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애니원에서 <헌터X헌터>의 애니메이션 방영을 시작한 기념 + <유유백서> 애니메이션이 순조롭게 '명계편'까지 도달함을 혼자 자축하면서... 간만에 <헌터X헌터>를 다시 뒤적이면서 성의없다고 내팽개쳤던 19권까지 몰아서 보니, 새삼 이거 재밌네! 하게 된 기념도 약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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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백서>와 <헌터X헌터>의 작가 토가시 요시히로.
1990년 장편 연재 <유유백서>로 <드래곤볼> <슬램덩크>와 함께 1990년대의 일본 만화계를 풍미했던 작가 중 하나로 올라섰으나, 인기작 <헌터X헌터>를 그리고 있는 요즘에서는 성의없고 게으른 작가의 대명사로 불리우고 있는 인물이다. 요즘 디씨인사이드 등 일각에서 돌고 있는 만화가 파문 시리즈만 봐도 그의 악명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토가시 요시히로 : "발로했삼." 파문
나가노 마모루 : 내가 토가시 보다는 성실하다, 파문
토가시 요시히로는 자신의 작품에 관여하는 걸 참으로 싫어하는 작가라고들 한다. 애니메이션를 제작할 때도 가급적이면 '오리지날 스토리'를 배제하도록 하며, 살인적인 일본의 만화 제작 시스템 속에서도 어시스턴트를 쓰지 않고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의 작가로도 잘 알려진 아내 다케우치 나오코와 함께 자신이 직접 그리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유유백서>의 연재 당시 점프 편집부와의 심한 마찰로 인해 작품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막을 내린 전력을 갖고 있기도 할 만큼 강한 의지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http://mirugi.com/k/com/ktacg027.html 을 참고
그만큼 자신의 만화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그 때문에 잡지 연재를 보는 사람들은 연필 콘티 위에 그대로 펜선을 입힌 성의없는 그림을 봐야하는 경우가 많다. 단행본 발행을 위해 잡지 연재분을 수정하면 잡지 연재분 그릴 시간이 모자라고, 그러다 보니 휴재가 반복되고...
개인적으로 토가시 요시히로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은 '애증'인 듯 하다.
분명 좋아하는 그림체, 좋아하는 내용의 작가지만 역시 그 '불성실함'만큼은 용서하기 쉽지 않다. 위에 쓴 것처럼 자신의 만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 때문에 하염없이 늦어지는 부분도 틀림없이 있지만, 항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게임(드래곤 퀘스트)에 미쳐서 그런다는 얘기도 있으니까;; 뭐, 작가들에겐 이런 사정 저런 사정이 있는 거니까, 라고 생각하려 해도 <유유백서> 완전판을 보면 용서하질 못 하겠다.
어쨌거나, 토가시 요시히로의 만화 중 가장 큰 특징은 권선징악이나 도덕, 정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대개의 열혈소년만화들이 정의로운 주인공이 '악'을 물리치거나 감화시키는 내용들로 이뤄지고 있는 반면에, 토가시 요시히로의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이들은 오로지 '재미있으니까' '왠지 분해서'와 같은 감정에 따라 자신의 몸을 움직인다. 그렇다, 이들은 모두 '격투본능'으로 끓어오르는 '배틀 매니아'!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은 어느 정도 격투본능에 충실한 인물들이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들은 이들에게 '정의'라는 이름의 족쇄를 덧씌운다. 주인공은 마지막 순간에는 반드시 정의로워야 하고, 절대악에 맞서야 하고... 토가시 요시히로의 만화 주인공들은 분명 악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맞서긴 하지만 그 이유는 '왠지 맘에 들지 않으니까'라거나 '너희들의 그런 부분만큼은 용서할 수 없어!'라거나, 이다. 즉, 정의와 도덕의 중간쯤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
생각해보면, 이 작가도 <유유백서>의 중반까지는 보통의 열혈 소년물 작가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암흑무투회편' 말미에서 주최자 사쿄와 마지막 상대였던 도구로 동생의 입을 빌려 과연 누가 진정한 정의이며, 악일 수 있는지에 대해 묻기 시작하면서 작가는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다. 이러한 생각이 증폭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명계편'이다. 인간들의 요괴 살육을 본 전 영계탐정 센스이와 '흑(黑)의 장(章)' 비디오를 본 미타라이,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극한의 증오를 드러내는 '닥터' 카미야의 입을 빌어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오싹할 정도의 혐오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 토가시 요시히로의 머리 속은 과연 소년만화를 그리기에 적합한 걸까, 과연 이 작가의 만화를 12세 정도의 어린이들이 봐도 좋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마계편에 가면 히에이와 함께 활동하는 마계 3두 중의 하나이자 유일한 여성인 무쿠로는 어렸을 적 인간에 의해 '페도필리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거나 하는 얘기들까지 나온다. 위험하다, 이 작가!
