어느새 입대가 코 앞이다. 공군홈페이지에 가봤더니 생각외로 준비해야 될 게 많다. 난 몸만 가면 되는줄 알았다. 요구하는 게 이렇게 많을줄이야. 티비에서 봤던 입대 풍경은 이런 잡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듯 한데, 이거 원. 공군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준비물엔 주민등록등본도 있다. 동사무소 문 닫은지 오래되었고, 일요일은 쉬는 날이니 천상 월요일 아침 진주에서 뗄 수밖에 없겠다. 휴대폰을 3년간 정지하고, 입대 전 할 일은 따져보았다. 하기로 약속한 것들이 부지기수다. 하릴없이 식언이 되고 말았구나. 특히나 중원이와 한 약속을 거듭 어기게 되어 여간 미안한 게 아니다. 나의 군입이 조금이나마 핑계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 군대가는 일 아무렇지 않게 생각 됐었는데, 조금 전에 본 '그것이 알고 싶다'의 실미도의 진상이 내 소심을 자극한다. 실은, 실미도고 나발이고 더 무서운 게 있다. 1500미터 달리기 7분 44초의 압박. 사람들 말로는 이게 별거 아니라 하는데, 달리기를 해 본 지가 까마득하여, 생각하면 조금 긴장된다. 연습이라도 한번 해볼 것을. 좌우간 체력검정을 통과한다손 치더라도, 어느 부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병과를 보아하니, 무엇하나 똑부러지게 잘할 만 한 것도 없더구먼. 잉여인간으로서의, 그것도 저급한 의미의 잉여인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재삼 확인함.

전주 내려오기 전 어쩌다 운동화도 잃어버렸으니, 그 누런 아버지의 르까프 운동화를 신고 헙수룩한 머리에 추레한 복장으로 입대하겠구나. 버스에 뭐라도 놓고 내린양 영 찜찜한 기분일 텐데 말이야. 김병익처럼, 군생활이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찬 벽감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그처럼 도스토예프스키를 아껴가며 곱씹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나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까. 과연 그랬으면 한다.

 

우선 나는 그대들의 건강과 영광을 빈다. 아울러 그
대들의 죽음을 축하한다. 그대들의 꿈같은 좌절과 화려
한 지옥을 축하한다. 모든 것은 절대로 좋고 절대로 나
쁘다-그 점을 축하한다. 그대들의 공포 및 동해와
서해의 격랑을 축하한다. 그대들의 이목구비와 발바닥
과 신문을 축하한다. 극장과 짧은 즐거움과 애국가를 축
하하고, 전진과 후진을, 좌진과 우진을, 그대들의 전후
좌우를 축하한다. 한 잔의 술, 길 없는 데서의 질주의
끈기(!), 그 모든 것을 축하한다.

  돋아나는 풀잎의 눈물 속에 내리는 비
  불 꺼진 창의 검은 눈동자 속에 내리는 비
  오 내 사랑
  돋아나는, 풀잎의, 눈물, 속에, 내리는, 비......


-정현종, <내 사랑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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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side 2004-02-08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입대 전날이라... 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정말 긴장되는 순간일 것 같네요.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짧아졌으니까요. 시간은 흐르는 거니까요. 다들 감내하는 일이니까요... 부디 화이팅 하십시오!!!

쎈연필 2004-02-08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하시고, 휴가 나오시면 이곳에 또 글 남기세요. ^^

wald33 2004-02-0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도서관여행자 2004-02-0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체력검정도 잘 통과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