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하
윤고은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때 난 이십대였어. 힘 쓰는 거 하나는 자신 있었다구."
그 힘도 이미 잘못 고정한 것을 고치는 데는 소용이 없었다. 에이미는 결국 그 문짝 때문에 당신을 떠났다. 에이미가 떠난 과정보다는 에이미가 떠나고 남은 빈자리에 대해 당신은 오래, 공들여 묘사했다. 에이미는 잠깐 당신의 삶에 나타났던 신기루였다. 당신이 그 집을 나와야 에이미가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한 당신은 그렇게 집을 떠나, 몇년 만에 거리로 나섰다. 그때 머물렀던 곳이 여기 썬셋 비치 부근이었는데, 매일 바다에 나와 앉아있는 게 일이었다.

"그때 나를 구원한 건 파도였어. 나도 파도 타는 법을 배울 수 있었지. 그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빌리였어. 빌리는 하와이에 온 다음 써핑을 많이 배웠던 모양이야. 우리가 처음 만난 게 바로 여기, 써핑 포인트였지. 그때 빌리는 파도 위를 날고 있었고,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어."(p.57~58)

당신 역시 『넥스트 호놀룰루』를 활용하는 노숙자 중 한명이었다. 당신은 어제의 기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건 파라세일링을 하다가 죽은 남자에 관한 것이었다. 신혼여행이었기 때문에 유족들은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쌍의 남녀가 구명조끼를 입고 하늘로 솟아올랐는데, 마치 거미처럼 보이던 그들이 바다 위를 달린 지 이분 만에 사고가 났다. 파라세일의 줄이 근방을 달리던 제트스키와 얽히면서 생긴 사고였다. 남자는 죽고 여자는 가까스로 살았는데, 남겨진 여자의 모습은 절반의 확률로 살아난 것을 안도해야 하는지, 절망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사고경위서라든지 사망확인서, 방부처리확인서 같은 서류들을 여자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줄거리를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일들로 죽는다. 사십년째 반복해 걷던 산책로에서 죽기도 하고 파도를 즐기다가 죽기도 하고 다이빙을 하려던 찰나에 죽기도 한다. 말싸움이나 교통사고, 식중독, 개에 물리는 사고로도 죽는다.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예츠할 수는 없다. 예측하지 못하게 태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예측하지 못한 일들로 죽는다. 이곳이 낙원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없다.(p.48~49)

* 표제작 「알로하」의 일부를 옮겨다 적는다. 표제작 알로하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라 생각하며 읽었다. 한국소설의 무대가 된 배경을 찾아가며 기행을 했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코로나가 끝나면 하와이를 찾아가고 싶다는 즉흥적인 욕구가 생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튼, 산 - 이제는 안다. 힘들어서 좋았다는 걸 아무튼 시리즈 29
장보영 지음 / 코난북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견 출판사는 그 어떤 모험도 실수도 허락하지 않았다. 원로 문인들이 쓴 장편소설을 중쇄하며 현상 유지에 만족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내삶도 굳어갔다. 매달 말이면 한 달을 일한 대가로 월급이 들어왔고, 저녁 6시 30분이면 퇴근해서 이런저런 강의도 들었다. 또 주말이면 어김없이 산에도 올랐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출근길에 마시는 아메리카노 같은 거였다. 잠시는 잊을 수 있고 벗어날 수 있지만 그저 그때뿐인 것들, 나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앞으로의 내 삶이 두려웠다.

한 달 뒤 나는 회사를 나왔다. 한 번도 멈춘 적 없이 달려온 삶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휴학 한 번 하지 않았고, 졸업과 종시에 대학원에 입학했고, 또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다. 그렇게 정해진 모범 노선에서 단 한 번 이탈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왔다.

그런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크고 높은 산에 가고 싶다는, 언제나 내 마음 가득 차올라 있던 그 소리를. 나는 생각했다. 산은 눈으로, 추억으로, 상상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심장으로, 가슴으로, 두 다리로 올라야 한다고.

이튿날, 네팔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일주일 뒤에 떠나는 일정이었다. 준비도 계획도 오래전부터 되어 있었다. 공과금이 다달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카드에 여윳돈을 채워뒀다. 집주인에게 사정을 전해 두 달 치 월세를 미리 입금했다. 그동안 돌보지 못한 집 안 구석구석을 정리했다. 마음을 다잡으며 매일 일기를 썼다. 미용실에 들러 그동안 기른 머리로 짧게 잘랐다. 그리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에게 나의 근황을 알렸다. '네팔에 간다'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때 얼마나 두근대던지. 얼마나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p.32~34)

* 『아무튼, 택시』를 읽고 난 뒤의 아무튼이라 그런지 등산을 하는 심정으로 우직하게 쓴 글이라는 느낌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섬이 쓰고 바다가 그려주다 - 홀로 먼 길을 가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함민복 지음 / 시공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이 제법 까부는데......"
"물이 까분데야?"
고 선장이 한마디 던지자 말이 재미있던지 자선이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도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이상했어. 뱃사람들은 바다에 대해 항상 겸손하거든. 그러다가도 파도가 일단 일면 바다를 낮춰 보는 거 있지. 어차피 헤쳐나아가야 할 파도라서 그런가 봐. 바다를 낮춰 말하며 자기가 강하다고 자기 최면을 거나 봐. 일종의 주술 같아."
모시조개를 냄비에 넣고 왈가닥탕을 끓였다. 매운 고추와 파를 넣고 살짝 더 끓인 뒤 불을 껐다.
"추운데 국물 좀 드세요."
해가 안 나고 바람이 불면 한여름에도 바다는 춥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도 바람이 조금만 나도 갑판에 친 그늘막 아래는 추워서, 편히 쉬려면 머리나 다리 쪽 중 한쪽을 그늘 밖으로 내놓아야 한다. 갑판에 둘러앉아 조개 국물과 소주로 속을 풀었다.(p.30~31)


