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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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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에는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 애의 가쁜 숨결이 미묘하게 변하기만 해도, 나는 잠에서 깼다. 종종 나는 잠에서 깬 채로 그냥 누워서 내가 숨쉬고 있는 공기가 그애가 방금 뱉어낸 공기일까 생각하고는 했다.-77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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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뿔
권정현 지음 / 노블마인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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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을 펼쳤을 때 유물을 둘러싼 고도의 추리물을 기대했다. 원체 역사와 픽션이 결합된 팩션 장르를 좋아하는 지라 <다빈치 코드>류의 재미를 느낄거라 예상했다. <동한연의>의 이야기와 함께 대선이 펼쳐지면서부터 추리극보다는 정치 활극으로 마음을 바로잡았다. 바로잡지 않고서는 읽겠다는 마음이 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는 과연 무엇을 읽었는지 종잡기 힘들었다. 사건 수사로 시작해 권력욕이 뒤엉키고 나중에는 유물 보호의 정당화 주장?

작가는 <달팽이의 뿔> 속에 담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았던 것 같다. 첫 장편인만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으리라. 덕분에 시작은 거창했다. 다섯 병정을 둘러싼 배경과 사건, <동한연의>라는 작자 미상의 소설이 상당히 긴박감 넘치게 소개되면서 읽는 이의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과연 이 소설이 주인공과 주인공의 현실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다섯 병정을 훔친 이는 과연 누구일까? 다섯 병정은 결국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작가는 속도감 있는 문체와 전개로 이런저런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시작에 비해 결말은 초라하다. 한껏 벌려 놓은 이야기를 분량과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포장한 느낌이 든다. 권정현 작가가 결말을 위해 제시한 복선이나 구성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한나라 왕위 찬탈을 노린 5명의 역적들과 대권에 도전하는 5명의 후보를 함께 엮은 것은 그 숫자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두 상황의 허술한 연결은 단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로만 보여진다. 아울러 주인공의 성격 묘사도 상당히 부족하다. 섬세하지 못한 내면 표현은 그의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평면적인 캐릭터로 끝나버렸다.

물론 복잡한 내용을 쉽게 읽히도록 표현한 것과 속도감 있는 전개는 높이 살 만 하다.(개인적으로 <동한연의>를 풀어 쓴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다.) 덕분에 추천서를 쓴 박철화 교수의 글대로 권정현 작가는 이야기꾼이라 부를 수는 있겠다. 하지만 단지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것만으로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에는 줄과 줄 사이의 빈 틈에서도 작가의 생각이 읽혀야 된다고 생각한다. <달팽이의 뿔>은 그런 빈 틈이 그저 '빈 것'으로 느껴진다. 이야기는 있지만,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빈 틈이 계속 느껴진다.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만 끝난 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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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타고난 이야기꾼 혹은 사기꾼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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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라딘의 Lets Look 기능은, 그림책 이외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모니터로 책을 읽는 것에 영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봐봐야 집중도 되지 않고 살지 말지를 판단하는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신간 소개를 보다가 어쩐 일인지 <맛>의 Lets Look을 누르고 표지부터 훑어보기 시작했다. 성석제가 로알드 달을 철두철미한 프로라 했다 하고, 강아지 두 마리를 끌어안고 찍은 달의 사진과 프로필이 있다. 뭐 그냥 평범한 아저씨네, 흠.

 

첫번째 작품 <목사의 기쁨>을 잠깐 보기로 한다. 그런데, 어, 어... 이거, 그만 둘 수가 없다. 목사를 사칭하며 시골 사람들에게서 고가구를 헐값에 사들이는 능구렁이 보기스씨를, 그의 낡은 스테이션 왜건 뒷좌석에 몰래 자리잡고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호기심 반 감시 반의 시선으로 지켜 보는 심정이랄까. 아, 저 능란한 거짓말, 아니 흥정 솜씨를 보라지, 선량해 보이는 얼굴에 수완까지 좋으니, 타고난 장사꾼이로군.

 

책을 받자마자 <목사의 기쁨>의 뒷부분을 펼쳐 들었다. 보기스씨가 선명하게 살아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니 넘기기도 전에 벌써 다음 장의 내용이 궁금하다. 이렇게 조바심을 내며 마음이 앞서가는 독서를 한 게 얼마 만인지. 드디어 보기스씨의 거래가 성사되고, 흠, 훌륭한 흥정이었어,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던 중에, 갑자기 엉뚱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눈을 치켜 뜬다. 순간, 뒤통수에 찌릿 전기가 일더니 푸하하 웃음이 터진다.

