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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의 역사와 말 - 일제 시기 한 평민 지식인의 세계관
백승종 지음 / 궁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처음 이 책을 손에 잡은 것은 풀무학교의 설립자 이찬갑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이미 반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충청도 홍성땅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자그마한 저 학교가 정작 관련 당사자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대안학교의 한 전형으로 자리매김되어 수많은 교육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기까지 그 원동력과 학교를 꾸려온 사람들에 대한 관심 말이다.
그래서 책을 통독하고 난 지금, 1899년부터 용동마을(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을 중심으로 남강 이승훈이 의도했던 이상촌 건설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찬갑이 식민지 조선 농촌의 갱생을 위해 덴마크 국민의 교사 그룬트비히의 사상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농촌문제의 핵심을 '깬 인간'에서 찾고자 교육운동을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도 풀무는 '유기 농업이 기초가 되어 사람과 생명을 살리고, 자치의 정신과 협동 공동체의 실현, 소규모 경제 단위와 생태계 보존, 농업과 공업의 결합, 새 시장 구조, 생명문화 창출, 대체 에너지 개발, 청빈과 높은 지적 창조, 국내와 지구적 교류를 공통의 목표로 갖는 자치적 지역 공동 사회 건설, 그것은 조용히 진행되는 사회변혁' 이라는 인식 아래 젊은 일꾼들을 키워나가고 있음에, 한 지식인이 꿈꾸었던 이상촌의 맥박은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이 책은 이찬갑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 역사학자에 의해 시도된 미시사다. 거시사가 역사적 거대 구조의 탐색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과학적 분석과 계량을 중시하는 방법, 예컨대 맑스주의 역사학, 독일의 사회구조사, 프랑스 아날학파의 전체사등이 대체로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것들이라면, 미시문화사는 사회적 경제적 행위들을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적 텍스트로 간주하면서 구체적 개인이란 창을 통해 역사적 리얼리티의 복잡 미묘한 관계망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인식되고 있다.
하여 미시사가들은 전체사적 흐름이라는 이름 아래 정작 그 주역인 인간 개개인의 모습이 사라져버리는 거대 역사보다는, 경계가 잘 지워진 지역 내에서 어떤 위기나 사건에 대처하는 그곳 사람들의 전략이나 가치관 등을 면밀히 탐색하는 미시적 접근을 택한다. 그러나 미시사는 끊임없이 거시사가 실패한 역사적 실재를 분석하기위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다수가 '가능성의 역사'를 지향하는 바, 실증적 의미에서의 증거의 단편성이 문제될 때, 증거와 증거를 잇는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미시사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저자 역시 또다른 곳에서 전체주의는 본질적으로 개체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적 사실주의는 전체주의와 결합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 때문일까? 저자는 구체적으로 이찬갑의 신문 스크랩북, 시 그리고 편지들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일간지를 장식했던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 사건에 대한 그의 내면적 반응을 드러내고자 하나 그 과정에서, 역사 서술이란 결국 역사가가 엮어낸 하나의 흔들리는 담론일 뿐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부족한 사료와 현재의 방법론적 미숙을 넘어서, 일제하 한 지식인의 신문 스크랩북이라는 구체적인 자료를 통하여 본격적인 미시사를 시도하고 있기에 미시사의 제 면모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미덕을 간직하고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