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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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은유들이 축제를 벌이는 작품이었다. 

- 사실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수백장의 수용소 스냅 사진을 모아 놓은 것 같다. 그러데 그 사진들이 독특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일종의 현실적 환상이다. 수용소의 끔찍한 상황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지만, 아니 어쩐지 이단아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또 하나의 훌륭한 수용소의 고통을 그려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환상적인 은유들의 향연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안 읽는 게 좋겠다. 그러나 시적인 언어, 은유의 아름움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강추다. 새로운 세계를 만날 것이다. 환상적인 배고픔과 중노동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끔찍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섬강의 철학카페) |작성자 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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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 자유론 / 통치론 동서문화사 월드북 42
토머스 모어.존 스튜어트 밀 지음, 김현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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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세상에는 여러 가지 가치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 마다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돈, 꿈, 나눔, 평화, 행복, 평등, 자유 등등.

이 중에서도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가치는 아마도 자유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너무나 당연히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가장 관심없는 것도 자유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유가 그 어떤 가치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산소와도 같은 것이다.

 

수 많은 세월 피를 흘려서 획득했던 자유, 오늘날도 여전히 피를 흘려서 획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유는 이제 인간 존재의 기본 조건으로 당연시 여겨질 정도의 위치에 오른 가치다.

그런데 과연 자유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과연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자유에 대해 말하지만 자유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다고 말하지만 때때로 그것은 책임을 방기한 방종과도 같은 자유일 때가 있다.

때로는 책임을 지며 자유롭게 산다고 말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체제에 자기를 순응시키며 살아가기도 한다.

결국 알게 모르게 자유를 빼앗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잘못되었다고 사람들의 말할 자유를 빼앗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투표를 하러 가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날 정도다.

개인적인 삶에 몰두하면서 그 안에서 적절히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주어진 길 속에서 나는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까?

정말 소중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대로 자유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존 수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이 책은 행복의 자유나 신체의 자유와 같은 다양한 자유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 책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억압과 자유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바로 사상과 양심, 감정의 자유 그리고 결사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자유는 모든 자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동시에 모든 자유의 기초가 되는 자유다. 

왜냐하면 이 자유야 말로 자유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억압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존재이자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개인적인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반면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안전하게 생존하기 위해서는 사회라는 집단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때때로 집단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또 그렇게 산다는 것이 사실 정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라는 집단을 형성해야만 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는 현장일 수밖에 없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느 한 쪽을 버리면 좋겠지만

개인과 사회는 인간의 두 측면이지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쪽만을 추구하다보면 인간은 결국 실패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본질이 갈등이 벌이는 상황 속에서 자유를 어떻게 성취할 것이냐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사회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또는 공리적인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할 때

갈등은 심각해지고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숨쉴 공기가 없을 때가 되어야 숨 쉴 공기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과 같다.

 

밀의『자유론』은 바로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우선 밀은 이제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개인의 자유 추구와 사회적 억압에 관한 원칙을 말한다.

 

"자유라고 불릴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유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으려 하거나 행복을 얻으려는

다른 사람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유토피아, 자유론, 통치론』, 동서문화사, 127쪽)

 

이 말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라고 불릴 수 없으며

그러한 행위는 억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함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다면 거의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즉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밀은 다른 사람들과의 토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다.

즉 서로 자유롭게 얘기를 하면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 얘기하고 설득하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억압하는 것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러한 합의는 강제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 중에서 도출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자유로의 합의를 통해 도출된 결론은 사람들을 더욱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자유로의 합의의 방향은 공리주의적이어야 한다.

밀은 공리를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의 항구적 이익에 바탕을 둔다는 넓은 의미로서의 공리'를 라고 정의하여

논의를 정리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사상과 양심, 감정의 자유'이며, '결사의 자유'인 것이다.

이것이 보장되어야 밀이 추구했던 자유로운 토론과 합의를 할 수 있고 나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밀의 주장은 옳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의 한계나 사회적 억압의 한계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와 거의 같다.

사실 밀의 주장으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자유가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크게 과장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자유에 대한 개념을 좀 더 명확하게 정의하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억압의 한계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이 책,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어보는 것은 참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쓰인 책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자유에 대해서 유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특히 앞으로 정치를 하고자 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서 마음 속의 금과옥조로 여겨야 하리라 생각한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억압의 한계에 관한 두 가지 공리>(『유토피아, 자유론, 통치론』, 동서문화사, 255쪽)

 

1. 개인은 그의 행위가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군가의 이해관계와도 상관없는 이상,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충고나 훈계, 설득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경우 어떤 행위를 회피하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은 사회가 개인의 행위에 대한 혐오감이나 비난을 표명할 때 정당하게 사용해도 되는 유일한 수단이다.

