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노바리 > 현대 도시인들이 살아남는 법
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피버 피치]는, 좀 점잖게 말하면, 어떤 열렬한 팬덤에 대한 보고서다. 하지만 툭하면 거품 물고 쓰러질 정도로 몰입하며 지름신의 강림을 적극 팔벌려 맞곤 하는 소위 빠순모드 강한 나나 친구들와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어떤 열혈 빠순모드에 대한 고백서"라 할 수 있을 거다.내 빠순상대 1순위가 영화라면 그의 상대가 영국 프로페셔널 축구, 그 중에서도 1부 리그 팀인 아스날이라는 것만 다를 뿐, 이 사람, 빠순모드에 대해 아주 제대로 알고 있다. 재미있는 건 나의 빠순모드의 대상에 이 닉 혼비도 이미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어바웃 어 보이] 한 권과,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닉 혼비식 체취로.

[어바웃 어 보이]를 버스 안에서고 지하철 안에서고 거의 미친 듯이 킬킬대며 보고는 "나의 사랑하는 책" 리스트에 망설임 없이 넣어놓고, 닉 혼비의 책이 한국엔 도대체 왜 이리도 안 나오는 거냐며 투덜대고, 내가 아는 범위의 출판사에 다니는 모든 사람에게 제발 닉 혼비 책을 내달라고 졸라대고... 했던 건 변명컨데 결코! 나만 했던 행위가 아니다.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 나와 공감대를 형성한 친구가 적어도 한 명이 있고, 또 한 명은, 물론 나처럼 그런 격한 반응으로 빠순 기질을 마음껏 드러내는 스타일의 친구는 아니지만, 조심스레 닉 혼비의 책 저작권을 추적했다. (그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다.)

닉 혼비는 나나 내 주변 친구들이 종종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곤 하는 빠순행위들을 대상만 바꾸어 그대로 전시해 놓고 있다. 심지어는 일련의 빠순행위 - 남들이 보기엔 강박증에서 기인한 온갖 기행과 괴벽 - 을 스스로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엔 슬쩍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까지 톡까놓고 밝혀놔 버려서 민망해 하면서도 키득댈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내 비록 지난 월드컵 때마저도 경기를 전혀 안 볼 정도로 축구를 안 좋아하고 또 전혀 모르는 사람임에도 그가 축구와 관련해 보이는 온갖 기행과 강박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가 써내려간 글을 보고 있노라면 이 부분에선 얼마나 스스로 쪽팔려하며 썼을지, 저 부분에선 또 얼마나 피를 토하며 썼을지, 조 부분에선 남들이 다 돌 던질 것이라 얼마나 단단히 각오하며 썼을지, 요 부분에선 얼마나 이상한 시선을 각오하며 썼을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뿐인가. 그 사람이 쓰는 어떤 문장에 대해선 그래, 요쯤에서 이런 자기방어 기제로서의 발언 한 마디를 아니 할 수 없지, 하면서 고 심리를 빤히 꿰뚫어볼 수 있을 수밖에 없더란 거다. 만약 닉 혼비가 나를 개인적으로 알았더라면, 그 사람 역시 내가 영화에 대해 하고 있는 짓거리들의 속내를 빤히 다 꿰뚫어보았을 것이다.

굳이 어른이 되려고 하지 않고, 혹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자기자신을 바꾸고자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철딱써니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 여유만만하고 유연한 삶의 자세. 물론 그 역시 그렇게 살기 위해 많은 걸 치러야 했을 거다. 하지만 자신을 부정하는 방향이 아니라, 아무리 유년기에 여전히 머물러있다 한들 그런 자신을 그대로 긍정하며 그걸 그냥 담담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는 또다른 종류의 어른스러움이 획득된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그렇게 살아도 살아지는 사회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각 개인들의 성인이 되는 나이가 계속 더 뒤로 유예되는 게 현대사회의 특성이기도 하다. 과거 공동체 중심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과 오늘날 특히 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도시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성년의 나이가 계속해서 늦춰지는 건 단순히 피터팬 컴플렉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인의 탓이 아니라, 최대한 오랫동안 청소년기에 묶어두려는 사회 시스템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로 올수록 성년식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도 이 탓이다. 덧붙여 신화학에서 통과의례 이야기를 아주 슬쩍 끌어오자면, 현대사회로 올수록 통과의례는 거세되었다.) 과거의 사고가 여전히 남아있는 현대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우리가 여전히 키덜트로 남기를 부추키면서, 또다른 한 편으론 '빨리 어른이 돼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만큼 착취를 당해달라고' 부추킨다. 개인은 이 사이에서 당연히 정신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에서, 인생의 고난과 슬픔의 무게를 감당도 못할 거면서 직접적으로 맞으면서 허덕대고 자기연민에 시달리는 것보다, 이렇게 세상과 나 사이에 축구, 혹은 또다른 '열렬한 팬덤 대상'을 끼워넣어 완충제로 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그대로 인정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 미쳐버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엔 꽤나 유용한 요령이 된다. 어쩌면 더 나아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이 되는 방법은 닉 혼비식의 이런 방법일지 모른다.

