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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평점 :
이 책은 필드웤을 통해 작성된 인류학자의 민속지(ethnography)입니다. 송이버섯, 풍경, 전쟁, 자유, 자본주의 사이에 기묘하게 얽힌 이야기가 소설처럼 펼쳐지는데, 어제 막 역자 해제를 읽고나니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제가 사는 마을 뒷산에서도 송이가 납니다. 주변 동네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국유림이 많지만 마을마다 산 소유자가 다르고 운영 형태도 다릅니다. 공동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고 경매에 부쳐 개인이 관리하는 곳도 있습니다.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한다.” 책을 펼치자 말자 유혹하듯 저자가 말하는 저러한 삶이 가능할지에 대해선 의문이 듭니다. 좁은 이 땅에서도 가능한 삶의 형태일까요.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동해안 산불과 산림청의 정책에 맞서 싸우고 있는 최병성 목사와 같은 분도 있습니다. 정책이란 건 숲 가꾸기를 통해 생태적 다양성을 무시하며 잡목을 베어내거나, 경제성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산불이 난 후에도 화재에 가장 취약한 소나무만을 심는 등등의 사례가 되겠지요. 물론 소나무는 수목생태에서 최악의 조건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송이는 홀씨가 적당한 환경에서 발아된 후 균사로 생육하며 소나무의 잔뿌리에 착생하여 균근(菌根)을 형성하는 공생균(共生菌)입니다. 우리가 항용 버섯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는 땅 속 곰팡이가 만든 자실체란 얘깁니다. 곰팡이는 식물들을 잇는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저자는 균근이 숲을
가로질러 정보를 나르면서 생물종 간 상호 연결의 인프라를 형성하는 데 주목합니다.
기후위기로 오십 년 뒤 더 이상 휴전선 이남에선 소나무를 보기 힘들어질 수 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인근에서도 수십 년 사이 참나무가 솔 숲을 파고들어 송이 채취를 불가능하게 만든 곳이 종종 보입니다. 온 산을 뒤지며 머리에 솔 갈비를 뒤집어 쓰고 숨어있는 송이를 찾아낼 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들이며 갓이 제법 핀 놈을 찢어 소주 한 잔 할 때 그 향과 식감이 주는 여유와 즐거움은 어느 것에도 비할 바 아닙니다. 버섯을 들어 이처럼 수 많은 창발적 사고를 던져주는 책은 여지껏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송이를 둘러싸고 많은 문제점들이 있기에, 인류학자인 저자가 제기하는 기본적인 어젠더를 저 역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은 여러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숲과 소나무와 송이를 통해 우리 삶을 그리고 있는 진 풍경을 구경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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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국가의 유효성과 자연 풍경에 대한 자본주의의 대대적인 파괴를 고려할 때, 우리는 국가와 자본주의의 기획 바깥에 있던 것들이 오늘날 왜 살아남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다루기 힘든 가장자리의 것들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미엔인과 송이버섯이 오리건주에서 함께 모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런 질문이 모든 것의 방향을 뒤집어,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을 핵심적인 것으로 보도록 이끌지도 모른다. 위의 책 P51
자유를 쟁취한 사람이 받는 트로피처럼 여겨지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 헤매게 되는버섯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자산이 되는가?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전형적인 일본식 선물이 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공급사슬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예상치 못한 배치를 이루며 연결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연결고리를 하나의 초국적 순환 노선으로 끌어들이는 번역 과정 또한 주의 깊게 봐야 한다. P119
저자가 제시하는 개념과 방법들은 인간 정신의 진보에 대한 실증주의적 서사와 달리, 일련의 부정적 전환점들을 취했던 레비스트로스의 설명방식과 닮아있습니다. 그리고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통해 기존 사회과학/철학의 주관-객관이라는 이분법적 양식 대신 이질적인 연결망(heterogeneous network)으로 보는 시각을 강조하는 라투르에 많이 기대고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