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미래가 온다
다니엘 핑크 지음, 김명철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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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개 물건을 살때 아내와 나는 좀 다른 견해를 갖는다.  아내가 가격과 실용성에 비중을 두는 반면, 나는 무엇보다 디자인을 우선한다. 가격이 비싸더라도 디자인이 좋다면, 매번 오케이하는 쪽은 나다.  남자들의 장난감이라 부를 수 있는 자동차를 보자.  신차가 발표될때면, 내가 보는 것은 그 차의 실용성이나 첨단기능 보다는 차의 전체적인 모양새,  즉 디자인이다.  물론 첨단기능이 뭐가 추가됐는지 보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기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디자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내가 과연 그 차를 선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것은 전자제품을 살 때나 책 한 권을 고를때까지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껏 책은 내용이나 작가를 보고 샀지만,  책 표지가 예쁘면 내용이 실망스러워도 크게 손해봤단 생각은 안 들것 같다.  책이란 장식적 기능도 갖는 거니까.  서점을 가끔 둘러볼때가 있는데, 나의 발길을 `일단' 잡는 것은 책제목과 표지 디자인이다. 

이런 디자인 우선적인 시각은 나의 독특한 성향 때문일까?  그런건 아닌것 같다.  모든 상품의 기능적 차이는 좁혀지고 있다.   후진국은 선진국의 기술을 따라잡고 있다.  선,후진국간 기술격차는 많이 해소되었다.   이제 세계 시장에서 기술력만으로 승부할 수 없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보다 기발한 디자인이다.  현대차 YF소나타를 예로 들어보자.  내 시각으론 YF소나타는 기능적인 면에서 오히려 후퇴했다는 느낌이 든다.  낮게 깔리는 유선형의 지붕을 갖는 바람에, 키가 큰 사람이 뒷 좌석에 앉을 땐 머리가 차의 지붕에 닿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또한 초기 출시 때, 작은 결함으로 리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도로에 나가보면 이 차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만큼 많이 팔렸다는 것이다.   이 차의 디자인은 중형 승용차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이다.  디자인이 실용성을 대체하면서,  많은 남자들이 이 독특한 디자인의 자동차가 풍기는 분위기에 반하여 차를 구입한다.  

산업화 시대는 대량생산으로 상품의 가격을 낮추고, 고품질로 고객에게 신뢰를 얻어야 상품을 잘 팔 수 있었다.  6시그마 운동처럼 상품의 결함률을 최저로 낮추려는 경영기법들이 기업에 전수되었고,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기술력과 품질이었다.  현대 정보화 시대는 하나의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지식근로자들이 대우받은 시대였다.  비상한 머리는 높은 IQ로 무장했고, MBA를 가진 경제 전문가들은 회사에서 대우받았다.  수리 능력이 뛰어난  컴퓨터 프로그래머처럼, 정보화 시대를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을 사회는 중요시 했다.  그들의 높은 성과는 좌뇌의 계산적 지능에 기반하고 있다.   얼마전까지 미국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정보통신 계통의 지식근로자들은 한 해 연봉이 수십만달러에 이르렀다.  변호사들은 법률 문서 하나를 대필해주는 것만으로도 먹고 살만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런데, 최근에 접근불가할 것이라 여겨지던 이들 지식근로자의 업종에 활발한 아웃소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인도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빠르게 미국의 고연봉 지식근로자들을 대체하고, 인도의 법조인들이 미국의 법률서비스에 진출함으로써, 가격파괴를 앞장선다.   

다니엘 핑그는 <새로운 미래가 온다 A Whole New Mind>에서 이 주목할만한 현상을 세가지 개념으로 풀이한다. "풍요,아시아,자동화"라는 것이다.  풍요로움의 시대에 고객이 선택하는 서비스는 사소한 `차이'에 기반한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디자인이다.  그간 대우받았던 계산적인 지능이 뛰어난 지식근로자들을 아시아의 값싼 지식 노동자가 대체함으로써,  고액연봉을 받던 선진국의 근로자들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법조인처럼 정보독점으로 고수익을 누리던 직종은 이제 법률서비스의 원거리 자동화라는 과정을 통해 기계에게 일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좌뇌중심의 지식근로자들의 시대가 가고 있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다이엘 핑크는 이 혁신적인 변화의 시대를 맞으면서 미래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인재상을 이 책에서 6가지 테마로 묶어 설명한다. 그걸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비선형적, 직관적, 전체론적 능력을 소유한 우뇌 중심형 인간의 탄생이라 부를 만 하다. 

우리의 두뇌는 크게 두 개의 반구로 나뉜다.  좌뇌와 우뇌가 그것이다.   좌뇌가 순차적,논리적,분석적인 기능을 갖는반면, 우뇌는 비선형적,직관적,감성적이다.  지금껏 세상은 좌뇌 중심형 인간이 이끌었고, 대우받던 시대였다.   모든 학교 시험은 좌뇌 중심형 인간에게 맞춰져 있었다.   수리능력과 암기능력에 기반한 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은 다른 이들보다 계산적인 문제 풀이를 더 잘 할 수 있어야 경쟁 사회의 상위층을 점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량 생산과 기계화, 정보화 과정을 거치며 수리적인 문제는 사람보다 컴퓨터가 더 잘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회사가 요구하는 인재는 컴퓨터처럼 일처리를 빨리, 정확히, 잘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아니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높은 상상력과 뛰어난 감수성으로 무장하고, 다른 이들이 볼 수 없고, 흉내낼 수 없는 물건을 디자인하거나,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이야기와 상품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인재를 찾게 된 것이다.  세상엔 지금 명석한 인간이 아닌 창의적 인재가 부족하다.  즉,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창재(창의적 인재)가 긴요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다니엘 핑크는 이 책에서 미래를 하이컨셉과 하이터치의 시대로 명명하고,  미래 인재의 6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하이컨셉이나 하이터치는 모두 우뇌속에 담긴 인간의 예술적인 감각, 감수성을 상징하는 단어다.  

디자인   - 하이컨셉 시대의 핵심 능력
스토리   - 소비자를 움직이는 제3의 감성
조화      - 경계를 넘나드는 창의성의 원천
공감      - 디자인의 필수 요소
놀이     - 호모 루덴스의 진화
의미     -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

" 하이컨셉은 패턴과 기회를 감지하고, 예술적 미와 감정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며, 훌륭한 이야기를 창출해 내고, 언뜻 관계가 없어 보이는 아이디어를 결합해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  하이터치란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미묘한 인간관계를 잘 다루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잘 유도해 내고, 목적과 의미를 발견해 이를 추구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   14p. <새로운 미래가 온다>, 다니엘 핑크

이 책을 읽으면서 요즘 회사의 분위기가 데자뷰 현상처럼 아른 거렸다.   갑자기 회사가 스토리텔링에 기반한 고객 서비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이 지긋한 상사들이 어렵게 스토리텔링의 작문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이들이 쓴 글 몇 편을 공교롭게 내가 `감수'한 일이 있었다.   작년에 사내 공모전에서 상을 받게 된 이후에 가끔 이런 일이 내게 맡겨진다.   평소 글을 잘 써보지 않고, 책도 잘 읽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써낸 글은 맞춤법과 어법이 엉망이었다.  그들의 사내 업무 추진력은 내가 보기에도 대단한 것이다.  대중을 사로잡을만한 위엄과 품위를 지니고 뛰어난 연설능력을 갖춘 분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쓴 글엔 구어와 문어의 혼란이 가득했고, 상상력의 빈곤을 피할 순 없었다.  그들이 받은 교육이 좌뇌 중심형 교육이고, 그들이 회사에서 지난 수십년간 요구받았던 능력또한 수치로 환산 가능한 성과물일 것이다.  그러하니, 그러한 성향이 글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이끌 인재의 기본 요건은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쓰는 인재임이 분명하다.  하이컨셉과 하이터치는 먼저 인간의 글 속에서 풍겨져 나와야 한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 자체가 감수성 훈련에 도움이 줄 테니까. 

안타깝게도, 사교육이 만발한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들은 지금 이 시간도 좌뇌를 혹사시키는 교육을 받고, 수능 문제 하나를 더 풀어,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직업또한 의사나 변호사 등 천편일률적이다.  공장에서 상품을 찍어내듯 우리의 교육은 미래엔 쓸모없는 인재를 양산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다니엘 핑크는 이 책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길 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적 현상들을 반영한 것이다.  MBA를 위해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진학하기는 UCLA 예술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하버드 MBA 과정의 합격률이 약 10% 인 반면, UCLA 예술대학원의 합격률은 겨우 3%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MBA라는게 그저 공부만 잘하면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예술대학원이란 예술적 감각이나 재능이 없으면 진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희귀성의 측면에서 MBA를 앞지르는건 MFA임이 자명하다.   과거 MBA를 갖고 있는 이들은 회사의 최고 엘리트로 대우받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미국 업계에서 MBA보다는 MFA(Masters in Fine Arts, 미술학 석사학위)가 더 대우받고 있다.  회사는 이제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인재를 더 선호한다.  계산적인 능력이 뛰어난 인재는 흔하다.  그러나 감성적인 능력이 풍부한 인재는 찾기가 어렵다.  우리 주위에 공부잘하는 아이는 널려있지만,  미술이나 문학적 소질이 있는 아이란 흔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니엘 핑크는 대량 생산, 아웃소싱,정보화,풍요로움을 지나온 미래의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해선, 감성적인 상품을 내놓아야 하고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인재란 MBA가 아닌 MFA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MFA를 가진 인재는 물론 우뇌형 인간이다. 

