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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 글(좌파예술가)에 대해 권군과 나눈 이야기이다.

 

권군 :

숭군, 나 K네. 잘 읽었네. 내가 궁금한 건 이런 것이네.
자네 글을 따라가다 보니 진은영이 랑시에르 가지고 ‘감각적인 것의 분할’ 을 가지고 논점을 제기하던 것이 생각나네. 정치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그러니까 시나 소설이 정치에 의미가 한정되는 경우에 그게 문학일 수 있는가, 오히려 선동시 아닌가 하는 그 창비 논쟁이지?
나는 이 문제의 가장 어려운 점 중에 하나가 어떤 시를(사진을) 정치적인 것이라 판단하는 사람이 그 시를 문학다운 문학이 아니라고 말할 ‘권리’의 문제, 그러니까 우리 시선에서 봤을 때는 어떤 주제에 국한되어 버린 듯한 시-사진에게, 더 이상의 의미의 잉여와 사념함을 발생시키지 못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거지.

‘다만 나의 주장은 예술이 다른 지시체를 가리키는 것에서 끝나는 기표의 지위에서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점 특히 사진 예술에서 그러하다.”

신용준이 이렇게 말하면서, 어떤 작품에 대해서 사태개방성이 없다고 할 때, 좌파 예술가가 집창촌의 현실을 찍을 때 거기에 미적 혁신성이 없다는 것은 그저 직관에 의존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게 있는지가 해명되는게 중요한 것 같아. 수많은 노동시는 왜 시가 아닌 ‘노동시’일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될 때 확실해지는 거 아니겠나 싶어. 물론 직관에 의존한다고 해도 상관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만 말해 버리면 어떤 사진이 '살아있음에 대한 자극'이 되는 사진인지에 대한 합의도 미술시장에나 맡겨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겠지? 즉,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거야. (나는 직관적 이해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자기 직관은 다른 직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지)

덧붙이면, 나는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 아닌 것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에, 그래서 '정치적인 시'도 시로 표현된 정치라는 점에서 그저 정치적인 이야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을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 이건 결국 이런 질문이기도 할 것 같아. - 이 사진이 개방하려는 그 사태로 개방되지 않으려는 감상자로 인해 사진은 그저 기표가 되는 것은 아닌가?

 

숭군 :

 

1. "작품의 사태 개방성은 무엇이 보증하는가?"


권군!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었는데 고맙네!

 

먼저 앞서 밝혔다시피

나는 "노동을 다룬 모든 시"가 "노동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이 (새로운 사태를 개방할 수 있듯이)

좌파 사진작가의 집창촌을 다룬 사진도 충분히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새로운 사태를 개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라 방법론과 표현의 결과물이니까.

 

그렇다면 이제 문제를 "작품의 사태 개방성은 누가 보증하는가?"로 이해하면 되려나.
나는 이에 대해 기본적으로 감상자 개인차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네.


즉 한 작품이 완전히 보편적 차원의 미적 가치(소위 새로움의 호출, 혹은 균열성)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에는
나 역시 회의적이야. 예를 들어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어쩌면 당대의 아프리카 부족민들은 진부하다고 할 수도 있었겠지.
또한 뒤샹의 샘(변기)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 작품의 미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생각하네.

그런 차원에서 나는 학 작품의 미적 가치는 정량화, 절대화 될 수 없다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나는 한 작품에 대한 보편적 의미에서의  미적 가치 역시 평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네.

 

예를 들어 "결정적 순간"이라는 개념을 만든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 생각해 보겠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사진사 내에서 이룩한 미학적 성취는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하지만 DSLR를 들고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라는 방법론으로 거의 브레송의 수준으로 사진을 찍는,

혹은 브레송 이상으로 사진을 찍는 SLR클럽 아저씨들의 사진이 결코 사진 미학 내에서

특별한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하네.(물론 일종의 발전 단계의 한 지점이라는 가능성은 점은 열어두고 있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결국 한 작품의 미적가치의 보증 주체는 두가지 차원이 있는 것 같네.