***
긍정적인 밥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주인집 아주머니가 주말에 와 텃밭을 가꾸며 심어놓은 옥수수 대궁들이 장마철 비바람에 일제히 쓰러졌다. 옥수수 대궁들을 줄로 잡아매며 강제로 일으켜 세우다 뿌리가 끊어져 그만두고 동네 친구 세 명에게 물어보았다. 두 명은 못 일어난다고 했고 한 명은 스스로 일어선다고 했다. 판단을 내릴 수 없어 할머니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냥 내비려둬. 옥수수들이 다 알아서 일어나. 괜히 강제로 일으켜 세우면 옥수수통 끝 알이 잘 여물지 않고 쭉정이가 돼. 주접이 든다구."
땅바닥에 쫙 깔렸던 옥수수 대궁이 삼사 일 지나자 할머니 말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옥수수들이, 지게꾼이 지게 작대기로 땅을 짚고 일어서듯 겉뿌리를 뻗어 땅을 짚고 일어섰다. 쓰러지며 뿌리가 많이 끊어진 대궁은 비스듬히 일어섰고 그렇지 않은 대궁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툭툭 털고 곧게 일어섰다.(p.210~211)


* 함민복을 읽으면, 한창훈이 생각나고 또 곽재구가 떠오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잘라 2021-08-21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주접든다, 저럴 때 쓰는 말이군요! 어르신들 살아있는 말 들으면 들썩들썩 마음이 나대요. 책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

2021-08-23 0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시는 만남과 시간으로 태어난다 - 매일이 행복해지는 도시 만들기 아우름 39
최민아 지음 / 샘터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학교를 가는 길에는 작은 문방구와 분식점이 있었고, 신발가게나 옷가게, 쌀가게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침 조회시간에 가지 말라고 강조하시는 만화가게나 오락실도 있었고, 약국이나 빵집도 있었습니다. 동네와 쇼핑센터를 구분하지 않아도, 생활에 필요한 모든 공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갑작스럽게 아파트 단지가 늘어나고, 모든 사람이 그곳에 살고 싶어 하면서 길게 늘어섰던 작은 가게들이 단지 내 상가로 들어가 길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습니다. 그리고 도시가 빠른 속도로 변하면서 아파트에서 태어나 평생 아파트 아닌 곳에서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주택가가 사라지고, 골목길이 사라지고, 학교 가는 길이 사라지자, 작은 가게와 이곳을 뛰어놀던 아이들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서울 이곳저곳에 많이 남아 있던 주택가를 이제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재건축과 재개발의 바람이 전국을 훑고 지나가면서 아파트를 올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고, 대로변이나 산등성이에도 이곳저곳 20~30층 넘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습니다. 아파트 열병이 휩쓸고 지나가자, 사람들은 슬슬 사라진 것과 이전 도시 속에 있던 공간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p.29~30)

어디를 가도 주변 풍경이 비슷하다 보니 그 도시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자칫 길을 못 찾고 헤매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단지 안에 들어가서도 자신이 사는 아파트 동을 찾기가 쉽지 않고 외부인의 경우에는 단지 안에서 가고자 하는 동을 찾아 빙빙 돌거나 길을 잃는 수가 생깁니다. 슬픈 일이지만 치매를 앓는 노인들이 아파트 단지 안에서 길을 잃는 경우가 반복적으로 발생한다고 합니다.(p.92)

* 아파트 단지를 허물 때가 오면, 다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것 외에 새로운 '마을'의 형태가 들어설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일 인문학 공부
김종원 지음 / 시공사 / 2021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독후하는 삶을 강조했던 괴테는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나 후배들을 독특한 방법으로 성장시켰다. 먼저 좋은 작품을 읽어주고 반드시 소감을 물었다. 하지만 당장 소감을 말하라고 하지 않고, 며칠 정도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괴테는 언제나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했고, 생각을 통해 작품 안에 있는 수많은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기를 바랐다. 그게 바로 독서를 통해 성장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한 번 읽은 책은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 게다가 숙제가 아니면 독후감은 전혀 쓰지 않는다. 하지만 책은 읽고 그냥 덮어버리는 게 아니다. 괴테가 제자들에게 그랬듯, 반드시 읽고 생각한 것을 노트에 적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같은 책을 100번 읽어도, 각기 다른 100번의 독후감을 쓰는 게 중요하다. 같은 책을 100번 읽으며 늘 같은 것만 얻는다는 것은 당신의 독서가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같은 책이라도 여러 번 읽으며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수많은 영감을 발견해낼 수 있다. 그게 바로 진짜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이다.
(p.88~89)

* 괴테, 사색, 이어령.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8-18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리뷰)를 쓰니까 책도 다시 한번 보게 되고 생각할 수 있어서 좋더라구요. 뭔가 독서가 마무리 되는기분?😆

2021-08-18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