"동시에 기업들은 공급 과잉의 시대에 자신들의 상품과 서비스를 다른 상품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소비자의 감성에 호소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예술가의 하이컨셉 재능을 경영대학원 졸업자들의 좌뇌형 기술보다 귀중한 가치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p.85  

저자의 예언은 이미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은 그의 예언과 정 반대로 가고 있다는 얘기다.  우린 학교에서 미래 인재가 아닌, 과거 인재를 키우고 있다.  예전에 아이들이 커서, 작가가 된다거나 그림을 그리겠다거나 하면 부모들은 밥굶기에 딱 적당한 직업이라며 두손 두발 들고 말렸다.  훗날 이같은 풍속은 바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도 작가가 되겠다고 하면, 부모들은 흥쾌히 예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핑크의 예언이 맞다면 가까운 미래엔 작가나 예술가가 가장 크게 대우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들의 창의성이란 단시간내에 흉내낼 수 없는 재능이다.  꾸준히 감성적인 인간으로 교육받고, 오랜 수련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족집게 강의가 수능에는 고득점을 얻게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돌덩이같은 무딘 인간을 감성적인 인간으로 일순간 변신케 할 순 없다. 그러한 면에서 교육자체에 사고 전환이 요구된다.  

"정보화 시대에서 하이컨셉 시대로 이동하면서, 좌뇌 중심적 사고에서 우뇌 중심적 사고로 이동해 가는 것, 논리와 분석적 사고에 예술과 감정을 불어넣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중요하다.  빅터 프랭클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이상적인 삶은 두려움 속에서 치즈를 추구하는 삶이 아니다.  그보다는 여행 자체가 목적인 라비린스와 더욱 비슷할 것이다."  p. 246  

다니엘 핑크가 미래 인재의 요건으로 내건 6가지 재능은 모두가 지금껏 소홀히 생각해 왔던 것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사람들은 남과 공감하는 능력, 돈이 되지 않은 이야기를 창조하는 능력,  삶의 여유와 기쁨을 만드는 놀이, 종교적이건,철학적이건 우리 삶의 목표에 닿아 있는 의미의 추구를 멀리해 왔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선, 뭔가 실적이 필요했고 그것은 쉽게 수치화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세상은 이제 점점 바뀌어가고 있다.  비지니스의 세계에서조차 고객의 감성을 자극해야 물건이 팔리는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다니엘 핑크가 미래 인재의 요건으로 내건 6가지 요건을 갖춘 인간은 전인적 인간이다.  그것은 좌뇌와 우뇌 모두를 쓸 줄 아는 ` A Whole New Mind ' 를 가진 인간이다.  

그간 인류의 문명은 좌뇌의 이성적 기능에 의탁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산업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방치해둔 우뇌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모든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이 예술가들로만 구성된다면, 이 세상에 전쟁과 살육이란 우둔한 역사는 더이상 반복되진 않을 거란 얘기가 있다.   남과 내가 다르지 않고, 세상이 모두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아래서 우리는 조화로운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란 수능 문제 한 두개를 더 풀어 낼 수 있는 계산적 지능에 비할 바가 아닌, 고귀한 인간만의 재능이요, 가치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선물한 두뇌 모두를 조화롭게 쓸 수 있는 인간이 전인적 인간이다.  그는 영혼의 절름발이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이 지배하는 미래는, 진정 새로운 미래일 것이다.
 

 

2010.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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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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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선집 9권 가운데 미국편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다.  단편 소설집을 읽은 것이 참 오랜만이다.  이 책에는 19,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 11명의 단편 작품이 담겨 있다. 시간적으로 그리 멀리 있질 않고, 선집을 구성하는 작가들도 그렇게 생소한 것은 아니다.  스콧 피츠 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로, 허먼 멜빌은 <백경>의 작가로,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너세니얼 호손은 <주홍글씨>로 이미 독자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작가들이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작품을 제외하곤, 이 모든 장편 소설을 운좋게 20대에 모두 읽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특별히 내겐 그리 낯설지 않은 단편집이었다. 

이 작가들의 대표적 장편 소설에서 받은 인상이 무척 강렬했고, 그것이 세계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상또한 컸기 때문에 9개국 114편의 단편들을 담고 있는 창비의 세계 문학 선집 중 미국편에 먼저 손이 간 것은 내겐 자연스러웠다.   장편소설은 긴 호흡, 장대한 서사가 소설읽기의 맛을 더한다.  장편을 통해 작가는 삶을 해석하는 원숙한 기량과 철학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이 단편을 썼다면 과연 어떤방식으로 독자를 사로잡았을까,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리라.   장편을 잘 쓰는 작가가 꼭 단편까지 잘 쓰란 법은 없다.   육상 경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장거리를 우승한 선수라고 단거리에 우승하란 법은 없는 거니까.

그러나 미국 문학편 <필경사 바틀비>에 담긴 눈에 익은 작가들과 내겐 생소했던 몇 작가들의 단편 모두는 기발한 상상력과 경험, 독특한 서술 방식과 문체 때문에 읽는 내내 한 권의 장편 소설이 줄 수 없는 다채롭고 향기로운 즐거움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19세기와 20세기 미국인의 일상과 사회상을 담아내면서, 거기에 얽힌 인간의 삶과 심리를 풀어내는 묘미는 현대의 독자에게 시간과 역사라는 단어의 중량감을 문학작품 안에서 느낄 수 있도록 도왔다. 

이들 9편의 단편 작품들 안에는 한때 영국의 식민지에서 1774년 7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고, 다시 종교와 경체 체제에 기인한 갈등으로 남북 전쟁을 겪는 미국인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였기에 종교적인 엄숙성과 일탈 사이의 갈등[너새니얼 호손, 젊은 굿맨 브라운]의 문제가 부각된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최대 부국으로 발돋움 하는 미국은 산업자본주의의 대표 국가로 승격된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개인의 익명성과 수동성의 문제를 다룬 듯한 작품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이 중편 분량으로 담겨 있다.   죽음이란 시간과 역사의 보편성을 품어안는 이야기[스티븐 크레인, 소형보트]가  시대를 뛰어넘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최초로 페미니즘 경향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샬롯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이 그 시절 여권의 위치와 여성해방 운동의 시원을 알린다.   노예문제를 다룬 [찰스 W. 체스넛, 그랜디썬의 위장]은 혼혈 흑인인 작가의 반인종주의적 경향을 그대로 작품에 녹아내며, 남부와 북부 사이에 퍼져 있던 노예 해방 문제로 얼킨 갈등의 현상을 유추케 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전편으로서 이 소설의 초고라고 불릴만한 [F.스콧 피츠제럴드, 겨울꿈]은 하나의 원숙한 장편이 탄생하게 된 밑그림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귀중한 경험을 제공한다.

 
1.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변호사인 화자의 사무실에 바틀비라는 필경사(필사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가 들어온다.  차분하고, 온순한 태도에 반한 화자는 그의 책상을 자신의 곁에 두고 신임하려 든다.  그러나 필사 작업을 하던 바틀비에게 화자는 다른 작업을 부탁게 되는데, 그는 고용주라 할 수 있는 변호사인 화자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답한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한번은 그럴 수 있을테지만, 그 이후 바틀비는 화자가 시키는 모든 일에 똑같은 답변을 한다.  그는 이 소설속에서 철저히 고립된다.  그의 거부는 이유없는 반항처럼 보이며, 거부를 보일수록, 그의 고립은 사무실안에서, 월가 안에서, 아니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더욱 철저히 심화된다.    그가 내뱉는 말은 오직 "안하고 싶습니다"라는 거부의 의사 표시 뿐이다.  사무실의 다른 필경사들과 고용주인 화자가 바틀비의 `거부'에 심리적인 충격을 겪으며, 때론 황당해하고, 분노하며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한다.   자본주의 사회 아래서 그것도 가장 약아빠진 사람들이 모여드는 월가, 거기에 등장한 이 기이한 인물은 대체 누구인가?

소설은 이제 화자의 끝없는 내면 갈등, 즉 그를 해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대체, 그는 누구이며, 고용주의 말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라는 증폭된 의문과 그의 처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탐색하는데 집중된다.  가진것도 없고, 가족도 없고, 거처할 공간도 없는, 바틀비는 알고보니 일과가 끝나면 화자의 사무실에 남아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는 점심때도 외출해 밥을 먹지 않고, 사환을 시켜 생강빵 몇 개를 먹을 뿐이다.   큰 보상금을 주고 그를 내쫓으려 한 화자의 제안에도, 바틀비는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는 거부 의사를 건낸다.  이 궁지에 빠져버린 합리적 자본주의자,  월가의 대표적인 지식인,  바틀비를 신임했던 그의 고용주인 변호사인 화자는 이제, 아예 그만 남겨두고 사무실을 통째로 옮기는 해프닝을 벌인다.

