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날의 시작 박완서 소설전집 4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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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 유명한 여자 소설가 중 뺄수 없는 이름. 하지만 나는 신경숙, 공지영 등등의 소설 몇권을 읽었지만 박완서씨의 소설을 읽지 못했다. 사실 관심이 없었다. 주로 남자 소설가의 글을 읽어오던터라 선뜻 여자소설가에게는 손이 가지 않았다. 간혹 일게되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식이었다.(주위에서 반복해서 추천(?)하게 되니)

그렇지만, <살아있는 날의 시작>을 읽게 된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었다. 가끔 웃음 짓지만 희끗희끗한 머리에 작아진 체구의 어머니를 보면서 '지금 내 어머니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 책을 보게 된 것이다. 바로 이책을 구입하고 읽게 되었는데, 슬픈 감정에 휩싸인채 단번에 읽을 수 있었다. 내 어머니의 머릿속말을 이 책에서 모두 들을 수 있었다는 착각아닌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한줄한줄 슬프게 읽었다.

내 어머니 세대의 사회적 멸시와 남편의 무시, 삶의 의지를 표현하지 못한채 반복해야만 하는 좌절이 주인공의 독백에서 아주 잘 드러났기 때문에 연민이 아닌 슬픈 감정을 일으켰던것 같다. 남편, 시어머니, 친어머니, 자식들에게 강요받는 헌신에 스스로 위안하며 찾기 힘든 즐거움을 만드는 일들은 남자인 나로써도 눈물짓게 하는 것이었다. 내 어머니의 슬픔이 가끔 늘어놓는 푸념과 한풀이식 잔소리를 이해할수있겠다면 당장은 위선일수있겠으나 박완서씨의 <살아있는 날의 시작>은 그것을 일깨워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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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마광수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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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자 했던 목적은 시를 쓰기 위해서였다. 시를 쓰기 위해 시집을 읽기도 해보았지만 교과서 수준의 감흥 이상을 받지 못하였고, 습작을 해보았지만 시를 쓰고자하는 열망만 있을뿐 도대체 어떻게 써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 안에 가득한 독백이 가지는 의미를 표현하지 못하니 더욱 답답하였다. 이 책을 보게 이유는 이렇다.

'다 읽은 지금, 감은 잡았나요?'라고 묻는다면 부끄럽지만 '네, 그런것 같네요'라고 말할 수 있게되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겠다. 마광수씨는 <<시학詩學>> 맨 마지막 글에서 문학하고자하는 이들이 갖추어야할 태도에 대해서 말한다. '고독한 가운데에서의 정직한 배설'!

이것은 집단적 창작과정보다는 개인주의적 창작과정을 염두해 둔 태도이다.(이것으로 마광수씨의 시론詩論을 개인주의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기초한 개개인의 욕망해소 방법을 근거로 한 것이기에, 시인 자신의(혹은 여타 문학하는 이의) 창작욕이 '정직한 배설'에 기초해야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super-ego'에 억압된 욕망 즉 욕망에 대한 억압을 솔직히 인정하고, 내적 갈등의 표현과 해소의 장으로 시를 써야하는 것. 바로 지적 편력이나 욕망에 대한 억압을 방조, 강요하는 것이 시가 될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마광수씨의 주장은 시작詩作에서부터 시작해야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시학詩學>>은 국가주의 추종이나 교조주의에 신물난 상태에서(그속에서 괴로워했던 나 자신) 청량제였다.

내 안의 욕망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정직하게 배설해야 한다는 거을 은연중에 억제했다는 것을 인정하니, 이제야 시를 쓰고자하는 욕망의 흐름에 대해 감을 잡았다고 말할수있게 된것이다.

<<시학詩學>>은 '시를 어떻게 써야하는가'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색다른 재미를 제공해준다. 바로 명시라고 하는 '진달래꽃', '서시'등등의 시에 대한 분석/이해 대해서도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 설명하여 일반적인 이해와 분석의 밖에서 시를 볼수있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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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생 다인이 작가정신 소설향 23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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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에서, 지난 대학생활의 후일담을 늘어 놓은 계기로 삼고자했다. 희망을 찾을 수 있기보다는 좌절과 절망에 사로 잡힌 나머지 이내 과거의 틀에 갖혀있는 나로써 일상 저편에 놓인 푸념들을 늘어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누군가 말을 걸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다인이'세대에게 말이다. 사회 발전의 진로에 대한 투철한 모색을 했던 이들에게 몰락과 좌절의 시기라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는 갑갑함과 성과 없는 지리함으로 채워졌다.

