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도 며칠 남지 않은 형편에 책을 몇권 구입했다. 책구매도 중독이지 싶다. 일정 기간 서점을 멀리하거나 이렇게 인터넷으로라도 구입하지 않으면 왠지 좀이 쑤시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책이지 싶다. 이때의 책은 그 내용보다는 물신의 대상으로서의 책이니 이 버릇도 자랑은 아닐 것이다. 막연한 소유의 욕망이 물질의 구입으로 그 정신까지 사로잡을 수 있다는 최면을 내게 걸었던 것이다. 구입한 책들:(1) 고종석, <감염된 언어>, 개마고원 (2) 고종석, <언문세설>, 열림원 (3)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4)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여시야문 (5) 김현, <책읽기의 괴로움/살아있는 시들>, 문학과 지성사 (6) 김현, <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 문학과 지성사;읽었던 것들도 있고, 선물로 주어버려 새로 구입한 책도 있다. 다시 읽고 싶어서, 두고두고 보고 싶어서 산 책들이라 할 수 있겠는데, 책의 구입에 더 큰 동기를 마련해 주었던 소이는 책 몇권이 곧 절판될 것만 같은 위기감이었다. 내게 책은 어쩔 수 없이 무엇보다 페티시즘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오늘 배달된 책을 보고, 가슴 한 구석이 든든했고, 동시에 허무했다.

근자에 읽었던 책들:(1)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고려원;조르바는 나와 상극의 인간이다. 내가 그의 곁에 있었다면 미치도록 달달 볶아서 그를 안절부절 못하게 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가 나의 입을 틀어막든지. 둘 중 하나였겠지. 조르바의 자유는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자유다. 그의 체험, 춤과 노래, 땀에서 오는 자유다. 그에게 이성의 자유는 만져볼 수 없는 자유이고, 따라서 배격할 만한 자유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통밥을 굴릴 것이므로 조르바에게 동화되지는 않았을테지만, 그가 곁에 있었다면 그를 그 몰래 퍽이나 좋아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책은 인물에 푹빠져 읽어내려가야 제대로 읽었다 말할만 하겠다. 그러니 그는 전형적인 마초가 아닌지, 그의 자유는 사회적 영역 안에서 자유라 불릴만 한 것인지 끊임없이 따졌던 나의 독서는 만끽의 독서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꼰대들의 필독서다. (2)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한겨레신문사;그의 대표작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읽은지 오래되어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음에도 내게 그리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사회주의적 가치관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내게 거부감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책 또한 납득가지 않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의 개방성, 탈권위적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개방적 태도와 상호존중은 이념의 갑각을 떠나 가장 먼저 요구되는 자세일 터이다. (3) 성석제, <쏘가리>, 가서원; 집근처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알고보니 절판된 서적이어서 얼른 구입했다. 역시 나의 책구입의 우선원칙에 '절판'이 꽤 큰 역할을 한다. 예전에 읽었던 엽편들도 많았는데, 책으로 다시 읽으니 그 재미의 진가를 알겠다. 이 작가는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잘도 우려먹는다. 소설도 그렇고, 산문도 그렇다. 그런데 질리지 않게 이야기를 잘도 풀어낸다. 책 속 한 엽편에서 최고의 이야기꾼이 지녀야할 자질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그 재미를 잃지 않게끔 해야한다고 말해놓았다. 그 자신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제는 사라진 신촌의 클래식 다방들에 관한 이야기, 강화도의 비빔국수에 관련된 추억들, 어렸을적 자신의 대부였던 나자로에 대한 기억이 읽는 나의 가슴을 덥힌다. 성석제는 전형적인 보수적 작가다. 그의 이야기는 대개 지나간 시간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의 탈주는 자주 과거를 향한다. 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과거를 행복하게 추억할 수 있는 데에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크게 관련있는 듯하다. 그는 요즘 <한겨레21>에 음식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 칼럼이 이 보다 더 지루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최근의 생활에 깨소금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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