돈을 많이 벌고,  한 푼 이라도 더 받기 위해, 고용주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득실대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좋은 집을 얻고, 더 좋은 차를 사기 위해,  고용주가 시키는 모든 것에 예스만을 욽어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턱대고 노우 노우를 연발하는 이 사람, 바틀비는 무엇을 상징하고,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인가 ?  자본주의의 수장인 고용주를 무너뜨리는데 사용된 그의 무기는 "노우"라는 단 한마디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디시피 100여년전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21세기에 직장에서 바틀비 같은 이를 만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작품의 바틀비란 인물은 매력적이자 동시에 이해불가능한 인물이다.  한번의 노우는 가능하지만, 끝까지 노우라고 말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법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굶어죽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바틀비는 결국 굶어 죽게 된다.  아니, 그것은 음식을 앞에 놓고 죽는 거였으니 일종의 단식이었다.  독자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아니 그 다채로운 상징속에서 바틀비를 처음 만났던 고용주처럼 번민하게 될 것이다. 

" 난생 처음으로 가슴을 찌르듯 밀려오는 우수의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껏 나는 감미로운 슬픔밖에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다 같은 인간이라는 유대감이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어두운 우수로 끌어들였다.  형제애의 우수 !  나나 바틀비나 다 같은 아담의 후예가 아닌가. 나는 그날 내가 보았던 화사한 비단옷의 생기찬 얼굴들을 기억했다. 나들이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미시씨피 강 같은 브로드웨이를 백조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그들을 나는 그 창백한 필경사와 대조했다.  우리는 세상이 명랑하다고 여기지만 불행은 멀찌감치 숨어 있어서 우리가 불행이 없다고 여길 뿐이다."   72p.  허멀 멜빌 <필경사 바틀비>

 

 2. 샬먼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 

우울증과 정신 분열증 증상을 보이는 여성이 요양차 기거하게 된 한 시골의 저택에서 보낸 며칠을 1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남편과 오빠 모두 명망 높은 내과 의사로서, 그들은 주인공 `나'의 정신 이상 증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정신과 질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자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적극적으로 그의 고민을 들어주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주인공 남편은 아내의 질환을 정신병으로 인정하길 거부한다.  그저 요양이 며칠 필요한 단순한 신경성 질환 정도로 여기고 있다.  요양차 기거하게 된 시골의 2층방은 조용하고, 안락하다. 창밖으로 시골의 멋드러진 풍경이 펼쳐지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화자에겐 더없이 안락한 장소처럼 보인다.  그러나,  방 전체를 둘러싼 노란 벽지의 풍경은 예사롭지 않다.

벽지엔 페이트 칠이 되어 있고, 낙서가 보인다. 군데군데 오래된 벽지들은 뭉텅뭉텅 벗겨진데다 그 무늬가 미로처럼 복잡해서 그것을 따라가다보면 눈이 어지럽고 흐릿해지는 기분이 든다.  벽지의 색깔은 혐오스럽고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햇빛에 묘하게 색이 바래면서 썩어가는 불결한 노란색이다. 또 벽지의 어떤 부분은 우중충하지만, 야하게 짙은 오렌지색이며 어떤 부분은 황록색을 띤다.   주인공은 이 방에 살았던 아이들이 분명 벽지를 증오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 공간의 벽지가 이제 주인공을 매일 매일 공포에 떨게 한다.  어느날 밤 달빛이 노란 벽지에 비추어오자,  그 무늬는 마침 감옥의 쇠창살로 변하는데,  자세히 보니 그 무늬 안에 한 여인이 기어다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무늬 뒤에서 한 여자가 수그린 자세로 여기저기 기어다니는 것 같다. 나는 그게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궁금해한다 -- 생각하기 시작한다 -- 존이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었으면! "     172p.  샬롯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

화자의 서술은 실제의 현상을 설명한 것은 아니다.  화자는 미쳐가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페미니즘의 서곡을 알리는 작품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여성 참정권은 1920년대에야 전 연방주들에서 인정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1892년에 쓰여진 작품이다. 여성의 권리와 여성의 자기실현이란 힘있는 남성들에 의해 항상 제압당했다. 그것은 폭력성을 띠기도 했지만, 때론 암묵적으로 사회적 관습인냥 치부되기 마련이다.  남편이 아내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이나,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쓰기를 남편이 금지하는 모습은 그 당시 여성들을 억압하는 상징성을 나타낸다.  오래된 관습이란 때로 미풍양속으로 포장돼 여성들의 권리를 억압하곤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남편과 오빠는 내과의사로서, 아내를 자신의 방식으로 치료하고 도우려 한다.  특별히 나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 남성들이 여성의 언어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양은 남편에 의한 감금이 된다.  공포로 치부되는 공간을 벗어나려고 1층으로 방을 옮기자고 요구하는 화자의 주장에 남편은 "신경과민일 뿐이야"라는 친절한 무시로 일관한다.  여전히 남편은 아내의 고민을 무시하고, 자신의 논리로 그 주장을 묵살한다.  친절하게 거부하는 것이 더 잔인한 법이다.  이 작품은 여성 해방을 작품의 말미에 암시적으로 담아낸다.  자신을 노란벽지가 있는 공간속에 계속 가둬둔 남편을 향해, 아내는 그 벽지를 찢어냄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나 드디어 나왔어요, 내가 말했다. `당신과 제니의 반대를 무릅쓰고요. 그리고 내가 벽지 대부분을 벗겨냈으니, 당신이 나를 도로 집어 넣을 수는 없어요!'"  p.184

이 작품은 대학시절 영어원문으로 읽고 작품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샬롯 퍼킨스 길먼의 노란 벽지를 이 작품집에서 만난게 무척 반가웠다.  십수년 전 원문을 더듬더듬 읽어내려가면서 작품을 분석하고, 의미를 해석하려 노력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기억에 돋아났다.  난 그 당시 어떻게 이 작품을 분석했을까?   

 

3. F.스콧 피츠제럴드 <겨울 꿈>

<위대한 개츠비>를 몇 해전에 읽은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을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이란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향을 많이 보아 왔다.  그런데 그러한 측면에서 해석하려 들수록 작품은 난해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엔 번역상의 문제로 치부했는데, 창비의 단편선집에서 발견한 피츠제럴드의 단편 <겨울 꿈>을 읽고서, 그러한 내 생각을 수정하게 됐다.  <위대한 개츠비>를 하나의 보편적인 연애소설로만 읽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이 단편은 장편으로 큰 성공을 거둔 <위대한 개츠비>의 초고 수준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부유한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과의 실패한 사랑 이야기라는 설정이 비슷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랑의 끌림이란 주제의식도 많은 부분 겹친다.  

1960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가 최대의 성공을 거둔 소설 작품은 <이방인>이란 소설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기 전에 그는 하나의 작품을 습작으로 내놓은 바 있다.  바로 <행복한 죽음>이란 소설이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방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행복한 죽음>의 실패를 통해서였다.  <겨울 꿈>은 피츠제럴드에겐 <위대한 개츠비>의 전초가 되는 작품 같다.  그러나 카뮈와 다르게 피츠제럴드의 단편은 그 자체로 훌륭한 성공을 이룬다.  장편의 난해함을 걷어내고, 사랑과 연애의 실패담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들을 담아내기에 <겨울 꿈>은 충분히 아름답고 멋드러진 작품이다.

부유하지만 순정적인 사랑에 집착하는 남자 덱스터와 아름답지만 자유분방하고 인생에 숙명론적 기질을 품고 있는 여인 주디 존스의 비극적인 젊은 날의 사랑의 실패담을 이 소설은 피츠제럴드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미국편을 이루는 단편선집 가운데, 번역상의 문제이긴 하지만, 문체상의 독특함은 몇 개의 소설에서밖에 살아나지 못하는데 바로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번역으로 한번 걸려진 이후에도, 그 애틋하고 살가운 문체의 힘이 곧바로 독자의 가슴을 울려주는 힘을 잃지 않는다.

"덱스터는 더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으니 이제는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치 주디 존스와 결혼하여 그녀가 자기 눈앞에서 삭아가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 듯이 그는 더 소중한 무엇을 방금 잃어버렸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꿈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빼앗긴 것이었다."    p.305  F.스콧 피츠제럴드 <겨울 꿈>

이 작품이 독자의 가슴에 큰 공명을 남기는 것은 젊은날 누구나 사랑의 열병 속에서 겪어봤음직한 상실과 그 열정의 허망함을 소설이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덱스터나 <위대한 개츠비>의 남자 주인공은 도덕과 관습 모두를 역행하는 사랑을 감행한다. 그것은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남자주인공들은 모두 부를 일구는데 일가견을 갖고 있지만, 사랑에 있어선 약삭빠르지 않다.  약삭빠르게 굴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사랑에서만큼은 진실되기를 원한다.  상대여성이 바람둥이고,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더라도, 그는 사랑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려든다.   어쩌면 그게 진짜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가는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건 사랑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놓인 거리감에 비할 바가 못된다.  우리는 살면서 끝없이 젊은 시절의 잃어버린 사랑과 마주앉는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속에 나오는 남자주인공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서도,  불가능한 사랑, 이미 식어버린 열정을 되찾고자 노력한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 즉 그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사라진 사랑의 열망이런지도 모른다.   그 진실을 드러내주는 작품을 피츠제널드는 썼던 것이다. 

