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 마음을 얻는 지혜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2
조신영.박현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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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큰누나와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했다.  가끔 누나는 내가 읽을만한 책을 보내주곤 한다.  책이란것이 기호식품과 같다고 보는 나란 사람은 되도록이면 책 추천을 달가와하지 않는다.  내가 읽은 책은 내가 선택한다는 고집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누나는 내게 <무지개원리>라는 베스트 셀러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번엔 <경청>이라는 책을 또 읽어보라고 추천한 것이다.  예외는 있는 법이라고나 할까?  누나가 추천해준 두 권 모두, 맘에 들었다.  내 기호에 맞지 않는 스타일의 책이라지만, 그러나 가끔 먹는 피자나 치킨이 입맛을 돋우듯 이 책들을 통해 얻은것이 참 많았던 것이다.

`경청' - 이 미덕이란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타인의 말을 세심하게 듣고 겸손하게 수긍하는 자세는 초등학생도 교과서를 통해 다 배우는 내용이다.  이 덕목을 강조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새삼스럽기까지하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를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누구나 또 아는 내용이다. 말을 배우는데는 2년이 걸리지만, 침묵하는것을 배우는 데는 60년의 세월도 모자란다고 이 책에선 말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우리는 말을 잘하고 논리적으로 타인을 설득하는 법을 각고의 노력과 금전적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배우려 노력하지만, 침묵하는 법에 대해선 배우지 않는다.  즉 경청하는 방법에 대해선 아는게 없는 것이다.  이러니 가정이나 직장이나 학교나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말만 하려도 들지 타인의 말을 처음부터 끝날때까지 좀 참고 듣는 법이 없다. 사람들은 대화중에 대부분 타인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기 일수다.  참 이만큼 예의없는 일도 있을까? 

남탓할거없이 내가 그랬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내가 아는 작은 지식이나 나의 기준에 어긋나는 말을 할때, 특히나 상대가 나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내 판단에 따르면 그것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때는 이판사판막판으로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내 주장을 여지없이 퍼붓곤 했다.  상대가 무안해질때까지, 자신의 빈약한 지식에 스스로 창피함을 느낄때까지, 나는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또 공손한 자세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처절한 말의 융단폭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뭐 따지고보면 이건 회사 사람들 모두가 그렇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선 논쟁이 끝나고 아니면 논쟁이 시작될때쯤이면, 이렇게 자조섞인 이야기를 주고받곤 한다. `말 잘못하면 매장당해 허허허'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잘못된 경청문화 때문이라는것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책이 이 시점에 적절히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을 통해서 사람들의 대화 습성이 상당히 바뀔 수 있기를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자기 계발서지만 소설 형식을 빌었다.  구조조정을 앞둔 30대 직장인 이토벤이란 인물,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기 주장만 펴고, 사람들의 말에는 의심과 무시로 일관되게 살아온 인물. 그 인물이 어느날 암에 걸려 자신을 뒤돌아보는 과정에서 삶 자체에 따듯한 경청의 자세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변화함으로써, 그 작은 변화가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발견한다.  이야기는 큰 재미나 흥미가 있는건 아니고, 이 과정을 통해 경청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작은 실천이 세상 사람들을, 직장 문화를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간단한 에피소드지만 이만큼 듣는 법과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책이란 사실이다.


이 책에서 잘 듣는 법을 이렇게 5가지로 요약한다.


1. 공감을 준비하자

-  대화를 시작할때 내가 가진 지식과 선입견, 판단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백지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그냥 나는 상대의 공명통이 되어, 듣는데 몰입하라는 것이다. 판단하려 할때, 상대의 말은 들리지 않고, 내 마음속 반대의 논리만이 다듬어질 뿐이다. 


2. 상대를 인정하자

- 처음부터 상대는 이래, 저래 라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갖고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를 나와 똑같은 인격체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대부분 대화가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3.  말하기를 절제하자

- `말을 배우는 데는 2년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린다'  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상대가 말을 다 끝낼때까지 참고 있자는거 아닌가.  사람들이 제일 실천하지 못하는 부분같다.  말을 자르는 사람과 대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4. 겸손하게 이해하자

- 상대의 말을 다 듣고나서 내 말을 하기에 앞서, 그의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록 부분적으로 틀린 점이 있고, 나와 의견이 전혀 다르다 할지라도, 그 상대의 입장에서 되돌아가 왜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겸손히 생각하고 이해해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5. 온몸으로 응답하자

상대가 말하고 있을때, 여유있는 모습과 수긍의 바디랭귀지가 필요하다.  호응이 필요하단 얘기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단 한번도 수긍하지 않는다면, 그 대화의 결말은 이미 뻔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바로 실천에 들어갔다.  매일 나의 직장 파트너와 사회,경제,정치 문제로 티격태격 하기 일수였다.  남자들끼리라도 하루중 얼마나 많은 수다로 시간을 보내는가 ? 그런데 껀수마다 다 의견이 상충하기 일수였다. 말 자르고, 이해하지 못하고, 올바로 듣지 않으려 하고, 자세 불량에,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정말로 잘못된 경청 습관을 갖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상대의 말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듣으려고 한다.  그리고 비록 의견이 충돌할때라도 상대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좀 더 많은 이해심을 발휘하고 있다. 이 책 한 권을 누나가 추천해 준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전하는 진실하나을 말해두고 싶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내 말을 소중하게 듣고, 존중해서 듣는 사람을 좋아하고 또 원한다는 사실말이다.  내 말을 소중히 듣고, 공감해주는 사람은 이미 나의 베스트 프랜드가 아니겠는가?  이것을 깨닫고 보니 나는 지금껏 참 적을 많이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껏 사람들의 워스트(worst) 프랜드가 되고자 발버둥을 친거 아닌가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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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6000k 2008-01-05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위의 글처럼 정말 느끼신건가요?
전 솔직히 지루하더라구요..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는 금방 알겠지만...맘으로 느껴지게는 안되더라구요..

