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1 - 제1부 격랑시대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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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가로 장인인 조정래님의 <<한강>>을 영화화 한다면, 아마도 카메라는 한없이 낮은 곳을 향할 것이다. 그리고 렌즈는 위로 향한채 영상을 담아야할 것이다. 등장인물의 얼굴 주름과 핏줄 선 눈과 눈시울을 담아야 하고 푸석푸석한 피부와 굵은 마디의 손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주의가 얼마나 가혹하고 피눈물나는 과정을 지나온 결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돈 벌기 위해 서독으로 월남으로 떠났던 누이와 형제들의 모습을 누가 기억하고 있습니까. <<한강>>은 60, 70년대를 살아온 한국사람의 모습을 되찾아주고 옹호해 주고 위로해주는 소설로 읽을 수 있습니다'라고 조정래님이 말했듯이 '공으로 얻어진' 한국 자본주의가 아니며 또한 자본주의의 수혜자들만의 공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강>>은 핏물을 담은 스폰지 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담아온 한국 현대사의 증거들을 10권의 책으로 생생해 보여주고 있다.

한국 현대사는(여타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과 마찬가지다) 지구에서 바라보는 달과 같다. 달표면에 수백수천개의 구덩이가 있듯이 그리고 밝은 면에 얼룩으로밖에 치부되지 않는 그 구덩이들이 조정래님의 '현미경'과 '망원경'을 통해서 달의 어두운면과 밝은 부분의 수많은 구덩이들의 실체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민중의 일상사가 역사학의 중심이 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값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조정래님의 소설의 힘이고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담론으로 역사의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 아닌 현재 내 생활 내 의식에서 이미 역사의 편린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수없도록하기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태백산맥>>이 이데올로기 담론에 의해 민중 삶의 의지나 희망이 축소, 왜곡되고 <<아리랑>>이 민족이란 담론에 갖혀 한반도의 특수성이라는 평강에 한정 될 수 있다는 평으로 평가절하될수있지만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완성되어진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하는 조정래님의 대하소설은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역사의 관성속에서 민족사적 특수성과 이데올로기적 격정이 녹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절정이 바로 <<한강>>이라고 생각한다.

월북자의 아들(유일민, 유일표), 권력지향형 정치인(강기수), 빈농 출신의 출세주의자(이규백, 김선오), 빈농 출신의 깡패(서동철) 등의 가상인물들과 전태일, 김진홍, 박태준, 임종국 등 실존인물들 모두가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수레 속에서 허구 아닌 실존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더룩 그러하다. 또한 이야기의 기승전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삶의 군상(대다수의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대중들의 애환과 고통이 소품처리 되고 마는 것에 불과한 반면)들을 통해서 현실의 각양각색의 인간들의 사고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결론을 말한다면, 조정래님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는 이미 역사의 선상에(이것이 칼날 위든 평지 위든) 서 있음을 깨닫게된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젊은이들이 <<한강>>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고 이것 때문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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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락웍 오렌지
앤소니 버제스 지음, 안봉선 옮김 / 정민미디어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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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말종의 표본인 알렉스는 폭력, 강간을 일삼는다. 형무소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인간개종 프로그램을 자청한다. 그렇지만 알렉스는 개종되지 않는다. 대략 줄거리는 이렇다. 메세지는 철학적이지만 간단하다. 인간이 물리적인 압력-폭력이든 정신적 쇼크든-에 의해서 즉 타성에 의해서 악한 성품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주이주권이 박탈된 수인들이 받는 프로그램이나 정부의 온갖 켐페인등 이 모든 것들이 자발적인 참여없이는 그 의도된 개조는 이룰수 없음을 시사한다. 근본적인 문제해결이나 장기저인 해결이 아닌 단기적인 성과에 근거한 개종프로그램은 손으로 해를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가해자들을 피해자로 양산할 뿐이다. 알렉스가 가해자에서 순간 피해자로 재창조되듯이... 여기에 덧붙여야할 의문점이 있다. 비폭력/순종이라는 것이 폭행, 강간만의 대립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긍저적 무제제기나 정당한 물리적 행동 그 자체를 원청봉쇄할 수 있는 인간개조가 될수있다는 것이다.

조지오웰의 <<1848년>>은 언어와 감시장치를 통한 전제주의를 비판한것이라면 안소니 버제스의 <<클락웍 오렌지>>는 인간 내부에 인공의 본성을 넣는(오렌지에 시계태엽장치를 하는것 같은) 전제주의 비판을 하고 있다. 제도적 통제를 넘어서 인간 본성의 통제로 까지 나아가는 듯하지만 인간형성의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1984년>>이 더 다양하고 큰 전제주의를 비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앤소니 버제스의 <<클락웍 오렌지>>(시계태엽장치 오렌지)와 큐브릭 감독의 동명영화 사이에 놓일수 있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 모두를 참고하여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원작 소설과 큐브릭 감독의 동명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에 가깝다고 말할수있겠으나 영화가 소설에 기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사이에 놓여진 것이라 말해야한다.

