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서평 쓰는 법 : 독서의 완성 땅콩문고 시리즈
이원석 지음 / 유유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는 낮술을 마셨다. 날이 따뜻해서 수원 남문(팔달문이 남문이라고 한다) 근처를 걷고, 아이스크림 붕어빵-아붕-도 먹었다. 신림동에서 수원까지 차 없이 오가는 길은 길어서 책 읽기도 좋았다. 이원석의 <서평 쓰는 법>을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에 대한 서평은 그 수가 적다. 읽고나면 ‘지금까지 내가 책 읽고 쓴 것은 모두 서평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책을 읽고 글을 남긴다는 단순한 목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서평의 본질, 목적, 의미를 자세히 짚어내 자신의 글을 돌아보게 해주는 책이다. 서평과 독후감을 비교하는 글에서 비교적 명료하게 서평을 정의하는 방식이 좋았다. ‘독후감은 정서적이라면, 서평은 논리적입니다.‘라는 문장에 많은 사람들이 ‘음? 내가 쓴 것은 독후감인가?‘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 뒤에 더 많은 설명이있고, 정서적 방식의 표현이 모두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독후감을 잘 쓴다. 이 책은 어디가 재미있고, 이 책은 어디가 감동적이라고. 하지만 나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만으로 그 책을 읽거나 읽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좋다‘고 생각한 책을 사람들이 좀 읽어보면 좋겠고, 그래서 그 책 이야기를 다시 나누면 좋겠다. 그래서 아이들과 서평쓰는 수업을 할 때도 ˝얘들아, 이건 과학책 읽고 쓰는 독후감이 아니니까 자기가 읽은 책이 그냥 (졸라) 재미있었다고, 혹은 그냥 (졸라) 쓰레기라고 쓰지 말자. 왜 권할만 하거나 아닌지, 무엇을 읽었는지 또는 느꼈는지 쓰고, 그것이 자신의 경험과 어떻게 일치하고 또 어긋났는지 찾아보자.˝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잘 쓰지는 못하면서 잘도 말했다. 그래도 과학책 읽고 서평 쓰는 수업이라고 해놓고 다른 쓰기를 종용한 것은 아니어서 다행일까. 하지만 아이들의 글에는 이 책에서 언급하는 ‘요약하기에서 멈추는‘ 서평이 많다. 그것이 선택적 요약이고, 그 요약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고자 한 아이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목차를 따라가며 글을 요약하기에 멈춘다. 나는 그 요약 안과 밖에 읽은이의 이야기가 있을 때, 그것이 더 잘 전달되고 이해되는 글이라고 판단했다. 페이스북의 공유글, 트윗의 리트윗을 많이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선택적 공유를 보고있으면 맥락이 보인다. 그렇다면 책의 요약도 그렇게 맥락을 찾으며 봤어야 한다. 단순히 요약 안팎에서 경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아니면 이런 방식의 서평도 소개했어야 한다. 올해 과학책 읽고 서평 쓰기 수업을 기획할 때 고민할 부분이다.

이 책은 서평 쓰기의 방법론이면서 서평집에 관한 한 권의 서평이기도 하다. 저자가 인용한 서평집의 목록만 보아도 어떤 서평집이 읽을만한 글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 고르는 안목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가지치기 하는 책이 많아질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남기는 것은 그것이 정서적인 부분을 털어내거나 모아 올리는 글이거나, 책에 관한 논리적인 분석과 사유이거나 모두 메타적인 책읽기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책 읽는 나를 돌아보는 작업이고, 그 서평이 남아있거나 머릿속에서 맴돌다 사라지거나 모두 나를 비춘다는 점에서 긍정이다.

그러고보니 어제 함께 낮술 모임의 한 분에게서 3년 전 처음 선물 받은 책이 <이모부의 서재>라는 서평집(과 비슷한 무엇). 그 책이 좋아서, 선물 받은 그 상황이 좋아서, 나는 그날 꽤나 마음에 드는 글을 하나 썼다. 그리고 그때부터 더더욱 공격적으로, 더더욱 많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이모부의 서재>에 담긴 글은 <서평 쓰는 법>에서 말하는 논리적인 서평이라기 보다 조금더 개인적이고 감성적이다. 그래서 좋다. 나는 그 책을 몇 번 읽었고, 몇 번은 읽다가 울었다. 그 책에서는 책을 읽는 사람의 냄새가 난다. 서평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실전화기‘ 같다. 가느다랗게 책과 책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짧거나 짧지 않거나 자꾸 글을 남겨야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3-02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한 권 다 읽었는데 서평을 쓰지 않으면 찝찝해요. 음식을 맛있게 먹었는데도 속이 허전한 느낌과 같아요. ^^;;
 
