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를 부르는 그림 ㅣ Culture & Art 1
안현신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키스를 부르는 그림? 이야기로 더 아름다워지는 그림!

 

사람들은 취미를 묻는 말에 흔히 대답하는 말이 있다.
바로 '독서', '음악 감상', '영화 감상' 등이다. 좀 더 고급스럽게 보이려고 한다면
'미술관에 자주 가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보통 '아, 그래요.'라고 말하면서 그냥 흘려 듣는다.
사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취미를 말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어서
왜 그런 취미를 갖게 되었는지, 어떤 식으로 감상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묻지 않는다.
어쩐지 지나가는 말로 '다음에 만나면 술 한 잔 해.'라고 하는 것처럼
그냥 취미를 묻는 말에 예의상 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품 감상을 우리는 얼마나 잘 하고 있을까?
그냥 보고 느끼는 것을 감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아이 맛있어!'라고 하는 것으로 감상은 충분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감상이라는 말에서 단순한 느낌만을 찾지는 않는다.
단순한 느낌에서 나아가 분석을 통한 깊이 있는 해석과 의미 찾기를 넣어야만
감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물론 그렇게까지 꼭 해야 하느냐고 항의를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분석과 해석 그리고 의미 찾기는 평론가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그런 일은 평론가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평론가가 아닌 일반적인 감상자, 취미가들이라고 해도
미술관에 가서 쓱 그림을 보고 '이 그림이 마음에 드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이 그림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이야. 인상파 화가들은 빛에 의한 대상의 변화까지도 포착해서
그림에 표현하려고 했지. 특히 이 그림은 후기 인상파인 모네의 그림으로 그가 시각을 잃어가면서
빛이 점차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야. 놀랍지. 빛에 따라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말야.'
정도는 얘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 분석과 해석 그리고 의미 찾기를 꼭 평론가 수준으로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분석과 해석 그리고 의미 찾기가 있어야만 제대로 된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가 부족하면 분석과 해석 그리고 의미 찾기가 쉽지 않다.
나름대로 찾아 헤메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좀 더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은 사실 시각적인 것이므로 손쉽게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시각은 가장 많은 정보를 전달해주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어떤 지식이나 정보가 없어도 시각적인 정보만으로도 대상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림은 여러 가지 감상의 대상 중에서도 가장 손쉬운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오늘날 그림을 감상하려면 정말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으로 올 수록 화가들은 그림은 장점을 십분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투정을 부리고 싶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투정만을 부리고 있으면 내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수 많은 그림에 대한 정보를 내가 다 손수 찾아서 헤멜 수는 없다.
내가 그 정도로 감상에 투자를 한다면 이미 그것은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생기는데, 바로 미술 작품에 대한 해설서이다.  그리고 여기... 안현신의 『키스를 부르는 그림』이 있다.
이 책은 '키스'라는 주제를 가지고 서양의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그림(또는 조각품)들을 모아 놓고
그 감상을 적은 책이다.
'키스'라는 주제 자체가 흥미로운 데다가, 다양한 작가들의 그림을 하나의 주제로 꿰뚫어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더군다나 그 그림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재미있는 해석 그리고 의미 찾기까지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몇몇 그림은 전에 본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림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신기한 그림들이 많았다.
그 중에 인상적인 것은 20세기 활동을 했던 마르크 샤걀의 <파란색 연인들>, <여자 곡마사>, <생일>, 르네 마크리트의 <연인들>, 카미유 클로델의 조각품 <샤쿤탈라>,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조각품 <키스>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름답고 관능적인 키스를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였다.
샤갈의 것은 색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르네 마크리트의 것은 신비스러움에 반했고,
클로델의 것은 강렬하고 역동적인 모습에 반했고, 브랑쿠시의 것은 귀여움과 소박함에 반했다.
클림트의 그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화려한 관능미에 반했다.
이런 그림이나 조각품 외에도 수 많은 화가들의 키스와 관련된 그림이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등장한다.

지은이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읽고 있노라면 '헉 어떻게 저기까지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때로는 '아니야, 이건 아니다. 이건 다르게 봐야 돼.'하는 생각도 든다.
지은이는 보편적인 감상을 적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읽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상을 잘 전달하려는 듯
그림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책 속에 뿌려 놓아 이해를 도우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잘 안내가 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은이가 펼쳐놓은 수 많은 정보에 압도당해
독자 스스로의 감상이 방해당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때문에 독자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리는 주체적인 방법으로 이 책을 보고
나아가 미술관을 찾아 실제 그림들을 감상해야 할 것이다. 