개츠비 2008-01-06 16:44   좋아요 0 | URL
스토리 자체가 크게 흥미로운게 아니라서 그럴 겁니다. 자기계발서가 소설처럼 쓰여졌으나 소설처럼 읽을맛이 나는것두 아니고....그러나 나름 책이 전하는 메세지는 분명하다고 봅니다.

깐따삐야 2008-01-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에 뽑히셨네요! 축하드려요! ^^

개츠비 2008-01-05 19:20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 댓글보구 알았네요..고맙습니다. 아침에 살짝 기분이 좋았네요 ^^
 
침묵 (양장)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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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쓰여진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었다.  17세기 서양과 무역으로 재미를 본 일본 권력자들이 처음엔 기독교의 선교 자체에 호의적이었으나, 곧 정치적이나 경제적 목적에 휘둘려, 무자비한 기독교 박해를 시행한다.  파송된 신부들을 비롯해 수많은 일본의 카톨릭 신도들이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끝에 처형되고, 남겨진 이들은 배교를 종용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포루투칼에서 파송된 덕망높고 신심깊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영광된 순교를 거부하고 고문의 위협에 눌려 배교라는 치욕스런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로마교황청에 접수된다.  결국 그는 교회에서 제명되고, 이런 불명예스런 배교를 저질렀다고 상상할 수 없었던 그의 제자들이 일본으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그의 행방을 추적하게 된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 로드리고는 일본에 입국, 비밀리에 신도들을 만나다 결국 체포되어 투옥되고, 우여곡절끝에 완전한 일본인으로 변신한 스승 페레이라와 옥중에서 재회하게 되는데, 교회와 하나님께 영광인 아름다운 순교를 거부하고,  구차하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 배교를 선택한 그는, 열심히 자신의 배교 행위를 로드리고 제자에게 설득하려 든다. 강한 신앙심으로 순교를 결심한 로드리고는 흔들리는데.....결국 로드리고 신부도 페레이라의 뒤를 이어, 성화를 밟아 하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배신하는 배교를 결심하게 된다.  그들은 신부로서 명예로운 죽음인 순교를 포기하고,  배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은 이 과정에서 종교와 세속의 권력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부를 통해, 무엇을 보려주려 하는걸까?

그리 긴 분량이 아니지만, 이 소설은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질문 자체의 무게가 어느 작품 못지 않는 문제작이다.  작가는 로드리고 신부를 통해 작품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눈앞에서 일본인 신도들이 권력자들의 잔인한 폭력앞에 쓰러져간다.  이천년전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못지 않은 고통을 겪으며 신도들이 죽어간다. 그들은 사실, 신부인 자신들이 가르쳐준 성경과 교리를 지키고자 한 것 밖에 죄가 없다. 자신의 눈앞에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는 신도들에게 신부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겨우 짧게 기도해주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목이 잘리거나 구멍에 거꾸로 매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거나 바닷가에 매달려 수장되고 있다. 그들의 처형뒤에 무슨일이 있는가?  세상은 파리의 날개짓 조차 들을 수 있을만큼 조용하고, 한가하고, 평화롭다.  그들을 처형한 무사들은 희희낙낙하며,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이 거룩한 순교앞에서 세상은 어찌 이렇게도 거룩하지 못할까?  그리고 대체 하나님은 왜 역사하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마른 하늘에 벼락이라도 내리지 못하는 걸까?  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왜 `침묵'만을 지키시는가?   이 소설이 묻고 있는 질문이다.

"예루살렘의 밤, 한 사나이의 운명에 아무 관심도 없이 불에 손만 쬐고 있던 몇 사람의 모습. 그들처럼 이 파수꾼들도, 인간이란 이 정도로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있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그런 소리로 웃기도 하고 지껄이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엔도 슈사쿠,<침묵>,p.136

