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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의 흰옷
구에 반봉 지음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1986년 8월
평점 :
절판


과거에 대한 향수, 참회
그런 단어들을 언습하게 만드는 이야기

1.
대략 5년만에 다시 만나게 된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선배는 나와 친분이 두터웠던 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선배는 나와 대학시절 역사의 진보라는 이름 하에 사회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을 동일시했던 경험을 공통분모로 갖고 있었다. 아무래도 초·중·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었다. 나누던 이야기들 중에 서로에게 가장 감동을 주었던 책이 무엇인지를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전태일 평전>이었고 그 선배는 <사이공의 흰옷>이라고 했다. 내가 <사이공의 흰옷>을 읽게된 계기는 이러하다.

2.
나는 배달되어 온 <사이공의 흰옷>을 단번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홍이 학생운동에 헌신·체포·고문·당 가입을 하게 되는 단련의 과정을 그린 것이 이 책의 줄거리인데, 마치 대학시절 선배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고 단편적으로는 후배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사회적 이익을 위해서 홍이 유급을 결심했듯이 선배들 역시 그러했다. 서서히 강해져 가는 홍의 모습에서 학년이 높아질수록 강고해지는 선배들의 모습 또한 유사했다. 즉 <사이공의 흰옷>은 내 과거의 단편들 끄집어냈고 향수를 자아냈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순간 나는 씁쓸한 입을 다셔야만 했다. 왜냐하면, 주인공 홍은 사회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이 부합된 일생을 사는 것으로 결론지어진 반면 내 주위에 대다수의 선배들은 사회적 이익의 방향과 개인적 이익의 지향이 괴리된 채 혹은 종잡을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은 너무도 버겁게 때론 슬프게 보일 뿐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만. 이 책의 줄거리는 선배들의 모습과 유사했건만 결론은 너무도 딴판이었다.

그 다름은 책을 읽던 중간 중간에 불러일으켰던 향수와는 다르게 그 동안 놓치고 있었던 activist의 지향을 포기한 문제들을(혹은 과거 한동안 내가 놓지 못했던 좌절감의 원인들) 되돌려보게 했던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유쾌한 것이 될 수 있겠지만 젊은 시절을 헌신했던 것들이 공염불이 된 이들에게는 유쾌한 것이 될 수 없었는지 나는 지금 처해있는 현실의 모습--즉, 私的(사적) 이해에만 몰두해있는--에 홍의 모습을 통해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참회를 하게 된 것이다.

3.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과거 이 책을 읽고 다부진 결의를 다짐했던 독자들과도 다르게 나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참회를 행하고만 것이다. 그런데, 내 머리 속에서는 '너는 지금 이 책을 정신적 안위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여기고 있어'라는 말이 떠돌고있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떠올려진 것은 내 개인적 느낌이 이 책을 빛낼 수 있는 가치를 추락시키고 있다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과거의 뒷물에 허덕이는 이들이 읽기보다는 현실에 치열한 이들이 읽기를 바란다. 더 이상 내 개인적 향수·참회로 이 책의 가치가 바래지 않기 위해서 이런 바램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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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뒤흔드는 소설
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광장>의 시대적 이식성
: 지식인의 일탈과 몰락을 그린 빼어난 작품

좋은 작품은 발표된 시점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하게 된다. 또 좋은 작품은 발표된 이후에도 독자들이 속한 시대상황에 뛰어난 이식성을 보여준다. 그런 작품을 우리는 수작·명작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최인훈씨의 <광장>은 작품 그 자체가 갖고있는 독보적인 지위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속한 매 시기마다 <광장>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새롭게 되집어 보게 하는 이식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광장>을 몇 안 되는 수작·명작이라고 부르고 싶다.