 

2. 개인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해를 끼는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사회가 사회 보호를 위해 사회적 처벌이나 법적 형벌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개인은 그런 처벌을 당연히 받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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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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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도 산다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아마도 잘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여유롭고 즐겁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아닐까? 

 

  그런데 이런 목적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안전하고 평화로울 때 가능하다. 만약 이 세상이 평화롭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하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는 세상이라면, 시시때때로 죽음을 직면해야만 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과연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이쯤 되면 삶의 목적이 이거네, 저거네 하며 운운할 시간도 없고,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삶의 목적은 죽음을 피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이제는 내 목숨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의 유지도 내 삶의 중요한 목적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삶에 대한 집착은 인륜까지도 포기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라도 내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매 순간이 공포의 순간이며, 목숨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기 어려울 때,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삶을 선택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고민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되지만 사실은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 죽음을 회피하려는 그 자체도 매우 중요한 삶의 목적이라는 것.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런 이유를 저차원적이고 동물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이유를 말하면 무시하거나 비웃어버린다. 하지만 그것 자체로 정말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의 목적이 아닐까?

 

  생명이 어떻게 생겨나서 왜 내게 주어졌는지 나는 모른다. 어떤 사람은 신이 주었다고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그 말을 믿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렇다 할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주어진 생명을 그냥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 삶이 불편하다. 뭔가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오류가 아닐까? 인간 종족으로 가지는 종족의 우상이 아닐까?

 

  사실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저 숲에서 살아가는 수 많은 생명들이 그 자체로 소중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음을 회피하여 살아남는 것 자체로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코맥 메카시가 쓴 소설 『로드(The road)』는 한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종말과 절망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종말적인 세계에서 사람들이 치열하고 잔인무도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는 매우 많다. 그런 면에서 이 이야기는 그닥 신선할 것은 없다. 좀더 황폐한 세계, 좀더 고요한 죽음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다른 종말적인 세계를 다룬 이야기와는 다른 세계가 그려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매우 신선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른 종말적인 세계에 나타나는, 근육질의 멋진 영웅이 없다. 이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빛 인간들만을 보여줄 뿐이다. 모두가 죽음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며, 아무도 서로 믿지 못하는 공포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이런 평범한 종말의 세계가 그 동안 보여주었던 종말의 세계와는 다른 신선한 면으로 다가온다. 물론 여기서 말한 평범한 이란 우리가 현재 느끼는 일상의 평범함은 아니다. 단지 생명을 이어가려는 그러한 삶으로서 평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그렇게 신선한 종말적 세계가 작품의 숨막히는 의미가 되어 나타난다.

 

  혹자는 『로드(The road)』를 아버지의 위대한 사랑이야기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아버지든 이 이야기 속 아버지처럼 할 것이다. 결코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 재빛 세상을 조금이나마 희망찬 눈빛으로 보려는 철없는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평범한 아버지가 존재할 뿐이다. 

 

 『로드(The road)』는 재빛 절망의 순간에 작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삶, 그저 생명을 어떻게 유지해 나가려는 삶을 보여준다. 뭔가 충격적이고 감정이 폭발할 만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지만 결국 두 주인공은 죽음을 회피하여 생명을 유지하려는 작은 노력을 할 뿐이다. 너무나 평범하지만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산다. 다가올 것 같은 죽음의 순간에도 생명은 너무나 평이하게, 뭔가 충격적인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사고를 꼬집으며 이어진다.

 

  이 때문에 『로드(The road)』는 의미가 있다. 삶이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과격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도 그저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한 삶을 그려내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의 진정성에 대해 평범치 않은 의문을 던진다. 노회한 작가의 삶에 대한 담담한 고찰이 느껴진다. 마치 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는다고 답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계는 죽음 뿐이다.

  그래도 삶은 존재한다.

 

  길,

  위에서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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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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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역사에 바친 핏빛 서사시

 
  1846년에서 1848년에 미국와 멕시코는 영토 분쟁으로 인한 전쟁을 치렀다. 당시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전쟁에서 이겼고, 멕시코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맺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겨우 1,825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로부터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와이오밍 주 등을 할양 받아 한반도 넓이의 15배에 달하는 300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넓혔다. 당시 멕시코는 독립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력하게 전쟁에서 패배했고, 조약 이후에도 내부의 혼란과 더 많은 영토를 뺏으려는 불법적인 미국의 게릴군, 그리고 잔혹했던 아파치 인디언 때문에 안정적이지 못했다. 이에 멕시코 정부는 미국 용병을 고용해 아파치 인디언들을 잡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들은 얌전한 다른 인디언들이나 멕시코인들을 죽여 머리가죽을 벗기어서 멕시코 정부를 속이곤 했다. 

