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urblue > 타고난 이야기꾼 혹은 사기꾼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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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라딘의 Lets Look 기능은, 그림책 이외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모니터로 책을 읽는 것에 영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봐봐야 집중도 되지 않고 살지 말지를 판단하는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신간 소개를 보다가 어쩐 일인지 <맛>의 Lets Look을 누르고 표지부터 훑어보기 시작했다. 성석제가 로알드 달을 철두철미한 프로라 했다 하고, 강아지 두 마리를 끌어안고 찍은 달의 사진과 프로필이 있다. 뭐 그냥 평범한 아저씨네, 흠.

 

첫번째 작품 <목사의 기쁨>을 잠깐 보기로 한다. 그런데, 어, 어... 이거, 그만 둘 수가 없다. 목사를 사칭하며 시골 사람들에게서 고가구를 헐값에 사들이는 능구렁이 보기스씨를, 그의 낡은 스테이션 왜건 뒷좌석에 몰래 자리잡고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호기심 반 감시 반의 시선으로 지켜 보는 심정이랄까. 아, 저 능란한 거짓말, 아니 흥정 솜씨를 보라지, 선량해 보이는 얼굴에 수완까지 좋으니, 타고난 장사꾼이로군.

 

책을 받자마자 <목사의 기쁨>의 뒷부분을 펼쳐 들었다. 보기스씨가 선명하게 살아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니 넘기기도 전에 벌써 다음 장의 내용이 궁금하다. 이렇게 조바심을 내며 마음이 앞서가는 독서를 한 게 얼마 만인지. 드디어 보기스씨의 거래가 성사되고, 흠, 훌륭한 흥정이었어,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던 중에, 갑자기 엉뚱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눈을 치켜 뜬다. 순간, 뒤통수에 찌릿 전기가 일더니 푸하하 웃음이 터진다.

 

이 책에 실린 열 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흡인력이 대단하다. 단순한 줄거리에 치밀한 구성과 긴장감 유발이라는, 단편 소설 본래의 미덕을 그대로 맛볼 수 있다. 그 짧은 분량 안에서도 등장 인물들의 성격이 세세히 살아나고, 호기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나고, 예상치 못한 혹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도 절대 김빠지지 않는 반전까지 등장한다. 읽는 중에 다음 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 솜씨야 말할 것도 없고, 마지막의 반전이야말로 이 작품들의 진정한 매력이다. 재미있다. 놀랍다.

 

이 사람은, 로알드 달이라는 이 작가는, 진짜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혹은 소설 속 등장 인물들처럼 뛰어난 재능과 사기꾼 기질을 함께 지니고 있을 게다. 평범하고 사람좋아 보이는 달의 미소 띤 얼굴 뒤에 순진한 시골 사람들을 후려먹는 보기스씨(목사의 기쁨)나 예술적인 경지로 포도주를 감별해 내는 프랏(맛), 마찬가지 예술적 경지로 여자를 홀리는 오스왈드(손님)의 능청스러움과 짓궂음이 숨어 있을지도. 어쩌면 남편에게 순종적인 여자들(하늘로 가는 길,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위험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 그냥 덤볐다가는 빅스비 부인(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이나 드리올리(피부)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이만한 재미라면, 그 정도쯤 대수랴. 손가락은 내 놓지 못하더라도 기쁘게 사기당할 준비는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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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어뱃살 > 오역의 문화와 함께 비평의 문화도 한번 돌아봤으면
문화의 오역
이재호 지음 / 동인(이성모)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알라딘으로부터 이 책을 받아 읽는 순간 10분도 안되어서 나는 이 책에 대해 실망했다. 미리 서점에서 한번 만 봤더라면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분들이 번역서를 접하면서 오역에 대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출판계에는 오역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의 오역'으로 '오역의 문화'가 일상화되었다면, 그에 대한 비평도 뼈아프지만 애정 어린, 미래 지향적인 비평이 되었어야 했다.

내가 기대했던 책의 내용은 그간 '문화의 오역'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발전적 대안이 포함된 책의 내용이었다. 즉 우리 영어 교육의 문제, 번역 작업의 학술 성과로서의 인정 문제, 번역가 양성 과정에서 나오는 문제, 오역 나올 수밖에 없는 번역가에 대한 대우 같은 제반 사항이 포함된 내용 말이다. 아마 책 제목만 보고 말한다면 누구나 이런 식의 기대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내용이 없다. 저자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잘못 번역된 내용들만 나열되어 있다.  이 내용도 결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Queen이 여왕과 왕비로 모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영어가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여왕이라고 번역해야 할 곳에 왕비로 왕비라고 번역해야 할 곳에 여왕이라고 쓰인 경우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이미 안정효씨의 <영어 길들이기>에서 지적된 바 있다. 그런데 이 내용에 대한 예를 무러 18페이지나 들고 있다. 이건 지면 낭비가 아닐까?

