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에 다녀왔다. 한 3주일쯤. 주말에는 서울에 들렀고, 연말에는 전주 집에 다녀왔으니 만으로 3주는 되지 못하겠지만, 3주간 서울이나 전주를 떠나본 적이 거의 없으니 꽤 의미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원주 캠퍼스는 원주에서도 꽤나 외진 곳에 있었다.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던 그곳은 예전 그대로 였다. 11월말부터 레포트다 발표다 시험이다 쓸모없는 골칫거리가 많았는데, 마지막 시험을 봤던 크리스마스 이브, 이틀 뒤부터 다시 계절학기 시작이었다. 빠듯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원주로 가는 버스에 오르기 전까지 나는 원주에 대한 상상으로 들떠있었다. 에코캠퍼스. 호수가 있고, 호수를 낀 가로수가 있고, 멋들어진 산책로도 있었다. 속된 세상에 잠시 등을 돌릴 기회, 그러니까 겨울이라는 계절이 품고 있는 방랑의 이미지는 원주 바로 그 자체였다. 불교에 동안거라는 말이 있던가. 하지만 기대는 언제나 쉽사리 깨어지는 법. 놀러간 건 아니었다. 하루에 여섯일곱시간의 수업을 들어야 했다. 7시반쯤 일어나 아침을 대충 때우고 하루를 시작하면 저녁 일곱시쯤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수강했던 과목들도 만만하지가 않아서, 계속적인 공부가 불가피했고, 숫자가 약한 나는 '재무관리'나 '통계학'같은 무시무시한 과목들을 제때 소화하지 못했다. 덧셈 하나 잘못해 한두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그리고 매일 혹은 일주일꼴로 닥쳐오는 시험들. 시험 스트레스 또한 여전했다. 간혹 친구와 호반을 걷는 일도 있었으나 그곳에서 나누었던 이야기의 대부분이라면 시험 보다 실수한 일, 그로 인한 자괴감 등등등. 하지만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자연이, 이 날것들이 왠지 살풍경하게 느껴져 한편으로 당황스러웠지만 우리는 새롭게 주어진 환경에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그리고 재미있었던 것. 지나치게 소심하게 굴며 성적에 연연하던 내게, 아니 정확히 말해 무능력을 비관하던 내게 친구가 건네던 위로들. 서로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었던 그가, 나를 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고. 아, 나보다 더 심한 사람이 있구나.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구나, 한다는. 그리고 그는 뜬금없이 김연아 이야기를 꺼냈다. 도서관에 데려가서는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줬다. 검색어. '대인배 김연아' 김연아가 티비 방송에서 했던 인터뷰들을 캡쳐해놓은 블로그를 엿보게 됐다. 동메달? 언론에서 아쉽다 그러는데, 저는 오히려 부담이 없어요. 라이벌 신경 써 본 적 없어요. 차근차근 배워나갈 뿐 고급기술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등등등. 이어지는 친구의 해설. 그러니까 아사다 마오라는 일본 선수가 김연아의 경쟁자인데, 그녀는 공중에서 세바퀴 반을 도는 무시무시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착지가 불안하고, 페이스 조절에 능숙하지 못해서, 엉덩방아 한번 찧으면 패닉에 빠진다나. 패닉이라. 충격적인 언어선택이었다. 시험 보다 시간이 부족할 때 흔히 느끼던 감정상태를 패닉이라는 말만큼 잘 표현해 줄 말이 없어보여서다. 패닉. 그렇구나. 그녀가 그 상황에서 패닉에 빠진다면, 사실 그녀의 모든 생활이 패닉의 연속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그녀의 인생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패닉에 빠진 상황. 패닉에 빠질 것 같은 상황. 패닉에 빠질 것 같은 상황도 크게 봐서 패닉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녀를 패닉이라는 한마디로 정의 내리는 것도 가능하리라. 패닉. 패닉. 한동안 이 말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듯하다. 친구는 나이는 어리지만 김연아에게 한수 배워야겠다고 말했다. 자신도 원주에 오기전까지 괴로운 일이 있었나 보다. 그와 나의 차이라면 나는 더 절망했고, 그는 구원받았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망쳐버린 시험을 한탄하며 원주에서 와서 뭘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는 언제까지 한탄만 하고 살거냐고 물었다. 원주에 와서 지금까지 괴로웠던 고민들이 치유되었다 했다. 김연아 때문인가, 반면교사 역할을 톡톡히 했던 나 때문인가. 어쨌든 그는 거의 아사다 마오에서 김연아로 환생하는 중이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와 3주간 같은 방을 썼던 그에게 그만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물론 종종 망할 통계학과 재무관리 생각도 했다. 그에게 미안했다.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의 공기를 원주의 공기보다 친근하게 느끼는 내 모습은 스스로에게도 생경했다. 이제 원주에서의 3주는 끝난 것이었고, 내게는 돌아갈 집이 있었다. 서울의 공기는 유래없이 찼다. 집에 도착해 방의 불을 켰다. 방바닥은 더 찼다. 전기장판을 켜고 씻지도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들었다. 새벽 네 시쯤 잠이 깨 옷을 갈아입고 다시 씻지도 않은 채 잠들었다. 이제 다시 서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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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시험기간이다. 모두 다섯 과목의 시험을 치르는데, 두 과목은 어제 보았고, 세 과목의 시험을 앞두고 있다. 미루던 시험공부를 하던 일요일에 나는 스스로가 참 어처구니 없었다. 가슴이 너무 떨렸기 때문이다. 다음날 혹여나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할까, 심장은 계속 두근거렸다. 무슨 대입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닌데, 밤에 잠자리에 들려니 가슴이 너무 떨려 잠도 안 왔다. 한 시간쯤 잠을 설치고, 아침에 알람이 울리자 퍼뜩 깨어났다. 꽤 많은 시간을 잔 셈이었지만, 몸과 마음은 모두 피곤했다.