 
4. 그외의 작품들과 창비의 또다른 세계문학 선집들

선집에는 이외에도 너무나도 유명한 에드거 엘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가 담겨 있다.  어린 시절 한번 읽고 나서 내 기억속에 그 괴기로움을 각인시킨 명작이다.   마크 트웨인의 <캘레바래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는 최근에 내가 읽은 그의 자서전에서 잠깐 언급된 것이 기억난다.  마크 트웨인이 얼마나 입담 좋은 작가인지 깨닫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헨리 제임스의 <진품>이란 작품은 이 선집 가운데 읽는 재미가 솔솔한 작품이 될 것이다.  가짜가 진품을 대체하는 시대를 묘파하는 문장들은 오늘에도 그 비유가 다양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성형 미인들의 당당한 아름다움은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는 사회의 일반화를 드러낸다고 해야 할까?

창비의 미국편을 읽었지만, 창비 세계문학단편선집은 9개국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거대한 기획물이다.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장편들에 우리 독자들은 익숙했다.  문학 작품을 분량으로 평가할 순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간 장편에 너무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창비의 이 기획물들을 통해, 각국의 다양한 단편 문학을 앞으로도 섭렵해 보려 한다.  미국편은 눈에 익은 작가들이 많아 읽기에 그리 낯설지 않았지만, 중국이나 포르투칼, 라틴 아메리카 등의 작품 선집은 그 생소함이 매력이어서 나름 기대가 된다.  단편 문학 선집은 한 권으로 다수의 작가와 작품을 접할 수 있어 좋고, 그 다채로움 만큼 각국의 문화와 역사를 훑는 가장 손쉬운 방벙을 제공할 것이다.

야간 근무를 하는 새벽 시간, 밖은 비가 오고 있었다.  마침 나는 이 선집의 단편 중, 스티븐 크레인의 <소형 보트>의 난파선 표류기를 읽었다. 새벽 시간 잠이 오는 몽롱한 정신 사이로 창밖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 눈에 들어온 문장들은 100여년 전 작가의 실제 난파 경험을 묘사하고 있었다.  거대하고 육중한 바다 한 가운데 난파된 배에서 겨우 소형 보트에 옮겨탄 이들의 생명을 향한 끝없는 사투가 한 편의 문학 작품속에 현실감 있게 묘사된다.  자신의 실제 난파 경험을 작가는 이 소설에서 차용한다.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그 절박했던 기억속의 순간을 작가는 훗날 문학 작품으로 남겼다.  

세계를 돌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스티븐 크레인은 29세에 요절 한다.  100여년을 훌쩍 뛰어넘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 문장의 힘은 무엇인가?  밖은 여전히 빗방울이 세차게 창을 두드렸지만, 내가 있던 공간은 스팀으로 따뜻했고 정적이 감돌았다.   그럼에도 내 눈에 비춰오는 문장은  나를 가슴조리게 하고,  결국 치열하게 삶을 사유하게 만들었다.  그 새벽에 내 영혼을 침식해 들어오던 그 듬직한 문장들이 바로 문학이 건내는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0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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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던져라 책이 답한다
김은섭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작년에 읽은 인상깊은 책 한 권이 있다.  이외수의 <청춘불패>라는 책이다.  이 책은 자기 계발서 같기도 하고, 문학적 향기가 솔솔 풍겨서 한 권의 수필집 같기도 하다.  그 범주가 어디든 간에,  그 책엔 살아있는 문장들이 가득했다.   이외수는 특유의 비유와 은유로 젊은이들이 헤쳐가야할 세상을 설명하고 자신의 경험을 빗대, 지혜를 전수한다.  그 책엔 백수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담겨 있다.  젊은날 먹는 문제 하나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던 작가의 인생역전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이외수는 결혼하고 아내를 한 번도 고생시킨적이 없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그는 한때 백수였고 삼류 작가였지만,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위대한 작가로 성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비록 나이가 많은 백수라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정진하라. 지금부터라도 단 하나의 꿈을 선택하고 잠을 줄이면서 의지력과 집중력을 고양시켜 꾸준히 실력을 연마하라. 현대 사회는 실력이 절대적인 성공의 조건이다. "  이외수

가끔 책에서 얻은 지혜를 수첩에 적어 놓곤 한다.  이외수의 이 문장을 수첩에서 다시 만날 때마다, 힘이 불끈 솟는다.  마지막 구절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실력이 절대적인 성공의 조건'이라는 것.  맞다.  이제 서른 중반을 보내고 있는 내게도 20대는 악몽같은 시간들이었다.  취업,연애,결혼 등 하나도 쉬운게 없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뿐, 나를 한때 궁지로 몰아넣었던 그 세가지 고민거리는 이제 내겐 씁쓸한 추억이 되었다.  그때 난 무일푼의 백수였고,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실연의 아픔을 겪었다.  또 매일 줄어드는 통장의 잔고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인생이란 번민의 연속인가?  지금 내게 고민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 시절만큼 절박한 건 아니다. 여하튼, 나는 지금 안정된 직장과 따뜻한 가정이란 인생의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갖고 있으니까.  그러나 내 인생이 가끔 정체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곤 한다.  현대인의 고질병인 불안은 예외가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가 되었든, 그는 불안이란 만성적 피로감을 호소한다.

직장생활 6년차에 접어든다.  새로운 직장에 들어와 가슴 설레던 시간들이 있었다. 달라진 환경, 새로운 사람, 주어진 낯선 일들, 기대에 못미쳤던 일에 대한 불만족, 인간관계의 어려움, 다양한 상사들의 개성에 나를 끼워 맞추는 일의 피곤함 등. 지난 5년간 내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책상물림으로 살았던 학생시절이나 직장을 갖기를 갈망했던 백수시절의 내 환상을 철저히 파괴했다. 학생이나 백수가 직업인의 정신으로 개조되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번민하고, 갈등했던 시간이 5년이었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   

지난 5년간 나는 책읽기에 나름 노력했다.  결혼을 하고 생활의 안정을 찾자, 책읽기는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내 독서방향은 주로 인문학 서적들에 관한 것이었고,  실용서라는 경제,경영, 자기계발서는 내 독서 리스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실용서는 직장인에게 일종의 멘토와 같은 것이다.   오히려, 직장에서 훌륭한 멘토들을 많이 만났던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지금 되돌아 보면, 내가 실용서 독서에 공을 들이지 못한 것은 일종의 오류처럼 보인다.   인문학은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업무와 인간관계, 그리고 직업인의 마인드를 확보하는데는 실용서 독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마침 3월, 난 5년간 몸담았던 소속에서 새로운 소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직장생활과 독서의 조화를 강조했던 내 삶에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실용서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할 시점이 찾아온 것이다.

"그의 모든 조언은 `불행하게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라는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바로 `나'를 위해 나답게 살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내가 내 배의 선장이고, 운명의 주인'이라는 철저한 주인정신 없이는 인생은 타인의 것이 되기 십상이다.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삶에는 어떤 성취도, 보람도 없다."  <내가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리처드 브랜스 지음)  리뷰,   p.87

네이버, DAUM 등 모든 포탈에서 파워블로거로 인정받는 실용서 독서와 리뷰의 귀재(鬼才), 리치보이 김은섭님이 드디어 책 한 권을 펴냈다.  지난 1월 증정본 한 권을 선물받고, 일독할 기회를 노리다 며칠전에야 겨우 책을 잡았다.  지난 몇 해 그의 블러그를 방문해 경제,경영, IT분야의 최신 서적에 관한 그의 성실한 리뷰를 살펴보고 감탄한 적이 많았다.  그는 인터넷 세계의 수많은 실력있는 도서 리뷰어들 가운데서도, 실용서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물들을 매일 쏟아내는 전도유망한 리뷰어다.  그의 리뷰를 읽다보면, 한 권의 책이 그의 깔끔한 문체속에서 논리정연하게 전개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한권의 문학서적을 리뷰하는 것과 실용서의 서평을 쓰는 작업은 차원이 다르다.  문학작품은 글쓰기의 감상이 주를 이룰 수 있지만, 실용서는 한 권의 책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책의 주요 내용을 독자에게 가장 짧고 간결하게 압축해 전달해야 하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면에서 김은섭의 리뷰는 그 모두를 충족시키는 양질의 생산물이다. 