  극도로 혼란스럽고 피비린내가 자욱했던 시절이었다.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코맥 매카시는 『핏빛 자오선』을 썼다. 이 작품은 멕시코인들에게 고용되었던 한 용병부대원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요 인물인 대장 글랜턴, 판사, 가짜 신부 그리고 소년이다. 이들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유린하고 학살했으며 피의 향연을 즐긴다. 매카시는 그들의 피의 여정을 시적인 표현으로 묘사해낸다. 흔히 생각하는 전개, 위기, 절정이 없다. 그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작품을 읽어가면서 생각났던 의문은 작품이 다 끝나고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런 교훈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굳이 찾아내자면 놀라운 '낯설게 하기'라고나 할까? 

  '낯설게 하기'. 작품에서 묘사하고 있는 수 많은 주변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은 작가의 놀라운 능력에 의해 매우 낯설게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의 묘사 하나하나가 독자의 눈동자를 강하게 자극한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놀라서 혀가 턱을 뚫고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다. 다음의 묘사를 보라.

   말은 낯선 땅에 퉁명하게 발을 딛뎠고, 둥근 지구는 말발굽 아래에서 조용히 구르며 거대한 우주를 빙빙 돌았다. 그 일대의 중성적 금욕 속에서 모든 현상은 기묘한 균질성을 상속 받았고, 거미든 돌이든 풀이든 그 어느 것도 우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이러한 명징함으로 인해 그네들의 친숙함은 사라졌고, 명암에 아무차이도 없는 눈은 그 모두를 하나의 풍경으로 혹은부분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시각적 민주주의로 인해 선호라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며, 사람과 바위가 뜻밖의 혈연으로 이어졌다. (322쪽)

   묘사들은 끝이 없다. 숨막히게 낯선 묘사들의 잔치를 벌인다. 그러나.

   그 외에는 뭔가? 그저 잔혹한 그들의 학살 행위와 사막의 모래와 먼지로 인해 목구멍과 눈구멍이 답답할 뿐이다. 피비린내에 코를 틀어 막고 책장을 마구 넘길 뿐이다. 도대체 뭔가?

  그러다 미국의 서부 역사에 대해 알게 된 후에야 이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매카시는 『핏빛 자오선』을 통해 잔혹했던 그들의 역사를 구현함으로서 현재 미국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뿌리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 자신의 핏빛 어린 과거를 알게 되었을 때,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해 인간은 얼마나 많은 감사를 하게 될까? 평온하고 풍요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지금의 삶이 당연한 듯 여겨지기 마련이다. 감사를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처절한 삶이 과거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침내 현재의 삶에 대해 감사하게 될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잔혹함. 그렇다. 이 작품은 미국인들에게는 무의식의 뿌리인 것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한 부분인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의 그들에게 의미가 있다. 

   놀라운 것은 이토록 잔혹한 역사를 서사시적인 묘사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또한 독특한 캐릭터(특히 판사)를 내세워 다큐멘터리식이 아닌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판사의 지적인 말들과 행위 그리고 그 신비스러운 폭력성 등은 이야기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다만 내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보면, 잔혹함에 대한 강렬한 묘사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들을 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펼쳐놓아야만 하는가? 그래서.

   솔직히 재미가 없고 지루하기도 하다. <타임>에서 선정한 100대 영문소설이라고는 하지만(그래, 작품 속에 나타나는 묘사들은 정말 놀랍다), 한국인인 나에게는 그다지 위대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정말 미국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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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부르는 그림 Culture & Art 1
안현신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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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부르는 그림? 이야기로 더 아름다워지는 그림!

 

