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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산문집 -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 지음 / 살림 / 1990년 3월
평점 :
품절
(1)'나는 죄인이다. 나는 앚아서 성장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에게 경배하러 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육체에 물을 묻히고 녹이 슬기를 기다렸다. 서울에서 나의 행복론은 산산조각나고 있다. 내가 거듭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거듭 변하기 위해 나는 지금의 나를 없애야한다. 그것이 구원이다.'(기형도.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pp.22~23)
(2)'빗방울처럼 아아, 이 우울하고 음침한 북구의 하늘 같은 나의 몽상이여. 공원의 낡은 목조 팔걸이 의자위로 힘없이 뒤집히는 신문지 조각 같이 서럽게 또 다시 천천히 땅의 동맥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기적소리여 나는 언제부터 이따위 시시한 감상주의자였을건가. 이 둔감한 나의 지성과 딱딱한 빵껍질처럼 굳어 더 이상의 탄도를 잃고 쓰러진 용수철 같은 완고한 철학과 언어요. 공격적 성품 오우, 펜촉이 날카로운 이유를 나는 왜 납득하려 하지 않았을까. 나는 운명과 사내를 기피해온 일 개 무숙주의자였으며 현명한 무숙주의자가 되기엔 또 얼마나 현실적 사고의 그라프에 따라 좌표를 이동하였던가. 아아, 나는 마침내 또다시 영락하고 말았음을 확인하였다.'(기형도.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p71)
(1)은 1988년 여행중 광주에서 쓴 글이다. (2)는 1982년 일기로 보이는 '참회록'중에 하나다.
기형도는 '나는 마침태 또다시 영락하고 말았음을 확인'하였고, '지금의 나를 없애야'했던 사람이었다. 그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고 지울수있었던 것을 시로 말하였다. 그의 유작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서 너무도 정확한 단어선택으로 피부가시를 세울수밖에 없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죽은자(기형도)의 편린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허위와 가식으로 둘러싸인 내 일기와 메모를 비교하였다. 언제나 좌충우돌하고 현실에 기댄 무능력의 상징을 내 끄적거림에서 볼수있다면 그는 철저히 씻어낼 수 없는 자신의 허울 멀정한 껍질을 벗겨내는데 너무도 투철한것이었다. 번데기에서 성충이 되는 탈피의 과정은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 벗겨낼수없는 가벼운 껍질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인가. 그것을 나는 기형도의 정제된 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간간히 남기고 간 여행기, 일기, 편지, 단편소설, 서평 속에서(직업상 쓴 기사를 제외하겠다.) 진중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형도는 감정의 뱉어냄이 아니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살을 베어내었다. 기형도의 시는 바로 이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