 잠이 오지 않던 새벽에 나는 이 난데없는 긴장의 이유를 설명해보려고 애썼다. 아니, 그것보다는 긴장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대기에 바빴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테다. 대학 학점이란 혹여 좋지 못하더라도, 인생을 크게 좌지우지하지는 않는 다는 게 위로의 근거라면 근거였다. 정말 그런가. 요즘 학점이 높아야 취직이 잘된다고 하지는 않던가. 취직 이전에 학점은 성실성의 척도가 아닐까. 학점이 좋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단지 방기된 생활을 변명하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잡다한 생각이 오갔다.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어쨌든 시험을 보았고,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해졌다.

 다시 시험 전날이 되면 그제같이 잠이 오지 않을까, 지레 겁이 나기도 한다. 적어도 입대 전에는 시험을 이유로 그렇게 마음 떨리지 않았던 것 같다. 시험공부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학점은 평균은 되었고 그걸로 만족했었다. 물론 저학년과 복학생의 마음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다. 하지만 연륜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째 나는 세상과 더 스스러워지고 있는 것만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은 단순하다. 이렇게 질문하는 데 시간을 쓰지말고, 그 시간에 시험공부를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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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스무 날쯤 지나면 스물일곱이 된다. 새삼스럽게 나이를 들먹이는 까닭은 스물일곱이라는 숫자가 앞으로의 인생에 한 표지가 될 거라는 생각을 암암리에 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별뜻없는 짐작을 하기 시작한 게 언제인가, 되짚어 보면, 스물한살쯤, 아니 스물두살쯤이었던 듯하다. 어쨌든 스물두살쯤엔 빈번히 스물일곱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왜 하필이면 스물일곱이었을까, 다시 자문하면, 당시 숭모했던 어느 분의 나이가 스물일곱이었기 때문이라는, 딱히 이유랄 수 없는 이유를 댈 수밖에는 없다. 스물두살인 나는 스물일곱인 내게 바라는 것이 많았다. 사소하게는 이런 것들. 김치찌개를 끓여 먹을 수 있고, 능력이 된다면, 김장까지 할 만한 재주가 내게 있었으면 하는. 그러니까 우선 나는 생활인이 되고 싶었다. 연애라는 것은 꿈 같은 일이고, 우선 혼자 사는 살림살이에 어느 정도 능숙하고 싶었다. 내가 이 세상을 별 탈없이 살 만한 능력이 있었으면 했다. 물론 김치찌개를 끓일 줄 모르고, 김장을 할 줄 몰라도 세상을 사는 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자기충족적인 느낌이 중요했다. 예컨대 스콧 니어링 같은 삶을 감히 꿈꾸지는 못할지라도, 스콧 니어링의 살림 운용능력은 갖고 싶었다. 몇 가지 능력으로 적어도 내가 혼자 사는 데에는 무능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가벼운 대인공포증세는 나에게 여러 가지 잡다한 능력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타인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해결하기 위해선 알아야 할 것도, 해야 할 일들도 많았다. 나는 필요한 기술들의 목록을 구성해 보는 일을 즐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타인을 두려워하기 이전에 나를 두려워했고, 나의 능력을 불신했다. 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대인공포의 원인이 됐는지, 대인공포가 스스로를 하찮은 사람으로 느끼게 했는지, 무엇이 앞서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들이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나는 나에 대한 불신의 느낌을 늘 간직하면서 불만에 가득 차있었고, 그 느낌을 지워버리기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게 되면, 오히려 나의 무능력이 다시 한번 발각되는 것 같았다. 몇 번의 기회는 있었다. 이를 테면, 군 생활이 그런 기회의 하나였을 것이다. 훈련소에서 나는 생각지 않게 취사병으로 배정받았다. 요리의 능력은 예전부터 바라왔던 것이므로, 기회삼아 군 생활을 열심히 할 수도 있었으리라. 2년이 넘는 생활이었고, 매일 같은 일과를 반복했으므로, 아무리 요리에 대한 재능이 없다고 해도 날렵한 숙수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군 생활이 남겨준 한 가지 지혜가 있다면, 무슨 일이든 상황을 피해보려는 사람에게 하늘은 함부로 재능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씁쓸하고 명백한 사실이었다. 