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 - Good Seed 말씀과 삶 시리즈 2
필립 얀시 지음, 차성구 옮김 / 좋은씨앗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가지고 있는 필립 얀시의 책 8권 가운데, 세번째로 이 책을 읽었다.  아마도 제목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교회를 나가고(물론 비번날에), 성경을 읽고(교회서적에 밀려 가끔), 스스로 기독교인(정말로 하나님의 기준으로봐선 어불성설)이라고 칭하며, 기도를 하고(식사때만) 그리고 교회서적을 읽지만(어쩌면 교회지식을 얻기 위해) 나는 점점 이상한 수렁속으로 요즘 빠져들고 있단 느낌이 든게 사실이다.  그러한 믿음의 틈새는 작게 시작된것 같았지만 이제 내 스스로 그것을 막아내지 못할만큼 큰 구멍을 만들어버리고 만 것 같다. 나는 요즘 겉으로만 신앙인이었고, 안으로는 내 멋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사람과의 교제 자체를 귀찮아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리고 내 안엔 어떠한 기준도 없이 그저 허깨비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신앙적인 지식만 늘어가는 이상한 괴물이 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이 책을 읽었다.

필립 얀시의 책을 연달아 읽고 있는 이유는 이 나이 지긋한 연배의 크리스챤 작가가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고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초보신자나 할것 같은 신앙에 대한 의심과 고민을 정직하게 독자에게 표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위안과 공감같은 것 때문일 것이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이끄는 목회자들의 기도와 설교를 듣다보면,  내 믿음과 그들의 믿음이 비교가 되기 쉽상이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멀고 미숙한데 저들의 믿음은 저렇게 크고 높구나. 어떻게 하면 저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 또 의심과 믿음의 약함이 그저 나만의 문제이기나 하는 것처럼 그것은 항상 괴로운 문제였다. 

최근에 마더 테레사의 미공개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신의 존재 문제가 또한번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세상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가 있고, 그들의 싸움은 역사 이래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살아서도 성자요 죽어서는 이미 신처럼 대우받은 성녀 테레사조차도 신의 침묵과 부재의 문제에 고민했다는 것 자체가 많은 이들에게 어떤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게 분명하다.  특히 무신론자들은 믿음이란 비합리적이고 성서는 오래된 소설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믿음을 갖고 있는 신앙인들이 테레사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에 있다.  그 기사가 나왔을때, 나는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의심을 마치 죄처럼 생각하는 고지식한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필립 얀시와 테레사의 정직한 고백이 내 신앙의 뿌리없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일평생을 신이 있다없다 라는 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20대 이후 줄곧,  신의 존재 문제로 고민해 왔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20대엔 적극적인 무신론자였고 이제 30대가 되어선 또 신앙의 입구에 도달해 있다.   그것은 바쁜 일상을 보내는 직업인이 돼 버린 지금에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내 삶의 중요한 문제다.  오랜 시간 무신론의 입장을 고수한 내가 어느날 갑자기 기독교인이 돼 버린 것은 어쩌면 신앙을 갖고 있는 아내를 만나서 였는지도 모르지만, 이미 오랜시간 내 마음속에는 두가지 신념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지금은 무신론이 신앙의 힘에 패퇴당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 승리가 영원한 승리인가 하는 점이다.  어느 철학자는 무신론을 `강렬한 유혹'에 비유하기도 했다.   신앙인이 돼 버리면 모든 게 끝날것 같이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요즘의 내 자신을 뒤돌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진정한 싸움의 시작일 뿐인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고, 테레사 수녀처럼 신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부재에 깊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필립 얀시의 <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책 제목처럼, 지금 내 안에는 그분의 흔적이 너무나 희미해져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내 자신이 신앙인 이라고 믿고 있으며, 또 신약성서속의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마음속에 담고 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세상에 널린 그 수많은 진리 가운데, 무엇이 진리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심은 믿음이라는 공간에 숨어있는 뼈대와 같다. 그런 골격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개된 장소로 이끌어내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밝히는 것이다. 의심은 감추거나 두려워 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직을 가지고 그것을 성장시키는 단단한 골격이다. 만약 내가 지금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지 말고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쓸 필요없이 이 문장을 끝으로 책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왜 교회는 '의심'을 마치 적군처럼 간주하는가 ?"  pp.56-57