4.19/386세대에게는 한국 사회 발전에 층을 이루는 결과라도 있었지만 70년대 생에게 있어 젊은 시절 경험은 어떠한 결과도 없이 생채기만 간직한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말을 걸어서 위로 받고싶었는지 모른다.

<71년생 다인이>는 90년대 학변/70년대생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헌신을 의도적으로 역사의 반석위에 올려놓으려 하지 않는다.치열함에 비해 훈장과 같은 성과가 없으니 4.19/386세대와 달리 다인이와 같은 세대는 스스로 그 반석위로 자신들을 올려 놓을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이 슬픈 침묵에 익숙해져 있는 지도 모른다.
'다인이'세대가 내세울수 있는 역사적 성과가 없다하더라도 즉 좌절과 패배만 했다 하더라도 과거의 투철함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질수 있으니, 그들에게 옛 고통과 고뇌에 대해 말을 걸어야한다고 생각한다. <<71년생 다인이>>는 그 말걸기에 시작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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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장미여관으로
마광수 지음 / 자유문학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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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담론이 한풀 꺽인 시점에 나는 마광수의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읽게되었다. 여러 여성주의 논평이나 글에서 관념적으로 이해했던 남성중심의 성담론에 대한 반대가 일상을 지내면서 자주 충돌하는 시점에 나는 마광수의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읽었다. 사회적 담론이 지나 낡은 것이 된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성담론에서는 논리보다는 과거의 인습과 안주로 인해 속앓이를 낳는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쓰린 속이 바로 그 결과라 하겠다. 마광수의 시집을 찾게된 것은 선전적인 제목 때문이 아니라 서점에서 훑어보았던 몇편의 시가 나의 위선과 거짓(이것은 남성의 위선일것이고 권위주의적인 성 정체성일것이다.)을 비꼬고 뒤집어버렸기 때문이다.

마광수의 시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의 시가 풍기는 상징을 생각해본다면 남성 성기중심의 성에대해서 통렬한 비판하고 있으며 억압적인 사회체제에 대한 위선과 거짓을 뒤집어 보여주고 있다. 부부간의 관계가 현실은 어떠하지를 기호의 나열로 보여주는 시에서는 유교적 부부관이 아직도 재생산이(물론 지금은 서유럽의 부부관이 많이 수용되고 있지만, 앞으로 세대간의 부부관의 충돌을 볼때) 무미건조하고 인간개개인의 욕구를 짖밟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마광수의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자신(특히 남성)이 갖고 있는 성에 대한 관념을 제거하고 현실의 위선과 거짓을 보는 상징의 만화경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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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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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님이 굿을 열었다. 요섭(주인공)을 내세워 굿을 연것이다. 요섭은 넋들을 부른다. 가해자들(자신의 형을 비롯해 6.25에 잔인한 살해극을 꾀한 기독교인들)과 피해자(6.25에 죽은 무고한 양민들)을 불러 서로의 이야기를 늘어놓도록 한것이다.

하나의 사실(6.25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장이었다는 전쟁)에 두 측면이 충돌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정당성을 설파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의 시각을 보여줄뿐이면 그 결과가 어떠한지 제시할 뿐이다. 이로써 굿을 보는 이로 하여금(손님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과거 선혈이 낭자한 역사적 사실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황석영님이 '남과 북이 꺼끄러울 수 있는' 것이라 말하듯 하나의 정당성을 전제하여 읽는 이를 계몽시키려하지 않는다. 이는 어쩜, 황석영님이 공개한 창작노트 메모에서 말한 발전되 리어리즘인지는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내가 이 '손님'을 읽으면서 느낀것은 참혹한 역사의 경험이 반복되지 않도록(그것을 경험했든 그렇지 않든) 매진하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사실은 어쩔수 없는것같다. 또한 넋들을 진정 위로하기 위한 현재의 과제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역사... 이 거대한 뿌리는, 한번 든자리에 또 다시 들어 차지 않는다. 뻗어 갈뿐이지만 그리고 똑같이 반복될수 없는 것이지만 토양의 형태에 따라 굴곡되고 때론 썩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것... 그래 전진하자... 앞으로 저 짙은 자양분이 있는 토양으로...'

'손님'은 이렇게 역사의 현장에 독자를 손님으로 참여시키므로써 3인칭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1인칭 시점으로 옮겨놓아 충돌했던 두 넋의 화해를 꾀하고자하는 태도를 요구하는데 뛰어나다고 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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