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자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가장 편한 고백이어야 할 일기이기에 어깨에 실리는 과다한 힘이 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일기라는 글의 한 종류가 내면의 고백인 동시에 나 아닌 타인에게 비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을 바에야 그 힘은 거역할만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쓰여진 모든 글은 독자를 의식하고, 적어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중 일기는 적어도 겉으로는 그 폐쇄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열림과 닫힘의 팽팽한 긴장 위에 있다. 어쩌면 일기는 그 폐쇄성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일기를 읽는 독자는 그 일기가 글쓴이의 가장 진실한 내적 고백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일기라는 순수한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든지간에 한꺼풀의 기름을 덧칠해준다. 그러니까 내가 일기를 함부로 쓸 수 없는 이유에는 앉을 자리의 순백에 질려버린 탓도 있다.
그런데 사실 위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순진하지만은 않다는 증거다. 아무 생각 없이 말 그대로 거침없이 일기를 쓸 수도 있을게다. 일기의 장르적 속성과 글쓴이와 독자의 심중까지 헤야려 본 까닭에는 실제로 내가 일기를 하나의 전략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 없지 않아 작용하고 있다. 일종의 불가피한 반증인 셈이다. 어쩌면 이런 것. 채 씨는 어느날 기 시인의 산문을 보았다. 기 시인은 요절한 시인이므로, 사실 그에게 출간과 게재를 목적으로 산문을 쓴 경험은 없다. 하지만 그는 일찍 죽었고, 탁월한 시인이었기에 그의 생전 일기와 산문이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산문집은 낙양의 지가를 올리면 팔린다. 그것은 단순한 대중적 판매고는 아니었으며, 감수성 예민한 문소, 문청들을 주 소비층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채 씨도 그 산문집을 읽게 되었다(그의 감수성은 예민보다 신경쇠약에 가까웠다지만). 일기였음에도 망설임없는 깔끔한 문체, 섬세한 감수성을 그 산문과 일기들은 보여주었고 그를 감복케 하였다. 채 씨도 그런 일기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우선 그의 마음가짐은 타인의 일기를 훔쳐봄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일기는 철저한 타인지향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 여기에 그의 성격적 결벽은 단박에 완벽한 문장과 감수성을 바랐던 것인데, 그에게 그런 준비가 돼있을리 없었다. 그는 절망했고, 일기는 항용 몇줄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가령 이렇다는 것이다.
요컨대, 일기의 장르적 순수함과 글쓴이의 타인지향적 글쓰기, 완벽함에 대한 결벽, 이 세 요소가 공존할 때 최악의 일기가 쓰여진다. 감정의 여과가 없고 내 글쓰기의 훈련상태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글이 가능할 때, 나는 최악은 벗어난 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뭐가 두려워서 내 치부를 피하는 걸까. 애시당초 이런 고심참담을 늘어 놓을 필요는 없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