사실, 신부들은 아름다운 순교로 죽음을 선택했어야 맞을것도 같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가르침을 받은 일본인 신도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고나 페레이라는 배교하고 만다. 언뜻보기에 이것은 모순같다.  이노우에라는 최고권력자는 로드리고 신부와 옥중에서 일본사회와 신앙에 대한 논쟁을 통해, 일본은 문화적 특수성으로 타종교가 뿌리내릴 수 없는 늪지대와 같다고 비유한다. 어떤 종교건, 일본으로 건너와 자체의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한체로 포교될 수 없다. 그들이 믿는것은 신부가 가르쳐준 하나님이 아니라, 일본인의 다신사상속에서 섬김을 받고 있는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신부에게 표면상의 배교를 종용한다. 마음속으로 무엇을 품고 있건 상관없이, 표면상의 배교, 즉 발로 성화를 밟고 지나가고 말로 배교한다고 선포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노우에의 주장은 정치권력자로서 통치의 수단으로 기독교의 사상이 맞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의 포교를 허락하지 못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신부는 자신의 배교가 신도들의 목숨과 연계돼 있다는 현실적 딜레마에 빠져든다.  아름다운 순교는 교회 자체의 명예를 드높이고, 자신의 신부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내는데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실제적으로 신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저 신부의 입장에 놓인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하나님은 또 어떤 모습을 로드리고에게 바랐을까?  하나님의 침묵가운데서 신부는 결국 배교를 선택한다.  성직도, 신앙도, 그리고 그렇게도 사랑했던 하나님의 얼굴조차 밟고 지나간다. 이 처절한 선택의 고뇌와 행위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일본인 특유의 절제된 문장력으로 작가 엔도는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의 중심은 지상의 고통과 하나님의 `침묵'이 가리키는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다. 신부가 계속해서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은 침묵을 깨시고 이 지상에 그 힘으로 역사하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직자가 품고 있을만한 신앙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아들의 죽음앞에서도 침묵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지상에서 한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있는 모든 심적,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고 마지막을 장엄히 마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 로드리고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무구한 신도들의 죽음앞에 하나님의 침묵을 질타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요구의 부당함을 신학적으로 지적할 수 있을까?  물론 이론적으론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그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신부나 신자였다면, 과연 그 이론이 유용할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신부로서 죽어가는 신도들을 도울 방법은 오직 자신의 배교 행위밖에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지금 그 순간 신도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최후의 기도가 아니라, 바로 성화를 밟고 또 배교행위를 선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행위를 이제 제자인 로드리고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파수꾼이 견디다 못해 몽둥이를 쥔 채 밖으로 나오자 기치지로는 도망가면서 계속 소리쳤다.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p.177

성직도 잃고 신앙도 잃었지만, 로드리고 신부는 결코 마음속의 하나님은 잃지 않았다. 교황청의 파문조차 이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나 일본인 신도들이나 박해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니 기독교가 공인된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자신이나 배교를 선택한 기지치로라는 사람이나 모두, 아름다운 신앙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로드리고 신부는 교회에서 파문당한것이지만, 하나님께 파문당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하나님의 침묵의 바른 뜻을 해명하며 끝을 맺는다.  우리가 힘들때, 우리가 시련에 놓였을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이 하나님이다. 우리가 능력있을때, 우리가 행복할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기도 한다. 신앙에 불타다가도 때로 신앙을 잃기도 하며, 다시 하나님앞에 볼낯을 붉히며 되돌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죄짓고, 또 죄를 회개하며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며, 사랑한다 말해놓고 배신하기도 한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으며, 우리는 자신에게조차 정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연약하며, 우리는 비굴하고, 교만하며,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시며,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그에게 침뱉고 모욕하는 순간에도, 그에게 영광돌린 순간처럼 그와 함께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이고, 그분의 성품이다. 이 소설은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이며 자비로우심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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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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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C.S 루이스의 글에 빠져 지냈다.  <순전한 기독교>를 비롯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고통의 문제>, 그의 회심기인 <예기치 못한 기쁨>을 읽었다. 그리고 다섯번째로 사랑하는 아내를 사별한 그가 슬픔에 매몰돼 써내려간 일기인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에 다다랐다.  그리고 아직 사놓고 읽어야할 그의 책은 5권이 더 남았다.   나머지 책들은 좀 아껴두고 읽을 생각이다.  여전히 C.S 루이스는 가벼운 작가가 아니다.  내가 만나본 크리스챤 작가 가운데 글을 가장 어렵게 쓰는 사람이다.  기독교에 대한 변증서를 제쳐 두고라고 나는 소위 그가 자신의 회심기(자서전)을 쓸때는 좀 더 쉬운 문체로 독자들의 눈과 머리를 좀 편안히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20세기 초라는 가깝고도 먼 시간속으로 나를 편히 인도하긴 했지만, 그 자신의 그 예의 논리적이고 난해한 문체는 여전했다.  자서전은 수많은 상징적 단어로 채워졌고, 문체는 여전히 변증적이다.  내가 읽은 다섯권 모두 비슷비슷했다. 그러니 더이상 그에게 쉽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의 책 5권을 읽고, 머리가 한참 무겁고 책읽기의 동력이 바닥난 이유가 아마도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글은 매력이 가득한 보물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무슨 이윤가?  먼저 그의 글이 뛰어난 독창성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변증가답게도 그는 자신의 논리로 기독교의 본질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그것은 깊은 사색과 인생의 연륜속에서 오랜 시간 신앙의 고민과 회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교파들 간의 형식을 뛰어넘어 곧바로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이르고 있다.  <고통의 문제>에선 삶이 고통속에 존재하는 이유를 신앙안에서 답하고 있다.  완전한 무신론자로 살았던 그가 신앙앞으로 나와 하나님 아래 고개숙일 수밖에 없었던 여정을 그리고 있는 그의 회심기는 곳곳에 흥미로움과 지성적인 고민이 함께 내재해 있는 명저다. 다만 앞서 얘기했듯이, 그의 문체가 쉽게 그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사람들은 그를 난해한 작가로 오인하게 한다. 그러나 책읽기의 인내심을 조금만 발휘한다면, 우리는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의 신앙 간증속으로 접근할 수 있다.  게으르고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지적 고민과 회의속에서 다다른  한 신앙인의 성실하고 근면한 믿음과 조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에 대한 완벽한 논리와 믿음이 조화를 이룬 사람인 루이스조차도, 개인적인 슬픔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야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고, 분노이자, 그리고 섭섭함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선함에 대한 `의심'이 아닐 수 없다.  청년기의 회심이후 평생을 기독교의 가르침이 무엇이며 그것이 진리일수밖에 없는 이유를 변증하고 설득하며 살아온 한 신앙인이자 학자인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 후에 느끼는 극심한 슬픔속에 신앙조차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그 엄연한 진실앞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는 모습을 가감없이 써내려간 글이 바로 본인조차 출판될것을 생각지 못했던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인 것이다.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  <헤아려본 슬픔, p.46>