사람들은 취미를 묻는 말에 흔히 대답하는 말이 있다.
바로 '독서', '음악 감상', '영화 감상' 등이다. 좀 더 고급스럽게 보이려고 한다면
'미술관에 자주 가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보통 '아, 그래요.'라고 말하면서 그냥 흘려 듣는다.
사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취미를 말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어서
왜 그런 취미를 갖게 되었는지, 어떤 식으로 감상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묻지 않는다.
어쩐지 지나가는 말로 '다음에 만나면 술 한 잔 해.'라고 하는 것처럼
그냥 취미를 묻는 말에 예의상 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품 감상을 우리는 얼마나 잘 하고 있을까?
그냥 보고 느끼는 것을 감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아이 맛있어!'라고 하는 것으로 감상은 충분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감상이라는 말에서 단순한 느낌만을 찾지는 않는다.
단순한 느낌에서 나아가 분석을 통한 깊이 있는 해석과 의미 찾기를 넣어야만
감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물론 그렇게까지 꼭 해야 하느냐고 항의를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분석과 해석 그리고 의미 찾기는 평론가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그런 일은 평론가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평론가가 아닌 일반적인 감상자, 취미가들이라고 해도
미술관에 가서 쓱 그림을 보고 '이 그림이 마음에 드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이 그림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이야. 인상파 화가들은 빛에 의한 대상의 변화까지도 포착해서
그림에 표현하려고 했지. 특히 이 그림은 후기 인상파인 모네의 그림으로 그가 시각을 잃어가면서
빛이 점차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야. 놀랍지. 빛에 따라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말야.'
정도는 얘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 분석과 해석 그리고 의미 찾기를 꼭 평론가 수준으로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분석과 해석 그리고 의미 찾기가 있어야만 제대로 된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가 부족하면 분석과 해석 그리고 의미 찾기가 쉽지 않다.
나름대로 찾아 헤메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좀 더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은 사실 시각적인 것이므로 손쉽게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시각은 가장 많은 정보를 전달해주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어떤 지식이나 정보가 없어도 시각적인 정보만으로도 대상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림은 여러 가지 감상의 대상 중에서도 가장 손쉬운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오늘날 그림을 감상하려면 정말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으로 올 수록 화가들은 그림은 장점을 십분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투정을 부리고 싶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투정만을 부리고 있으면 내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수 많은 그림에 대한 정보를 내가 다 손수 찾아서 헤멜 수는 없다.
내가 그 정도로 감상에 투자를 한다면 이미 그것은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생기는데, 바로 미술 작품에 대한 해설서이다.  그리고 여기... 안현신의 『키스를 부르는 그림』이 있다.
이 책은 '키스'라는 주제를 가지고 서양의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그림(또는 조각품)들을 모아 놓고
그 감상을 적은 책이다.
'키스'라는 주제 자체가 흥미로운 데다가, 다양한 작가들의 그림을 하나의 주제로 꿰뚫어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더군다나 그 그림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재미있는 해석 그리고 의미 찾기까지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몇몇 그림은 전에 본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림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신기한 그림들이 많았다.
그 중에 인상적인 것은 20세기 활동을 했던 마르크 샤걀의 <파란색 연인들>, <여자 곡마사>, <생일>, 르네 마크리트의 <연인들>, 카미유 클로델의 조각품 <샤쿤탈라>,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조각품 <키스>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름답고 관능적인 키스를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였다.
샤갈의 것은 색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르네 마크리트의 것은 신비스러움에 반했고,
클로델의 것은 강렬하고 역동적인 모습에 반했고, 브랑쿠시의 것은 귀여움과 소박함에 반했다.
클림트의 그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화려한 관능미에 반했다.
이런 그림이나 조각품 외에도 수 많은 화가들의 키스와 관련된 그림이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등장한다.

지은이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읽고 있노라면 '헉 어떻게 저기까지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때로는 '아니야, 이건 아니다. 이건 다르게 봐야 돼.'하는 생각도 든다.
지은이는 보편적인 감상을 적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읽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상을 잘 전달하려는 듯
그림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책 속에 뿌려 놓아 이해를 도우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잘 안내가 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은이가 펼쳐놓은 수 많은 정보에 압도당해
독자 스스로의 감상이 방해당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때문에 독자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리는 주체적인 방법으로 이 책을 보고
나아가 미술관을 찾아 실제 그림들을 감상해야 할 것이다. 

이런 감상을 모아 놓은 책은 자칫 독이 될 수가 있다.
이런 책을 읽고 나서 마치 자기가 스스로 그림을 보고 감상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의해야 한다. 이 책은 어디까지는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길잡이지, 이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한 가지 더,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을 소개함으로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바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엥그르의 작품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이다.
이 두 사람은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매우 비극적이었는데, 그 비극적인 사랑을 엥그르가 그림으로 옳겨 놓았다.
파올로 집안과 프란체스카 집안은 서로 정략결혼을 하려고 했는데,
이때 파올로 집안은 파올로가 아니라 그의 형인 잔초토와 프란체스카를 결혼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잔초토의 잔인함과 못생긴 외모 때문에 프란체스카가 결혼을 안 하려고 할까봐
대신 파올로를 잔초토로 꾸며 내보낸다.
프란체스카는 그만 그런 파올로에 반하게 되고, 파올로도 그만 그녀에게 반하고 만다.
마침내 프란체스카는 결혼을 승락한다.
그러나 실제로 결혼해보니 남편은 잔초토였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고통에 빠지게 된다.
남편 몰래 사랑을 나누던 그들은 마침내 잔인한 잔초토에게 사실에 발각되고
두 사람은 잔초토에 살해당하고 만다.
전에 단테의 <신곡>에서 보았던 제2지옥(육욕에 빠진 자들이 가는 지옥)에서 함께 꼭 껴안고
폭풍같은 바람에 휘둘리며 고통을 겪고 있었던 두 사람이 바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였는지 그림을 보고 그 감상글을 읽으면서 반갑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작품 자체에서는 뭔가 대단한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배경 이야기를 알고 그림을 다시 보니 슬픔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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