 

이 책에 실린 열 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흡인력이 대단하다. 단순한 줄거리에 치밀한 구성과 긴장감 유발이라는, 단편 소설 본래의 미덕을 그대로 맛볼 수 있다. 그 짧은 분량 안에서도 등장 인물들의 성격이 세세히 살아나고, 호기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나고, 예상치 못한 혹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도 절대 김빠지지 않는 반전까지 등장한다. 읽는 중에 다음 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 솜씨야 말할 것도 없고, 마지막의 반전이야말로 이 작품들의 진정한 매력이다. 재미있다. 놀랍다.

 

이 사람은, 로알드 달이라는 이 작가는, 진짜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혹은 소설 속 등장 인물들처럼 뛰어난 재능과 사기꾼 기질을 함께 지니고 있을 게다. 평범하고 사람좋아 보이는 달의 미소 띤 얼굴 뒤에 순진한 시골 사람들을 후려먹는 보기스씨(목사의 기쁨)나 예술적인 경지로 포도주를 감별해 내는 프랏(맛), 마찬가지 예술적 경지로 여자를 홀리는 오스왈드(손님)의 능청스러움과 짓궂음이 숨어 있을지도. 어쩌면 남편에게 순종적인 여자들(하늘로 가는 길,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위험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 그냥 덤볐다가는 빅스비 부인(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이나 드리올리(피부)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이만한 재미라면, 그 정도쯤 대수랴. 손가락은 내 놓지 못하더라도 기쁘게 사기당할 준비는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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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어뱃살 > 오역의 문화와 함께 비평의 문화도 한번 돌아봤으면
문화의 오역
이재호 지음 / 동인(이성모)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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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으로부터 이 책을 받아 읽는 순간 10분도 안되어서 나는 이 책에 대해 실망했다. 미리 서점에서 한번 만 봤더라면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분들이 번역서를 접하면서 오역에 대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출판계에는 오역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의 오역'으로 '오역의 문화'가 일상화되었다면, 그에 대한 비평도 뼈아프지만 애정 어린, 미래 지향적인 비평이 되었어야 했다.

내가 기대했던 책의 내용은 그간 '문화의 오역'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발전적 대안이 포함된 책의 내용이었다. 즉 우리 영어 교육의 문제, 번역 작업의 학술 성과로서의 인정 문제, 번역가 양성 과정에서 나오는 문제, 오역 나올 수밖에 없는 번역가에 대한 대우 같은 제반 사항이 포함된 내용 말이다. 아마 책 제목만 보고 말한다면 누구나 이런 식의 기대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내용이 없다. 저자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잘못 번역된 내용들만 나열되어 있다.  이 내용도 결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Queen이 여왕과 왕비로 모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영어가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여왕이라고 번역해야 할 곳에 왕비로 왕비라고 번역해야 할 곳에 여왕이라고 쓰인 경우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이미 안정효씨의 <영어 길들이기>에서 지적된 바 있다. 그런데 이 내용에 대한 예를 무러 18페이지나 들고 있다. 이건 지면 낭비가 아닐까?

저자는 오역만 찾다보니 오역이 제대로 고쳐져 사용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나 보다.

* 올더스 헉슬리의 Brave New World가 <용감한 신세계>로 오역되어 있는데 <멋진 신세계>가 맞다는 것이다. 그걸 누가 모르나? 알라딘에 검색창을 한번 사용해 보시길 바란다. 요즘도 <용감한 신세계>로 제목을 다는 경우가 있는지..

* A Man For All Season이 <팔방미인>이 아니고 <4계절의 사나이>란다. 미안하지만 이 영화 제목은 오래 전에 <명화극장>에서 방송할 때도 그렇고 각종 영화 잡지에도 그대로 <4계절의 사나이>로 번역되고 있다.

* 코페르니쿠스의 On the Revolution of Celestial Orbit가 <천체의 혁명에 관하여>가 아니라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란다. 그러면서 오역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책이 1963년 판 <세계문화사>이다. 골동품 수준의 책에 실린 오역을 소개하기에 앞서 한번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1998년에 서해문집에서 이미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 같은 예로 토마스 핀천의 The Cry of Lot 49는 저자가 지적을 안해도 이미 <49번지의 비명>이 아니라 <49호 품목의 경매>로 번역되어 있다.