요즘 의심의 함정속에서 헤매는 동안 그러나 몇가지 중요한 변화가 내 마음속에서 일어났음을 정직히 고백해야 겠다.  그 결과는 내가 신앙속에서 멀어지려 했을때,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한 결과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앞서 언급했지만, 요즘 매사에 부정적이었고 또 사려깊지 못한 말들을 쏟아냈다.  내 안에서 나를 잡아주는 존재가 희미해져 버린 순간, 나는 타락의 롤로코스터 위에 올라와 버렸다.  가장 먼저 아내가 그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내게 다가와 포스트 잇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항상 긍정적인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내 안에 그분의 존재가 사라졌을때,  역시 내 안의 사랑의 감정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가르침의 으뜸이 무엇이었나 ?  그것은 사랑이었다. 나는 내 자신을 그리고 주위를 사랑하지 않게 돼 버렸다.   그것은 내가 무신론자로 살아온 지난 몇십년간 반복해 느낀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항상 잘못된 길에서 나 자신을 방치해 둬 버렸었다.  

필립 얀시의 책 <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를 읽으면서, 나는 다시 내 마음의 믿음의 엔진을 보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앙이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하고 청결한 마음과 의지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합리성과 과학적 사고를 내세워서는 믿음의 씨앗이 자라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불합리하게 보일때에도, 내 안의 믿음을 갖고 그분을 신뢰하자고 필립 얀시는 주장한다.  내 안의 믿음과 의심의 사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지금 믿음이 조금 우세한 판세를 유지하고 있다고해서 방심하면 안된다고 필립 얀시는 가르쳐준다.   필립 얀시가 궁극적으로 일깨우는 것은 그래서 믿음생활의 겸손함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 베드로에게 믿음을 공약하지말지어다 라고 가르쳐 주신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언제나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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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필립 얀시 지음, 김동완 옮김 / 요단출판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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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필립 얀시의 책 8권 가운데 두번째로 읽은 책은 바로 이 책이다. 필립 얀시란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은 아내 덕분이다.  결혼하면서 가져온 아내의 책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란 책이 있었다. 물론 필립 얀시의 책이다. 교회 서적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어든 책에서,  나는 많은걸 느끼고 수확했다.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내가 생각했던 방식으로 그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립 얀시라는 작가가 맘에 크게 와 닿았던 점은 신앙에 대해 진술하는 태도인데 그는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독자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진리를 진리로 서술할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오류가 있다. 특히 신앙서적의 저자들은 성경이란 원전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의 풍요로움과 합리성을 담아내려 할때 자칫 근거를 강요로 이용하는 행태를 보이곤 한다. 

내가 보았을때, 필립 얀시는 대단한 독서가이자 인문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한 저술가 같다. 그가 인용하는 문학작품들의 진폭에서 그의 독서량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앙적인 고민과 의문을 풀어가는 방식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품고 있는 의심과 질문들을 그가 대신 고민해주고 그에 나름 답하고 있단 생각을 갖게 된다.  미국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복음주의의 대표적 저술가로 일컬어지는 그이지만, 이렇게 초보신자도 따라갈 수 있을만한 서술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가 겸손함이란 미덕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서 나는 작가의 무난한 진술태도를 통해 이천년전 이땅에 `사람'으로 오신 은혜롭고 자리로우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예수님의 등장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부터 해명한다.  간단히 말해서 2000년전 이스라엘땅에서 그는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이 바라던 구세주는 오늘날 신약성서속에서 우리가 지켜보아온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속에서 그 민족이 바라는 구세주는 어떤 사람일까? 난세를 풀어줄 `힘'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지금 자신들의 `왕'이 되어줄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핍박 받았을까? 율법이 곧 신앙이란 등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정작 지상에 있으면서 그를 추종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지상에서의 33년 동안, 그가 상대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거지, 문둥병자, 귀신들리자, 눈먼자, 이방인 들이다.  이들은 오늘날도 그렇게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그 시대의 유대율법의 규율속에선 절대 상대하지 말아야할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이처럼 내가 알지 못했던 역사적, 시대적 상황속에서 예수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읽은 신약성서는 그 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내게 다가왔다. 쉽게 말해서 배경에 대한 입체감이 살아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여러가지 신앙적인 의문들에 대한 저자의 질문들은 곧 내가 품고 있던 의문이었고, 또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품을 만한 의심들이다. 7월에 샘물교회 신도들이 탈레반에 납치 되었을때,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얼마나 숱한 비난과 조롱을 했던가? 그렇게 능력있는 하나님이시라면 왜 저들을 구원하지 못하는가 ? 자신들이 선택한 길이니 순교를 자랑스럽게 여기라 라는 비아냥을 나는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 질문의 우매함이나 잔인함을 생각하기에 앞서, 나는 상황의 유사함이 이천년전의 예수에게 던져졌던 군중의 비아냥과 놀랍도록 닮았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라는 군중들의 비꼼을 들으셨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들에게 능력을 보여주었다면, 인류 역사가 달라질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선 이 부분을 권력의 복종과 사랑의 복종이란 대비로 설명한다.  사람을 권력으로 복종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고통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자발적인 사랑에의 복종은 더디지만,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돼 있다.  이천년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랑에의 복종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왜 망나니처럼 살아도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으신가 ?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신다.  자발적인 사랑이 마음속에서 자라나기만을 기다리신다.  그런 사랑이어야만 영원할 수 있다.  권위와 권력에서 나오는 섬김이란 진정하지도 않고, 영원할리도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침묵, 예수님의 능력에의 절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절은 엔트로피와 붕괴가 증가일로에 있는 우주의 돌파구를 열었으며, 어느날 하나님께서 부활절의 기적을 우주적 규모로 확대하시리라는 약속을 보증한다.  우주적 드라마라는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아무런 명칭도 붙여지지 않은 중간적인 날, 곧 토요일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함이 좋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여인의 할머니는 루이지애나 전원의 한 성공회 공동묘지, 150년 된 참나무 숲 아래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묘지 비석에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단 한마디만 새겨져 있을 뿐이다.