루이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미국에서 이민온 여류시인 조이(Joy)를 59세에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전 남편과 이혼하고 자식들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와 루이스의 친절한 배려속에 함께 지내다 사랑을 느끼고 결혼에 골인한다.  그 늦은 나이에 피어난 사랑은 이미, 조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들었고 몇년간 행복한 사랑의 시간이 어이진다.  그리고 아내 조이는 지병이 악화돼 투병하고 결국 루이스와 영원히 이별하고 만다.  늦은 나이에 만났지만, 그들은 서로를 너무도 사랑했고 그 사랑이 깊어갈수록, 그 사랑은 더 절실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헌신적인 투병기간을 아내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쏟아냈을 기도의 양과 절박함이 어떠했을지도 명확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기도조차 아내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했다. 루이스는 몸과 마음이 지쳤고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삶은 더이상 의미조차 없게 돼 버렸던 것이다.  루이스는 아내가 죽고 한동안, 사람들을 만나는것조차 글을 쓰고 글을 읽는것조차 밥을 먹는 것조차 귀찮은 일이라고 이 일기속에 적어놓았다. 그의 슬픔이 어느정도 였는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이 일기를 읽으면서 철저한 논리와 명증함을 앞세운 신학자다운 면모를 루이스에게 찾아볼 순 없다.  그는 명석했고 기독교의 가르침의 핵심을 누구보다 명확히 깨닫고 있는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것은 이성의 영역이었을 뿐이다.  슬픔에 잠겨버린 머리는 오직 슬픔외에는 그 무엇도 생각해 낼 수가 없게 만든다.  이제 내가 교회내에 들어와 있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교회밖의 비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시간들이 지금은 아찔하기만 하다.  나는 내 삶에 출현하는 모든 고통앞에 무방비로 살아왔었다. 그것은 임기응변식 인생이었고, 불안한 외줄타기와 같았다.  나는 언제든지 낭떨어지로 추락할 수 있었고, 내 불완전한 이성의 힘과 세상적 지식의 풍성함이 진리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비전이 없는 삶이었다. 그것은 미래가 없는 삶이다.  이제서야 깨닫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존재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연약함의 소유자들이다.  이 위대한 작가의 슬픔에 가득찬 일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내가 또다시 깨닫게 되는 것은, 이성은 허깨비이고 세상적 지식은 요란한 빈깡통이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루이스는 이 책의 끝에서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가 엄마에게 투정하는 것은 그리 흉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인간적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바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짧은 시야로 섭리앞에 실망감과 분로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이야 말로 연약한 인간의 현실적 모습이고 정직한 자화상이다.  루이스의 슬픔에 가득한 일기를 읽으면서 그의 인간적 번민앞에 느껴지는 친밀감은 그때문이다.   결국 루이스의 일기는 마지막에 조이의 마지막 말을 전하며 끝을 맺고 있다.  루이스는 이렇게 다시 하나님앞으로 되돌아 갔다.

 
" `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  그녀는 미소지었으나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의 샘으로 돌아갔다. " p.10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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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양장) 믿음의 글들 18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원제는 `Mere Christianity'다.  이 가운데 영어의 `Mere'란 단어를 이 책에선 `순전한'이라는 말로 번역해 놓았다.  얼핏 보기에 대단히 어려운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Mere'란 단어는 [[ ① 단순한, ~에 불과한, 단지[다만, 그저] ~에 지나지 않는. ② (폐어) 전적인,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정도로 해석되어 있다.   저자는 왜 이러한 제목을 붙였을까, 이 책의 머리말을 읽고 나면 분명해진다.  기독교는 많은 교파가 있다. 같은 하나님과 같은 성경을 기반으로하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또 교파간 교리상의 차이와 형식적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같은 교파간 차이로 인해 서로간의 반목이 있어왔고, 역사적으로나 오늘날이나 이들 교파간의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가 변증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불순물도 첨가하지 않는 기독교 자체의 가르침이다. 순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C.S  루이스는 필립 얀시의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작가다.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유명한 사람인줄은 몰랐다. 그러나 얀시의 책에서 그는 심심찮게 인용되었고, 그때마다 그가 참 비중있는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1898년 아일랜드 출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 영문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옥스퍼드대 모들린 칼리지 대학 교수를 역임한 사람이다.  대학에서 그는 고전문학을 배웠고 또 교수로서 가르쳤지만, 그는 많은 분야에서 재능을 펼쳤다.  요즘 서점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나니아 연대기>라는 판타지 소설을 쓴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는 아동 문학가였고, 또 시인이었고, 문학 평론가 였고, 소설가 였다. 그러나 이런 명성들에 앞서 그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신학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 책 <순전한 기독교>로부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 등의 3부작을 비롯해서 그가 기독교를 변증하고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쓴 책 모두는 오늘날 신학서로서는 최고봉의 자리에 올랐고, 회심기를 기록한 자서전과 그의 신앙적 고백들을 저술한 책들은 모두 스터디 셀러가 되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의 저서를 이제야 읽게 된 것은 기독교 서적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이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순전한 기독교>부터 읽기로 한 나는, 그의 주요한 책들을 우선 모두 구입해 놨다. 10권 정도 되는 그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다.  보기만 해도 마음 한켠이 풍성해지고 설레이는 이 마음은 무엇 때문인지 ?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의 책을 읽는다는 기쁨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래서 그럴까?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풍성했다.  이 책 <순전한 기독교>의 머리말을 읽고 잠든 날 밤,  내가 너무나 편안하고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다.   인간이란 원래 자신의 신념을 보충하고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무신론자는 무신론의 신념을 더 보강하기 위해 노력하며 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그저 단순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적인 변증을 통해서도 증명 가능한 것이 되기를 은근히 소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보통, 신앙의 문제로 와서는 이같은 것이 통하질 않는다.  믿음은 근거를 가지고 믿기 보단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신앙인들 사이엔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의 특성이고 조건이라고 우리가 배워왔기 때문이다.  보통의 목회자들이나 또 주위 신앙인들이 전도할 때 대게 이러한 태도를 보이곤 하는데, 이것이 나또한 옳고 그 자체가 신앙의 특성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C.S. 루이스는 이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믿음의 문제라고 해서 아무런 변증이 필요없고 기적을 기적 자체로, 성서의 사건들을 사건 자체로 아무런 의문없이 믿는것이 옳은 것인지, 루이스는 이 책에서 의문을 표시한다.  하나님은 과연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실까?  그는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대해서 알기 위해, 끝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또 궁금해야하고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적 본능이다. 왜 종교적인 영역에선 이러한 본능적 질문과 의문들이 경원시 되는가 ?  루이스는 이것이 기독교인의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이라고 질타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을 자랑할 것은 못된다는 것이다. 거기엔 믿음 자체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반성, 그리고 고민이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과학과 종교가 함께 가지 못한다는 과거의 생각은 그러므로 잘못된 것이다.  과학적인 객관성은 종교적 세계에도 도입될 수 있으며, 기독교의 교리 자체와 신앙도 충분히 객관적으로 변증 가능하다는 것을 루이스는 이 책을 통해 보여줬다.
 