폭력이 지배하는 남한이라는 광장. 폭력에 깨져버린 남한에서의 이명준(지식인)의 밀실(첫 번째 일탈). 이데올로기적 편협함이 지배하는 북한이라는 광장. 그 편협함을 강요하고 이용되는 이명준의 밀실(두 번째 일탈). 결국 전쟁포로가 되어 제3국 행(세 번째 일탈)을 택한 이명준. 외국으로 이송 중 자살(몰락. 죽음 자체가 어쩜 광장이거나 밀실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징성은 독자로 하여금 시대의 아픔을 되새기게 한다. 그리고 독자에게 삶의 진지함을 부여한다. 그럼 어떤 시대의 아픔인가?

<광장>은 이데올로기 대립(혹은 체제 대립)에 일탈할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표상과 살아 남을 수 없었던 지식인의 몰락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악폐들에 고통스러워하고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수단과 방법들이 구체적이지 못할 때,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들이 거짓일 때 일탈을 꾀하게 된다. 그럴 때 지식인은 일반인들이 꾀하게 되는 일탈 - 사회의 악폐에 고통스러워하고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수단 방법이 제거되어 무기력증을 심각하게 느끼게 될 때(이명준이 남과 북에서 밀실로 파고들어 갈려고 했듯이) - 은 살벌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진행되었던 시기뿐만 아니라 악폐들에 대한 돌파구를 찾지 못 하는 현재의 상황에 비춰서 되 집어 볼만하다.

또 지식인의 몰락 - 사회의 악폐에 패배한 후 사회와 단절하고 침묵하거나 지식인이라는 지위가 상실되는(이명준이 제 3국 행을 택했듯이 그리고 자살을 했듯이) - 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남북한이 체제 대립을 하며 각각의 답안을 제시하지만 정답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 비춰 볼 만하다. 남한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고도의 산업사회가 되어 부유해졌다고 말하지만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재의 처지를 본다면 말이다. 이유를 어찌저찌 단다고 해도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나는 '절망에서 피어나는 희망'이라는 통속적인 말을 하고 싶다. 어쩌면 최인훈씨는 <광장>을 통해서 매 시기시기 독자들에게 이탈하고자하는 인간들과 몰락하는 인간, 그들에게 자화상을 그려줘서 다시금 희망을 가져보라는 메시지를 <광장>이라는 소설의 행간에 암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식인의 머뭇거림, 동요, 우유부단함을 질타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암시들이 느낄 수 있기에 전쟁 이후의 세대들이게도 특히 이사회의 발전을 고심하는 이들에게 <광장>은 충분히 생산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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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 풀무질신서 8
조지 오웰 지음 / 풀무질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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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가 조지오웰에게 있어 전환기와 버팀목

한 사람의 개인사는 역사의 큰 줄기에 극히 미약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와 개인사를 거시와 미시로 대응하는 것이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사가 역사에 열려있듯이 그리고 역사가 개인사의 집합체이듯이 개인과 역사는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역사적 사건이 한 개인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쳐 전화기를 마련하도록 강제했다면, 이미 개인은 역사의 도상(刀上)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로 유명한 조지 오웰에게 있어 스페인 내전은 그에게 육체적 상흔을 남긴 것뿐만 아니라 그가 자평하듯이 자신의 문학의 지향(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을 보다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카탈로니아 찬가]는 그렇게 조지 오웰의 작품들의 분기점을 이루는 작품임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이기보다는 스페인 내전의 다큐멘터리로 보일 수 있는 [카탈로니아 찬가]에는 조지 오웰이 단순히 사실 나열만 하는 것이 아닌 영구에서 행해지는 스페인 내전에 대한 왜곡과 편견에 쌓인 보도 그리고 소련의 외교정책에 종속되어 스페인을 희생시키려는 정치세력들의 작태에 대한 폭로로 가득하다. 그러나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다른 정치적인 소설이 특정한 정치적 이상을 전제한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라면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분명히 하는 길 중심에 놓여진 것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의 묘사(전선의 의용군의 모습이나 부르주아지에 해방된 스페인 광경이나 스페인 공산당에 의해 무정부주의자들과 독립노동당이 탄압 받는 사실들 등등)가 작위적이지 않는 또 연출되지 않는 그래서 생생히 살아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이 단순히 허구성만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 할 수 있다.