식당일은 고됐고, 다른 부서에 비해 불합리하게 잡다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내가 왜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에 있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어처구니 없게도, 내가 나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느낀다는 점과는 모순되었다. 내가 진정 나의 무가치성을 시인하고 있었더라면, 어떠한 일이든 나의 가치를 그나마 인정해주는 것으로 알고 넙죽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비겁한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그 따위 것이 나를 지탱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오년이 지나 스물일곱. 졸업을 일년 앞둔 취업준비생. 몇 년간 습관처럼 해왔던 여러 가지 일을 포기해야 한다고, 못다 이룬 꿈이 있는 듯 아쉬워 하지만, 포기해야 하는 건 몇 가지 일이 아니라 몇 가지 일에 대한 가능성이었다는 점은 명백히 해두고 싶다. 이제는 떠밀릴 대로 떠밀려 무엇이든 해야만 할 나이에 이르러 취업준비라는 한 가지 일을 드디어 시작하게 됐다는 어처구니없는 기쁨이 요즘 내게는 밀려들고 있다. 적어도 그것은 가능성으로 맴돌지 않고, 실행해야만 하는 일이 될 테니 위안이 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결국은 비겁한 자존심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가 다시 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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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하다 퍼뜩 놀랄 때가 있다. 어떻게 그런 야비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은 대개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내내 부려져 있다가 이때다 하고 마음먹고 하게 된다. 그리고 말이 입에서 새어나오는 그 순간! 상대방의 표정을 읽기도 전에 내가 내 표정을 짐작할 수 있게 되고 말은 떨리고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게 거기에서 그치면 좋겠는데, 어색한 허세가 말의 야비함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 같아 오히려 한두 마디의 말을 더 보태게 된다. 하지만 상황은 더 꼬여버리고 나는 하릴없이 이제 더 무슨 말을 해야 이 상황을 모면할까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내가 미워져 하던 일에 집중도 할 수 없고, 벌게진 얼굴로 호흡만 가다듬고 있다. 이미 머릿속은 하얗다.  

 그 야비한 말은 왜 내 마음 속에서 맴을 돌며 부려져 있었을까. 내가 못마땅했고 상대방이 잘나보였으며, 굳이 흠이라면 흠이라고 할 만한 구석을 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근질근질했는데, 마침 지겨운 강샘을 털어놓을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나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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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듣기는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심지어 음악을 듣는 일조차. 시디를 재생시키고 은근한 초조감에 시달린다. 이윽고 재생을 중지한다. 음악을 들으며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다. 생각은 쉽게 분산된다.

 과민한 탓인가. 추측은 해보지만, 예민한 신경과 음악이 그리 좋지 못한 관계를 갖지는 않을 것 같다. 순전히 음악만 듣는다면야 오히려 신경이 안정되어야 할 터인데, 그럴 땐 오히려 음악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딴 생각만 일삼게 된다. 역시 집중력 탓이려니 여기고 있다.

 책을 읽는 속도나, 이해력이 웬만한 사람과 견주어 뒤떨어지는 것 또한 집중력 탓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듣기가 안 되니 불편한 점이 많다. 우선, 사람을 만나도 이야기를 오랫 동안 하지 못하고 빨리 끝내게 된다. 내가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맥락을 자주 놓치기 때문이다. 대답이라고 주섬거리면 동문서답이 되고말아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가 곤란해진다. 자연 타인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게 되고 배려심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게 다 집중력 때문이라고 다시 말하려니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듣기문제가 요즘 더욱 현실감있게 다가온다. 아주 결정적인 이유.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토익듣기점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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