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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선집 9권 가운데 미국편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다. 단편 소설집을 읽은 것이 참 오랜만이다. 이 책에는 19,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 11명의 단편 작품이 담겨 있다. 시간적으로 그리 멀리 있질 않고, 선집을 구성하는 작가들도 그렇게 생소한 것은 아니다. 스콧 피츠 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로, 허먼 멜빌은 <백경>의 작가로,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너세니얼 호손은 <주홍글씨>로 이미 독자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작가들이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작품을 제외하곤, 이 모든 장편 소설을 운좋게 20대에 모두 읽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특별히 내겐 그리 낯설지 않은 단편집이었다.
이 작가들의 대표적 장편 소설에서 받은 인상이 무척 강렬했고, 그것이 세계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상또한 컸기 때문에 9개국 114편의 단편들을 담고 있는 창비의 세계 문학 선집 중 미국편에 먼저 손이 간 것은 내겐 자연스러웠다. 장편소설은 긴 호흡, 장대한 서사가 소설읽기의 맛을 더한다. 장편을 통해 작가는 삶을 해석하는 원숙한 기량과 철학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이 단편을 썼다면 과연 어떤방식으로 독자를 사로잡았을까,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리라. 장편을 잘 쓰는 작가가 꼭 단편까지 잘 쓰란 법은 없다. 육상 경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장거리를 우승한 선수라고 단거리에 우승하란 법은 없는 거니까.
그러나 미국 문학편 <필경사 바틀비>에 담긴 눈에 익은 작가들과 내겐 생소했던 몇 작가들의 단편 모두는 기발한 상상력과 경험, 독특한 서술 방식과 문체 때문에 읽는 내내 한 권의 장편 소설이 줄 수 없는 다채롭고 향기로운 즐거움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19세기와 20세기 미국인의 일상과 사회상을 담아내면서, 거기에 얽힌 인간의 삶과 심리를 풀어내는 묘미는 현대의 독자에게 시간과 역사라는 단어의 중량감을 문학작품 안에서 느낄 수 있도록 도왔다.
이들 9편의 단편 작품들 안에는 한때 영국의 식민지에서 1774년 7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고, 다시 종교와 경체 체제에 기인한 갈등으로 남북 전쟁을 겪는 미국인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였기에 종교적인 엄숙성과 일탈 사이의 갈등[너새니얼 호손, 젊은 굿맨 브라운]의 문제가 부각된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최대 부국으로 발돋움 하는 미국은 산업자본주의의 대표 국가로 승격된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개인의 익명성과 수동성의 문제를 다룬 듯한 작품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이 중편 분량으로 담겨 있다. 죽음이란 시간과 역사의 보편성을 품어안는 이야기[스티븐 크레인, 소형보트]가 시대를 뛰어넘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최초로 페미니즘 경향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샬롯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이 그 시절 여권의 위치와 여성해방 운동의 시원을 알린다. 노예문제를 다룬 [찰스 W. 체스넛, 그랜디썬의 위장]은 혼혈 흑인인 작가의 반인종주의적 경향을 그대로 작품에 녹아내며, 남부와 북부 사이에 퍼져 있던 노예 해방 문제로 얼킨 갈등의 현상을 유추케 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전편으로서 이 소설의 초고라고 불릴만한 [F.스콧 피츠제럴드, 겨울꿈]은 하나의 원숙한 장편이 탄생하게 된 밑그림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귀중한 경험을 제공한다.
1.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변호사인 화자의 사무실에 바틀비라는 필경사(필사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가 들어온다. 차분하고, 온순한 태도에 반한 화자는 그의 책상을 자신의 곁에 두고 신임하려 든다. 그러나 필사 작업을 하던 바틀비에게 화자는 다른 작업을 부탁게 되는데, 그는 고용주라 할 수 있는 변호사인 화자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답한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한번은 그럴 수 있을테지만, 그 이후 바틀비는 화자가 시키는 모든 일에 똑같은 답변을 한다. 그는 이 소설속에서 철저히 고립된다. 그의 거부는 이유없는 반항처럼 보이며, 거부를 보일수록, 그의 고립은 사무실안에서, 월가 안에서, 아니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더욱 철저히 심화된다. 그가 내뱉는 말은 오직 "안하고 싶습니다"라는 거부의 의사 표시 뿐이다. 사무실의 다른 필경사들과 고용주인 화자가 바틀비의 `거부'에 심리적인 충격을 겪으며, 때론 황당해하고, 분노하며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한다. 자본주의 사회 아래서 그것도 가장 약아빠진 사람들이 모여드는 월가, 거기에 등장한 이 기이한 인물은 대체 누구인가?