"그렇다면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 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 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p.101
 
루이스의 이 책은 단순히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기독교의 교리들을 해설한다거나 신앙의 세계로 비기독교인들을 인도하기 위한 저서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가장 비기독교적인 방식으로 변증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란 본래 어떤 존재인가 하는 매우 철학적인 고찰로 이어지는 흥미로움을 발산하고 있다.  그래서 비기독교인이 읽어도 변증에 대한 거부감은 일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되도록이면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 혹시 관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무런 부담감 없이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그는 아마도 신앙에 이르진 못할지라도 기독교가 최소한 맹목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불어 무신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엄연한 규칙성을 발견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규칙성은 우리가 흔히 도덕률로 말하는 것인데, 루이스는 이 부분을 너무나도 명백하고 선명하게 잡아주고 있다.
 
수많은 종류의 인간군상들이 있고, 그들 가운덴 악당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악당과 선인에게 공통되는 점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부당함에 대한 선명한 인식이다. 그러니까, 어떤 악인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악행에 죄책감을 느끼는 감수성을 상실해 버렸다치자. 그는 역사상 히틀러나 아니면 연쇄 살인마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도 선인이 가지는 부당함에 대한 감정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우연하게 배급소에서 줄을 서서 선인들 사이에 서서 빵을 배급받는다고 해보자. 그 차례가 되었을때, 앞선 선인들에겐 빵을 두개 주고, 그에게만 하나를 주었다치면 그 악당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는 분명히 눈에 핏대를 세우며 `이것은 부당하다' `공정치 못하다'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악행에는 눈뜨지 못하지만 그는 내면속에 일종의 `도덕률' `선의 법칙' 같은 것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같은 본능적인 법칙들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점을 추궁한다.  그것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창조되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함께 전수된 것이 분명하며, 이것이 그 어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말이다.  우주의 저 너머에서 우리 삶으로 그 원칙을 공급해 주는 분은 누구일까? 
 
"이 세상은 위대한 조각가의 작업실이고,  우리는 그 조각가가 만든 조상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작업실에는 우리 중 일부가 언젠가 생명을 얻으리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 - p.248
 
루이스는 또하나 이 책에서 내 인식을 분명히 바꿔준게 한가지 있다. 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종류와 그 경중을 얘기할때, 그는 모든 죄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를 `교만'으로 정의한다. 성적인 타락, 도둑질, 살인 등을 넘어서 이 교만을 가장 큰 죄의 목록으로 올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교만하다는 것은 단순히 잘난체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종이 주인행세를 하는 것 만큼 오만해 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절대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완전하며 공정한 척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 발아래 모든 것을 두게 된다.  좀더 가진 사람은 가난한 자를 업신 여기고,  좀더 배운 사람은 덜 배운 사람을 깔보기 마련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당직을 가진 자는 평신도를 그 아래 두고자 하며, 믿음이 큰자는 믿음이 덜 성숙한 사람을 얕본다. 이것이 교만의 실체다.  나중에는 하나님 위에 자신을 두려 한다.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 행세를 하려 든다.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인간이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명백한 사실앞에 교만은 얼마나 허황된 범죄인가?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신론자들의 교만이다.
 