교보문고에서 출간된 김은섭의 <질문을 던져라 책이 답한다>는 그가 자신의 블러그에 공개한 리뷰 600여편 가운데, 직접 엄선한 100여 편을 담아 묶어낸 책이다.   목차가 인상적인데, 실용서를 4개의 대목차로 구획하고,  다시 10개의 소목차로 분류하여 거기에 직장인이 읽어야 할 경제,경영,자기계발서를 주제별로 모았다.   4개의 대목차 앞에는 하나로 묶어낸 책에 관한 저자의 흥미로운 총평이 담겨 있어 단순히 리뷰를 담아낸 책이란 편견과 단조로움을 빗겨간다.  어떤 책이건  목차를 보면 한 권의 책이 전개될 양상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목차 자체만으로도 그 쓰임이 유용하다.  독자들은 저자의 리뷰를 모두 읽을 수 있겠지만,  소목차별로 정리된 100여권의 책 가운데 특히 마음에 와닿는 책을 자신의 독서리스트로 바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실용서들은 이미 베스트셀러로 눈에 익은 것들이지만, 독서폭이 넓지 않은 실용서 독자들에겐 대부분의 책이 무척 생소한게 사실이다.  그러나 실용서 독서와 리뷰로 특화된 블러거인 저자의 안목으로 또한번 걸러진 책들은 그 자체로 충분한 신뢰를 보낼 수 있다.  나또한 이 책을 읽으며 수십권의 실용서적을 독서리스트에 추가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의 상세하고, 친절한 리뷰를 통해 100여권의 실용서를 짧은 시간, 요약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이 책을 읽는것만으로도 실용서 독서의 길을 새롭게 다지는데 큰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수많은 파워블러거들은 나름의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을 갖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무수히 많은 책을 읽어왔고, 독서와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  모든 파워블러거들이 책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낼 수 있는 파워블러거는 문장력은 기본이고, 컨텐츠의 독창성과 한 영역을 특화한 경우가 많다.  리치보이 김은섭은  경제,경영,자기계발 분야의 독서에 힘썼고, 완성도 높은 서평들을 계속해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독서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능동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난 당신에게 꼭 필요한 좋은 책을 소개하여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벌어주려는 것이다.  나는 대학교수도 아니고, 책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다. 단지 당신보다 조금 먼저, 약간 더 많이 책을 읽은 사람, 좋은 책을 찾아 읽은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한 사람에 불과하다. (중략)  대학을 졸업한 후 10여 년간 직장 생활과 사업을 하면서 풀기 힘든 고민과 문제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책을 통해 해답을 찾으려 노력해왔고, 그 덕분에 용케도 지금껏 잘 살아오고 있다.  그동안 쌓아왔던 나의 독서경험들을 이 책을 통해 전해주고자 한다." 저자의 말 p.5

그간,  경제,경영,자기계발 분야 등 실용서의 독서에 소극적이었던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책들이 많았다.  인문학에 치중된 독서였지만, 직장 6년차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내가 읽은 책들 덕분에 회사에서 생각지 못한 성과를 낸 일들이 있었다.  직장 초년이란 햇병아리로 자신의 역량을 내보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일 뿐, 신입 사원이 영원히 하찮은 일만을 도맡진 않는다.  실력과 내공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자신의 능력를 펼칠 기회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찾아오는 기회를 모두가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준비되지 않는 사원은 영원히 신입처럼 대우받고, 비중없고 성취감 없는 직장 생활을 이어가다 낙오할 가능성이 있다.   직장인에겐 오직 두 부류가 있을 뿐이다.   성과를 내는 직원과 그렇지 못한 직원.  이 결정적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꾸준한 독서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직장인에게 독서의 중요성를 깨닫게 한다. 더불어, 직장인이 왜 실용서를 읽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알려준다. 더불어, 도무지 실용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떤 책을 선별하여 독서해야 하는것인지, 고민하는 독자에게 친절하고 신뢰도 높은 리스트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 책을 실용서 읽기의 로드맵으로 삼아,  남과 다른 성과를 낼 수 있는,  모든 회사의 CEO들이 그렇게도 찾아 헤매는 창조적인 인재인, 창재(創才)로 거듭나 보자.   인생은 짧지만, 직장생활은 길다.   당신의 길고, 행복한 직장 생활의 비결은 당신이 선택한 실용서 한 권 속에 담겨 있다.

 

2010.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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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의 양지만을 거쳐온 당신께 묻습니까?   한번이라도 완전하게 세상을 부정해본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우여곡절의 연속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인생의 행로를 한번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잘 교육받은 부모밑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의 삶이란 대개 보지 않아도 명확합니다.  정규교육이란 평균치의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문명의 은밀한 제도이자 작용이지요.  그런 환경속에서 자라나는 인간은 세상을 부정하는 법을 모릅니다. 아니 서툴다고 해야 할까요?  언제나 긍정하도록 교육받기 마련이니까요.   만약, 누군가 정해진 행로를 이탈해 나가려는 존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소속집단에서 철저히 배척받고 비난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도속에서 길러진 어른들의 현재는 어떻습니까?  완벽해 보이나요?  완벽하다면,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이렇게 모순덩어리로 가득차진 않을 겁니다. 일탈을 꿈꿀 수 없도록 사방에 감시망이 쳐진 세상, 그러나 그들이 쳐놓은 감시망이란게 자신들의 잣대로 꾸려진 허위와 위선의 조각품 아닙니까?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지난 1월 27일 미국 뉴햄프셔 코니쉬의 자택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생전 단 한 편의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Catcher in the Rye>을 발표하고, 세상과 영원히 담을 쌓고 지냈던 은둔의 작가는 그렇게 조용히 영면에 들었습니다.  미국의 언론과 미국인들이 뽑은 몹시도 자의적인 것이긴 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언제나 미국인들이 세계 100대 소설로 뽑고싶은 명작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지나친 비속어를 사용하고, 청소년의 정신건강에 해가 될 흡연,음주,성적문란함 등의 묘사로 한 출판사로부터 작품의 일부 개정을 요구받기도 합니다. 나중엔 이 출판사는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지요.  이후, 샐린저는 기분이 상한 나머지 다른 출판사를 통해 원본 그대로를 출판했고,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니까요.

평생 철저한 은둔 생활을 이어온 것 때문인지 세상 사람들은 샐린저를 괴짜로 취급합니다.   그 이후, 이 전설적인 작가와 소설에 얼킨 몇가지 일화들이 있지요.  그 연관성이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1980년도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넌을 권총으로 살해한 살인범 마크 칩맨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소지하고 있었고, 자신이 그 소설을 통해 영감을 얻었다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만약, 그의 살해 동기가 이 소설과 연관이 있다면 그날 그가 입고 있던 팬츠의 상표까지도 조사해볼 필요가 있는거 아닐까요? :D  소설의 인기에 끌려 많은 사람들이 작가와 작품을 세상속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요.  그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가 작품의 영화화를 위해, 샐린저를 찾았다가 문전박대의 수모를 당했다고 하는데 샘통이지요.  은둔의 삶을 트레이드 마크로 알고 사는 작가를 만나려면 사전에 만날 의향이 있는지 여부는 타전하고 방문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   지난해 들려온 흥미로운 뉴스 하나는, 작가의 허락없이 <호밀밭의 파수꾼> 속편을 쓴 작가가 셀린저에게 고소를 당했다는 겁니다.  이건 더 황당한 일이죠.  속편은 작가 본인이 써야지 왜 제 3자가 허락도 없이 씁니까?   이러한 내용들은 언론에서 샐린저와 그의 소설을 이야기하며, 가십거리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입니다.  기자님들께 묻습니다.  이러한 가쉽으로 독자를 낚는 것이 언론의 사명일까요 ?

작가를 평가하는 근거는 작가의 괴짜적 `프라이버시'가 아닌`작품'입니다.   작품을 읽지 않고 그저 가십거리나 즐기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대로 기사를 써대는 신문기자들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차라리 샐린저의 괴짜적 삶보다는 작품의 분석기사나, 기자들의 독후감 한 편을 더 읽고 싶습니다.  아니면, 일독을 권장하시던지.. 

1951년에 발표된 <호밀밭의 파수꾼>은 작가의 나이로 32살에 쓴 작품입니다.  1950년대에는 평균 수명도 그리 길지 않았으니 살만큼 살고, 산전수전 다 겪은 작가가 자신이 살던 마을의 어느 호텔방에 들어가 3주간의 칩거끝에 탄생시킨 작품인 것이지요.  이 작품의 주인공은 홀든 콜필드 입니다. 부유한 중산층 부모밑에 자란 그는 유명 기숙 사립학교인 펜시의 일원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퇴학을 당하고 맙니다.  퇴학의 이유가 여러가지겠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적부진입니다.  17살, 소년이 퇴학을 당할 처지에 놓이자 심적으로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3일후면, 퇴학 통지서가 부모님의 자택으로 배달될 것이 확실해 집니다.  3일후에 짐짝인냥 기숙사에서 쫓겨나느니, 차라리 야반도주를 선택합니다.  소설은 이제 뉴욕행 밤기차를 타고 부모님이 사시는 뉴욕으로 올라온 콜필드의 3일간을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나갑니다.  뉴욕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세상의 비릿한 풍경들을 훔쳐보고, 이 세상에 대한 느낌을 17살의 눈으로 그려보이지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내면의 불안, 자신이 꿈꾸는 삶의 불확실성을 앞에 놓고 17살 소년의 내면의 흐름과 변화를 놀랍도록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시대와 장소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여전히 17살 사춘기의 소년소녀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는 증거이겠죠. 홀든 콜필드는 어른들의 세계에 `이유있이' 반항합니다.  그 이윤 어른들의 행동이란게 모두다 `엉터리'라는 거죠.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그 반대를 가르치니까요.   