저자는 오역만 찾다보니 오역이 제대로 고쳐져 사용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나 보다.

* 올더스 헉슬리의 Brave New World가 <용감한 신세계>로 오역되어 있는데 <멋진 신세계>가 맞다는 것이다. 그걸 누가 모르나? 알라딘에 검색창을 한번 사용해 보시길 바란다. 요즘도 <용감한 신세계>로 제목을 다는 경우가 있는지..

* A Man For All Season이 <팔방미인>이 아니고 <4계절의 사나이>란다. 미안하지만 이 영화 제목은 오래 전에 <명화극장>에서 방송할 때도 그렇고 각종 영화 잡지에도 그대로 <4계절의 사나이>로 번역되고 있다.

* 코페르니쿠스의 On the Revolution of Celestial Orbit가 <천체의 혁명에 관하여>가 아니라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란다. 그러면서 오역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책이 1963년 판 <세계문화사>이다. 골동품 수준의 책에 실린 오역을 소개하기에 앞서 한번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1998년에 서해문집에서 이미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 같은 예로 토마스 핀천의 The Cry of Lot 49는 저자가 지적을 안해도 이미 <49번지의 비명>이 아니라 <49호 품목의 경매>로 번역되어 있다.

저자의 오류도 눈에 뜨인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원 제목은 Lost In Translation. 저자는 Translation은 '번역/통역'이 아니란다. 왜냐하면 Translation의 동사형 translate는 '황홀하다'라는 뜻이 되고 명사형인 translation은 '황홀경' 정도(Translation이 '황홀경'이라고 영어 사전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translate에서 유추해서 다시 명사화 시킴 ). 'be lost in~'은 '~에 홀리다'. 즉 Lost In Translation은 '황홀경에 빠지다'라는 뜻이라는게 저자의 주장. 영화 제목 하나 설명하기 위해서 고차 연립 방정식을 푸는 것 같다.

저자의 주장대로 Translation이 '황홀경'이라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이 영화의 감독 소피아 코폴라의 인터뷰에 의하면 translation은 '번역'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 외국 영화 리뷰에도 '황홀경'이 아니라 모두 '번역'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영화에서 일본인들이 '통역' 때문에 애를 먹지 남녀 배우 두 사람은 모두 영어를 잘 하기 때문에 '통역'에 문제가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통역'과 무관하다는 단순 논리. 하지만 우리 식으로 의역을 하지 않고 영어 원제로 하자면 <번역 속에 사라지다>(Lost In Translation) 정도가 적절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 소통 속에 사라진 의미를 향수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주제이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저자도 '오역'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에게 진심으로 충고를 하고 싶다.  '요런 의미가 있는 건 몰랐지?'하는 반박을 위해 두꺼운 영어 사전을 몇권 씩 뒤지기 보다는  <씨네 21> 실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해석하는 두 가지 키워드'라는 김소영 교수의 글을 읽기를 권한다. 왜 tanslation이 '번역'의 의미로 쓰였는지를 저자에게 차근 차근하게 알려 줄 것이며 제목 트집 잡다가 놓친 영화의 주제를 친절하게 안내해 줄 것이다. 그러면서 단어에 국한된 번역이 아니라 '문화'의 번역'이 뭔지를 그 글을 통해서 한번 깨달아 보시길 바란다. 

 이 책의 2/3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장미의 이름> 등으로 알려진 이윤기씨에 대한 비평이다(솔직히 비평이라기 보다는 비난이나 험담이 더 어울린다)
저자는 마치 영어 선생님처럼 "니가 한 이 번역은 이래서 틀렸고 저건 저래서 틀렸어.."하며 이윤기씨를 몰아세운다. 보기에 참 민망하다.
저자의 지적 중에 일면 타당한 것도 없지 않지만 이윤기씨가 자신의 관점에서 "이건.. 이런 식의 의미로 보인다"라고 해석한 부분을 '마치 자기가 세계적인 신화학자가 되는 것처럼 함부로 해석한다'라는 글로서 험담을 해댄다. 신화의 해석은 세계적인 신화학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신화가 그들의 손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면 신화는 얼마나 밍숭맹숭했을까.(난 개인적으로 이윤기씨나 이 책의 저자 이재호씨에게 한번 물어 보고 싶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금전 채무 문제로 다툼이 있었는지를 말이다. 왜냐하면 이재호씨는 이 책에 소개된 다른 저자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이윤기씨만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물고 늘어지니 말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는 책 제목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이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이는 그의 관점에서 현대식으로 해석해보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도 않은채 자기 관점에서만 벗어나면 무조건 오역이라는 건 문제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이 책은 2천년전에 쓰여진 신화이다. 신화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전승과 관점이 있다는 것을 왜 인정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백번 양보해서 이윤기씨의 오역과 저자인 이재호씨의 주장을 모두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화의 오역'을 단지 저자 몇 사람을 골라서 인민재판식으로 몰아 붙인다고 해결될까? '문화의 오역'에는 그만큼 우리 번역 문화가 미성숙했음을 보여준다.이 문제는 한 개인의 능력에 국한시킬 문제가 아니라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비평을 위한 비평, 비판만 난무하는 비평을 넘어선 성숙한 번역 문화를 만들 수 있을것이다. 