즉, "개인적 차원"과 "보다 보편적 차원"의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네. (절대적 차원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전자는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기호의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예를 들어 최고급 와인보다 서울 막걸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이)

 

하지만 후자의 경우 소위 예술사적 맥락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네.
단순히 형식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까지 포함하여 예술사적 지평 내에서

어떠한 "새로운 자리"를 자리를 가질 수 있느냐가

한 작품의 미적가치의 상대적 보편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 아닐까하네.

그리고 여기서는 새로움이란 형식적 차원과 함께 감각적 차원도 포함하는 것이겠지.

 

(이러한 -예술사 내에서의- "새로움"이 미적 가치와 왜 상응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큰 문제이기에 

다음 기회에 찬찬히 더 생각해 봐야할 것 같지만 일단은 "매끄럽지 않음을 통해, 즉 관찰자와 작품과의 마찰에서 

빚어지는 울림으로 반성적 호출을 가능하게 한다"는 정도의 모호한 수준으로 정리해 보겠네. 정말 이 문제도 중요한 문제인 것 같네.)

 

 

대략 정리하면

 

1. 기본적으로 작품의 미적가치(사태 개방성)는 작품을 보는 사람에 따라 상대적으로 파악된다.

2. 그러나 한 작품의 가치는 (순수한 주관 척도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보편성 차원에서 평가될 수도 있으며,

    이러한 판단의 척도는 미술사(사진사) 전반의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생각이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좋은 작품이다라고 말하는 작품은 언제나 이러한 보편적 기준에서 이루어지는 판단 작용이라 생각하네.

 

예를 들어 나 같은 음악의 문외한은 지금은 아무리 열심히 들어봐도 일정 수준 이상되는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들의

연주에서 그들 사이의 우위를 판단하지 못하지. 그건 당연히 내가 클래식 음악을 듣는 재능이 없는 동시에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서겠지. 즉, 클래식 음악에 대한 감각의 수준이 저질이란 이야기지. 이런 수준의 내가

C급의 피아니스트를 최고 수준의 피아니스트보다 더 선호하는 것은 내 개인의 문제이지만 만약 피아노 연주의 수준에 대한

보편적 판단기준이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분명 내가 잘못된 것이겠지. 내가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 음악계에서도

좋은 음악을 판단하는 보편적 판단 기준이 있을꺼라 생각하네.

 

미술이나 사진의 경우도 나는 마찬가지라 생각하네,

특히 어쩌면 형식의 문제는 보다 선명하게 그 혁신성이 드러나서 상대적으로 쉽게 미적가치가 판단 가능하지만,

감각의 문제에 있어서는 권군 말대로 마치 직관에 가깝게 느껴질만큼 그 미적판단 기준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하네.

 

그러나 나는 감각의 새로움(사태 개방성)에도 상당한 수준의 보편적 판단기준이

이 역시 미술사, 사진사의 컨텍스트 내에서 그 새로움의 가치는 충분히 정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면

한 작품의 미적가치에 대한 기준은 비록 주관적일 수 있지만,

적어도 담론의 장에서 공유가능한 사진사(미술사)에 근거한 보편적 기준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지.

일면 모순처럼 보이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불가피한 현실인 것 같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문득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게

과연 작품의 미적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일정 장르의 역사성에만 국한되는가라는 질문이네.

역사성이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는데,

그것이 전부인가는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인 것 같네.

 

 

2. 매체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의미 생성의 문제에 관해  

 

 

권군 말대로 "사진 매체로 정치를 표현하면서 이미 새로운 의미 생성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나 역시 일정 부분 동의하네, 분명 사진으로 드러낸 정치적 메세지는 단순한 정치적 선동구호와는

다른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는 맞는 것 같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사진사의 한 지점에서 유진스미스와 같은 작가가  예술적 가치를 발생시켰다는 점도 사실이라고 생각하네.

권군의 표현대로 "의미의 잉여"가 분명히 발생하는 지점이 있으니까.

 

그런데 앞서 위에서 밝혔듯이 중요한 것은 사진이 정치에 종속된 사진이 되느냐 아니냐는 피사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맥락에서) 새로운 형식과 감성을 창출해내었는가의 문제인 것 같아.

 

즉, 정치적 이슈에 대한 사진이 그 사진 매체 고유성으로 인해 분명 다른 매체(시,문학,그림)와 구분되는

의미를 생성하는 것은 사실이이지만 그 사진이 사진계 내부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느냐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지.