문장이 아주 유려하다. 비록 번역이라는 필터와, 교열과정에서 채 잡아내지 못한 비문들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어바웃 어 보이]와 이 책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어떤 특성들은 분명 닉 혼비의 것이라 추측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솔직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재치있는, 그렇다고 억지로 비아냥과 이런 걸 과장해서 짜내지 않은 자연스러운 문체. 그리고 그런 문장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낙관론자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위로와, 소통에의 의지. 감동이다. (제발 출판사들은 닉 혼비의 다른 책들도 내달라! 내달라! 내달라~~!)

고백하자면, 축구에 대한 닉 혼비의 그 열정과 '어쩔 수 없는 운명'에서 비롯한 행태를 본다면,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지나치게 깍쟁이같아서 감히 '영화팬'이란 말을 못 하겠다. 영화를 직업으로 삼은 건 어쩌면 닉 혼비처럼 솔직하지 못했던,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앞에서 정신분열하던 나의 마지막 타협책이었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진작 닉 혼비를 만났더라면, 시행착오가 조금은 줄어들었을텐데.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빠순모드가 강해지는 나는, 사실은 이제서야, 나를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에 굳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토닥여주는 닉 혼비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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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윤기, 이다해 부녀가 쓴 『겨울이야기』의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지금부터 이 책에 대해 몇 마디 할 텐데, 순전히 트집 잡으려 작정하고 시작한 글이니 이 일방성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길. 

우선 전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에 대한 농담으로 시작되는 머리말부터 물고 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제인 에어』 소설을 읽는 것과 <제인 에어> 영화나 텔레비전 시리즈를 보는 건 다릅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지요. 만약 여러분이 케네스 브래나(영국의 연극배우이자 연출자, 영화 <햄릿>에서 감독, 주연을 맡았다;편집자 주)의 <햄릿>을 극장에서 보았다면, 그건 웬만한 번역본을 읽는 것보다 훨씬 셰익스피어를 깊이 체험한 것입니다. 일단 브래나는 원작에서 대사 하나 빼지 않았으니 그 영화는 ‘정본’입니다. 게다가 관객들은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이 실제로 어떤 리듬을 타고 낭송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죠. 번역본 독서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영화들이 브래나의 <햄릿>처럼 충실한 건 아닙니다만, ‘영화만 봐서는 모른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는 아닙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처럼 셰익스피어 원작과 줄거리만 간신히 공유하는 작품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은 원작의 언어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가 배우들의 입을 통해 관객들의 귀에 들려지기 위해 쓰였다는 걸 무시하는 건 아무래도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치중한 셰익스피어 읽기 역시 큰 설득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셰익스피어를 읽기 위해서는 당시 교양 있는 사람들이 가졌던 약간의 지식은 필요합니다. 고대 신화도 그들 중 하나고요. 하지만 유일한 지식은 아닙니다. 역자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알고 있으니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대 신화에서 셰익스피어로, 셰익스피어에서 현대 작가들로 이어지는 일직선의 강을 상정한 건 오해의 여지가 큽니다. 특히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특별히 대단한 인문 지식을 과시한 적이 없었던 셰익스피어의 경우에는요. 이 책에서 밝히는 고대 신화의 ‘압축지식’들은 모두 간단한 설명 몇 줄로 끝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셰익스피어 독자들에겐 몇몇 고유명사들의 어원을 설명하는 것보다 <안녕, 프란체스카>에 나오는 뱀파이어들처럼 외국인들로 변장한 당시 영국인들과 영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유익한 일일 수도 있겠죠. 이런 식으로 서구 문학에 숨은 고대 신화의 코드를 찾는 작업을 하고 싶다면 셰익스피어보다는 고전에 대한 지식이 더 밝고 그 전통에 더 충실한 다른 작가들을 찾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하긴 그렇게 작정한다면 ‘무례하고 무식한’ 영국 작가들보다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작가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게 더 생산적이겠지만요. 