"펜시의 토요일 밤 메뉴는 언제나 똑같았다. 저녁 식사로 비프스테이크가 나오는데, 그건 성찬이다. 학교측에서 그런 성찬을 베푸는 이유는 일요일에 학교로 찾아오는 많은 학부모들이 틀림없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젯밤에는 무엇을 먹었니?'하고 물을 것이고, 아들들은 `스테이크를 먹었어요'하고 대답할 것을 서머 교장이 미리 계산에 넣었기 대문이다."    J.D.셀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 58  

17살, 아직 여물지 않은 이성과 사유로 세상을 판단하려니 세상이 얼마나 바보처럼 보이겠습니까?  부모님이 사주신 타자기를 판 돈으로 여비를 마련한 콜필드. 뉴욕행 기차에 올라 우연히 한 여인과 마주칩니다.  말을 해보니 같은 반 친구의 엄마죠.  이 친구 얼마나 엉뚱하냐 하면,  그 엄마에게 반합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17살 소년이 40대의 아줌마에게 반해서 설레고 있다는 것.  그가 놀랍도록 솔직하고 순수하다는 증거이겠으나, 어른들의 눈에야 비행청소년으로 보이겠군요. 그러다, 이제 뉴욕의 한 호텔에 들어서지요. 그런데 왠일입니까?  호텔 건너편에서 못볼꼴을 보고 맙니다. 알만큼 아시는 어른들께서 호텔방에서 저마다 화려한 변태짓을 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을 흉내내고 싶어 술도 먹어보고, 춤도 쳐보고, 성매매도 합니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모든 것을 콜필드는 `경험하려' 합니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것은, 그게 나쁜 것이어서 그럴까요?   그러면 왜 어른들은 그 모두를 즐기는 겁니까?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홀든 콜필드는 특유의 상소리를 내맽게 되지요. " 엉터리,바보,변태들, 도저히 참을수가 없어"

주인공 콜필드처럼 이 소설은 당돌합니다.  읽는 사람을 저히 당황스럽게 하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엉터리니, 변태니 하며 덤벼드는 이 17살 꼬마한테, 일장 훈계라도 한소리 하고 싶은 어른들도 있을 겁니다.   '임마, 네 나이가 몇인데 벌써 술먹고 담배나 피우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다 퇴학이나 당하니? 너 어른이 되면 뭐가 될래?  공부해야지, 성공해야지, 그래야 사람답게 산단다" 이렇게 말이죠.  어른들이란게 무척 단순합니다.  원래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지요. 그런데 몹시도 단순하게 만들어놓은건 무엇입니까?  콜필드가 혐오하는 `학교' 아닐까요?  단순하면서도, 덤으로 순수하지도 않는게 어른들의 특징이지요.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욕망의 동물'정도 될까요 ? 

이에 반해, 홀든 콜필드는 무척 순수하고 생각이 깊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구요?   술,담배나 즐기고, 퇴학이나 당하고, 여자와 놀아나는 이 구제불능이 어떻게 순수하냐구요?  아닙니다. 그는 최소한 평균치의 어른들이 하지 않는 것 하나를 할 줄 알거든요.  그것은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할 줄 안다는 겁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거지요.   이 아이에게 훈계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어른들은 이 차이 하나로 욕망의 동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만들어진대로, 세상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는 수동적인 인간들이지요.  아무런 의문도 없고, 질문도 할 능력도 박탈당한 사람들, 그게 바로 평균치의 어른들입니다.

그가 벗어난 학교라는 공간은 이러한 평범한 어른들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공장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모습으로 길러지고, 또 그 체체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교육받습니다. 이 소설의 가치는 여기에 있습니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비행'은 그저 곁가지일 뿐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러한 반항을 통해, 어른들의 세상을 고발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콜필드가 학교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뭔가 통쾌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가방 따위를 모조리 손에 들고는 다시 계단 옆에 서서 마지막으로 복도의 저쪽 끝까지 바라보았다. 울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른다.  나는 빨간 사냥모자를 내가 좋아하는 식으로 모자 챙을 뒤로 돌려 쓰고 있는 목청을 다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바보들아, 잘들 자거라!'"     J.D.셀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 58 

맞습니다.  이 통쾌함은 아마도 우리의 경험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아요.  퇴학당할 정도의 경력을 가진 아이완 상종을 안해야하고, 안하는게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의 비행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작은 움직임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학창시절만의 문젠 아니죠. 세상을 변화시키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우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도를 안하는거죠.   학교에 범생이 있다면 회사엔 예스맨이 있겠죠. 회사의 예스맨들을 보십시오.  상사가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자리를 보전하는 최고의 비방이지요.  그래서 노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고 노우,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목이 서너개는 되는 괴물이겠죠.  자, 우리가 홀든 콜필드에 불편하면서도 통쾌함을 느끼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우린 도저히 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의 길을 가려는 아이에게 우린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냐, 우리에게 없는  한가지를 그가 가졌거든요.  바로 용기입니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나와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콜필드, 더 열받습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불량,저질 퇴학생이란 딱지를 매겼지만 어른들이 벌이는 얼간이 짓이 한 두개입니까?    작가가 활동했던 시대를 힌트로 삼는다면,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가던 시대입니다. 전쟁은 무수한 인간을 살육의 공간으로 내몰았지요.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보기좋은 명분을 내세우면서 젊은이들에게 총 한자루씩을 주고 살인을 정당화 합니다.   전쟁 자체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의 결과라는건 뻔하지요.  거기에 정의니 불의니 하니 이원론을 내세우는건,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이 정의라고 가르치는 세상, 그 시대만의 문젠 아니죠.  오늘날 수많은 전쟁의 당사자들은 정의를 내세워 인간을 살육하라고 등을 떠밀죠. 그게 어른의 체제를 수호하는 방법이거든요.   그러니 홀든 콜필드,  어른들의 세계가 정상으로 보이겠습니까? 이대로 가다간, 인류는 핵전쟁까지도 정의의 이름을 내걸고 벌일테니까요.   문제의식없이 수동적인 인간들을 양성해 내는 학교, 거기에서 어른의 가르침을 받고, 어른보다 더 영악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 그들을 비판하는 콜필드의 이야길 들어보십시오.

" `언제 시간 있으면 남학교에 가보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시험삼아 한번 가봐. 엉터리 자식들이 우글거릴 테니까. 놈들이 하는 일은 장차 캐딜락을 살 수 있는 신분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일뿐이야. 그리고 축구 팀이 지면 분해 죽겠다는 시늉이나 하고, 하루 종일 여자와 술과 섹스 얘기만 지껄여대는 거지. 게다가 더러운 파벌을 만들어 결속까지 하거든. 농구 팀은 그들대로 뭉치고, 천주교 신자들도 그들대로 뭉치고, 지랄 같은 지성인들도 그렇고 놀음하는 놈들은 저희끼리 뭉치거든. 심지어 월간 추천도서 클럽에 가입한 놈들도 끼리끼리 뭉친단 말이야. 그러니까 좀 똑똑하려면....' "   J.D.셀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 58 

그러나 언제까지 부정만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건 아니죠.  세상을 부정하는데만 능통한 콜필드에게 구원은 없는 걸까요?  콜필드의 10살짜리 여동생 피비가 오빠에게 묻습니다. "오빤 세상 모든 것이 싫다는 거야, 그럼 묻겠는데 좋은것 한가지만 말해봐"  이 당돌한 꼬맹이의 질문에 우리의 콜필드 얼굴색 변하며 당황해 합니다. 사실, 싫다는 소리만 주야창천 늘어놨는데 초등학생 여동생이 좋아하는걸 묻자, 쉽게 답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피비가 오빠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세상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입니다.  긍정과 부정 사이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 존재의 한계라는 것.  그게 세상이라는 것, 그러니 완전한 부정도, 완전한 긍정도 모두 부질 없는 짓이고 오직 `올바른 판단력'을 갖추는게 먼저라는 것을 이 꼬맹이가 오빠에게 가르쳐주려 합니다.  퇴학을 당하고, 어딘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않는 곳으로 도망하려는 콜필드를 막은 이도 피비입니다.  함께 떠나자며 10살자리 꼬마가 학교를 결석하고 오빠앞에 짐싸들고 나타납니다.  아무리 철없는 오빠라도, 명색이 오빠인데 콜필드, 피비를 자신이 도망왔던 학교로 선도하려 듭니다.  최초로 이 생을 긍정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지요.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 라는 이 말.  피비가 제대로 가르쳐줍니다.