그리고 사진 매체의 틀 안에서 미적 혁신성을 획득해야만 이때야 비로서 정치적 사진이 사진예술로서의 가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 같네.

 

이런 점에서 나는 단순히 사진의 매체적 독특성이 예술적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단지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독자적 특이성은 확보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지.

 

참고로 이런 점에서 문득 지난번 정연두, 여지현의 사진을 비롯해서 회화, 조각에서 사진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왜 소위 "사진적인 사진"에, 어쩌면 "진부한 사진"에 천착하는지 더 분명하게 이해가 된다.   

아마 그들은 회화와 대비되는 사진적 낯설기가 만드는 효과와 거기서 발생하는 의미생성에 집중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 위에서 말했듯이 새로움이란 언제나 상대적 새로움일테니까.

 

다음에 언제 기회가 되면 새로움과 미적가치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보면 좋을 것 같네.

이제사 밝히지만 사실 이것도 참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의견이란 것도 부정하지 않겠네ㅋㅋ

그래서 다음엔 미적가치의 생성 기준에 대해 좀 더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네.

칸트나 진중권 아저씨처럼 우리도 나름대로 미적가치의 판단기준을 만들어 보면 의미있을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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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5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5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5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5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5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스트셀러작가K 2014-03-26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숭군, 나 K군이오.
이번에는 내 생각을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서 질문을 해볼까 하네. 용서하게나.

먼저, 어떤 작품에 대해서 개인적인 판단과 보편적 판단이 나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문도 없네. 작품의 미적 가치를 개인의 취미 판단에 맡길 때는 어떤 작품도 걸작의 조건과 가능성을 갖게 되겠지.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보편적 판단’에 대한 것 아니겠나? 내가 하려는 질문은 어떤 작품이 지닌 사태개방성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보편적 계기를 찾으려는 거야. 그것이 직관에만 의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논의나 사태개방성은 개인의 내면으로 떨어지고 말겠지.

자네의 답에 대해 좀 더 추가해서 질문하고 싶네.
그러니까 자네도 사진으로 표현된 ‘정치’가 정치적인 이야기와는 다른 사태에 대한 개방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수긍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자체가 갖는 의미 생성에 사진예술이 만족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면 진부하다, 그래서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는 거지?

1) 자네는 앞선 글에서 사진 예술이 기표의 지위에만 머물면 안된다고 하며, 새로운 사태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사진으로 표현된 ‘정치’는 정치적인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는 의미의 잉여가 있다는 점에서, 설령 어떤 사진이 정치를 최소화된 예술적 표현만을 갖춘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진 예술인 한 다른 매체가 지니지 못하는 ‘사태개방성’이 있지 않나 생각했어. 요컨대 현장적인 생생함이나 우연성 같은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자네가 ‘새로움의 전개 가능성이 사진 예술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한 말과 지금 이 답변에서 하는 말에는 어떤 충돌이 있어 보인다네. 정식화하자면, <좌파예술가>에서는 사진이 지시체에 대한 기표 이상이어야만 사진다운 사진이라 했고, 이 글에서는 사진사적 맥락 속에서 새로운 형식과 감성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네. 내가 보기에는 ‘사진 다운 사진’의 조건이 이번 글에서 더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단순히 사진의 매체적 독특성이 예술적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그러면 사진의 예술적 가치는 형식과 감성에 있어서의 ‘미적 혁신성’을 갖출 때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은 지나치게 높은 기준이 아닐까? 사진예술의 조건이라기보다 차라리 ‘걸작의 조건’ 아닌가? 나는 사진의 매체적 독특성, 즉 사진이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나름대로 실현하고 있다면 예술로서의 사진으로 볼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실패한 사진 예술로 ‘진부하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사태에 부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네. 자네의 주장대로라면 소위 미술사적 의미에서의 ‘전회’를 가져오지 못하는 작품이라면 ‘진부한 것’ 내지 ‘예술로서의 회화’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대화에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좋음’의 참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단적으로 나와 자네의 ‘좋음’에 대한 판단 기준의 핵은 ‘사태개방성’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내가 ‘좋음’에 대해 다소 느슨한 조건을 걸어두는 반면에 자네의 ‘좋음’을 만족 시킬 수 있는 사진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네.