이런 감상을 모아 놓은 책은 자칫 독이 될 수가 있다.
이런 책을 읽고 나서 마치 자기가 스스로 그림을 보고 감상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의해야 한다. 이 책은 어디까지는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길잡이지, 이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한 가지 더,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을 소개함으로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바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엥그르의 작품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이다.
이 두 사람은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매우 비극적이었는데, 그 비극적인 사랑을 엥그르가 그림으로 옳겨 놓았다.
파올로 집안과 프란체스카 집안은 서로 정략결혼을 하려고 했는데,
이때 파올로 집안은 파올로가 아니라 그의 형인 잔초토와 프란체스카를 결혼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잔초토의 잔인함과 못생긴 외모 때문에 프란체스카가 결혼을 안 하려고 할까봐
대신 파올로를 잔초토로 꾸며 내보낸다.
프란체스카는 그만 그런 파올로에 반하게 되고, 파올로도 그만 그녀에게 반하고 만다.
마침내 프란체스카는 결혼을 승락한다.
그러나 실제로 결혼해보니 남편은 잔초토였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고통에 빠지게 된다.
남편 몰래 사랑을 나누던 그들은 마침내 잔인한 잔초토에게 사실에 발각되고
두 사람은 잔초토에 살해당하고 만다.
전에 단테의 <신곡>에서 보았던 제2지옥(육욕에 빠진 자들이 가는 지옥)에서 함께 꼭 껴안고
폭풍같은 바람에 휘둘리며 고통을 겪고 있었던 두 사람이 바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였는지 그림을 보고 그 감상글을 읽으면서 반갑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작품 자체에서는 뭔가 대단한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배경 이야기를 알고 그림을 다시 보니 슬픔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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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여섯 영화에서 걸어나온 고미숙

1. 괴물

  <괴물>이라는 영화 속에서 '위생권력'의 정체를 확인하여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녀의 모습이 또각또각 보인다. <괴물>은 초반 반미영화네, 뭐네 하며 떠들썩 한 화제를 가져왔다. 그리고 곧 이어 천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 최소의 SF영화라는 점, 우리 기술로 괴물을 창조했다는 점 등이 화제에 올랐다. 하지만, <괴물>의 의미망을 철저하게 분석한 적이 없다. 그녀는 또랑또랑 한 목소리로 이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이토록 분석적이며, 비판적으로 들여다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한 '위생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괴물'을 확인하고 그와 맞대응하는 강두 가족을 일그러진 영웅으로 인지하며 인디밴드 가족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하는 등 재기발랄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녀의 표현은 참 즐겁다. 

  그녀는 강두 가족, 그러니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그대들을 영웅으로, 진정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런 묘사를 할 수 있는 그녀의 내부에는 아마도 현대적인 주체, 자본의 노예가 된 주체에서 벗어난 자들, 다른 말로 하면 유목민(노마드)을 긍정적으로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듯하다. 그녀의 내부에 숨겨진 이 욕망은 이 이후의 나올 모든 영화에 대한 감상의 기본 가닥이 된다.

2. 황산벌

  노마드의 운명을 좋아하는 그녀는 여기서 갑자기 왜 마초적인 영화 <황산벌>을 선택한 것일까? 자신의 욕망을 잠시 내려놓은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마구마구 솟아날 무렵, 아하...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했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거시기'로 대변되는 마초들의 욕망을 아주 사뿐히 즈려밟고 서 있는 그녀를 보시라.

  그녀는 마초들의 놀이인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한 짓인지, 역사적 영웅으로 등장하는 김유신이나 계백 등이 얼마나 개인적인 욕망, 다시 말해서 마초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사투리, 그것도 '거시기'라는, 의미를 무한 변용하는 기표를 용사로 내세워 무참하게 썰어 내어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칭찬 한마디, 이 영화를 만든 이준익 감독에게, 천만 관객을 돌파한 <왕의 남자>보다 <황산벌>이 더욱 멋진 작품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왕의 남자>는 빈껍데기로만 남아 자본과 거대 이론과 권력 등에게 노예가 된 주체들이 포르노그라피 속에서 자위를 하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런 현대적 주체들의 빈껍데기 같은 욕망들이 사투를 벌이는 전쟁터에서 영웅의 이름으로 빛나던 자들을 비주체적, 비주류적, 노마드의 운명을 가진 사투리 '거시기'로 있는 힘껏 싸데기를 날려버리는 <황산벌>은 그야 말로 위대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역시 그녀는 노마드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더욱 강력하게 외치고 있다. 가라, 껍데기는 가라.(물론 여기서 껍데기는 신동엽이 말한 부패한 권력, 과거에 붙잡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권력이 아니라, 돈과 거대 이론과 권력에 사로잡힌 주체를 의미한다.)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3. 음란서생