오역이 있으면 오역을 지적하고 오역을 한 사람은 타당한 지적이면 수용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핏대 올리면서 남을 폄하할 필요도 없고 주눅이 들 필요도 없으며 오역을 찾아냈다고 우쭐해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한 작품에 대한 번역의 수준은 한 번역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오류와 수정 속에 번역은 새롭게 바뀌어지고 시대적 관점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번역은 단 한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구' 번역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길러지는 것은 번역 과정에서 쌓여지는 것이 우리 문화의 수준이며, 그 번역 문화에는 번역가의 문제와 번역을 지적하는 비평가의 수준 역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진정한 번역의 문화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계가 지금껏 '오역의 문화'를 양산해 왔다면, 저자는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문제일까? 과연 이재호 교수 책을 잡고 이 잡듯이 잡으면 오역이 보이지 않을까? 비평을 하는 사람 자신 역시 번역문화라는 큰 테두리에서는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차라리 자신의 그간 번역 과정에서 쌓여온 고충이나 노하우를 점잖게 소개하는 것이 옐로우 저널리즘식 글쓰기 보다는 우리 번역 문화에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저자에게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 책은 '명예교수'라는 '명예'와 전혀 걸맞지 않는 비평이다. 이건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비평에 불과하다. (만약 저자식의 비아냥거림이 허용된다면 저자에게 이런 식으로 돌려주고 싶다)  "이런 식의 비평은 네이버 댓글에서 한 페이지마다 수두룩하게 찾을 수 있는 공해 수준의 글이다."

번역이 오역이라고 해서 똑같은 수준의 비평이 용납될 수 없다. 어쩌면 수준 높은 번역 문화는 수준 있는 비평이 자리잡을 때 가능할지도 모른다.

군소리)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말씀드린다. 이재호 교수를 비판했다고 '이윤기씨의 측근' 이런 식의 황당한 편가르기 식의 소리를 하지 말기 바란다.  우연찮게 두 사람의 책을 다 읽은.. 책 읽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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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노바리 > 현대 도시인들이 살아남는 법
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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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피치]는, 좀 점잖게 말하면, 어떤 열렬한 팬덤에 대한 보고서다. 하지만 툭하면 거품 물고 쓰러질 정도로 몰입하며 지름신의 강림을 적극 팔벌려 맞곤 하는 소위 빠순모드 강한 나나 친구들와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어떤 열혈 빠순모드에 대한 고백서"라 할 수 있을 거다.내 빠순상대 1순위가 영화라면 그의 상대가 영국 프로페셔널 축구, 그 중에서도 1부 리그 팀인 아스날이라는 것만 다를 뿐, 이 사람, 빠순모드에 대해 아주 제대로 알고 있다. 재미있는 건 나의 빠순모드의 대상에 이 닉 혼비도 이미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어바웃 어 보이] 한 권과,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닉 혼비식 체취로.

[어바웃 어 보이]를 버스 안에서고 지하철 안에서고 거의 미친 듯이 킬킬대며 보고는 "나의 사랑하는 책" 리스트에 망설임 없이 넣어놓고, 닉 혼비의 책이 한국엔 도대체 왜 이리도 안 나오는 거냐며 투덜대고, 내가 아는 범위의 출판사에 다니는 모든 사람에게 제발 닉 혼비 책을 내달라고 졸라대고... 했던 건 변명컨데 결코! 나만 했던 행위가 아니다.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 나와 공감대를 형성한 친구가 적어도 한 명이 있고, 또 한 명은, 물론 나처럼 그런 격한 반응으로 빠순 기질을 마음껏 드러내는 스타일의 친구는 아니지만, 조심스레 닉 혼비의 책 저작권을 추적했다. (그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다.)