무신론자들은 매우 이성적인 척한다. 합리적이고 공정하고 그리고 과학이란 객관성을 무기로 이 세상이 운행하는 진리를 모두 터득하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곤 한다.  그들은 과학을 맹신하지 않는다고 또 주장한다.  과학은 언제나 새로운 이론과 진리에 주인 자리를 넘겨줄 수 있기에 맹목적이지 않다고 나름 공정한척 한다. 그러나 그게 사실일까?  과학이란 분야을 넘지 않으면 그들의 태도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과학을 앞세워 종교를 재단하려 들때, 합리적 이성을 가장한채, 이 세상의 지식의 원천이 되고자 할때, 과학은 종교 만큼이나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 버릴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의 교리나 성경 자체를 비판하려 들때, 무신론자들이 들고나오는 신학적 오류의 사실들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은 헛깨비 신학 지식으로 그같은 오류들을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위해 우리가 얼만큼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지, 이들은 잘 모르거나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고 있지만, 나는 이슬람이나 불교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그 종교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신념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리이며 내가 그같은 종교들에 대해 비판하지 않아도, 나는 내 신념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무신론자들이 너무나도 쉽고 유치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는가 ?  그들이 가장 쉽게 공격하는 것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가 ?  구약성서의 이해되지 않은 말씀들,  <만들어진 신>의 저자 도킨스가 언급하듯 구약성서속의 신은 시기와 질투가 넘쳐나는 잔인한 신인데, 그게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포장될 수 있는가?  왜 믿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뒤따르는가? 왜 이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가 ?  등등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을 한꺼번에 풀어줄 정답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을 갖는다고 해서 모든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것에 불과하다.  무신론자들이 착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무신론자들은 마라톤의 출발선상에도 서보지 않고, 마라톤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것처럼 얘기해 버린다.  피니쉬라인을 통과하기 까지 과정에 대해서는 오직 그 마라톤 코스를 달려본 자만이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 역경, 인내, 고통에 대해 어찌 그외의 자가 언급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알 수 있단 말인가 ? 
 
그래서 누구나 겸손함이 필요하다.  기독교 신자도 교만에 빠질 수 있고, 무신론자는 수도 없이 교만에 빠져든다.  자신의 지식을 과대포장하고,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신앙한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든, 무신론자가 되었든, 우리는 자신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C.S 루이스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신앞에 겸손해지는 것이다.  겸손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다.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할 덕목이다.  <순전한 기독교>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가 종교를 갖고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삶의 분명한 비전과 선명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과 함께 3부작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를 인내심을 갖고 읽어보는 사람은 세상과 삶에 대한 보다 선명한 인식을 얻고,  겸손함의 덕목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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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독단상]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from JelicleLim's Eye 2007-10-20 21:12 
    [기독단상]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http://jeliclelim.tistory.com JelicleLim ## 모든 종교는 진리의 단서를 가진다!! ## 여기서는 우선 기독교를 믿는 다는 것이 기독교외에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고 하면 어떤 종교라고 해도 그 안에 진리에 관한 단서가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어떤 종교든 모든 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종교..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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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를 나가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고해서 내 믿음이 견고하고 신앙이 깊다고는 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신앙은 하루아침에 크고 높아질 수가 없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은 그저 의심없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줄로만 알던 때가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성직자가 불미스러운 일로 언론 뉴스에 오르기라도 하면, 일반인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고 그들은 거기에 보태어 그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 신앙 자체를 덤으로 비판한다.  그것은 어린 아이가 버릇이 없으면 당장에 버릇없는 아이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것과 덤으로 그 부모를 비난하게 되는 경우와 동일하다.  내가 처음 교회에 등록을 하기 위해 8주간 주일마다 교회 당직자들에게 간단한 교육을 받을때가 생각난다. 그때 한 주 교육을 맡은 나이 지긋하고, 교양있어 보이는 집사님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몇십년간 교회생활을 했지만,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믿은 것은 최근에 일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신자가 된 지금은 알것도 같다. 신앙생활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믿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마더 데레사라는 세기의 성녀조차도 한때 하나님의 부재를 고민했던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자신있게 요구한다. "내게 증거를 보이라, 그러면 신을 믿겠다"라고.

영국 명문 옥스포드 대학교의 생물학과 석좌교수인 리처드 도킨스를 알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서지만 이미 그는 몇십년전에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명저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은 넓게 봐서 모두 반종교적인 기류를 담고 있다.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는 평생의 무신론의 논리를 완벽하게 정리하고자 원한 듯 하다. 이 책은 무신론자의 경전까지는 못되더라도 그것의 이론적인 논거를 거의 완벽하게 집약하고 있는 뛰어난 저서라고 생각된다.생물학자이지만 그는 전형적인 진화론자란 느낌이 들었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논증에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앞장세운다.  말하자면 생물은 환경에 적합한 개체만 살아남아 변이되고, 그러한 변이가 계속되면 고등생물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성서의 창조론에 맞서, 이 진화론의 핵심논거를 지속해 자신의 책으로 끌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이론이나 자연선택설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가 그쯤은 알것이라고 생각해서 넘겨버린 것인지, 아니면 무지한 창조론자들이 다윈의 <종의 기원>을 좀 읽어보라는 독려의 의미가 있는 것인지 좀체 헤깔렸다.  아마도 후자의 의미가 더 있는 듯 하다.  나또한 집의 서재의 한쪽 귀퉁이에 읽어보지 못하고 보관중인 다윈의 이 오래된 서적을 펴보게 되었으니까. 