내가 정연두의 작품을 자네와 다르게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이야. 나는 <보라매댄스홀>, <내사랑지니>와 같은 작업은 사진 예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의미의 잉여가 발생하는 지점이 있고, 해석에 대한 개방성도 높다고 생각하네. 네이버캐스트의 정연두에 대한 소개만 보더라도 그런 소개글이 정연두 작품에 대한 적절한 2차 담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작품이 ‘시적 지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지 않냐 하는 거지. 정연두가 소박하게 사람들의 꿈이나 사진으로 실현시켜주는 정도의 작가가 아니지? 오히려 한편으로 은근히 정치적이고, 은근히 냉소적이라네. 정연두 작품에 이런 면이 있다면 그의 작품을 좋은 사진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나? 그것이 비록 내 직관과 감성에 온전하게 부합하지 못하더라도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라도 말이야.

나도 역사성을 포함한 다양한 요소들이 ‘좋음’의 조건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이 질문은 꼭 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둘 사이에 가로 놓인 철학적 차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네. 만일 자네가 나처럼 자네가 제시한 조건을 사진 예술의 조건이 아니라 걸작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2) 또 다른 질문은 이미 자네가 글에서 묻고 있는 주제네. “새로움”이 왜 그토록 사진 예술에서 중요하냐 하는 거지. 고은이 미학적 보수성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고은의 시에 예술적 가치를 폄하할 수 없지? 다른 한편으로 레니 리펜슈탈이 놀라운 수준의 미학적 혁신성을 바탕으로 나치에 부역하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레니 리펜슈탈의 예술적 가치를 폄하하기는 어렵지? 만일 그렇다면 작품이 지니는 ‘미적 가치’는 미학적, 정치적 혁신과는 -무관하지는 않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지점에 있는 것이라 해야 하지 않나? 사진, 회화 할 것 없이 이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집중이 작품을 어떤 소통불가능한 영역으로 데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가 후설과 같은 현상학 전통에 있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후설의 ‘아류’가 되는 것은 아니네. 즉 후설 이후 현상학파라 할 수 있는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은 동일한 방법론적 태도와 현상학적 공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각자가 지니는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떤 작가 일군이 지금 유형학 사진의 전통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그들을 진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네. 비록 레비나스가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철학이 다루지 못했던 어떤 ‘사태’를 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가치는 있지 않은가? 물론, 후설 현상학의 방법이 하이데거에게 가서는 해석학의 형태로 방법론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네. 자네가 형식이 내용을 따라가게 된다고 한 부분과 일치하는 부분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내 졸저가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는 아이키우기에 대한 정보를 담고철학적 답습이라고 하더라도 ‘육아’라는 기존의 철학이 다루지 않았던 사태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고, 혹은 가치가 없지는 않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ㅋㅋㅋ (웃지 말게) 이 점, 자네도 첫번째 내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히로시 스기모토의 예로.. 그런데 이 글에서 '새로움'이나 '좋음'에 대한 기준이 왜 이토록 강화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네.

사진 다운 사진은 ‘사태 개방성’을 지닌 사진이라기 보다 ‘봄’에 기초하여 고유한 사태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 사진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방법론에 의존하여 나타나는 새로움과 작가가 본 ‘독자적인 사태’를 표현함으로 얻게 되는 새로움은 다르다고 보는 것이네. 방법론적 고민은 기존에 사진계가 공유해오고 있는 작업에 대한 ‘판단중지’에서 오는 것이고 그 자체로 가치 있으며, 걸작의 조건이 되지만, 비단 새로울 것이 없는 어떤 방법론 내에서의 사진 작업이 작가의 독자적인 봄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이 -걸작에는 못미칠 수 있더라도- 가치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현상학에 비유하자면 전자는 초월론적 현상학적 판단 중지, 후자는 현상학적 심리학적 판단 중지에 해당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두 번째 질문을 정리하겠네.
새로움이 미적 판단에 있어서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떤 새로움을 말하는 것인가?


숭군 2014-04-01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군! 이 역시 새 글로 옮겼네! 늦어서 미안하오 ^^;;
 

 

생각해보면 애초 "좌파 예술가"라는 말 자체가 일정부분 어불성설 아닌가 싶다.