닉 혼비는 나나 내 주변 친구들이 종종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곤 하는 빠순행위들을 대상만 바꾸어 그대로 전시해 놓고 있다. 심지어는 일련의 빠순행위 - 남들이 보기엔 강박증에서 기인한 온갖 기행과 괴벽 - 을 스스로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엔 슬쩍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까지 톡까놓고 밝혀놔 버려서 민망해 하면서도 키득댈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내 비록 지난 월드컵 때마저도 경기를 전혀 안 볼 정도로 축구를 안 좋아하고 또 전혀 모르는 사람임에도 그가 축구와 관련해 보이는 온갖 기행과 강박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가 써내려간 글을 보고 있노라면 이 부분에선 얼마나 스스로 쪽팔려하며 썼을지, 저 부분에선 또 얼마나 피를 토하며 썼을지, 조 부분에선 남들이 다 돌 던질 것이라 얼마나 단단히 각오하며 썼을지, 요 부분에선 얼마나 이상한 시선을 각오하며 썼을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뿐인가. 그 사람이 쓰는 어떤 문장에 대해선 그래, 요쯤에서 이런 자기방어 기제로서의 발언 한 마디를 아니 할 수 없지, 하면서 고 심리를 빤히 꿰뚫어볼 수 있을 수밖에 없더란 거다. 만약 닉 혼비가 나를 개인적으로 알았더라면, 그 사람 역시 내가 영화에 대해 하고 있는 짓거리들의 속내를 빤히 다 꿰뚫어보았을 것이다.

굳이 어른이 되려고 하지 않고, 혹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자기자신을 바꾸고자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철딱써니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 여유만만하고 유연한 삶의 자세. 물론 그 역시 그렇게 살기 위해 많은 걸 치러야 했을 거다. 하지만 자신을 부정하는 방향이 아니라, 아무리 유년기에 여전히 머물러있다 한들 그런 자신을 그대로 긍정하며 그걸 그냥 담담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는 또다른 종류의 어른스러움이 획득된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그렇게 살아도 살아지는 사회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각 개인들의 성인이 되는 나이가 계속 더 뒤로 유예되는 게 현대사회의 특성이기도 하다. 과거 공동체 중심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과 오늘날 특히 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도시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성년의 나이가 계속해서 늦춰지는 건 단순히 피터팬 컴플렉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인의 탓이 아니라, 최대한 오랫동안 청소년기에 묶어두려는 사회 시스템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로 올수록 성년식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도 이 탓이다. 덧붙여 신화학에서 통과의례 이야기를 아주 슬쩍 끌어오자면, 현대사회로 올수록 통과의례는 거세되었다.) 과거의 사고가 여전히 남아있는 현대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우리가 여전히 키덜트로 남기를 부추키면서, 또다른 한 편으론 '빨리 어른이 돼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만큼 착취를 당해달라고' 부추킨다. 개인은 이 사이에서 당연히 정신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에서, 인생의 고난과 슬픔의 무게를 감당도 못할 거면서 직접적으로 맞으면서 허덕대고 자기연민에 시달리는 것보다, 이렇게 세상과 나 사이에 축구, 혹은 또다른 '열렬한 팬덤 대상'을 끼워넣어 완충제로 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그대로 인정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 미쳐버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엔 꽤나 유용한 요령이 된다. 어쩌면 더 나아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이 되는 방법은 닉 혼비식의 이런 방법일지 모른다.

문장이 아주 유려하다. 비록 번역이라는 필터와, 교열과정에서 채 잡아내지 못한 비문들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어바웃 어 보이]와 이 책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어떤 특성들은 분명 닉 혼비의 것이라 추측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솔직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재치있는, 그렇다고 억지로 비아냥과 이런 걸 과장해서 짜내지 않은 자연스러운 문체. 그리고 그런 문장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낙관론자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위로와, 소통에의 의지. 감동이다. (제발 출판사들은 닉 혼비의 다른 책들도 내달라! 내달라! 내달라~~!)

고백하자면, 축구에 대한 닉 혼비의 그 열정과 '어쩔 수 없는 운명'에서 비롯한 행태를 본다면,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지나치게 깍쟁이같아서 감히 '영화팬'이란 말을 못 하겠다. 영화를 직업으로 삼은 건 어쩌면 닉 혼비처럼 솔직하지 못했던,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앞에서 정신분열하던 나의 마지막 타협책이었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진작 닉 혼비를 만났더라면, 시행착오가 조금은 줄어들었을텐데.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빠순모드가 강해지는 나는, 사실은 이제서야, 나를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에 굳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토닥여주는 닉 혼비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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