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석, <소외에서 소내로>. 지난 학기엔 유난히 초월이니 소외니 하는 말이 귀에 익었다. 뒤늦게 제2전공으로 택한 국문학 학점을 메우느라 문학 수업 몇 개를 듣게 되었는데, 수업에 자주 등장했던 개념이 초월이니 소외니였거니와 내야 했던 레포트들의 주제도 그것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대개 초월의 정치성과 관련된 설왕설래가 있었던 듯하다. 덕분에 김우창의 초월에 관한 글도 뒤적여 보게 됐다. 초월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지만, 그것이 함유하는 비정치성의 정치성이 위험하다는 게 강의며 레포트의 요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기에 따라서 애매하고 위험할 수 있는 초월이라는 개념을 포월(포복해서, 그러니까 기어서 넘어간다)이라는 단어로 정립해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진석이다. 그는 더 나아가 소외에서 소내라는 개념을 추출하기도 하였다. 중심에서 벗어났다고 징징 짜지만 말고, 중심에 있으면서 고독을 감내하고 당당하라는 거다. 어쨌든 김진석은 김우창에서 한발 더 나아가 초월에서 포월을 추출하고, 소외에서 소내를 걸러냈는데, 그것은 주로 시 비평에서 그가 보여주는 태도, 상징에 대한 기피와 '외시(外示)'의 강조에서 드러난다. 한용운의 상징어 '님'에 대한 거부감은 김우창의 한용운론이 보여주는 초월의 관념성과 비각을 이루고, '외시'의 강조는 주로 황지우와 김용택을 평한 글에서, 그들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나', 즉 '자아'의 과잉과 관련돼 이루어지고 있다.
문학과 사회에 대한 김진석의 태도는 일견 건조해 보인다. 초월도 아니고 포복도 아닌 포월을 하려니 오죽이나 정신을 바짝 곤두세웠겠나. 현실을 인정하면서, 현실과 거리를 두려니 김영민의 표현대로, 이드거니 배를 바닥에 끌고 가야 했을 것이다. 김진석은 이 과정을 '반성'이라는 단순한 어휘로 재단하길 원치 않는다. 자주 쓰이면서, 잘못 쓰이면서, 알리바이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면서, 낡아질 대로 낡아진 이 용어가 그는 마뜩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만들어낸 용어들은 '진정성'(이 말도 낡았다)을 풍긴다. 하지만 한편으로, 포월과 초월이 소외와 소내가 얼마나 큰 차이를 지니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초월과 소외를 잘 가다듬어 이해하면 곧 포월과 소내 아닌가 싶다. 아니, 그 용어들에 대한 이해의 범주가 대개는 김진석의 것과 어긋나는 경우가 많으니 개념을 새로 정립한 그의 공로는 의심할 바 없어 보인다.
'나'가 최대한 정제된 문학, '상징'의 무거움이 그것의 무거움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채로 가볍게 '외시'되는 문학이 그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으로 보여진다. 그 기준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너무 까다로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가 내세운 개념과 더불어 평론은 명료하고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