 

즉, 광의적 의미에서 좌파라는 것이 진보(progress)를 표방하는 집단이라면,

미학적 "혁신성"을 추구하는 것이 본령인 예술가들은 본질적으로 진보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가가 "이전 것"을 넘어서 끝없는 새로움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자라 한다면

-적어도 나는 장신정신의 구현자를 예술가로 보지 않기에-

예술가는 존재론적으로 진보주의자이고, 이 점에서 좌파라 아니할 수 없다.

(진보=좌파의 공식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임으로 한국사회에서 쓰이는 보편적 의미를 따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발생한다.

바로 미학적 진보성과 정치적 진보성에 관한 문제이다.

예술가가 진보(광의적 의미의 진보) 지향의 존재라면 협의적 의미의 진보,

즉 정치적 의미에서도 예술가는 진보인가의 문제이다.

 

좀 거칠게 말하면 "예술가는 정치적 좌파여야 하는가?"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기본적으로 "미학적 진보성은 정치적 진보성"과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절대 적잖은 비판을 받을 명제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기존 체계에 균열을 일으켜 새로운 사태를 그 균열 안으로 호출하는 행위라면,

그리고 한 인간의 의식이란 것이 "지향성과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구성체라면,

그 지향성과 통일성의 맥락에서 분열증자가 아닌 이상 예술가는 정치의 영역에서도 진보주의자,

소위 좌파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 의식의 특성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 발생한다.

"예술은 정치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는 예술가는 진보(좌파)인가?와는 다른 질문이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 하면 나는 "예술은 탈 정치적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예술 이외의 다른 대상에 대한 기표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예술의 "쓸모없음"에 대한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가능하다.

예술은 자신이 자신을 지시하는 존재이다.

그 자체가 기표이자 기의인 존재, 그것이 바로 예술이고 이것이야 말로 예술이 예술이 되는 기본 조건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 예술 안의 목적에 맞서는 싸움은 항상 예술 안에 있는 도덕화하는 경향에 맞서는 싸움이며,

 예술이 도덕의 하위에 놓이는 것에 맞서는 싸움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도덕 같은 것은 꺼져버려라!"이다."

 

니체의 말이다.

 

니체가 예술이 도덕에 맞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기표로써 전락하는 예술을 경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 내적 완전성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로써의

신적 절대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태를 호출하는 명령권을 가질 때에만 예술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예술은 "탈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예술이 일련의 정치적 이념을 대변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정치란 계급, 성, 인종을 포함한 일련의 정치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렇다면 예술은 삶과 동떨어진 유미주의의 길로 가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예술을 유미주의의 틀 속에 가두는 것에 반대한다. (삶과 유리된 예술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의 유미주의)

 

내가 말하고자 하는 "탈 정치적 예술"이란 특정한 정치적 의식으로 수렴되지 않는 예술,

즉 정치적인 것을 뿌리로 삼을지라도 이로부터 독자적 미적 성취를 이루어내어

자기 지시성의 힘으로 그 정치성을 뛰어넘는 "초 정치적 예술"을 의미한다.

 

예술은 정치적 상황을 얼마든지 담고 있을 수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생각해보라.)

이 점에서 정치적 상황을 찍은 다큐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얼마든지 열려있다.(나는 개인적으로 "조셉 쿠델카"가 그런 작가 가운데 하나라 생각한다.) 

 

다만 나의 주장은 예술이 다른 지시체를 가리키는 것에서 끝나는 기표의 지위에서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점 특히 사진 예술에서 그러하다.

 

가난한 자들의 삶을 조명하는 사진부터 어느 집창촌의 현실을 찍는 사진을 포함하여

값비싼 물건이 진열된 명품 샵을 찍는 사진까지 피사체가 그 사진의 예술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미적 혁신성에서 비롯되는 사태의 개방성,

즉 "새로움의 전개 가능성"만이 사진이 예술이 되도록 하는 유일한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투쟁의 대상, 새로운 열망의 대상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등장해야만 한다.

 

다만 예술가가 지향해야 할 것은

투쟁의 한 좌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투쟁의 동력, "새로움으로의 감각"이다.

