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한 개인의 죽음을 절대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현존재(인간)가 죽음 앞에서의 실존적 결단을 통해 삶의 고유한 가능성을 전개하여 본래적 자기를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이 같은 하이데거의 생각은 사사키 아타루의 관점에서 볼 때 일종의 자기과잉 상태에서 확장된 또 하나의 “유치한 절대주의”라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기독교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을(혹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동일한 뿌리를 가진) 엄숙주의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한 사사키 아타루의 비판은 어쩌면 예술 작업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무엇인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성 내에서 가치를 발휘하는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은 실상 어쩌면 “유치한 절대주의나 유아적 수준의 자기과잉"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친구는 내게 “엄숙주의, 걸작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과 함께 “재미(fun)의 추구야말로 오히려 좋은 작업의 시작점이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타당한 문제제기이다.
"나는...신처럼 창조한다"라 말했던 조각가 문신의 말처럼 창작이 일종의 “신적행위”라면,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이 신성의 첫 속성이다”했던 니체의 말이 옳다면 아마 "가벼운 발걸음이 창작의 첫 속성이다"라는 명제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 근데 다시보니 이 글 역시 괜히 엄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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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독자적이고 무연관적이며 능가할 수 없고 확실하면서도 무규정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죽음.
(중략) 이렇게 죽음은 가장 독자적이고 무연관적이며 능가할 수 없으며 가장 확실하면서도 무규정적인 가능성으로서 드러난다. 그런데 현존재가 항상 죽음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은 동물과 달리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고 자신이 어떻게 살지를 고뇌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이러한 실존적 성격은 '죽음을 향한 존재'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첨예하게 구체화된다.(중략) 따라서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전체에 진정한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는 죽음으로의 선구야말로 우리 자신의 삶에 진정으로 책임을 지는 본래적인 결의성에 해당한다.
현존재가 이렇게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결의할 때 현존재의 삶이 중심을 갖게 되면서 하나의 유의미한 전체로 형성된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상주성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읽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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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게 세계는 계속됩니다. 세계는 넓습니다. 그 세계는 더욱 넓습니다. 세계는 계속됩니다. 그 세계는 더욱 오래 계속됩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세계는 변합니다.(중략) <고도를 기다리며>는 종말론적인 이야기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만,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중략)
이제 지긋지긋해, 그만둬. 시간 이야기를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건, 바보같아!
언제야! 언제야! 어느 날이면 안 되는 거야?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인 어느 날, 놈은 벙어리가 되었어. 어느 날 나는 맹인이 되었어.
어느 날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지도 모르지.
어느 날 태어났어. 어느 날 죽겠지. 같은 어느 날, 같은 어느 시간에.
그것으로 충분하잖아. 여자들은 묘석 위에 걸터앉아 출산을 하지. 그 순간 해가 빛나는 거야.
그리고 또 새로운 밤이 찾아오지. 앞으로!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인 어느 날",
"또다시 새로운 밤이 찾아오지. 앞으로!" 이런 연극입니다.
이 장면을 인용한 것은, 축자적으로는 아니지만, 분명히 미셸 푸코가 인용구 없이 인용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가 결정적인 시대라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요. 바로 현대문학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안 뭔가 결정적인 몰락이나 종언이 일어나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유치한 사고에 대한 투쟁으로 조직되어왔습니다.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