아직 수입금지 영화인 <<클락웍 오렌지>>를 아직 볼수없는 이들에게는 이 책을 통해서 미약하겠지만 대리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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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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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읽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고전이며서 얇은 책인 <<고도를 기다리며>>(이하<<고도>>)를 집어들었다. 이미 이 책을 읽은 이들은 고개를 갸웃둥하며 혹은 혀를 차며 '차라리 좋은 만화책을 볼것이지'라고 말할 것이다.

얇은 생각에 경고하듯 <<고도>>의 적은 쪽수(대본 자체만 보면 150쪽도 되지 않는다.)와 적은 글자구(짧은 대사의 모음이니)가 인간 삶/생애에 대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어 쉽게 읽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여러번 읽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의 대사에서 '고도'라는 인물의 정체/의미를 정확히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나와 <<고도>>와의 추격전은 나의 완전한 패배가 되는 듯했다. <<고도>>를 덮고 잠시 추격전을 멈추니 내 방식데로 흐릿하게나마 <<고도>>의 의미에 대해서 알 수있게 되었다.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니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의 일정한 흐름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주어진 갈망'(부재한 것들은 채우려는 의지 혹은 채워진 것들을 더욱 많이 채우려는 의지)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즉 '고도'라는 인물을 끊임없이 기다려야하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은 '주어진 갈망'을 채우려한다.(왜, 무엇때문에 갈망이 주어졌는지는 <<고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나는 고도가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인지, 희망/자유 같은 추상적 관념인지, 토지/임금 같은 계급 불평등의 해결인지 단정지어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고도'를 특정한 단정들을 통칭 할 수 있는 '주어진 갈망'이라고 불러야한다고 생각한다. 즉 사뮈엘 베케트 자신도 고도에 대해 모른다고 했듯이 인간 개개인/세대/시대별 '고도'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여겨야한다. 내용의 보편성 획득!

이런 내용성뿐만 아니라 글체 역시 특정세대나 지역만이 고스란히 이해할수있는 것이 아니다. <<고도>>의 글이 '스타일 없이 쓰여진 글'인 것처럼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읽혀도 <<고도>>의 무대가 '그 어느 곳도 아닌 황량한 언덕'(그래서 인간의 갈망에 의해 그 무엇이 채워져야하는 장소)을 보편적으로 알수있는 것처럼 보편성을 굉장히 잘 획득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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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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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서 다양한 시인들을 접하게 되었다. 22명의 시인들.-보수주의 시인에서부터 순수주의 그리고 참여시인뿐만아니라 월불한 시인을 모두 접할수 있었다- 신경림 시인은 그들의 행적들을 발로 직접 찾아가 시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문인들 사이에서 주고 받던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시를 0ㅐ하고 느끼는데 신경림씨의 이런 방식은 교과서적 시의 이해나 서구 문화 비평이론의 무작위적 소개로 인해 해석의 과잉에 괴롭던 나같은 독자에게는 정말로 신선한 시 읽기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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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 제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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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를 20대의 모든 것으로 보낸 사람들. 소위 모래시계 세대나 380세대로 불러지는 세대들이 있다. 그들은 5.18을 시작으로 20대를 맞이했다. 20대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노동자들의 대투쟁을 경험했고 30대를 맞이할 때부터는 동구권의 몰락을 벼락보듯했다. 30대가 되자 오랫동안 심장병으로 앓고 있던 시베리아 불곰의 죽음을 인정할수 없지만 받아들어야만 했다.

그들은 시류에 환호 하기도 했고 절망 하기도 했다. 이 두가직 극단. 환호와 절망을 20대에 겪고 30대를 맞이했던 이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는 80년대를 젊음이란 이름으로 보냈던 이들의 이야기다. 전경린은 이들을 끈없이 흐트러진 목거리 알들이라고 했고, 이 구멍난 알들을 사랑이란 끈으로 꿰어 엮고 싶었다고한다.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맞선이들이(앞서 말했던 386세대) 마른 모래가 되어 흩어진 상황에서 인간적 관계중에 하나인 사랑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줄 수 있을까? 과연 80년대는 사랑이라는 생명수가 없어서 이들이 30대가 된 시점에는 패배의식을 품고 괴로워 하는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사랑이란 생명수에 대해 인간이 살면서 희망하는 요구 목록이 달라진 것뿐이다. 그래서인지 전경린의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는 시대의 아픔을 소재삼은 2류 연애소설에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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