<유유백서>의 연재 종료 이후 주간지에서 월간지 간격으로 연재되었던 <레벨 E>를 마치고, 토가시 요시히로는 1998년부터 현재까지 소년점프의 인기작 중 하나인 <헌터X헌터>를 연재 중이다.
<헌터X헌터>는 여러가지 면에서 <유유백서>의 확장/발전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스토리상에서 <유유백서>처럼 허술한 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작품 곳곳에는 정말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발하고도 멋진 설정들이 넘쳐난다. '헌터'라는 설정부터 '넨'과 '렌' 등의 개념, '환영여단'과 '그리드 아일랜드' 등 제대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기발하고도 정교한 설정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물론 '설정을 위한 설정'이라는 반발도 심하다-, 여기에 주인공 '곤'과 '키르아' 그리고 '크라피카'와 '레오리오' 같은 멋진 캐릭터 파티, 그들과 대척점에 서는 '히소카'와 '클로로'까지.
하지만 작품 곳곳에서는 <유유백서>를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 많다. 일단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 파티가 네 명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곤과 키르아, 크라피카와 레오리오는 성격이나 세부 설정면에서 각각 유스케와 히에이, 쿠라마와 쿠와바라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많다. 또한 등장인물들 모두가 곤에게 느끼는 엉뚱함과 거역하기 힘든 호감, 그리고 위험함 같은 감정도 유스케와 비슷한 점이라고 여겨진다. 두 작품을 모두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런 걸 생각하면서 봐도 꽤 재미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점은, <헌터X헌터>에선 키르아가 곤에게 느끼는 감정을 전혀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어 이거 혹시 '대놓고 공식 커플'이 아닌가 싶은 거다...후훗.
작품 전반에서 느껴지는 '카나리히토데나시'한 점, 이건 <유유백서>보다 훨씬 극대화되었다. 확실히 '상식적인 인간이라고 보긴 어려운' '히소카'나 '클로로'와 같은 캐릭터들이 내뱉는 말들도 무섭지만, 더없이 무서운 건 참으로 밝고 명랑해뵈는 '곤'이나 '키르아'가 사실은 선악 개념이 전혀 없는 녀석들이라는 것이다. <헌터X헌터>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세계는 <유유백서>와 달리 현실이 아닌 가상 어딘가의 공간이기 때문에 더더욱 참혹하며, 상식적인 룰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 무섭기도 하고. 최근의 '키메라 엔트'편에선 그러한 점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와아키 히토시의 <기생수> 같은 작품에서도 그런 인간 혐오의 감정이 언뜻 드러나긴 하지만-사실 그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중요함을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니까, 뭐-, 토가시 요시히로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아아, 어딘가 망가졌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내는 작가의 심성이 참으로 궁금하다...
솔직히 <유유백서> 때에 비하면 그림에서 완전히 섬세한 맛이 사라져버린 게 유감스럽긴 하다. 처음엔 아무래도 주인공인 곤과 키르아가 <유유백서>의 유스케보단 나이가 어리니 그렇겠지, 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연필 콘티로만 진행되었다는 잡지 연재분을 보면 절대 그런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http://morgoth.egloos.com/144467 을 참고
어쨌거나 나는 토가시 요시히로가 그려내는 그 '카나리히토데나시'한,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한 오싹한 세계를 좋아한다. 또한, 그 오싹한 세계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어둠에 물들지 않는 밝고 씩씩한 주인공들을 좋아한다. 아마, 그래서 난 '이 쉑히 정말 못 쓰겠네!'라고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토가시 요시히로의 작품을 찾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