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남편과 나는 용산에 있는 서점을 한 바퀴 돌았다. 베스트 셀러 자리에 꽂힌 《총.균.쇠》를 들춰보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았으니, 아마 그때 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잠시 맡겨두고 나온 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장면보다는 그 색깔에 매료되었고, 마지막에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으로 휘청휘청 걸어나왔다. 그 뒤로도 한참 진실공방을 벌이며, 원작 소설을 읽도록 만든 그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소설 《파이 이야기》에 관한 나의 기억이다. 오랜만에 얀 마텔의 소설을 읽게 되어 기쁘다.

— 이하에 소설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대체 무엇이 있을까. 첫 번째 소설 <집을 잃다>의 주인공은 뒤로 걷는다. 뛸 때와 자동차를 탈 때를 제외하면 계속 뒤로 걷는다. 어쩔 수 없이 속도가 필요할 때는 앞으로,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느린 시간은 뒤로 걷는다. 그는 뒤로 걸으면서 마치 시간을 뒤로 돌리는 것 같다.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으로, 자꾸만 자꾸만 돌아가고 싶은 것처럼.

시간의 앞뒤 개념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보통은 미래가 우리의 앞에 놓여 있고,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보이지 않는 미래는 뒤에 있고, 앞에 있는 것이 과거가 아닐까. 과거는 보이고, 미래로 나아갈 수록 과거의 디테일은 사라지고 시야는 넓어진다. 과거에 대해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과거가 현재의 자신과 멀어지며 점점 보이지도 떠오르지도 않게 된다. 미래는 뒤에 있으므로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과 마주치게 될 지는 모른다. 오로지 내가 지나온 방향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뿐이다. <집을 잃다>의 뒤로 걷는 주인공을 보며,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 과거에 갇힌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보았다. 그는 아들과 아내와 아버지를 일주일 동안 잃는다. 그리고 자신이 의지하던 신부의 일기에 의지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찾아간다. 마지막에 그는 두 번째 소설인 <집으로>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남편의 아이를 차로 치어 죽이고 만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세상과 신을 저주하려던 그는, 또다른 이들에게 구원과도 같았던 아이를 죽이고 세상에서 도망친다. 모두에게 구원은 없다.

인간에게서 얻을 수 없는 구원을 결국 마지막 소설의 <집>에 등장하는 침팬지에서 얻는다. 그는 동물과 함께 자연을 걷고, 그와 함께 생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파이 이야기》와 《포르투갈의 높은 산》 두 작품 모두에서 자연과 동물이 등장하고, 이는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구원의 중심이 된다. 특히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네 사람의 주인공들이 찾아가는 구원과 안식의 여정에 자연의 길이나 동물이 등장한다. 그들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부드러우면서 단호한 손길은 따스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소설을 끝맺는 타이밍이 기가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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