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스무 날쯤 지나면 스물일곱이 된다. 새삼스럽게 나이를 들먹이는 까닭은 스물일곱이라는 숫자가 앞으로의 인생에 한 표지가 될 거라는 생각을 암암리에 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별뜻없는 짐작을 하기 시작한 게 언제인가, 되짚어 보면, 스물한살쯤, 아니 스물두살쯤이었던 듯하다. 어쨌든 스물두살쯤엔 빈번히 스물일곱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왜 하필이면 스물일곱이었을까, 다시 자문하면, 당시 숭모했던 어느 분의 나이가 스물일곱이었기 때문이라는, 딱히 이유랄 수 없는 이유를 댈 수밖에는 없다. 스물두살인 나는 스물일곱인 내게 바라는 것이 많았다. 사소하게는 이런 것들. 김치찌개를 끓여 먹을 수 있고, 능력이 된다면, 김장까지 할 만한 재주가 내게 있었으면 하는. 그러니까 우선 나는 생활인이 되고 싶었다. 연애라는 것은 꿈 같은 일이고, 우선 혼자 사는 살림살이에 어느 정도 능숙하고 싶었다. 내가 이 세상을 별 탈없이 살 만한 능력이 있었으면 했다. 물론 김치찌개를 끓일 줄 모르고, 김장을 할 줄 몰라도 세상을 사는 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자기충족적인 느낌이 중요했다. 예컨대 스콧 니어링 같은 삶을 감히 꿈꾸지는 못할지라도, 스콧 니어링의 살림 운용능력은 갖고 싶었다. 몇 가지 능력으로 적어도 내가 혼자 사는 데에는 무능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가벼운 대인공포증세는 나에게 여러 가지 잡다한 능력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타인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해결하기 위해선 알아야 할 것도, 해야 할 일들도 많았다. 나는 필요한 기술들의 목록을 구성해 보는 일을 즐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타인을 두려워하기 이전에 나를 두려워했고, 나의 능력을 불신했다. 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대인공포의 원인이 됐는지, 대인공포가 스스로를 하찮은 사람으로 느끼게 했는지, 무엇이 앞서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들이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나는 나에 대한 불신의 느낌을 늘 간직하면서 불만에 가득 차있었고, 그 느낌을 지워버리기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게 되면, 오히려 나의 무능력이 다시 한번 발각되는 것 같았다. 몇 번의 기회는 있었다. 이를 테면, 군 생활이 그런 기회의 하나였을 것이다. 훈련소에서 나는 생각지 않게 취사병으로 배정받았다. 요리의 능력은 예전부터 바라왔던 것이므로, 기회삼아 군 생활을 열심히 할 수도 있었으리라. 2년이 넘는 생활이었고, 매일 같은 일과를 반복했으므로, 아무리 요리에 대한 재능이 없다고 해도 날렵한 숙수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군 생활이 남겨준 한 가지 지혜가 있다면, 무슨 일이든 상황을 피해보려는 사람에게 하늘은 함부로 재능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씁쓸하고 명백한 사실이었다. 식당일은 고됐고, 다른 부서에 비해 불합리하게 잡다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내가 왜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에 있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어처구니 없게도, 내가 나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느낀다는 점과는 모순되었다. 내가 진정 나의 무가치성을 시인하고 있었더라면, 어떠한 일이든 나의 가치를 그나마 인정해주는 것으로 알고 넙죽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비겁한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그 따위 것이 나를 지탱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오년이 지나 스물일곱. 졸업을 일년 앞둔 취업준비생. 몇 년간 습관처럼 해왔던 여러 가지 일을 포기해야 한다고, 못다 이룬 꿈이 있는 듯 아쉬워 하지만, 포기해야 하는 건 몇 가지 일이 아니라 몇 가지 일에 대한 가능성이었다는 점은 명백히 해두고 싶다. 이제는 떠밀릴 대로 떠밀려 무엇이든 해야만 할 나이에 이르러 취업준비라는 한 가지 일을 드디어 시작하게 됐다는 어처구니없는 기쁨이 요즘 내게는 밀려들고 있다. 적어도 그것은 가능성으로 맴돌지 않고, 실행해야만 하는 일이 될 테니 위안이 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결국은 비겁한 자존심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가 다시 미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