[eBook]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것이 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그 후회는 종종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물론 엄마 아빠도 그걸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망은 반사되어 다시 내게 돌아왔다. 정처없이 원망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서 나는 남자처럼 컸다. 어릴 때는 그게 쉬웠다. 치마를 거부했다. 국민학교 6년 동안 세 번 치마를 입었다. 여자아이들에게 쥐어주는 미미인형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고(그걸 다 벗겨서 머리채를 끌고 다녔다고 엄마는 종종 말한다),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로봇을 받았다. 시험을 잘 보았을 때 대가로 한 해는 축구공을, 한 해는 농구공을 요구했다. 물론 남자 아이들은 나를 대놓고 무시했고, 단 한 번도 축구 경기에끼워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비탈길에서 혼자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달리기를 거부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잘도 뛰었다. 학교 대표 선수도 하고 운동을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조금 더 커서 여고에서도 다른 아이들이 앞머리를 붙들고 또는 가슴을 가리고 뛸 때도 나는 잘 뛰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순간 남자처럼 크기를 포기했다.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걸 그냥 포기한 것이 안타깝다. 고립 속에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나눌 통로 없이 나는 그냥 일반적인 여자가 되었다. 그냥 어느 날 ‘사춘기 끝‘하고 머리를 기르고 보통 여대생이 된 것이다. 뭐랄까 어딘가 기억상실증 같아 그때를 곰곰 돌아보지만 특별한 기억이 없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나를 맴돌던 원망도 주위의 시선과 ‘원래 그래‘라는 단어에 물들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며 어린 페트로니우스의 생각에 격하게 공감하고 말았다. 맨움인 그는 움(male-female의 구조를 반대로 만들어 여자를 wom 남자를 manwom으로 부른다)의 직업인 뱃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맨움은 움의 직업을 갖기에 나약하고, 아이들 돌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설득과 압력에 부딪힌다. 그는 맨움이 억압받는 사회에 맞서 싸운다. 내가 남자가 되고 싶었던 건 우리 아빠의 형제 중에 우리 집에만 ‘아들‘이 없었고, 아들이 딸 보다 더 좋다는 집안의(그 시절의) 일반적인 시각 때문이었을텐데. 남자아이들에게는 내가 되고 싶었던 과학자의 꿈이 권장되기 때문이었을텐데. 그때는 그 구조 안에서 생각이 작았다. 조금 더 자랐다면 나도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조금 더 전투적인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뭐 그런 안타까움.

미러링의 원본처럼 보이는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여자-남자의 이분법적인 구조가 얼마나 문화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상세한 설명을 위화감 없이 푼다는 것, 그리고 감정과 한 사람의 삶 속에서만 펼쳐지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과 국가 차원에서의 큰 구조를 비틀어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반대로,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거울처럼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니. 1977년에! 작가는 얼마나 재미있어하며, 동시에 소스라치며 글을 썼을지.

좋은 페미니즘 책이 많이 나오고 이런책까지 다시 재조명 받는 이유는 2015년 부터 이어진 일련의 사건 때문일 것이다. 그중 메갈리아에 관한 몇 가지 세부적인 논의는 아직까지도 벽에 가로막혀 관계가 조심스러운 누군가들에게는 입장을 묻기 어렵다. 그 논쟁의 와중에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에 놀라고 당황하고 혼자 상처받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벌어진 ‘사실‘에 관한 관점조차 달라 사용하는 한 단어에도 여러 뜻이 붙었다. 메갈리아의 미러링과 그에 관한 논의의 깊숙한 바닥에 <이갈리아의 딸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이름을 선택했기 때문에 결국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과, 메갈리아가 미러링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의 대화 속에서 해석된다. 같이 해석하기 위해 김고연주의 추천사를 인용한다. ‘메갈리아의 등장에 주목하고 고무되고 긴장하고 고민하고 분노하는 모두는 <이갈리아의 딸들>을 정독해야 한다.‘

페트로니우스가 맨움이 움을 지배하는 나라를 바라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아들‘을 쓰지 않았듯이, 이갈리아는 여자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나라는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외치고 좌절하면서도 함께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그래서 다음 책으로는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골랐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2-28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해보면 초중딩 시절에 운동하는 여학생을 신기하게 봤습니다. 그때는 ‘운동=남자’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여학생이 남자처럼 운동하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선입견이 생겨요. 여학생은 열심히 운동하는 것뿐인데, 남자다운 인상 때문에 흡연한다거나 불량아라는 소문이 있었어요.
 