바로 "살아있음에 대한 자극"이다.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목적이 없다거나,

 목표가 없다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 

 

 니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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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작가임ㅋ 2014-03-24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숭군, 나 K네. 잘 읽었네. 내가 궁금한 건 이런 것이네.
자네 글을 따라가다 보니 진은영이 랑시에르 가지고 ‘감각적인 것의 분할’ 을 가지고 논점을 제기하던 것이 생각나네. 정치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그러니까 시나 소설이 정치에 의미가 한정되는 경우에 그게 문학일 수 있는가, 오히려 선동시 아닌가 하는 그 창비 논쟁이지?
나는 이 문제의 가장 어려운 점 중에 하나가 어떤 시를(사진을) 정치적인 것이라 판단하는 사람이 그 시를 문학다운 문학이 아니라고 말할 ‘권리’의 문제, 그러니까 우리 시선에서 봤을 때는 어떤 주제에 국한되어 버린 듯한 시-사진에게, 더 이상의 의미의 잉여와 사념함을 발생시키지 못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거지.

‘다만 나의 주장은 예술이 다른 지시체를 가리키는 것에서 끝나는 기표의 지위에서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점 특히 사진 예술에서 그러하다.”

신용준이 이렇게 말하면서, 어떤 작품에 대해서 사태개방성이 없다고 할 때, 좌파 예술가가 집창촌의 현실을 찍을 때 거기에 미적 혁신성이 없다는 것은 그저 직관에 의존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게 있는지가 해명되는게 중요한 것 같아. 수많은 노동시는 왜 시가 아닌 ‘노동시’일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될 때 확실해지는 거 아니겠나 싶어. 물론 직관에 의존한다고 해도 상관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만 말해 버리면 어떤 사진이 '살아있음에 대한 자극'이 되는 사진인지에 대한 합의도 미술시장에나 맡겨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겠지? 즉,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거야. (나는 직관적 이해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자기 직관은 다른 직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지)

덧붙이면, 나는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 아닌 것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에, 그래서 '정치적인 시'도 시로 표현된 정치라는 점에서 그저 정치적인 이야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을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 이건 결국 이런 질문이기도 할 것 같아. - 이 사진이 개방하려는 그 사태로 개방되지 않으려는 감상자로 인해 사진은 그저 기표가 되는 것은 아닌가?

숭군 2014-03-25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군! 위에다가 댓글 옮겨서 새로썼네!
 

대화
k군:

 

http://ppss.kr/archives/18207

숭군 네 의견이 궁금하다.


숭군:
난 작업 별로인데ㅋㅋ
이거 김옥선 작가 아류이고 이런식으로 접근하는 방법론 너무 유치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
외국 잡지도 한국의 기형적 성형문화에 대해 관심있는거지 뭐 작품에 관심이 있는건 아니지싶다.
사실 김옥선 작가 사진도 난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일단 이 사진은 새로운 미학적 통찰도 없고 방법론도 진부하고 감각도 떨어지고 하다못해 테크닉도 별로인 것 같다.. "고민이 안 느껴진다"랄까..

k군
숭군! 나 어제 일찍 잤다. 그래 나도 네 생각과 같다. 김옥선에 대한 견해도 거의 같아. 덧붙여서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런거야. 1) 대개의 사람들이 이런 작품에 대해 흥미가 있지? 어떤 면에서 정연두 작품도 주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라나. 아무튼 이런 방법론이 왜 진부한지에 대한 네 논증이 궁금하다. 나는 직관적으로는 알겠는데, 왜 그런지 '언어화된' 논거를 못찾겠어. 2) 다른 하나의 고민은 결국 좋은 사진이라는 것이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뛰어난 사진일텐데, 그러면서도 기존 미학에 대한 혁신 내지 혁명적 태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마치 만레이나 아로요 작품들처럼.. 그런데 뭔가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되는 것이 있으면 그게 혁신이라 말할 수 있는 계기도 있고, 아무것도 아니고 쓰레기라고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동시에 있는거잖아? 사실, 나도 이런 류의 작품들이 뭔가 오형근/라이어맥긴리 작품과도 유사한면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류의 작품들이 구본창, 배병우 류의 사진에 대한 작품에 대한 혁신이 아니라 오히려 진부하다고 말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뭘까. 조심스레 묻자면 히로시 스기모토나 사진이 좋긴 좋은데 젊은 사진가들의 지향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거야. a씨 같은 작품들이 전유하는 방법론을 구시대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뭘까. 방법론적으로 어떤 참신함이 깃들어 있나..




