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점심 먹으러 안 갈래?‘
태수가 어깨를 툭 치면서 인상을 쓰기 전까지 동혁은 작업하는 손길을 바쁘게 움직였다. 동혁은 연장을 내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동료들은 벌써 식당을 향해 바쁘게 걷고 있었다. 동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떼제베(TGV)’의 늘씬하고 날렵한 몸매가 아름답게 드러났다. 앞으로 준공될 고속철도 위를 멋지게 달리는 녀석을 생각하면 동혁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흐믓했다.
‘떼제베‘를 생산하는 거대한 현장 안은 사람의 마음을 미묘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최첨단의 과학기지처럼 웅장하고 때로 위대한 창조의 현장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마치 구석기 시대의 거대한 공룡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현장의 골격들이 낯설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귀 울리다 못해 가슴속까지 울려 퍼지는 기계의 굉음과 여기 저기 흩어져 저마다 맡은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은 마치 공룡과 사투를 벌이는 인간들 같았다.
‘너 이번 주 크리스마스 연휴 때 계획있냐?‘
태수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계획은 무슨, 특근이나 있으면 몰라두…‘
동혁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짜식이…노총각이 데이트할 생각은 안하고 만날 일이나 하냐? 너 그렇게 벌어서 어디 쓰려고 그래? 사람들이 널보고 짠돌이라고 하더라.‘
‘쓰긴, 그냥 일이나 하는 거지…연말이라고 달라질 게 있나…‘
두 사람은 식당으로 이어진 긴 줄을 따라 들어갔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의 작은 말소리가 모여 웅성거리고 식판과 수저가 움직이는 소리, 잔반통에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동혁과 태수가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눈에 보였다. 여직원 서너 명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동혁은 한 여직원을 발견하더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직원은 손을 흔드는 동혁을 보고는 흥!하는 콧김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동혁은 무안하지도 않은지 싱글싱글 웃었다.
‘마, 너 아직도 경옥 씨를 못잡았냐? 하긴, 너같이 무능력한 인간을 경옥씨가 좋아할 턱이 없지.‘
태수가 눈치를 채고 동혁에게 타박을 주었지만 동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경옥도 동혁이 훔쳐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태연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문을 나서던 동혁은 게시판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 눈길이 갔다. 여직원 모임에서 붙인 그 안내문에는 25일 성탄절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방문할 계획과 성금을 모금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동혁은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경옥에게 다가갔다. 경옥은 약간 경계를 하는 표정이었지만 싫어하는 것같지는 않았다.
‘저…경옥 씨…‘
망설이는 동혁을 보자 경옥은 눈을 곱게 흘겼다.
‘이번 주 연휴 때 만날 수 있을까요?……‘
‘바빠서 안되겠는데요. 여직원 모임에서 할 일이 있거든요.‘
‘아, 네…그러시군요.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동혁은 기운빠진 표정으로 어슬렁거리며 식당 앞을 떠났다. 경옥은 그런 동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서운했다. 동혁은 집요하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경옥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그런 동혁이 싫지는 않았지만 선뜻 마음이 끌리는 것도 아니었다.
동혁과 한 두 번 데이트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동혁이 보여준 모습에서 실망이 컸기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거였다. 동혁은 경옥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영화를 볼 때도 돈이 아까워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경옥은 그런 동혁이 좀스럽게 느껴졌었다.
며칠 후, 여직원 모임에서 고아원을 찾아가던 날에 눈이 내렸다. 풍성한 눈송이가 온통 하얗게 세상을 뒤덮고 있었고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면서 경옥은 참 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신나서 경옥과 그 동료들을 둘러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아이의 ‘큰 형 왔다!‘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경옥을 둘러쌌던 아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경옥은 창문으로 누가 왔는지 내다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봉고 차에서 막 내리는 동혁과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 봉고 차에는 아이들 옷이며 책, 필기구, 노트 등이 들어 있는 상자가 실려 있었다.
동혁은 기타를 어깨에 둘러메고 몰려드는 아이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동혁은 고아원 아이들과 가족처럼 가까워 보였다.
동혁은 경옥을 향해 환한 웃음을 보였다. 경옥은 그 웃음이 목화송이처럼 탐스럽고 마음속에서 훈훈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