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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길 위에서도 산다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아마도 잘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여유롭고 즐겁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아닐까?
그런데 이런 목적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안전하고 평화로울 때 가능하다. 만약 이 세상이 평화롭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하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는 세상이라면, 시시때때로 죽음을 직면해야만 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과연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이쯤 되면 삶의 목적이 이거네, 저거네 하며 운운할 시간도 없고,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삶의 목적은 죽음을 피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이제는 내 목숨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의 유지도 내 삶의 중요한 목적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삶에 대한 집착은 인륜까지도 포기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라도 내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매 순간이 공포의 순간이며, 목숨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기 어려울 때,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삶을 선택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고민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되지만 사실은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 죽음을 회피하려는 그 자체도 매우 중요한 삶의 목적이라는 것.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런 이유를 저차원적이고 동물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이유를 말하면 무시하거나 비웃어버린다. 하지만 그것 자체로 정말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의 목적이 아닐까?
생명이 어떻게 생겨나서 왜 내게 주어졌는지 나는 모른다. 어떤 사람은 신이 주었다고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그 말을 믿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렇다 할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주어진 생명을 그냥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 삶이 불편하다. 뭔가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오류가 아닐까? 인간 종족으로 가지는 종족의 우상이 아닐까?
사실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저 숲에서 살아가는 수 많은 생명들이 그 자체로 소중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음을 회피하여 살아남는 것 자체로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코맥 메카시가 쓴 소설 『로드(The road)』는 한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종말과 절망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종말적인 세계에서 사람들이 치열하고 잔인무도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는 매우 많다. 그런 면에서 이 이야기는 그닥 신선할 것은 없다. 좀더 황폐한 세계, 좀더 고요한 죽음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다른 종말적인 세계를 다룬 이야기와는 다른 세계가 그려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매우 신선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른 종말적인 세계에 나타나는, 근육질의 멋진 영웅이 없다. 이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빛 인간들만을 보여줄 뿐이다. 모두가 죽음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며, 아무도 서로 믿지 못하는 공포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이런 평범한 종말의 세계가 그 동안 보여주었던 종말의 세계와는 다른 신선한 면으로 다가온다. 물론 여기서 말한 평범한 이란 우리가 현재 느끼는 일상의 평범함은 아니다. 단지 생명을 이어가려는 그러한 삶으로서 평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그렇게 신선한 종말적 세계가 작품의 숨막히는 의미가 되어 나타난다.
혹자는 『로드(The road)』를 아버지의 위대한 사랑이야기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아버지든 이 이야기 속 아버지처럼 할 것이다. 결코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 재빛 세상을 조금이나마 희망찬 눈빛으로 보려는 철없는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평범한 아버지가 존재할 뿐이다.
『로드(The road)』는 재빛 절망의 순간에 작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삶, 그저 생명을 어떻게 유지해 나가려는 삶을 보여준다. 뭔가 충격적이고 감정이 폭발할 만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지만 결국 두 주인공은 죽음을 회피하여 생명을 유지하려는 작은 노력을 할 뿐이다. 너무나 평범하지만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산다. 다가올 것 같은 죽음의 순간에도 생명은 너무나 평이하게, 뭔가 충격적인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사고를 꼬집으며 이어진다.
이 때문에 『로드(The road)』는 의미가 있다. 삶이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과격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도 그저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한 삶을 그려내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의 진정성에 대해 평범치 않은 의문을 던진다. 노회한 작가의 삶에 대한 담담한 고찰이 느껴진다. 마치 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는다고 답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계는 죽음 뿐이다.
그래도 삶은 존재한다.
길,
위에서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