"기다림."   - p.377 

신앙이란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때, 품기 시작한 질문이다. 정말로 어려운 문제다. 때론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야 할 때가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신이 없다는 것을 과학으로 증명하려 든다. 리처든 도킨스이라는 사람은 <만들어진 신> <이기적인 유전자>를 쓴 무신론자이자 과학자다.  그는 `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인간의 능력을 주목하라'라고 대놓고 말했다.  나도 한때는 이 사람처럼 무신론자로서 무신론의 논리와 근거를 더 찾기 위해 혈안이 돼 봤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래서 내가 행복해졌을까?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무신론자는 무엇보다 `용감해야' 한다 라고 썼다. 내가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만나기 시작했을때, 성서속에서 붉게 표시된 예수님의 말씀 부분에 주목했다. 과연 사람의 언어가 아닌 신의 언어는 어떤 것인가 ? 그 품격과 통찰력은 남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의심할 수 없었다. 내가 숱한 문학적 수사와 미문들을 보아왔지만, 성서속에서 만난 그 말씀들은 그 어떤 언어와도 비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말씀의 언어를 볼수는 있었다. 그 문장들은 `사람이 생각하고 구사할 수 있는' 품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명백하지 않았겠는가?

필립 얀시의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이천년전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노력한 책이다. 왜 오셨는지 ?  그리고 어떤 모습이었는지 ? 무엇을 남겼는지 ? 승천하신 이후 남겨진 우리들에게 그는 어떤 의미인지 ? 나름 작가는 객관성과 주관성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예수의 일대기를 혼신의 힘을 다해 보여주려 노력한다. 이 책은 한번 읽은 나는 이 책에서 만난 예수님을 정확히 마음속에 그려볼 순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는동안 나는 시간과 역사를 뛰어넘어 한 인간을 또 위대한 인간을 느낄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었다. 나는 결코 그 점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두번째로 읽은 필립 얀시의 책이 내게 준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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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56-2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59
미우라 아야꼬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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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우라 아야꼬의 소설 <빙점>을 읽고 얼마 안있어 연달아 읽은 소설이 <빙점>의 후편인 (속) 빙점이다. <빙점>의 성공은 미우라 아야꼬를 무명의 보통사람에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빙점>은 잘 쓰여진 재미있는 소설이다. 인물간의 심리묘사나 인간 내면에 기생하는 악의 뿌리인 죄의 문제를 이정도로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담은 소설을 찾아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가 소설 읽기의 재미 측면에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를 두루갖춘 빼어난 작품이란데 독자들은 동의할 것이다.