자, 이것은 어찌보면 작품의 끝에 작가가 설치한 안전팬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소설 전체에 늘어놓은 세상에 대한 불만, 비난, 조롱, 일탈 등에 대해 작가는 부정적인 결론으로 이 소설을 마무리 지을 순 없었을거란 생각도 듭니다.  이 소설은 책의 99%가 부정적이지만, 마지막 1%의 긍정을 통해 겨우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남겨둡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중요한 것은 1% 긍정이 아니라, 99%가 묘사하는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누구도 용기있게 어른들의 세계를 조롱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얼굴에 침뱉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J.D 샐린저는 용감하게 이 작품을 썼습니다.  그래서 교양있는 부모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었지요.  여전히 지금도 미국의 어느주에선 이 작품을 청소년 유해 도서로 선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논쟁이 한창입니다.  미국의 학부모들은 이 작품을 교육자료로 선정한 교사와 학교에 집단 항의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감추고 싶은걸까요 ?  

우리가 이 소설을 읽으며 깨닫는 것은 아이들은 성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도 성장합니다.  그 어느 한쪽이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 아인 분명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불구로 남게 됩니다.  제게 어느쪽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영혼의 성장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육체는 병들어도 병든체 살아갈 수 있지만, 영혼의 질병은 곧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읽히고 싶습니다.  판단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콜필드의 못된짓을 따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순탄하게 잘 자라는 것이 정답은 아닐 겁니다.  학교에서의 우등생이 사회의 우등생은 아닙니다.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영혼의 성숙을 얻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한번쯤 완전하게 세상을 부정해 보는 것입니다.  부정해본다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해본다는 것이지요.  성숙한 아이는 이 소설의 99%를 보고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의혹을 품고, 질문을 하는 법을 익힐 겁니다. 그래서 이 책은 무해한 책입니다.   이 책을 소지하고 영감을 받아 존 레넌을 쐈다는 마크 칩맨의 변명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99%의 부정은 따라하기 위해 있는게 아니라, 질문하기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이 오늘날까지도 읽히고 있는 이윤, 이 긍정적인 메세지 때문 아닐까요?  30대가 아니라, 20대 아니 10대에 이 소설을 읽어보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만약, 그 때 이 멋진 소설을 읽었다면 어쩌면 좀더 용기있고 담대하게 세상에 대한 판단력을 갖추었을 것 같네요. 또, 세상에 정답이 하나라고 가르친 어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속아넘어가는 일도 없었겠죠.  그리고 앞날을 걱정하는 주위의 호들갑스럽고 무뚝뚝한 어른들에게 이렇게 콜필드의 한마디를 들려주었을지도 모르지요. 

"선생님,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정말입니다. 저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저는 지금 하나의 단계를 통과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나 여러 가지 단계를 거치는 것 아닙니까?"    홀든 콜필드



201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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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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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이 없다는 것은 절망하고 있다는 것과 다르다."  알베르 카뮈
 



1. 논픽션과 소설의 경계점


리사 제노바의 장편 소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원제:Still Alice>를 읽었다. 이 생소한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오직 내 손에 잡힌 것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한 편의 소설이다.  작가 프로필을 보니 하버드 대학에서 신경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는 것과 지금 매사추세츠에 거주한다는 것 정도였다.  첫 장편 소설인 이 작품은 그의 전공과 무관하지 않는 소설인 듯 하다.  신인이니 그의 이력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무위하다.  이 작품을 통해 리사 제노바는 2008년 브론테상을 수상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작품 하나로 무척 큰 성취를 이뤄냈다고 봐도 좋겠다.   조발성 알츠하이머 환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허구의 `소설'장르와 실화를 기반으로 쓰여진 `논픽션'의 경계점에 닿아 있다.

리사 제노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한 할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알츠하이머란 좀 생소한 의학 용어가 아닌가?  레이건 前 미국 대통령이 걸렸다던 병,  광우병과 증상이 유사한 질병,  한국인에겐 `치매'라고 해야 그 의미가 명확해질 것 같다.  치매 환자들은 우리주위에 흔하게 존재하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껏 치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치매 환자의 입장이 아닌, 그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과 그 주위 사람들의 고통과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왜 그랬을까?  정작 병을 통해 고통받는건 환자 본인이 아니라, 그 주위의 가족이란 인식을 우린 자연스럽게 공유했기 때문이리라.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알츠하이머 환자 본인의 1인칭 시점을 통해 그같은 우리들의 인식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질병인 알츠하이머는 그 병의 악화를 본인이 `물리적 고통없이'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가장 잔인한 운명이 될 수 있다.

작가는 기억이 사라져가는 병인 알츠하이머의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등장인물의 상황에 `조발성'이란 설정을 더한다.  일반적으로 조발성 알츠하이머는 흔한 케이스는 아니다.  조발성 환자는 대개, 4,50대에 병변이 관찰되고 급속하게 악화되는 특징을 갖는다.  나이가 들면 치매는 흔한 질병일 수 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나이에 치매를 앓는 것은 그리 큰 불행이 아닐 수도 있다.  치매는 피부의 노화처럼, 뇌의 일부가 퇴화되는 자연스런 증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여, 환자 본인의 수치스러움이 반감된다. 가족의 고통이 덜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가족이 받을 충격과 환자 본인의 고통은 어쩌면 `조발성'에 비하면 미미할 수 있겠다.  즉,  모든 정신활동이 왕성하게 정상적어어야 할 50대의 장년에 비하면 말이다.

논픽션은 별다른 장치가 없어도 큰 감명을 준다.  다큐멘터리는 실체적 현실을 통해 호소력을 지닌다. 기구한 사연이란 사람마다 존재하는 법이다.  타인에게 한 사람의 인생역정이란 새롭고도 친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논픽션과 허구가 조합된 소설이다.  충분한 자료조사를 통해, 작가는 조발성 알츠하이머 환자의 기억이 사라져가는 2년이란 시간을 추적하면서, 동시에 그 환자 본인의 시선과 언어와 생각을 통해 한 여인의 인생이 어떤 과정을 담고 추락하는지, 그가  일생을 걸고 추구했던 가치가 얼마나 허망한것인지, 다시 사랑이 얼마나 가치있고 위대하며 놀라운 힘을 갖고 있는지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은 기억이 저무는 시간들에 맞서 여전히(Still) 세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로 남고 싶어하는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종신교수 앨리스(Alice)의 가슴벅찬 투쟁의 이야기이며, 모든 알츠하이머 환자의 절망과 희망에 관한 한편의 장대한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2.  기억이 저무는 시간

인간에게 기억은 존재의 근거다.  사람의 기억이란 잡동사니들의 모음이지만, 한 인간이 거쳐온 삶이 저장되고, 버려지는 과정속에서 인간의 온전한 삶을 상징하고, 담아낸다.  기억은 질긴 것이다.  또한 기억은 인간의 편의에 의해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아름다운 기억은 더 아름답게 포장되고, 추한 기억들은 망각의 강을 건너온것처럼 아득해진다.  인간에게 기억은 인간 자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보며, 우리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체험한다.   기억은 영혼의 내용물이다.  생물학적인 죽음이란 호흡의 정지이지만,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영혼의 사망선고와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외부의 모든 것이 그대로인 채 자신의 기억이 사라져 가는걸 지켜보는 일은 곧 영혼의 사멸을 목도하는 일인만큼  환자 본인에겐 몹시도 비참한 일이다. 

엘리스, 50세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그의 뛰어난 연구업적은 그녀의 비상한 두뇌에 기반하고 있다.  그녀는 뛰어난 기억력을 소유하고 있고, 인생에서의 승승장구는 그 비상한 기억력에 빚졌다.  엘리스는 심리학과의 저명 교수로 25년간 하버드에서 심리언어학 분야의 훌륭한 업적들을 쌓아 올린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지성인으로,  교수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종신교수직을 막 수락한 처지다.  그녀는 수많은 청중들 사이에서 자신의 연구업적을 설명하는 것에 능통하며, 대중을 사로잡을만한 지식과 유머를 가진 달변가였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강의를 하다가 말문이 막히는 증상을 인지한다.  한번도 자신의 기억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하버드 최고의 지성은 단어 하나가 입안에서 맴도는 이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며, 당혹스럽다.  그 이후 계속되는 사소한 건망증은 점차 그녀를 헤어나지 못할 수렁속으로 빠뜨린다.  모든 검사가 끝나자 의사는 엘리스를 불러 그가 50세의 나이에 조발성 알츠하이머 증상을 내보이고 있다고 통보한다.  

"지금까지 앨리스의 대화 상대들은 그녀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보여왔다. 하지만 병이 그녀의 훌륭한 정신을 점점 갉아먹게 되면 사람들은 그녀에게 커다란 존경심 대신 어떤 태도를 보일까?  연민? 겸손?  당혹감? "   p.115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환자복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동등하지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 천민과 귀족이란 암묵적인 계급이 존재하듯, 어느 병원을 가도 그곳엔 병의 경중에 따라 그 무엇이 환자의 신분과 대중의 인식을 갈라놓는다.  병이 나으려면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병을 숨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떤 병을 앓느냐 하는 것이 환자가 받아야할 사회적 인식을 구별짓게 한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간혹 감당키 어려운 병에 걸린 이들은 절망적으로 부르짖기도 한다. "차라리 죽을병에 걸렸다면 위로라도 받을 수 있었을텐데"  조발성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진단을 받게 된 이후, 엘리스는 딱 그 심정에 사로잡힌다.  아무래도 젊은 나이에 치매를 앓는 것은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기 힘들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하버드 최고의 지성에게 알츠하이머라니 ?  엘리스는  참담하고 인정할 수 없다.

