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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쓰고 바다가 그려주다 - 홀로 먼 길을 가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함민복 지음 / 시공사 / 2021년 1월
평점 :
품절
"물이 제법 까부는데......"
"물이 까분데야?"
고 선장이 한마디 던지자 말이 재미있던지 자선이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도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이상했어. 뱃사람들은 바다에 대해 항상 겸손하거든. 그러다가도 파도가 일단 일면 바다를 낮춰 보는 거 있지. 어차피 헤쳐나아가야 할 파도라서 그런가 봐. 바다를 낮춰 말하며 자기가 강하다고 자기 최면을 거나 봐. 일종의 주술 같아."
모시조개를 냄비에 넣고 왈가닥탕을 끓였다. 매운 고추와 파를 넣고 살짝 더 끓인 뒤 불을 껐다.
"추운데 국물 좀 드세요."
해가 안 나고 바람이 불면 한여름에도 바다는 춥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도 바람이 조금만 나도 갑판에 친 그늘막 아래는 추워서, 편히 쉬려면 머리나 다리 쪽 중 한쪽을 그늘 밖으로 내놓아야 한다. 갑판에 둘러앉아 조개 국물과 소주로 속을 풀었다.(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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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밥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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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집 아주머니가 주말에 와 텃밭을 가꾸며 심어놓은 옥수수 대궁들이 장마철 비바람에 일제히 쓰러졌다. 옥수수 대궁들을 줄로 잡아매며 강제로 일으켜 세우다 뿌리가 끊어져 그만두고 동네 친구 세 명에게 물어보았다. 두 명은 못 일어난다고 했고 한 명은 스스로 일어선다고 했다. 판단을 내릴 수 없어 할머니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냥 내비려둬. 옥수수들이 다 알아서 일어나. 괜히 강제로 일으켜 세우면 옥수수통 끝 알이 잘 여물지 않고 쭉정이가 돼. 주접이 든다구."
땅바닥에 쫙 깔렸던 옥수수 대궁이 삼사 일 지나자 할머니 말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옥수수들이, 지게꾼이 지게 작대기로 땅을 짚고 일어서듯 겉뿌리를 뻗어 땅을 짚고 일어섰다. 쓰러지며 뿌리가 많이 끊어진 대궁은 비스듬히 일어섰고 그렇지 않은 대궁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툭툭 털고 곧게 일어섰다.(p.210~211)
* 함민복을 읽으면, 한창훈이 생각나고 또 곽재구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