 <빙점>을 10년 사이에 두번 읽은 나이지만 이 작품의 후편인 (속)<빙점>을 읽어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우라 아야꼬와 요즘의 나는 코드가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작가다. 그는 젊은 시절 고뇌의 답을 신앙에서 찾은 사람이고, 그 답을 찾기까지 그가 겪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은 너무나도 처절해서 그가 수기로 적은 <길은 여기에>의 절절한 울림은 숱한 비신앙인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또한 스물 네살 때, 군대 서가에서 우연하게 발견한 그 책 한 권으로 인간에게 종교적인 구원의 빛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산할 수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됐던 기억이 새롭다.

<빙점>은 이같은 아야꼬의 신앙적 체험과 깨달음을 죄의 본질과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해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군상들을 보면,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며 또 친숙하기까지 하다.  그 이유는 아야꼬가 이 소설에서 나열한 인물들이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며,  소설속 범주가 현실의 우리 세계의 영역을 너무나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인물들간에 벌어지는 사건 또한 20세기나 21세기나 별 차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란 간단한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주요한 테마는 `불륜'이다.

그러나 `불륜'은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죄안에 갖힌 인간의 진정한 구원이라는 큰 테마를 이끌어내는 소재 역활을 하고 있다. 전편에서 병원장 게이조오는 자신의 딸 루리꼬가 살해된 이유를 아내 나쓰에와 의사 무라이의 불륜으로 넘겨짚고, 아내에게 복수하고자 살인범의 딸 요오꼬를 몰래 데려와 아내에게 키우게 한다.  그 이유는 아내에 대한 들끓는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륜을 저지른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게이조오의 행동도 또한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잔인한 복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실을 몰래 알게 된 나쓰에가 요오꼬를 구박하고, 요오꼬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살을 감행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깨끗함을 자신했던 요오꼬는 부모의 사악함을 알게되자, 자신의 핏속을 흐르고 있는 죄의 무게감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러면서 요오꼬는 마지막 유서에서 자신의 죄를 구원할 수 있을 `권위있는 존재'를 갈망한다.

(속)<빙점>에서 요오꼬는 살아나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살인범의 자식이 아니라는 오명을 벗었지만, 요오꼬는 자신의 출생이 어머니의 부정이라는 큰 오점에서 기인한 것을 알고,  어머니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려든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속편은 요오꼬가 어머니를 용서하게 되는 기나긴 여정과 같은 것이다. 요오꼬는 때가 타지 않은 청순한 여인으로 자라나지만, 자신의 내면속에 흐르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깨끗한 자신이 부정한 어머니를 심판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아야꼬는 이 부분에서 신약성서속 예수님의 일화를 그대로 가져온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르침을 이어가던 어느날,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 앞으로 데리고 온다. 유대 율법에 간음한 여인은 현장에서 돌로 쳐 죽이게 돼 있었다.  유대인들이 말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에 그녀를 감싸고 돈다면, 예수는 율법을 어기게 되고, 또 죽이자고 하면 자신이 가르쳤던 사랑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침묵을 지킨 예수가 군중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조용히 땅에 이렇게 썼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 광경을 지켜본 유대인들은 하나둘씩 그 자리를 도망쳤다 한다. 

아마도 아야꼬는 이같은 예시를 통해 태생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그같은 죄책감으로 어두움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누구나 예외없이 깨끗하지 않다는,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성경은 `의인은 없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요오꼬는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했으리라. 그래서 어머니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그렇게 순수했던 요오꼬도 마음속엔 죄의 씨앗인 `빙점'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게되자 자신이 죄많은 인간이라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경속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오꼬는 자신의 죄에서 이제 어떤 방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지 그 힌트를 얻게 된 것이다.


"요오꼬는 기다하라에게, 도오루에게, 게이조오에게, 나쓰에에게, 그리고 준꼬에게
지금 본 불타는 유빙의 놀라운 광경을 알려 주고 싶었다. 자기의 눈앞에 생각지도
않았던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죄가 많다고 마음속으로 느꼈을 때 이상한 안식을 얻을 수 있었던 불가 사의함
도 알리고 싶었다. " p.555
  (속) 빙점의 마지막 장인 `불타는 유빙'에서