도킨스는 이 책에서 무신론자로서 모든 종교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그 가운데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대표로 도마위에 올려놓고 왜 인격신을 믿는 종교자체가 허구인지, 조목조목 반대의 논거를 열거하고 있다.  한가지 재밌는 것은 도킨스가 불교와 유교 자체를 종교로 보지 않고 도덕이나 윤리 체계로 이해한다고 언급한 부분이다. 이것은 그의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거의 논리의 오점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책 가운데 옥의 티가 돼 버렸다.  그는 차례대로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에서 역사적으로 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이나 파스칼의 내기, 성서속의 존재증명 등의 허구를 파헤치고 `신이 없다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란 장에선 자연선택설을 기반으로 나름 무신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든다. 이렇게 신의 존재에 허구를 밝혀낸 그는 종교가 있음으로써 우리 인간이 도덕을 세울 수 있고,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반대 논증하기 위해 `도덕의 뿌리: 왜 우리는 선한가?"라는 장에선 종교없이 충분히 인간이 정의롭고 도덕적일 수 있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로 들어와서 그는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란 장에서 자신이 왜 무신론자가 되었고 종교의 역사적인 해악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있다.  그리고 `종교로부터의 도피'란 장을 통해 그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들에게 부모의 종교적 신념을 주입하는 일이 아이의 교육과 인생에 가장 큰 해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여기까지 그는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긴 논증을 통해 인격신과 유일신 신앙을 가진 종교, 좁게 말하자면 기독교의 성서와 창조론의 논리적 허구를 날서게 비판하고, 신이 없다는 것을 거의 완전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이 놀라운 것은 그가 기독교의 전통이 오래된 서양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 영역에서 살아가고 활동해야할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다. 종교를 사회적 성공과 사교적 기회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그는 아마도 종교와 적당히 타협하고 살았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는 더 안정된 환경속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과학자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그가 무신론자임을 온세상에 드러내지 않아도, 그는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더 좋았을 것이란 점이다. 그 점에서보면 그는 정직하고 또 용기있는 학자이며, 종교가 이 사회에 끼치고 있는 해악을 양심적으로 고발한다는 면에서 봤을때도 그는 존경할만한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나는 종교인이고 또 그와 신념을 달리하는 면이 있지만 그의 그런 점은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지금 나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천동설이 진리이고 그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을때 종교적인 재판을 받은 갈릴레오가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가 돈다'라는 명언을 남겼듯이, 나는 나의 신앙의 허점을 심판하는 도킨스의 책을 모두 읽고 책장을 덮는 순간에 그의 완전해보이는 논증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하나님은 리처드 도킨스까지도 사랑하고 계신다'라는 말을 내뱉고 싶었다. 이것은 무엇때문일까? 

"예수에게 인간의 아버지가 있었을까,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처녀였을까?  판단에 쓰일 만한 증거가 충분히 남아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것은 원칙적으로 명확한 답을 지닌 엄밀한 과학적 질문이다. 즉, 답은 "예"나 "아니오"다.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려 냈을까?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뒤에 다시 살아났을까? 우리가 현실적으로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런 질문들은 모두 답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엄밀한 과학적 답이다." <만들어진 신> p.95

나는 도킨스가 얘기하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정치를 잘못해서 많은 인간이 살육당한 것보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죄없는 사람들이 살육당한 경우가 더 많고, 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의 근본주의자들 때문에 세계가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근본주의는 성서나 코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자신들의 종교 이외를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인 신앙을 갖는 집단 관념이다.  오늘날의 이슬람의 테러나 미국의 만행은 모두 종교적인 이유를 그 기저에 깔고 있다. 그런면에서 나도 도킨스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만행이 있다고해서 우리가 종교 자체를 부정해야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본다.  나는 어떠한 종교건 간에 그 종교 자체의 이념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화합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어떤 종교에 살육을 가르치고 반목과 전쟁을 이념으로 삼은 경전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그러한 신념을 갖고 살아가려는 인간들의 잘못된 신앙과 생활이 오늘의 이 평화롭지 못한 세상을 만든 것이다. 마더 데레사와 조지 부시를 대비해보라.  그들은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한분은 일평생을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분이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과 침략을 일삼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같은 성경을 읽었다. 조지 부시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침략과 살육을 옹호하고 이슬람 같은 타 종교인은 최첨단 무기로 쓸어버려야할 집단이라고 쓰여 있을까?

도킨스는 또하나 이 책에서 실패한 부분이 있다. 많은 부분 신의 존재의 허구와 성경이 소설이라는 관점을 증명하는데 노력하고 있지만, 그가 진정 신이 없다는 것또한 명백하게 증명하지 못했다는것과 19세기의 생물학자 다윈의 이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진화론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했다는점이다.  무신론자들을 잠시 들뜨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신앙인의 신념을 그 정도의 논거로 흔들리게 하지 못했다. 도킨스는 증거를 대면 신을 믿겠다고 주장하지만,  신앙인의 입장에서 봤을때 그는 신이 없다는 명확한 증거도 대지 못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도킨스는 과학자다.  과학에서 하나의 이론이 세워지기까지는 수많은 실험이 필요하다. 그러한 실험실의 과정을 거쳐야만 이론은 진실이 된다.  그가 증거를 대라고 하는 것은 그의 직업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 과학자의 엄밀한 태도로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성은 과학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접근해서 성서속의 사건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간단히 예를 들어 예수님의 기적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죽어 버린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가 잠에서 깨어나듯 살아난다는 것이 어찌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으며, 죽은 지 삼일만에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는 것도 과학적으론 절대 증명 불가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우리는 이 모두를 믿어야 한다.  그것을 믿고 난 다음, 우리 신앙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지, 도킨스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그것은 그 신앙인만이 알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이다. 과학으론 설명될 수 없는 현상들이 내 영혼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설명할 순 없겠지만,  지극한 행복감, 충만감 같은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앞서 얘기했지만 하나님은 리처드 도킨스까지도 사랑하실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능력에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때로 인간은 실수하고 또 범죄할 수 있지만, 언제나 돌아설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성경속에선 회개로 지칭하지만, 구태어 그렇게 종교적인 가치를 지닌 단어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앞에 우리는 모든것을 포용할 수 있으며,  유신론이나 무신론을 뛰어 넘어 정작 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성서속 가르침의 으뜸은 사랑이다. 투쟁이나 전쟁이나 살육이 아니다.  사랑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사랑의 가르침이 허구임을 구태여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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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준 2007-09-2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의 글을 비난으로서가 아니라 비판으로서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종교인들께서 종교를 옹호하신다면 세상은 더 행복할텐데요.