이래저래 운전하는 길이 길어 소설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받아두고 다른 책에 밀렸던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를 읽었다. 돌아다니는 길에만 들어야지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집에 와서도 계속 읽었다. 비극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인 그윈플레인도, <공각기동대 : Stand Alone Complex>의 웃는 남자인 소년도, 배트맨의 웃는 남자인 조커도 저 아래의 바닥에서 그 슬픔을 본 이들을 대변하는 누군가였다. 차별과 멸시를 뼈로 느낀. 공감하지 못하는 누군가와, 이용하려는 누군가와,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 사이에서 그들은 죽음으로, 소멸로, 악으로 대처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웃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본 것은 하층민의 고통으로 살찐 귀족과,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경제 권력과, 착한 척하는 세상 자체였다. 웃는다. 웃는다는 것은 균열을 만드는 것이다. 엄숙한,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착한 가면의 세상에. 세상이 웃는 한 사람의 누군가로 뒤바뀌지 않지만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인간의 입이라는 분화구가 분출하는 온갖 용암 중 가장 침식성이 강한 것은 즐거움이다.‘ 즐겁게 썩소를 날리자. 비웃어주자.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지만 차별에는 반대한다니, 그러면서 성소수자 차별 금지법은 국민 정서상 시기상조라 안된다니. 음주운전을 지지하지 않지만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것은 안된다. 하지만 애주가들이 표를 많이 주니 음주 단속이나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피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머러스한 할아버지, 보네거트는 지금 천국에 있을 것이다. 보네거트(보니것 보다 보네거트가 더 익숙하다)의 책이 잘 팔릴것 같다고 문학동네에서 판단했나 보다. 근간 소개에 침 흘릴만한 책들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사지는 않았지만 출고가격보다는 조금더 주고 <제5도살장>을 중고로 구매해서 보았던, 알라딘발 굿즈-보네거트 문학뱃지-를 얻으려고 하드커버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제5도살장>을 구입했던 그의 팬으로써 고마울 따름이다. 다른 책들은 좀 더 싸게 볼 수 있을테니.

역시 팬심으로 구매한 <나라 없는 사람>. 이 책은 보네거트의 마지막 산문집이다. 5년간 연재했던 것을 엮은 것이라고 한다. 곰의 탈을 쓴 여우 할아버지가 떠오르는 책이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유머와 미국(부시) 비판, 환경보호와 관련된 일관된 메시지가 좋다. 읽는 내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웃을 수 없는 몇 가지 유머가 덜그럭거리지만 이렇게 늙는 것은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가져다 주어 좋다.

---

THERE IS NO REASON GOOD CAN‘T TRIUMPH OVER EVIL, IF ONLY ANGELS WILL GET ORGANIZED ALONG THE LINES OF THE MAFIA.
(선이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천사들이 마피아처럼 조직화될 수 있다면야.) (5)


나는 과학기술을 생략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왜곡하는 소설은 섹스를 생략함으로써 빅토리아 시대의 삶을 왜곡하는 소설만큼이나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25)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차 대전이 끝난 후 <병사의 고향>이라는 소설을 썼다. 병사에게 고향에 돌아와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 것이 어째서 무례한 일인가를 그린 이야기였다. 민간인이 전투나 전쟁에 대해 물으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 것이다. 과거엔 그것이 유행이었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전쟁 이야기를 가장 인상적으로 말하는 방법은 입을 다무는 것이다. 그러면 민간이들은 온갖 종류의 용감한 행위들을 상상하게 된다. (...) 그리고 내가 눈으로 보고 기록했던 이야기에서 전쟁은 아주 추하게 묘사되었다. 진실은 강력하다. 그 힘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물론 전쟁에 대해 입을 다무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차마 그것을 입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28)