본문으로 들어간다면... 전 이 책이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불만입니다. 이 번역본은 대부분 산문입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운문이지요. 물론 시를 번역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언어로 넘어갈 때 셰익스피어보다 훨씬 많은 걸 잃는 테니슨이나 에드가 앨런 포우를 번역할 때에도 “울려 퍼져라 우렁찬 종소리, 거친 창공에, 저 흐르는 구름, 차가운 빛에 울려 퍼져라”로 몰아붙이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행과 연을 끊어주며 필요할 경우엔 원작의 음악성을 대체할만한 무언가를 넣을 겁니다. 전에 나온 신정옥 교수의 번역본은 무대에 올리기 위한 실용적인 책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읽히기 위한 책으로 의도된 이 번역본의 핑계는 뭐랍니까? 이런 식의 산문역은 대부분 원작의 가독성을 날려버립니다. 셰익스피어의 시어를 읊는 주인공들은 줄바꾸기도 없는 한 페이지짜리 대사들을 와르르 쏟아내는 수다쟁이들로 변하지요. 적어도 시의 논리는 남아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원어의 공연을 직접 감상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읽으면서 대사의 리듬은 따라갈 수 있어야죠.

그래도 전 번역자들이 자신이 ‘아마추어’임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부분에서 괜히 흥분합니다. 아마추어들은 프로들이 무의식적인 관습 속에 갇혀 못하는 걸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음 번역 때엔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십이야』의 주인공 바이올라와 세바스찬은 쌍둥이 남매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번역본을 읽어보면 두 사람의 나이차가 한 20년은 된 것 같습니다. 이건 남매가 있다면 당연히 누이 쪽이 한참 손아래여야 한다는 이상한 한국 번역가의 논리에서 나온 것인데, 읽을 때마다 불편합니다. (이런 식의 무신경 때문에 전 전에 KBS에서 방영한 더빙판 <피너츠> 만화에서 루시가 라이너스를 오빠라고 부르는 걸 참고 견뎌야했던 것입니다.) 습관에 눌리지 않은 아마추어 번역가들이라면 이 굴레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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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서도 듀나의 글은 항상 논란거리였다. 지나친 시비조 때문이었을지도.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갖고 험담을 늘어놓을 때면 듀나라는 사람에게 강한 반감을 가졌다.

하지만 <겨울이야기>에 대한 글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내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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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다닐 떄와 안 다닐 때의 큰 차이점. 바로 돈의 씀씀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어엿한(?) 직장을 다녔다. 그 당시에는 서점 가는 게 마냥 즐겁기만 했다. 만 원이든 이 만 원이든, 때로는 그 이상을 내고 책을 살 여유가 있었으니깐. 책 사는 돈은 아깝지 않다는 걸 온 몸으로 실천을 했다. (때로는 일 때문에 필요하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일을 그만 두고 나날이 모아 둔 월급만 홀랑홀랑 까먹는 중에, 서점 가는 건 고문이다. 오늘도 강남교보에서 친구를 만났다가 이 책을 보고야 말았다. 며칠 전에 휴 그랜트 박스 세트를 '질렀던' 터라, 도저히 지갑을 열 수가 없었다.

제엔장... 돈을 못 버는 게 바로 이거구나. 돈이 안 들어와서 괴로운 게 아니라, 돈이 있는데도 못 쓰니 괴로운거구나.

위로랍시고 시립도서관에 이 책을 신청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빌려서 2주만 보고 돌려 주는 게 더 괴롭겠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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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잡지 <필름 2.0>(이하 이쩜영)에서 즐겨 읽던 김세윤 기자의 칼럼.

영화나 드라마마다 장바구니에 파가 들어있는 이유와 헐리우드 영화가 왜 다 똑같은 목소리로 예고편을 하는 지에 대해 밝혀 주는 등, 매우 유용한(?) 정보가 가득한 칼럼이었다.