물론 조지 오웰이 영국의 노동당원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고 이를 소설로 남긴 것이 작위적인 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조지 오웰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스페인 내전에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밝히듯이 기사를 쓰기 위해서 내전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 오웰이 살아있을 시기에 주류를 이루었던 파시스트나 친스탈린주의자들에게는 홀대를 당하는 것을 감수해야만했다. 이후 정치와 예술이라는 두 주제의 균형감각을 잘 살린 [동물농장]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은 아마, 친 스탈린주의자들의 홀대를 보다 획기적으로 극복하고자하는 조지 오웰의 창의성의 발휘일 것이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기점으로 해서 이전의 작품은 순전히 조지 오웰의 작가적 열의가 강했던 작품이라면 그 기점 이후의 작품과 에세이는 작가로써 정치의 장에 종속됨 없이 창발성을 발휘하며 그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즉 이전의 작품은 화살촉이 가리키는 방향이 모호했다면 이후의 작품은 화살촉이 가리키는 대상의 심장에 정조준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식인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굴욕적인 침묵을 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굴종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은 침묵과 굴종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행위가 폭력적으로 저지되든 교묘하게 저지되든 상관없이 소설이라는 큰 저수지에 진정으로 이 사회의 미래상을 그려냈으며(해방된 스페인에 대한 묘사) 그 미래상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래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되돌아가는 것을 막고자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작품의 전환기로써 [카탈로니아 찬가]를 상정하고 싶다. 이에 추가로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의 작품활동과 그밖에 활동에 버팀목이 되어준 작품으로 삼고싶다. 그리고 한국에서 문학을 생산/소비하는 이들에게도 단순히 낭비적인 문학이 아닌 미래를 생산하는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는 책으로 여기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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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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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불꽃이 되고 싶어라!'

나는 체 게바라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하루는 마오의 전기인 <붉은 별>을 보고 '그 시대는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반동이 되는 시대였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시대에 풍미하는 조류에 휩쓸리게 하는 것과 흑백논리를 강요하는 사회(혹은 시대)를 비판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체는 마오를 굉장히 신뢰했던 것 같은데...'라 말하며 체와 마오 두 사람은 모두 동일하게 암울한 시대에 희망이 되어준 정치적 표상임을 내 비췄다.

내가 물꼬를 틀었지만 체와 마오(또는 체와 스탈린, 체와 레닌, 등등)로 대립시키는 그 친구의 모습에서 체가 상징하는 것과 그 밖에 인물들이 상징하는 것들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친구의 논지에서 체는 억압적인 사회 규율을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 건설 위해 백의종군을 마다하지 않는 '자발적인 인간'이었고, 그 밖에 인물들은 억압적인 사회 규율을 확립하고 보다 공고히 했던 인간이었던 것이다.

<체 게바라 평전>이 우리 나라에서 전기문의 통상적인 판매 부수를 뛰어넘고 체의 포스터와 뱃지가 곳곳에 붙여질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나는 바로 그 친구가 행했던 평가와 독자들의 평가가 어느 정도 부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체 게바라의 그림자만 잡고 그의 실천이나 사상에는 무관심한 가벼운 유행일 뿐이라고 평한다. 대중들의 관심 집중이 되면 체 게바라에 대한 인식이 질적으로 향상되기보다는 오히려 저하가 된다는 우려를 포함한 것이겠지만 내게는 그러한 단순한 유행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즉, 독자들의 평가에는 단순히 체 게바라 자체에 대한 평가이기보다는 다른 이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아르헨티나인으로 쿠바 혁명에 참여하고 아프리카와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종횡무진한 모습에서 특히 말끔한 연설이나 문장으로 대중을 선동하기보다는 게릴라로 몸소 실천했다는 것. 세상을 온통 불사르진 못했어도 자신의 불사르는 불꽃이 되어 자신의 고유한 빛을 잃지 않았다는 것. 뭐 이런 것들이 빛 바래졌던 그리고 지금도 바래지고 있는 시대의 영웅이나 지도자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매일같이 자신의 신념에 불타는 생활을 하고는 싶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이 사회에서 자신의 신념과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어쩜 굴욕적일지도 모른다)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들(즉 이 책을 보며 열광했던 독자들)의 처지를 반추하며 <체 게바라 평전>을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이 부합되지 않을 때, 더구나 개인적 이익보다는 개인의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이 봉급을 걱정하거나 불확실한 장래에 괴로워할 때, 이에 또 부과되는 괴로움으로써 이 사회의 굴레에 억눌려 주체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질 때, 영웅이 되고 싶고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영웅을 기다리게 되거나 과거의 영웅을 돌이켜본다는 측면에서 체에 열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체 게바라 평전>은 청량제였다.