그러나 <햄릿>의 위대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했다. 사람들은 좀처럼 칠판 위에 진실을 끄리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이 좋은 소식이고 무엇이 나쁜 소식인지 알지 못한다. (44)

머지않아 도시는 암흑으로 변하고, 전기는 옛이야기가 될 터이다. 모든 운송수단이 멈추고 지구는 곧 해골과 뼈와 죽은 기계들로 뒤덮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끄러기엔 게임이 너무 많이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파티를 망칠 필요는 없지만, 진실은 알아야 한다. 우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양 물과 공기를 비롯한 지구의 자원들을 흥청망청 써버렸고 그 탓에 정말로 내일이 사라져버렸다. 자, 파티는 계속되고 재미있는 대목은 지금부터다. (52)

내가 보기엔 모든 사람이 마치 알코올 중독자 치료협회의 회원들처럼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단 며칠만 더 살아도 충분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아는 한 후손들의 세계를 꿈꾸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73)

하느님은 어떨까? 오늘날 그가 살아 있다면? 길 버먼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무신론자가 될 겁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죠.˝ (116)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제외하고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실수는 시간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시계와 달력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시간을 소시지처럼 일정하게 자른 다음, 마치 그것들이 우리의 소유물이고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처럼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인다 - 가령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 그러나 실제로 시간은 수은 덩어리처럼 잘게 부서지거나 순식간에 증발하는 경향이 있다. 혹시 2차 대전이 1차 대전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1차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섬뜩한 종류의 불가해한 난센스로 남는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라. 바흐와 셰익스피어와 아인슈타인 같은 인류의 천재들은 사실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단지 미래의 위대한 작품을 베낀 표절가들이 아니었을까? (1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민된다. 별을 네개 주어야 할지 다섯개 주어야 할지. 좋다는 얘기다. 지난 번 앍은 <제노사이드>보다 복잡하지 않지만 재밌다. 사형제도와 그에 얽힌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을 잘 풀었다. 짧고 임펙트있게 영화처럼 치고 가는 스타일이 좋다.

---
이 책은 ‘추리소설‘에 해당하고, 아래 글은 스포일러에 해당하여 뒤에 덧붙여 본다. 책을 읽을 사람들은 읽지 않아야 더 재미있을듯 ‘-‘
---

어둠 속에서 준이치는 마침내 13계단을 다 올랐다. 준이치는 아직일까 싶어 중간층을 통해 회중전등을 비추어 보았으나, 빛은 1층 입구까지 닿지 않았다. 준이치는 회중전등을 2층 중앙의 불상 쪽으로 돌렸다. 부동명왕은 항마의 보검을 움켜쥐고, 모든 불적을 섬멸하고자 버티고 있었다. 원래는 이교의 최고 신이었으면서, 그 압도적인 파괴력과 함께 불교의 수호신으로 거듭난 무신의 모습이었다. 석가여래가 형성하는 정토, 그리고 법을 범한 자는 그 보검의 일격을 받아야만 한다. 지금 준이치는 눈앞의 불상에 끌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읽은 자료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불교는 상냥한 자비를 베푸는 것만으로는 구할 수 없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 이 파괴신을 준비했노라고. (6장, 고인을 사형에 처함 중에서)

이야기 속 결정적인 증거가 묻혀있는 일본의 사찰. 이곳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부동명왕‘이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많은 사찰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시바신이 일본의 불교로 넘어올 때 이 부동명왕이 되었다 한다. 부동명왕이 상냥한 자비를 베푸는 것만으로 구할 수 없는 어리석은 중생이란 사형제도를 없애면 살아남는 범죄자들을 이르는 것은 아닐까. 결국 살인을 저지른 범인에 대한 단죄가 다시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이후의 내용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절에 있는 13계단,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는 형장에 있다는 13계단 잘 연결되는 아이템을 통해 ‘당신이라면 이 범죄자들을 - 부모를 처참하게 죽인 자를, 여자친구를 강간한 자를, 아들을 죽인 자를 - 죽이지 않고 살려둘 수 있겠는가? 당신이 당한 일이라도 그럴 수 있겠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정면으로 던져대는 긴장감 넘치는 추리소설.

---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속으로 열 셋을 세는 버릇도 생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