보통은 <무비위크>를 보다가도, 김세윤 기자의 이 칼럼 때문에 이쩜영을 못 끊었다. 그래서 이쩜영이 댓수를 줄이는 등의 지면 개편을 거치면서 이 칼럼을 없애버린 후, 이쩜영을 다시는 사지 않았다. 왠지 모를 배신감 때문에 몸까지 떠는 '오바'도 저질렀다.

하지만, 드디어 책으로 나왔구나! 야호 야호~

그런데 책으로 나온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왜냐? 왜 <어바웃 어 보이> DVD를 껴 주냔 말이다!!!!!

최근에 <어바웃 어 보이> 하나 때문에 거금을 들여 휴 그랜트 컬렉션을 산 나 같은 이들은 어찌 하라고....물론 선착순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휴 그랜트 컬렉션이 알라딘에서 품절되어 예스24까지 가서 주문한 게 억울해 죽겠다. 차라리 좀 더 기다렸다가 이 책 살 때 받을 껄..ㅠ_ㅠ

OTL..... 그래서 좌절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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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속의 독백 나남신서 168
리영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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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은 강하다. 믿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발적인 희생을 하며, 순교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많은 이들이 혈기왕성할 때에는 믿음을 위해 맹목적으로 돌진한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이를 저버리는 경우는 많다. 대부분 자조적인 목소리로 스스로의 변절을 합리화시킨다. "한 때의 젊은 치기였을 뿐이야. 이제 나는 내 행동에 책임을 질 때야." 그리고 변절자들은 반증주의자 포퍼의 유명한 말을 덧붙인다.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바보지만, 늙어서까지 마르크스주의자인 건 더 바보라지 않았어?" 전체주의에 대한 포퍼의 경고가 비겁한 변명을 위해 인용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 사회에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

리영희 교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고, 여전히 지키고 있는 살아 있는 양심이다. 그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 끝없이 싸워 왔고, 수많은 이들에게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리영희의 최고의 무기는 '글'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물리적·정신적 폭력에 맞서, 그는 서슬 파란 글로 대항했다. 리영희 교수의 글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한반도를 유린한 독재 정권을 거침없이 희롱했다. 희롱의 결과는 당연히 참담했다. 리영희 교수는 여러 번의 구속과 해직을 당했으며, 그의 저서는 금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당시 젊은이들에 대한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많은 이들은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을 읽고 큰 깨우침을 받았으며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동굴속의 독백>은 수많은 이들을 일깨워준 '리영희 저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동굴 속의 독백>은 고희를 맞은 노교수의 기념 문집이다. 기념 문집답게 지난 30여 년 간 저술했던 <전환시대의 논리> <스핑크스의 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의 기념비적인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동굴속의 독백>은 한 마디로 리영희 교수의 알짜배기만 모였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인과 지성에 대한 단호한 정의, 이름과 종교에 대한 스스로의 신념과 베트남 전쟁의 부당함. 6.25라는 시대적 상황의 비극과 교회와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 등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 70년대에서부터 90년대까지,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글에 매료된 것은 당연하다. 리영희 교수의 글은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명쾌하다. 암울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저자의 외침은 사자의 포효와 같다. 리영희 교수 앞에서는 입에 올릴 수 없었던 많은 민감한 사항들이 그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고 만다. 저자는 이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편지, 소설 등의 다양한 기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딱딱하게 느껴질 법한 주제와 사상은 비교적 쉽고 빠르게 전달된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과 못난 부분 등을 주저 없이 펼쳐 보인다. 거만한 리영희, 경솔한 리영희, 고집 센 리영희 등 모두가 자신의 부분임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런 솔직함은 그의 어린 시절과 군 생활의 에피소드와 결합해 저자의 인간적인 매력을 드러낸다. <동굴속의 독백>의 미덕은 리영희 교수의 후회 속에 있다. 자신 때문에 고통 받았던 가족과 주변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그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글을 통해 리영희 교수를 한층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저자에게 깊은 존경심을 불러 일으킨다.

노교수는 머리말에서 자신의 일갈을 한 시대에 동굴 속에서 외치던 독백이라고 비유한다. 하지만 그의 독백은 메아리가 되어 우리 사회에 울려 퍼졌다. 이 메아리는 앞으로도 우리 사회를 계속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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