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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쉽게도, 다시 약간의 한탄으로 글을 시작해야겠다. 시간은 쏘아놓은 살 같았다. 지난 연말 이후로 난 아직 제 정신을 찾지 못한 듯하다. 그래, 그러니까, 1월에는 계절학기를 들었고, 2월과 3월엔 토익을 공부했다. 4월이 시작되었다. 난 잠시 주춤했다. 오랜만에 비장하게 치른 토익 시험이 끝나 긴장이 풀렸었나 보다. 그런 와중에 스터디를 구했다. 모임날짜에 맞춰 급히 숙제를 해치우곤 했다. 그런 대로 시간이 잘 굴러가는 듯했다.

 이게 다 토익성적 때문인가? 가볍게 치렀던, 만만해 보였던 한자능력 시험이 한 문제 차이로 나를 배신할 것 같다는 예감이 확실해 보이는 탓인가? 문득 지난 2개월 동안의 시간이 아무런 무게도 갖지 못하고 주위를 방방 떠가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도 나의 오만한 방심에 죽비를 내리치고 싶다. 시간은 충분했다. 적어도 한자 시험은, 며칠만 집중력있게 준비했어도 합격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4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한자자격증 따위야 무에 중요하겠는가. 충분히 넉넉하게 여겨 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하나둘 미루고 보면 어느덧 한 학기가 지나가는 것이다. 휴학을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헛된 시간이 될 수 있는지 친구들은 경고하지 않았던가. 나만은 그렇지 않다고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말했던가.

나는 스스로를 단련시킬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재능이라도 살려보자. 어쩌면 지금만큼 많은 시간이 주어지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마자막 기회라고 생각하자. 결과물을 바라지는 말자. 그러나 스스로에게는 떳떳한 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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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읽다만 하비의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다시 펼쳤다 관두었다. 오늘내로 완독할 생각이었는데 전만큼 잘 읽히지 않았다. 내용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팍팍하게 느껴졌다.

 이틀째 비가 왔다. 방 공기도 서늘해졌다. 손발이 찼다. 다시 책을 읽으려는 몇 번의 시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네 권을 한 시간에 열 페이지를 읽는 속도로 읽었던 기억이 일었다. 책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읽는다는 건 시간낭비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수년간 어렵게 읽었고 쉽게 잊었다. 내 속은 다시 텅 비었고, 나는 또 다른 책을 읽으며, 읽기를 망설이며, 시간을 축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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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사실 이 일을 하게 된 것이 같이 사는 친구가 이 잡지의 사진을 찍기 때문이었는데, 친구와 함께 포토에세이류의 꼭지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친구는 사진을 찍고, 나는 글을 집어넣는 일이었다. 예전에 비슷한 코너가 없지 않았는데, 글 쓰는 이는 사진에 맞춰 쓰겠다 하고, 사진 찍는 이는 글에 맞춰 사진을 찍는다고 해 손발이 잘 안 맞아 사라졌다고 했다. 같이 사는 친구니 수월하지 않겠느냐고. 결정 되거든 연락달라고.

 교정에 더해 매번 잡지의 커버스토리라는 것을 몇 줄 끄적였었고, 번번히 그닥 반갑지 않은 반응을 받아왔던 터라 의외의 제안이었다. 오늘만 해도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았던가. 지면 채우는 데 새로운 아이템이 부족했던가. 그래도 은연중에 노루 꼬랑지만한 신뢰감은 같은 게 있긴 있었나.

 내가 쓰는 글이나, 머리를 맴도는 생각이란 것은 언제나 도식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좀체 벗어나기 힘든 문법의 틀 안에 갖혀있기 마련이다. 문학을 하기 힘들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정치한 보고서를 쓰는 데 실패한 것도 대개 이런 탓이다. 그 별것 아닌 듯한 표지이야기라는 것도 몇 가닥 문장으로 구체적인 세계를, 섬세한 감수성을 길어 올리지 못하는 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되고만다. 사람을 만나도 할 말이 없고, 비슷한 이야기나 되풀이하게 되는 괴로움. 여러 다른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결국 가지들은 잘라버리고, 똑같은 몸통만 지겹게 쌓아두는 어리석음.

4월. 방갈로에서 바라본 해변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라는 표제어. '장 콕토는 사람의 귀 모양을 소라껍질에 비겼다. 잡답한 거리 한 가운데 멈춰 서서 파도소리에 귀기울인다'

2월. 개선문 앞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 사진, '자전거 열풍이 불고 있다'는 표제어. '복잡하고 답답한 거리를 가르자. 두 다리와 네 바퀴 사이를 두 바퀴로 가로지르자.'

