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읽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은지가 까마득해서 그 책과 이번 책이 어떤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지 분별할 수는 없지만, 이번 책 속의 글 <똘레랑스에 대한 두 개의 사족>은 유익했다. <나는 빠리의...>에 담겨 있는 주된 내용이 저자의 말대로라면 바로 똘레랑스일텐데, 그 책의 내용이 잘 상기되지 않는 나로서는 <두 개의 사족>이라는 짧은 글이 그가 말했던 똘레랑스를 받아들이기에 자못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똘레랑스는 타인을 대상으로 하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하지 않는다, 극단적 이념에게 필요한 것은 똘레랑스가 아닌 앵똘레랑스다, 라는 그의 말이 바로 그 짦은 글의 내용이다. 똘레랑스. 거칠게 말하면 그것은 넉넉한 마음씨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생각에 대한 관용을 똘레랑스라 칭할 수 있겠다. 쉬운 개념이지만 구체적 현상에 그 개념을 적용하자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게다. 똘레랑스란 개념자체가 두루뭉실한 점이 없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같은 극단의 사회에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무엇일게다.

영어공용화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다소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체계로 씌어진 글은 우리 문학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문학이 우리 문학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정에서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선 많은 논거가 필요할 듯하다. 물론 그 부탁은 무리한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언어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고, 똘레랑스를 소개한 치적이 그 단점을 충분히 감싸주고도 남기 때문에 그러하다. 책의 몇가지 단점에 대한 지적이 가능하다 해도 프랑스 문화를 구체적으로 살펴 볼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독서의 즐거움이 크다.

문화비평집. 이 책의 표지엔 그렇게 씌어있다. 난 어쩌면 지금까지 정치한 비평의 언어를 위해 애써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독후감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쓰고 싶은 언어는 비평의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어르고 눙치는 글. 너스레를 떠는 글. 그런 글들이 바로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이라고 문화비평집인 이 책이 말해주었다. 머리 속으로 꼼꼼히 따지는 글보다 활달한 언어의 글이 쓰고 싶다. 물론, 그렇다고 홍세화 류의 책을 더이상 읽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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