개츠비 2007-09-28 22:24   좋아요 0 | URL
저의 글을 비판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kclamp 2007-09-2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이 진정 도킨스를 사랑한다면 그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요. 안 준 것을 보니 그닥 사랑하지 않던지, 아님 줄 신이 없던지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전 후자라고 봅니다만.

개츠비 2007-09-28 22:24   좋아요 0 | URL
둘다 아니라고 전 봅니다^^

비로그인 2007-09-2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개츠비 2007-09-28 22:2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지나가던, 2007-09-2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메르신화, 조로아스터교, 불교를 융합하여 만든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유일신 야훼가있다면야훼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방관할뿐이죠. 그분은 전지전능하지 않으시기때문입니다.신앙을 통해서 얻는 행복감과 만족감은 단지 심리적효과이지 야훼가 주는 효과는 아닐겁니다. 적어도 야훼는 사랑의 신은 아니니까요. 자신을 믿지 않는다하여 돌로 쳐 죽이라하고 근친에 아동학대까지 장려하며 우상을 파괴하고 자신을 믿는다하여 내리는 전제조건적인 사랑을 인간의 도덕에 비추어봐도 이성적으로 살펴봐도 인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은 믿지 않을것입니다.절대적인 객관성을 지니지 못한 주관적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을겁니다,.

개츠비 2007-09-30 16:42   좋아요 0 | URL
종교는 주관성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영역이라고 봅니다.

흠,, 2007-09-2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킨스는 신이 있을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단지 그 가능성은 홉고블린이나 유니콘혹은 럿셀의 찻주전자나 제우스가 존재할 확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증명은 있다고 생각하는쪽에서 하는것이 증명의 기본인데..창조설이나 지구가 6천년되었다는 거짓을 대중에게 믿게하는 행위가 올바른지 모르겠습니다. 유럽이 그렇듯 이제 우리나라도 기독교를 추방할때인것같습니다.

개츠비 2007-09-28 22:29   좋아요 0 | URL
신앙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 주관을 지키시며 살아가는 것을 누가 방해할 권리는 없지 않을까요?

Powring 2007-09-2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른 사람이 신을 믿든, 안 믿든 전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만, 신의 이름을 빙자해서 권력을 지키고 그 권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 못 됐다고 봅니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아무리 성경을 4차원으로 해석해도 이교도를 말살하라는 내용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권력에 너무 집중되서 한마디로 뿌리가 썪은 상태죠. 그 때문에 소수 올바른 종교인들마저 일반인에게 매도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교와 힌두교는 종교보다는 철학으로 이해하는게 더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은 저도 저자와 같은 생각입니다.

개츠비 2007-09-30 16:40   좋아요 0 | URL
한국기독교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동의합니다. 저도 이슬람 선교는 반대하고, 이슬람을 상대로 개종을 목표로 한 전도도 반대합니다. 모든 종교는 나름 존중을 받아야 하고, 그래야만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압니다. 제가 가진 성경에 이교도 말살에 대한 가르침은 없다고 믿습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개인의 잘못된 신앙관이 원인이겠죠..

무신론자 2007-10-04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말꼬리를 잡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님이 가지고 계신 성경은 어느나라것인지 궁금하군요..구약성경의 야훼가 한말이 님이 가지고 계신 책에는 없나봐요..자기를 믿지 않는자를 돌로쳐죽이고 이교도를 말살하라는 내용말입니다. 도킨스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님처럼 종교를 믿는것이 지극히 개인적이라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것과 님의 신앙과는 별개의 것이 아닌가요? 자기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것이 님이 생각하는 종교의 전부라면 기독교가 주장하는 내용과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도킨스는 바로 그런점을 지적하고자 한것이라고생각합니다.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종교의 핵심이라면 전지전능(모든것을 알고 모든것을 할줄하는)하시고 인류모든것을 좌지우지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것은 허구라고요..

개츠비 2007-10-04 12:01   좋아요 0 | URL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구약만 보고 성경을 얘기하면 안되지요. 구약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어기지 않고, 모세가 구약에서 가르쳐준 10계명의 율법에 수만가지 율법을 추가해 그 율법만을 잘 지키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던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은 그것이 잘못된 신앙이라고 바리세인(모범적 구약신봉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바리세인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하나님)은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도킨스도 이 부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신약 시대에 대해서는 크게 꼬투리를 잡지 못합니다. 이 책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신앙은 개인적 신념속에서 1차적으로 절대자와 교제한다는 측면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종교의 허구를 논하기전에, 올바른 신앙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또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데 사회와 개인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도킨스가 지적한 종교적 해악은 그 종교 자체의 이념보다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개인적 과오에서 기인하는게 큽니다. 과학과 종교, 모두 인간에게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과학의 정점에서 원자탄이 개발됐지만 그것이 현재의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됩니까? 모든 것은 그것을 대하는 인간들의 정신이 문제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