둘 다 퇴짜였다. 시를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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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소외에서 소내로>. 지난 학기엔 유난히 초월이니 소외니 하는 말이 귀에 익었다. 뒤늦게 제2전공으로 택한 국문학 학점을 메우느라 문학 수업 몇 개를 듣게 되었는데, 수업에 자주 등장했던 개념이 초월이니 소외니였거니와 내야 했던 레포트들의 주제도 그것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대개 초월의 정치성과 관련된 설왕설래가 있었던 듯하다. 덕분에 김우창의 초월에 관한 글도 뒤적여 보게 됐다. 초월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지만, 그것이 함유하는 비정치성의 정치성이 위험하다는 게 강의며 레포트의 요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기에 따라서 애매하고 위험할 수 있는 초월이라는 개념을 포월(포복해서, 그러니까 기어서 넘어간다)이라는 단어로 정립해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진석이다. 그는 더 나아가 소외에서 소내라는 개념을 추출하기도 하였다. 중심에서 벗어났다고 징징 짜지만 말고, 중심에 있으면서 고독을 감내하고 당당하라는 거다. 어쨌든 김진석은 김우창에서 한발 더 나아가 초월에서 포월을 추출하고, 소외에서 소내를 걸러냈는데, 그것은 주로 시 비평에서 그가 보여주는 태도, 상징에 대한 기피와 '외시(外示)'의 강조에서 드러난다. 한용운의 상징어 '님'에 대한 거부감은 김우창의 한용운론이 보여주는 초월의 관념성과 비각을 이루고, '외시'의 강조는 주로 황지우와 김용택을 평한 글에서, 그들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나', 즉 '자아'의 과잉과 관련돼 이루어지고 있다.

 문학과 사회에 대한 김진석의 태도는 일견 건조해 보인다. 초월도 아니고 포복도 아닌 포월을 하려니 오죽이나 정신을 바짝 곤두세웠겠나. 현실을 인정하면서, 현실과 거리를 두려니 김영민의 표현대로, 이드거니 배를 바닥에 끌고 가야 했을 것이다. 김진석은 이 과정을 '반성'이라는 단순한 어휘로 재단하길 원치 않는다. 자주 쓰이면서, 잘못 쓰이면서, 알리바이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면서, 낡아질 대로 낡아진 이 용어가 그는 마뜩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만들어낸 용어들은 '진정성'(이 말도 낡았다)을 풍긴다. 하지만 한편으로, 포월과 초월이 소외와 소내가 얼마나 큰 차이를 지니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초월과 소외를 잘 가다듬어 이해하면 곧 포월과 소내 아닌가 싶다. 아니, 그 용어들에 대한 이해의 범주가 대개는 김진석의 것과 어긋나는 경우가 많으니 개념을 새로 정립한 그의 공로는 의심할 바 없어 보인다.

 '나'가 최대한 정제된 문학, '상징'의 무거움이 그것의 무거움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채로 가볍게 '외시'되는 문학이 그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으로 보여진다. 그 기준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너무 까다로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가 내세운 개념과 더불어 평론은 명료하고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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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서술은 평이했고, 정리되지 않았던 서양사 지식을 갈무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지은이의 좌파적 경향 덕분에 맑스의 노동가치설을 비중있게 접하게 됐다. 경제학 지식이 없어 가치를 생산하는 건 노동이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책을 읽다 의문이 들어 찾아 보니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이 값을 결정한다는 것도 뒤늦게 나온 이론일 따름이고 그 전에는 노동이나 한계효용이 값을 결정한다고 여겼었나 보다. 지금도 그 전의 이론들이 유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유효하지 않다면, 맑스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자본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구성되고, 가변자본만이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공식도 말짱 헛것 아닌가 싶었다. 휴버먼은 책에서 이 공식을 활용해 공황까지 설명하고 있는데, 공식이 사실이 아니라면, 공황에 대한 설명의 유효성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물론 맑스의 이론이 강조되어 있을 뿐, 맑스의 이론만 소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적절한 균형감각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맑스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아쉬웠다. 1930년대에 씌어졌다는 시대적 제약이나 지은이의 정치적 편향성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도 하다. 책을 읽다 이해되지 않는 구절들이 있어 전에 읽었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발췌독했는데, 맑스에 관한 챕터를 읽고 약간 허탈해졌다. 휴버먼이 책 한권으로 옹호하고자 했던 이론이 챕터 하나로 힘없이 무너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경제학을 쉽고 간단하게 소개하는 책들보단 경제학 책을 읽고 차근히 공부해 나가야 자기확신이라도 갖고 판단을 내리겠는데, 선무당처럼 어설픈 재단에 바쁘다. 발밑을 살피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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