숭군:
1. 사실 이런 작품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 기본적으로 나는 오히려 사진 외부에 있는 사람들, 그니까 미술전반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나 큐레이터 혹은 회화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류의 작품들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 아무래도 확실히 "비회화적"인 성격이 강하니까. (정말 "사진적"이라고나 할까?,,) 근데 되려 사진계 내부에서는 이런 작업들이 어느정도 진부하다는 의식을 가진 작가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 생각해보니 정연두나 이런 작업한 사람들 모두 회화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니까 "뭔가 날것의 사진적인 것"에 끌려서 이런류의 사진을 찍는게 아닌가 싶다.

2. 이런류의 사진이 왜 진부한가에 대해서는 나 역시 기본적으로 너처럼 직관적으로 느끼는게 먼저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직관적이라는 것이 이론적 근거가 없다는게 아니라 타당한 논증의 기반에서 이루어진 감각이라는 것 역시 사실인 것 같다. 물론 차근히 생각해보면 더 견고한 논리가 세워지겠지만, 일단 내 생각에 위의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시적 지시성"이 결여된게 아닌가 싶다. 그니까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더라도 뭔가 새로운 사태를 지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작품은 충분히 예술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예를 들어 스기모토), 성형수술 사진은 아쉽게도 그 지점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수 십년전의 낸 골딘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이점 더 뚜렷하지 않을까 싶다.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이나 미학적 감성을 환기시키는 작업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적어도 진부한 주제의식, 예전에 우리가 말했던 언어로 이미 정리가 끝난 사태를 굳이 다시 이미지화 하려고 했다는 것이 성형사진의 기본적 한계가 아닐까한다. 그니까 부연하자면 사태의 개방성이 없는 닫힌 기호랄까... 그래서 시적 지시성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정연두가 먹히는 이유는 나름대로 그 방법론 내에서 독특한 정서를 호출하는 힘이 있어서겠지..(사실 난 잘 못느끼겠지만...)

2. 나도 k군의 생각에 동의한다. 스기모토가 젊은 작가의 지향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거지. 사실 스기모토의 힘은 기술적 완성도와 피사체를 바라보는 스기모토만의 독특한 개인적 관점이 결함되었기 때문이지, 즉, f64 클럽이나 신즉물주의 계통의 사진미학 (탁월한 재현력에 근거한 이미지 생성이라는 미학적 태도)위에 스기모토 본인의 사물과 대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이 결합된 것이 스기모토 사진의 힘이라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스기모토를 롤 모델로 삼는 젊은 사진가는 피카소의 큐비즘이라는 방법론이나 인상파의 방법론으로 21세기에 그저 나름 자신의 주관적 감성을 표현하는 2류 혹은 1.5류 작가가 되는 것과 같은 형국이겠지.

a의 사진 역시 지형학 사진이라는 보다 큰 사진의 가지에서 나온 작은 가지이기 때문에 현재로써는 불가피하게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니까 방법론적 고민이 결여되어 있다는 거지. 이점은 본인도 인정하고 있고... (로버트 아담스라는 작가를 한번 참고해 보면 될꺼야). (뭐 그렇게 따지면 나도 마이너 화이트 짝퉁이지만ㅋㅋ)

말이 너무 길어졌다ㅋㅋ 암튼 뭔가 사진에서도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데 너무 다들 열심히만 찍는게 문제인 것 같다.

예전에 한번 생각해 본 문제인데 결국 내용이 형식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즉, 새로운 미적 감수성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형식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지. 그점에서 나는 k군이 이야기 했던 "뭔가를 봤나?"라는 질문이 중요한 것 같다. 고흐나 피카소도 "그 뭔가"를 담기 위한 그릇으로 기존의 방법론으로는 한계를 느꼈기에 새로운 스타일이 나온게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스타일을 위한 스타일 창조는 아니라는 것이지... 그래서 작가들이 정말 깊이 있게 새로운 문제의식을 느끼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게 되면 새로운 형식은 그림자처럼 따라 오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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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속에서 슬픔을 저축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유령에게 우리가 제시할 수있는
미학적 불온분자의 삶일 것이다.
-허윤진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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