  <음란서생>으로 너머 오니, 그녀는 더욱 자신의 욕망에 메달린다. 그녀는 멜로를 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껍데기만 남은 주체의 욕망이라며 배척한다. 그것은 한물 간 고대 유물에 불과하다. 아니 유물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그것도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제는 에로티즘이다. 포르노그라피다. 그녀는 따뜻한 손길로 '음란(淫亂)'이라는 글자를 머리에 새기는 형벌을 받은 음란서생 김윤서의 가슴을 살며시 쓰다듬어 준다. 윤서가 왕의 첩인 정빈과 낭만적인 멜로에 빠지자 구태의연한 멜로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면서 정빈을 욕하더니, 거기서 간신히 빠져나온 윤서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기특한 것이다. 다만 잠시 멜로라는 블랙홀에 빠졌다는 것이 섭섭할 뿐.

  왜 <음란서생>은 조선시대 사설시조처럼 질펀하게 놀지 못하고 그렇게 고귀한 귀족 놀음이었던 멜로를 결말로 삼아 심심하게 만들어느냐고 따끔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묻고 싶다. 왜 멜로는 삼류로만 느껴지는가? 사랑을 위해 유치한 대사를 몇 마디 날리고 목숨을 걸기도 하면 뭐가 좀 어때서? 왕이라고 사랑도 하지 말란 법있는가? 왜 멜로가 그렇게 싫은가? 뭔가 슬프고 무거운 곳에 고귀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양반들의 , 귀족들의, 왕족들의 관념론이 허무맹랑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인가? 

  하긴 그녀는 스스로를 반미주의자라고 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반미가 아니라 아름다움에 반대하는 反美주의자다. 그러면서 예술가들이 고뇌에 차 고독 속에 파묻히거나 피를 뚝뚝 흘리며 예술은 비참하고 슬퍼야 한다거나 괴기스러워야 한다며 표현마저 괴기스럽고 상식을 뛰어넘는 것에 대해 매우 혐오한다는 말을 한다. 그녀에게 예술은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더 이상 예술은 귀족놀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말은 이해하겠다. 그러나 왜 예술은 괴기스럽거나 슬프거나 공포스러운 안 되는가? 왜 예술은 일상 삶과 연관되어야만 하는가? 왜 멜로는 예술이 될 수 없고 포르노는 예술이 되는가? 좀 더 질펀하게 놀았다면 이 영화가 정말 재미있었을까? 

  갑자기 <색즉시공>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그녀는 이 영화를 어떻게 평할까? 

4. 서편제

  <서편제>에 대한 그녀의 평은 이제 노골적이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라고 생각했던 '恨'이라는 정서가 사실 일본 평론가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나마 19세기 이후, 즉 근대적이라는 것이다. 결코 고유의 정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녀의 말대로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에는 '한'의 정서가 없고 그저 풍유와 골계 그리고 흥이라는 정서만이 있는가? 아마도 그녀 조차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우리의 정서를 갈라놓지는 않을 것이다. 

  '한'의 정서를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라고 말하기 시작한 사람이 일본의 평론가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서를 표상하는 언어가 그때 그 사람에게서 생겼을 뿐 우리 민족에게 '한'이라는 정서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시대 여인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내면의 울음이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녀가 그렇게 외치던 삶을 외면하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단지 '한'을 고답적이고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서편제>라는 작품 안에서의 개념으로만 여기고 비판했다면 모르겠지만 우리 대중에 뿌리 박고 '한'의 개념 전체를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영화 <서편제>의 원작자인 이청준씨는 소설은 '지사적'이라는 말을 특징지워진다. 지사적이라 함은 조선시대 선비처럼 일상 삶에서 멀어져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며 학문에만 정진하는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의미한다. 즉 이청준씨의 소설은 구체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다는 개개의 삶을 통해 삶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하고 비극적인 체계에 대한 비판적이고 지적인 냄새를 풍기며 이야기한다. 그런데 영화 <서편제>는 그런 소설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그녀는 지나치게 주체에 대한 부정, 고답적인 것에 대한 부정을 추구하다보니 <서편제>에 나와 있는 정서를 비판하면서 잘못된 논리를 펼치고 있다. <서편제>에 등장하는 유봉이 가진 '한'의 개념을 비판하는 것을 옳지만 그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 민족 전체의 정서를 비판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5. 밀양