하버드대 생물학과 교수인 남편 존은 앨리스의 진단 결과를 부인하려든다.  그럴리가 없다,고 부정하려 애써보지만 결국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 모든 사실을 실토한다.  부부는 변호사와 배우지망생인 두딸과 의대를 나온 아들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이들 가족에게 엘리스의 조발성 알츠하이머 진단은 믿을 수 없고, 믿기 싫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진실의 힘은 무서운 법이다.  부정할수록 진실은 힘이 세다는 걸 깨달을 뿐이다.  더군다나 조발성 알츠하이머는 유전성을 지닌다는 사실까지를 알게 된 이 가족 구성원은 철저히 혼돈속에 빠져든다.   사회적인  지위, 놀라운 업적, 행복하고 이상적인 가족을 소유한 엘리스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기억이 사라지고 영혼이 조금씩 파괴되는 스스로를 목도하며,  사람들의 연민과 회피를 참고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간직한 채 생을 깨끗하게 마감해야 하는가 ?   자발적 죽음과 삶 사이에서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그의 시론집 <시지프의 신화>의 첫 페이지를 인상적인 문장 하나로 시작한다.  "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카뮈가 이 문장을 썼던 시절엔 나치의 제노사이드(집단학살)가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던 시절이었다.  죽음이 일상화되고 종교, 철학적인 휴머니즘 가치가 흔들리던 시절에, 그는 이 문장 하나로 전 유럽의 젊은이를 열광시켰다.  그러나 카뮈의 이 문장은 그 이후 자신앞에 놓인 불완전한 생을 놓고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차용할 수 있는 문장으로 진화한다.  그가 인생의 미로속에 놓인 젊은이건, 50세의 나이에 알츠하이머란 몹쓸병에 걸린 하버드 대학 종신 교수건 간에, 공히 예외란 없다.   

최고의 지성으로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아오던  완벽주의자 엘리스는  이제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오직 생이 근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그러나 이 질문은 너무 늦었거나 혹은 그녀의 생 전체에서 언제나 뒤로 미루어놓은 일이었을 것이다.  완벽주의자들은 흔히 자신을 온전히 신앙한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사랑하고,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이들의 패기와 자신감은 현실 사회속에서 위대한 성취로 나타난다.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라면, 지나친 자만이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망각과 겸손이란 미덕을 모르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허망한 진실앞에 그의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란 쓸모없는 휴지조각이 돼 버리지 않는가? 

엘리스는 이제 기억이 저무는 시간이 되어서야 세계안에 또다른 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삶은 그간 자신이 누려왔던 모든 것들과 결별해야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자부심, 이성에 대한 믿음, 자신감, 합리성, 이 모든 말의 반대는 부조리(不條理)일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목표가 존경받는 하버드 대학의 종신교수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불행한 일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앞에 겸손해지는 일, 그래서 능력이 부족하고, 가난하며,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을 되돌아 보게 된다는 점.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보다 더 확실한 죽음앞의 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기억이 저무는 시간, 조발성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엘리스가 자신과 같은 환경속에 놓인 다른 계급의 환자들과 만나서 소통하려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까?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법도, 신발 끈을 묶거나 걷는 법도 잊게 될 것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밀로이드의 축적으로 쾌락 신경이 파괴되어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을 즐길 수 없게 되리라.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리라. "  p. 157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3.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엘리스가 추구해 오던 가치는 이젠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기억을 잃어가는 대학 최고의 석학이란 무용지물이다.  엘리스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러나 삶을 선택한다.  왜, 자신에게 그러한 불행이 엄습했는가? 하고 수없이 묻는다.  자신이 모든 가족들의 짐이 될 것이 확실해 보이는 상황, 남은 것은 기억의 사멸과 초라한 아내의 자리, 자식에게 보여줄 실성한 엄마의 모습 뿐이다.  남편 존은 생물학자로서 이루어야 할 일이 많다.  기억을 잃어가는 여인 곁에서 시간을 허비하며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또다른 성취들을 포기할 순 없다.  사실, 남편 존은 엘리스와 함께 그녀의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까지를 함께 해야 하는지, 아니면 경쟁이 심해 추월당할 수도 있을 생물학 연구분야의 업적을 쌓아가는데 시간을 써야하는지, 그 둘 사이에서 고민한다.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다.  배우를 꿈꾸는 딸, 리디아는 출중한 재원으로 자라날 수 있을거라는 엄마 엘리스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이란 제도권을 벗어난 자유로운 형태의 삶을 꿈꾼다.  이 소설의 초반엄마와 가장 큰 마찰을 보여주었지만, 기억이 사라져가는 엘리스의 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자청한건 이 열린 생각을 지닌 딸, 리디아였다.

"넌 참 아름다워, 널 보면서도 네가 누군지 모를까 봐 두려워."
엘리스가 말했다.
"언젠가 엄마가 저를 몰라보게 된다고 해도 제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건 알 거예요."
"너를 보면서도 네가 내 딸이란 것도 모르고 네가 날 사랑한다는 것도 모르면 어쩌지?"
"그럼 제가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거예요. 엄만 제 말을 믿을 거고요."

                                                       p.297,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그녀가 알츠하이머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은 운이 나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발성이란 특성은 알츠하이머 유전자를 갖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더 운이 나쁜 축에 낀다.  그녀는 50세에 인생을 접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모든 업적과 가치는 일순간 무용한 것이 되어 버렸다.  어느 작가는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이야말로 인간에겐 가장 부조리한 죽음일 거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부조리한 죽음도 있다.  자신이 천천히 죽어간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인지하며,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했던 시간과 추억에 대한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면서 죽음에 이르는 것만큼 부조리한 일은 상상할 수 없다.  힘들게 고생하다 정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에겐 삶은 가장 역동적인 성취의 무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상에 있다, 한순간 추락을 통해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은 더이상 낙관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삶은 숭고한 것이다.  작가가 이 작품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인생의 숭고미다.  엘리스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했던 것은 가족의 사랑과 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신의 성취와 남다른 업적들이 아니라, 바로 가족과 타인의 관심과 사랑, 지지인 것을 우린 이 소설을 통해 확인한다.  죽음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이 삶에는 존재한다고 작가는 말하고자 한다.   다시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삶에 대한 잠언 한가지를 되뇌인다.  그는 희망이 없다는 것은 절망하고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의미심장한 문장을 남겼다. 

엘리스에겐 알츠하이머로부터 벗어날 희망은 본래 없었다.  아직 어떤 명약도 그 질병을 치유할 순 없다.  알츠하이머의 획기적인 치료제로서 이 소설속에서 가정된 "아밀락스"의 임상실험은 실패로 끝난다.  이 실험의 실패는 엘리스와 존에게 더없는 슬픔과 절망을 안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작가는 이 실험의 실패라는 기사 한 조각을 배치해 놓는다.  어떤 의미일까?

이미 기억이 상당부분 지워진 엘리스, 뇌속의 뉴런들이 파괴의 작동을 멈추지 않는 엘리스에게 희망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절망해야할 이유는 아니다. 알베르 카뮈가 희망이 없음이 곧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절망이 아닌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리라.  우린 조발성 알츠하이머란 다소 낯선 질병을 앓고 있는 엘리스를 통해 생이 가진 엄숙성과 완결성을 깨닫게 된다.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시와 둔감함이 시대의 조류를 이루는 시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생을 포기한다.  그러나 한 유기체가 생명을 얻고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지는 화분의 꽃나무 한 그루라도 가꾸어 본 사람은 안다.  좀더 인간적으로 말해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생명의 위대함이 지닌 가치에 공감할 것이다.  어떤 생명에도 자연과 인간의 무한한 사랑과 정성이 담겨 있다.  그러하기에 쉽게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범죄인 것이다.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 아닐 것인가?

그래서, 독자는 엘리스의 선택을 이해하고 지지한다.   이 소설의 원제는 Still Alice다.  `Still'이란 단어에서 변치 않는, 여전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는다.  어떤 짧은 시간동안의 여행도,  인생의 축약판이 될 수 있다.  여정안에 인생이 깃든다.  도로위를 달리는 차속에서, 풍경속을 거니는 둔중한 걸음속에서, 타인과 뒤섞인 여행자의 용기속에서, 여행은 많은걸 느끼게 해주며, 여행자에게 무수한 교훈들을 전달한다.  그 여정이란 언제나 미지의 영역에 있다.   여행이란 무방비로 쏟아지는 사건들에 인생을 내맡기는 것이다.  엘리스에게 조발성 알츠하이머는 그녀가 시작한 여행의 종착지를 상징하지 않는다.  알츠하이머를 통해 엘리스의 가족들은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는 사랑이 있다면, 희망이 사라진 곳에도 절망이 깃들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엘리스는 그래서 절망으로 가지 않고, 또다른 삶의 행로안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렇게 삶은 숭고하게 지속되는 것이다.



 

201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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