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니체가 위대한 철학자라 한다면, 그의 위대함은 시대에 대해, 아니 어쩌면 시대에 길들여진 자신의 정신에 대해 분노할 수 있었다는 지점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을 가두고 있는 그 모든 노예적 것에 대해 철저히 혐오했고 날선 정신의 칼로 철저히 이를 해부했다.
나는 그의 글이 “피로 쓰인 것”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시대를 향했던 그 날카로운 칼날이 동시에 정확히 자신 내부에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노예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기 속에 있는 가장 구역질나는 그것의 숨을 끝내 끊어버리려는 그 필사적 사투가 그의 글에서 피냄새가 나도록 허락한 것이다.
위대해질 수 없음은 충분히 역겨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기생하던 그 천박한 정신이 어느덧 나를 삼키고 이제는 내가 그것에 기생해 살아간다. 더는 힘들지 않다는 것,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은 살아가는 기술을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의 감각세포가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것은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수영은 더 나아갔어야 했다. 시인은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시를 쓰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 속에 있는 타락의 종자를 마지막 하나까지 토해내야 한다. 눈위에서 토해내야 한다. 완전히 토해내지 못하면 타락은 그의 몸 속에서 자라나 시인을 찢어버린다.
어제 꼰대라는 말을 들었다. 농담섞인 말이었지만, 부정할 수가 없다.
몇 달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책 한권을 읽지 않는 인간은 꼰대가 맞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살겠다는 의지의 증거다.
돈이 인간에 대한 평가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린 인간은 꼰대가 맞다.
얼마지 않아 돈이 인간에 대해 평가하는 모든 것이 될테니까.
더 젊었던 시절 그것들의 숨을 끝까지 끊어버렸어야 했는데,
내 몸에서 그것들을 끝내 토해냈어야 했는데,
삶을 사는 지혜라는 말로 변명하며 회피했던 그 값이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