저자의 오류도 눈에 뜨인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원 제목은 Lost In Translation. 저자는 Translation은 '번역/통역'이 아니란다. 왜냐하면 Translation의 동사형 translate는 '황홀하다'라는 뜻이 되고 명사형인 translation은 '황홀경' 정도(Translation이 '황홀경'이라고 영어 사전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translate에서 유추해서 다시 명사화 시킴 ). 'be lost in~'은 '~에 홀리다'. 즉 Lost In Translation은 '황홀경에 빠지다'라는 뜻이라는게 저자의 주장. 영화 제목 하나 설명하기 위해서 고차 연립 방정식을 푸는 것 같다.

저자의 주장대로 Translation이 '황홀경'이라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이 영화의 감독 소피아 코폴라의 인터뷰에 의하면 translation은 '번역'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 외국 영화 리뷰에도 '황홀경'이 아니라 모두 '번역'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영화에서 일본인들이 '통역' 때문에 애를 먹지 남녀 배우 두 사람은 모두 영어를 잘 하기 때문에 '통역'에 문제가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통역'과 무관하다는 단순 논리. 하지만 우리 식으로 의역을 하지 않고 영어 원제로 하자면 <번역 속에 사라지다>(Lost In Translation) 정도가 적절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 소통 속에 사라진 의미를 향수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주제이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저자도 '오역'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에게 진심으로 충고를 하고 싶다.  '요런 의미가 있는 건 몰랐지?'하는 반박을 위해 두꺼운 영어 사전을 몇권 씩 뒤지기 보다는  <씨네 21> 실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해석하는 두 가지 키워드'라는 김소영 교수의 글을 읽기를 권한다. 왜 tanslation이 '번역'의 의미로 쓰였는지를 저자에게 차근 차근하게 알려 줄 것이며 제목 트집 잡다가 놓친 영화의 주제를 친절하게 안내해 줄 것이다. 그러면서 단어에 국한된 번역이 아니라 '문화'의 번역'이 뭔지를 그 글을 통해서 한번 깨달아 보시길 바란다. 

 이 책의 2/3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장미의 이름> 등으로 알려진 이윤기씨에 대한 비평이다(솔직히 비평이라기 보다는 비난이나 험담이 더 어울린다)
저자는 마치 영어 선생님처럼 "니가 한 이 번역은 이래서 틀렸고 저건 저래서 틀렸어.."하며 이윤기씨를 몰아세운다. 보기에 참 민망하다.
저자의 지적 중에 일면 타당한 것도 없지 않지만 이윤기씨가 자신의 관점에서 "이건.. 이런 식의 의미로 보인다"라고 해석한 부분을 '마치 자기가 세계적인 신화학자가 되는 것처럼 함부로 해석한다'라는 글로서 험담을 해댄다. 신화의 해석은 세계적인 신화학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신화가 그들의 손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면 신화는 얼마나 밍숭맹숭했을까.(난 개인적으로 이윤기씨나 이 책의 저자 이재호씨에게 한번 물어 보고 싶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금전 채무 문제로 다툼이 있었는지를 말이다. 왜냐하면 이재호씨는 이 책에 소개된 다른 저자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이윤기씨만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물고 늘어지니 말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는 책 제목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이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이는 그의 관점에서 현대식으로 해석해보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도 않은채 자기 관점에서만 벗어나면 무조건 오역이라는 건 문제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이 책은 2천년전에 쓰여진 신화이다. 신화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전승과 관점이 있다는 것을 왜 인정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백번 양보해서 이윤기씨의 오역과 저자인 이재호씨의 주장을 모두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화의 오역'을 단지 저자 몇 사람을 골라서 인민재판식으로 몰아 붙인다고 해결될까? '문화의 오역'에는 그만큼 우리 번역 문화가 미성숙했음을 보여준다.이 문제는 한 개인의 능력에 국한시킬 문제가 아니라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비평을 위한 비평, 비판만 난무하는 비평을 넘어선 성숙한 번역 문화를 만들 수 있을것이다. 