전 문화부장관이자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이어령 선생님이 74세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내 나이 막 스무살이 되던 해, 나는 그의 수필과 소설들에 잠깐 빠져지낸적이 있다.  그의 글엔 항상  윗트와 자신감이 넘쳤고,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뛰어난 문장들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왜 그 늦은 나이게 회심했을까? 그는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절대 고독 속에서 절대자를 느꼈으며, 지상의 언어가 헛되다는것을 50년만에 깨달았다" 고.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때, 우리는 신앞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아야꼬가 <빙점>속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예외없이 죄짓는 우리가 진정 누구에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분이 누군인지 깨달았을때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기쁨과 희망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 될 것이라고 아야꼬는 이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듯 하다.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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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텐진 갸초(달라이 라마).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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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와 그의 중국인 친구 빅터 챈이 지은 <용서>를 읽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용서하는 자는 용서받는 자보다 더 자비롭고 더 인내심이 필요하고 더 힘
든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일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누구를 위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용서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 책의 가르침은 그것이다.  누군가를 용서하면
내 마음에 평화가 자리잡고 그것은 곧 용서하는 사람에겐 이득이 된다.  거창한 무엇을 위해 용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곧 나를 위해 용서하는 것이다.


티벳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 라마, 그는 정치지도자이자 승려다. 생불로 일컬어지며 세인
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그!  그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봐온 중국인 친구 빅터 챈과 함께
그의 가르침, 용서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 바로 그의 <용서>다. 이 책에서 만난 달라이
라마는  어떠한 수식어구로 치장된 범상치 않는 종교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소탈했고, 자신을 치
장하지 않았으며 어떤 위대한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다.  그의 삶과 그의 행동과
그의 언어가 곧 그의 가르침이었고 수행이었다.  저자 빅터 챈은 이것을 담으려고 그와 함께 여행
하고 그를 대면하는 일을 자주 만들었다.

그 과정을 꾸밈없는 티벳인들의 사진과 함께 엮고 있는 책!  달라이 라마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세심
하게 그리고 있는 이 책이 약간은 지루하게 보였지만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그같은 지루함이 작은
깨달음으로 독자앞에 보여진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용서에 관한 짧은
글 한 편은 내 마음의 공허감을 한번에 날려주었다. 왜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원한과 증오와 미움의 감정들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나는 겨우
깨닫게 된 것이다. 

 

2007.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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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는 상관없이, 세상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그러면 그들에 대한 자비심을 키우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나는 행복해지는 것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치 않는다. 이것은 사회적 여건이나 교육, 또는 사상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저 만족감을 원한 뿐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커
다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용서와 자비다.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처 입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내면의 힘을 시험한다. 용서와 인내심은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굳이 서로를 소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나와 같은
단 하나의 사람일 뿐이다. 움직이고, 미소 짓는 눈과 입을 가진 존재를 소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은 없다. 우리는 피부색만 다를 뿐, 모두 똑같은 존재다. 살아 있는 어떤 존재라도 사랑
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다면, 무엇보다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사랑이고 자비이다. 누가 우리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는가.
다름 아닌 우리의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
들이다.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분노와 미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 해도
삶에서 그는 진정한 승리자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을 상대로 싸움과 살인을 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모두 일시적이며, 결국 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죽는가,
병으로 사망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어쨌든 우리가 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기 마
련이고, 그러므로 결국 사라질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한 승리자는 적이
아닌 자기 자신의 분노와 미움을 이겨낸 사람이다.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
이 없다. 진정한 자비심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줄 아는 마음이다. 그의 고통에 책임을 느끼고,
그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마음을 기울일수록 우리 자신의
삶은 더욱 환해진다. 타인을 향해 따뜻하고 친밀한 감정을 키우면 자연히 자신의 마음도 편안해
진다. 그것은 행복한 삶을 결정짓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나는 한 명의 인간이자 평범한 수도승으로서 이야기 할 뿐이다. 내가 하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면, 그대로 한번 실천해 보기 바란다.  

                                   -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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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01-25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고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인데... 왜 이 좋은 말씀처럼 안 살아지는건지 원... 한 해, 한 해, 살아나가는 게 나이 먹을수록 벅차기만 합니다.

개츠비 2007-01-2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렇게 안 살아집니다....^^

종이달 2021-10-29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 2006년 9월이었을까?  P를 만나러 갔다가 본 석양이다.  건물주위를 감싸고 있는 구름과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빛이 한덩어리가 되어 멋진 풍경을 연출했다.  나는 석양 사진을 좋아한다. 석양엔

오늘에 대한 아쉬움과 내일에 대한 희망이 섞여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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