바로, <체 게바라 평전>은 우리의 마음속에는 선명히 타오르는 불꽃인 '체'를 돌이켜보며,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에게 '불꽃이 되고 싶어~!' 라는 소리 없는 절규를 대신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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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보낸 편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린 로너 엮음, 양희정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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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는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다.

수인으로 생을 마감해야 한다면 그런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암담한 현실에 굴종하거나, 교수대의 찬이슬이 될 것 같다는 생각들이 내 뇌리에서 막연하게 앞섰다. 물론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읽게된 계기가 한 인간의 개인사를 보면서 보다 분명한 답을 찾고자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특히 체제에 대항하다 감옥이라는 좁은 구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보다 진전된 질문을 되뇌게 될 때 스스럼없이 이 책을 읽게된 것 같다. 얄팍한 사색이 범람하는 요즘 세태에 자뭇 진지해 보일 수 있는 내 질문에 그람시는 절제된 그러나 한 인간의 온전한 모습으로 답을 했다.

'진정한 자유는 역사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라고.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한 수인의 몸이었지만, 그람시의 사상은 그리고 행위(비록 서한교환이나 초고로 남겨진 수고들을 집필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말 할 수 있지만)는 이탈리아 역사를 관통한 것이었다. 또한 직업 혁명가로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고자한 것이 수인이라는 육체적 속박은 너무도 가벼운 것임을 그람시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듯하다. 때론 육체적 피로와 질병으로 정신의 강박을 아주 간간이 드러내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 풀무질하며 자신의 사상과 의식을 달궈내는 모습은 그의 전일적(全一的)인 그의 세계관을 확증하며 더욱 귀감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감옥에 있더라도 그람시의 의식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했다는 사실(<옥중수고>,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통해서)이 무솔리니 정권의 책략도 무용지물이었음을 너무도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현대사에서도 군사정권의 폭력과 억압에 죽어가야만 했던 민주열사들을 이탈리아인 그람시를 통해서 보았다면 착각이다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람시의 인생역정과 충분히 비견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하였다.

우리는 그를 '진정한 사회주의자', '혁명적 사회주의자', '감옥에서 죽은 사회주의자'라는 그의 신념에 한정된 규정으로 생각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일생이 정치영역을 빼놓고는 말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책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통해서 '진정 자유로웠던 한 인간'으로 재정립될 수 있는 것들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장애인으로 비(非)장애인들과의 차별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던가! 누가 그를 자유롭지 못한 수인이었고 장애인이었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문학, 정치, 정신분석, 육아, 등등의 분야들을 넘나드는 그의 관심사와 굴하지 않는 논쟁에서 갇혀있는 자의 위축됨과 패배의식을 절대로 공유할 수 없는 그람시였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에서 나는 더욱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되었다. 자괴감이나 모멸감에 너저분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이 얼마나 위대한가. 더욱이 지금도 역사성을 획득할 수 있는 문학 평론관이나 지식인의 역사 등에서 그는 지극히 자유로운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그람시를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자유로운 인간이었다고 말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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