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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차가갑고 하얀 입김같은 겨울, 혹은 죽음에 대한 짧은 이야기. 짧아서 아쉽고 여운이 길다.
달
구름 뒤에 달이 숨는 순간 구름은 갖자기 하얗고 차갑게 빛난다. 먹구름이 섞여있을 때면 미묘하게 어둑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잿빛이거나 연보랏빛이거나 연푸른빛을 띠는 그 무늬 뒤에, 둥글거나 반원이거나, 그보다 갸름하거나 실낱처럼 가는 창백한 달이 숨겨져 있다. 보름달을 볼 때마다 그녀는 사람의 얼굴을 보곤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아무리 설명해줘도 무엇이 두 마리 토끼고 절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것 같은 두 눈과 코의 그늘만 보였다. 달이 유난히 커다랗게 떠오른 밤, 커튼으로 창들을 가리지 않으면 아파트 구석구석으로 달빛이 스며든다. 그녀는 서겅거리다. 생각에 잠긴 거대한 흰 얼굴에서 스며나오는 빛, 거대한 캄캄한 두 눈에서 배어나오는 어둠 속을. (70)
흰나비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 길은 눈이나 서리 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둣빛 봄풀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팔락이며 날아가는 흰나비가 그녀의 눈빛을 잡아채고, 떨며 번민하는 혼 같은 그 날갯짓을 따라 그녀가 몇 걸음 더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막히는 낯선 향기를 뿜고 있다는 사실을, 더 무성해지기 위해 위로, 허공으로, 밝은 쪽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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