오역이 있으면 오역을 지적하고 오역을 한 사람은 타당한 지적이면 수용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핏대 올리면서 남을 폄하할 필요도 없고 주눅이 들 필요도 없으며 오역을 찾아냈다고 우쭐해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한 작품에 대한 번역의 수준은 한 번역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오류와 수정 속에 번역은 새롭게 바뀌어지고 시대적 관점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번역은 단 한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구' 번역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길러지는 것은 번역 과정에서 쌓여지는 것이 우리 문화의 수준이며, 그 번역 문화에는 번역가의 문제와 번역을 지적하는 비평가의 수준 역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진정한 번역의 문화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계가 지금껏 '오역의 문화'를 양산해 왔다면, 저자는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문제일까? 과연 이재호 교수 책을 잡고 이 잡듯이 잡으면 오역이 보이지 않을까? 비평을 하는 사람 자신 역시 번역문화라는 큰 테두리에서는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차라리 자신의 그간 번역 과정에서 쌓여온 고충이나 노하우를 점잖게 소개하는 것이 옐로우 저널리즘식 글쓰기 보다는 우리 번역 문화에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저자에게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 책은 '명예교수'라는 '명예'와 전혀 걸맞지 않는 비평이다. 이건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비평에 불과하다. (만약 저자식의 비아냥거림이 허용된다면 저자에게 이런 식으로 돌려주고 싶다)  "이런 식의 비평은 네이버 댓글에서 한 페이지마다 수두룩하게 찾을 수 있는 공해 수준의 글이다."

번역이 오역이라고 해서 똑같은 수준의 비평이 용납될 수 없다. 어쩌면 수준 높은 번역 문화는 수준 있는 비평이 자리잡을 때 가능할지도 모른다.

군소리)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말씀드린다. 이재호 교수를 비판했다고 '이윤기씨의 측근' 이런 식의 황당한 편가르기 식의 소리를 하지 말기 바란다.  우연찮게 두 사람의 책을 다 읽은.. 책 읽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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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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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렀을 때 동시에 느낀 기분 세 가지. 하나, '마르케스의 신작이 나오는 건 처음 보는 걸'(그의 전작이 나왔을 때 너무 어려서 작가와 작품을 몰랐다.) 둘, '히야~ 이 작가의 작품이 새롭게 나오긴 하는구나.' 셋, '내가 그럼 이 대단한 작가랑 동시대에 살고 있는 거야?'(물론, 세대 차이는 꽤 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새 작품을 여전히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무료한 대학 생활을 하던 중, 어떤 순서를 밟는 것처럼 그의 소설을 처음 읽었었다. <백 년의 고독>을 읽으면서 가요만 듣다가 록 음악과 처음 조우한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록 음악에 빠졌던 그 순간처럼 마르케스와 라틴 문학에 순식간에 빠졌다. 문학이라고 해 봤자, 국문학과 영문학, 일본 문학이 다였던 대학생에게 마르케스, 보르헤스, 아옌데, 세풀베다는 진정한 신세계였다. 그 신세계 속에서 더위에 몸부림치던 3학년 첫 학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그의 신작을 읽었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처음 집었을 때, 책의 두께와 무게에 좀 놀랬다. '호~ 금방 읽을 수 있겠는 걸.' 읽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되새김질하는 과정은 읽는 속도의 배가 걸렸다. 그만큼 이 작품에 주인공의 사랑과 그 애절함이 진하게 농축되어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90세를 맞이한 신문 칼럼니스트. 사랑이 없는 육체 관계에 익숙한 주인공은, 자신이 창녀들 때문에 결혼할 시간이 없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생일을 맞아, 노인은 이제 막 밤의 여자가 된 한 숫처녀와의 하룻밤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 하룻밤은 잠든 처녀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 때부터 노 칼럼니스트는 생애 처음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자고 있는 어린 연인을 위해 칼럼을 쓰고, 그녀의 집을 장식하고, 보지 못할 때의 연인을 그리워한다.

사랑을 할 수 없었노라고 선언하던 사람의 사랑은 눈물겹다. 세상의 눈이 두려워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표현할 수 없었던 한 남자. 그리고 그의 어린 연인 역시 자신의 사랑을 떳떳이 밝힐 수 없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둘의 사랑을 가슴 졸이면서 읽어 내렸다. 그동안 마르케스의 여러 작품들은 사랑을 읊었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그 중에서도 작가 본인의 감정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90세의 신문 칼럼니스트와 작가를 동일시한 건 나 하나였을까. 분명 많은 독자들이, 그리고 작가 자신도 그랬을꺼라 믿고 싶다. 전작들처럼 환려하고 격정적인 사랑은 아닐지라도, 한 노인과 어린 창녀, 델가디나의 사랑에는 진정성이 살아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포주의 입을 빌어서 표현된 델가디나의 짤막한 고백은 진정한 애정과 그 결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는 여전히 마르케스 특유의 환상적인 문체와 상황이 가득하다. 소설가는 현재 70대 후반이다. 다시 한 번 그의 신작 소식을 듣고, 동시대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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