   영화 <밀양>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의 내면이 저토록 처절하게 파괴될 수도 있구나, 그런 사람의 모습을 전도연은 참 잘 연기해 내는구나, 이런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하다니 이창동 감독은 참 대단하구나. 반면 송강호는 뭐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밀양>이 가족, 고향, 종교의 삼위일체 세력에게 배반당한 자의 고통을 잘 그려내었다고 설명한다. 그것도 아직 냉정하게 그려내는 작품을 그녀는 매우 흠족해 한다. 사실 나도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정말 잘 만든 영화다. 그녀처럼 가족, 고향, 종교에게, 그러니까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평화롭게 지탱해주는 세 개의 거대한 기둥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사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이 영화가 놀라웠던 것은 아니다. 노마디즘(유목민주의)을 찬양하는 그녀이기에, 이 <밀양>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설명이 고개가 끄떡여지기도 했다. 송강호에 대해 마지막 부분에 찬사를 실은 것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밀양>이 다르게 보인다. 우리의 정신 세계를 지탱해주던 삼위일체의 기둥들의 나약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노마디즘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이 작품이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인 신애의 내면이 파괴되는 원인에는 삼위일체의 기둥들에게 기대려고 했던 까닭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내면이라는 것이 유리와도 같다는 것이다. 한 번 금이 가면 웬만해서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이제는 작은 충격에도 산산조각 날만큼 약해진다. 그녀는 삼위일체 기둥을 벗어나야만 올바르게 고통을 이겨내고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제대로 그 기둥들을 받아들여야만 그마나 약해진 유리가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예 유리를 다 깨고 마음을 유목민처럼 비운다면 모르겠다. 아마도 그녀는 유리를 다 깨라는 주장을 하는 것 같다. 그래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6. 라디오 스타

  <라디오 스타>, 그녀가 주장하는 노마디즘의 결정판! 정말 여기에 등장하는 최곤과 박민수 그리고 이스트리버 모두 주류가 아닌 비주류이며, 그 비주류를 마음껏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주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기표일 뿐이다. 마치 오늘날 자본과 권력에 놀아나는 주체처럼 말이다. 그녀는 그렇기에 자신의 영화 평론의 마지막을 <라디오 스타>로 장식을 한 것이다. 최근에 나온 영화 중 노마디즘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그녀의 평에 대해서는 정말 하나의 불만도 없다. 나도 이 영화를 그렇게 이해한다. 물론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락에 대한 후일담 영화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엇으로 보든 주류에서 다뤄지는 것은 아니다. 우정도 여기서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우정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는, 누구도 주체가 되려하지 않는 우정이다. 마치 동성애 같은 느낌을 주는 우정이다. 이것은 비주류의 우정이다. 이미 주류 음악이 아닌 비주류 음악의 대표로 상징되는 락도 비주류가 확실하다. 그렇기에 <라디오 스타>는 결코 주류에 대한 영화가 아니며, 바로 비주류에 대한 영화, 비주류의 정신, 다시 말해서 노마디즘에 대한 영화다. 

  그녀는 이 점을 잘 파악했다. 그리고 신나게 달린다. 신나게 부른다. 이스트리버로 나오는 '노브레인'처럼.

  고미숙 씨는 자신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6편의 영화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호평을 했다. 자신만의 관점, 즉 노마디즘으로 영화를 평했다는 점에서는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예술을 평가했다는 점에서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오늘날 유행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것 또한 노마디즘의 한 현상이다.

  다만 지나치게 노마디즘을 좋아하는 나머지 노마디즘을 하나의 주류 세력으로 밀고 올라가려는 인상을 받는다. 노마디즘은 하나의 개념일 뿐이다. 그것의 정체성은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주류 세력에 합류하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노마디즘이 될 수가 없게 된다. 

  노자가 말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노마디즘을 이용하되, 노마디즘을 이데올로기화 해서는 안 된다. 유목민은 유목민으로 남을 때,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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