소설은 이제 화자의 끝없는 내면 갈등, 즉 그를 해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대체, 그는 누구이며, 고용주의 말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라는 증폭된 의문과 그의 처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탐색하는데 집중된다. 가진것도 없고, 가족도 없고, 거처할 공간도 없는, 바틀비는 알고보니 일과가 끝나면 화자의 사무실에 남아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는 점심때도 외출해 밥을 먹지 않고, 사환을 시켜 생강빵 몇 개를 먹을 뿐이다. 큰 보상금을 주고 그를 내쫓으려 한 화자의 제안에도, 바틀비는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는 거부 의사를 건낸다. 이 궁지에 빠져버린 합리적 자본주의자, 월가의 대표적인 지식인, 바틀비를 신임했던 그의 고용주인 변호사인 화자는 이제, 아예 그만 남겨두고 사무실을 통째로 옮기는 해프닝을 벌인다.
돈을 많이 벌고, 한 푼 이라도 더 받기 위해, 고용주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득실대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좋은 집을 얻고, 더 좋은 차를 사기 위해, 고용주가 시키는 모든 것에 예스만을 욽어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턱대고 노우 노우를 연발하는 이 사람, 바틀비는 무엇을 상징하고,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인가 ? 자본주의의 수장인 고용주를 무너뜨리는데 사용된 그의 무기는 "노우"라는 단 한마디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디시피 100여년전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21세기에 직장에서 바틀비 같은 이를 만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작품의 바틀비란 인물은 매력적이자 동시에 이해불가능한 인물이다. 한번의 노우는 가능하지만, 끝까지 노우라고 말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법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굶어죽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바틀비는 결국 굶어 죽게 된다. 아니, 그것은 음식을 앞에 놓고 죽는 거였으니 일종의 단식이었다. 독자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아니 그 다채로운 상징속에서 바틀비를 처음 만났던 고용주처럼 번민하게 될 것이다.
" 난생 처음으로 가슴을 찌르듯 밀려오는 우수의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껏 나는 감미로운 슬픔밖에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다 같은 인간이라는 유대감이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어두운 우수로 끌어들였다. 형제애의 우수 ! 나나 바틀비나 다 같은 아담의 후예가 아닌가. 나는 그날 내가 보았던 화사한 비단옷의 생기찬 얼굴들을 기억했다. 나들이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미시씨피 강 같은 브로드웨이를 백조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그들을 나는 그 창백한 필경사와 대조했다. 우리는 세상이 명랑하다고 여기지만 불행은 멀찌감치 숨어 있어서 우리가 불행이 없다고 여길 뿐이다." 72p. 허멀 멜빌 <필경사 바틀비>
2. 샬먼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
우울증과 정신 분열증 증상을 보이는 여성이 요양차 기거하게 된 한 시골의 저택에서 보낸 며칠을 1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남편과 오빠 모두 명망 높은 내과 의사로서, 그들은 주인공 `나'의 정신 이상 증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정신과 질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자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적극적으로 그의 고민을 들어주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주인공 남편은 아내의 질환을 정신병으로 인정하길 거부한다. 그저 요양이 며칠 필요한 단순한 신경성 질환 정도로 여기고 있다. 요양차 기거하게 된 시골의 2층방은 조용하고, 안락하다. 창밖으로 시골의 멋드러진 풍경이 펼쳐지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화자에겐 더없이 안락한 장소처럼 보인다. 그러나, 방 전체를 둘러싼 노란 벽지의 풍경은 예사롭지 않다.
벽지엔 페이트 칠이 되어 있고, 낙서가 보인다. 군데군데 오래된 벽지들은 뭉텅뭉텅 벗겨진데다 그 무늬가 미로처럼 복잡해서 그것을 따라가다보면 눈이 어지럽고 흐릿해지는 기분이 든다. 벽지의 색깔은 혐오스럽고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햇빛에 묘하게 색이 바래면서 썩어가는 불결한 노란색이다. 또 벽지의 어떤 부분은 우중충하지만, 야하게 짙은 오렌지색이며 어떤 부분은 황록색을 띤다. 주인공은 이 방에 살았던 아이들이 분명 벽지를 증오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 공간의 벽지가 이제 주인공을 매일 매일 공포에 떨게 한다. 어느날 밤 달빛이 노란 벽지에 비추어오자, 그 무늬는 마침 감옥의 쇠창살로 변하는데, 자세히 보니 그 무늬 안에 한 여인이 기어다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무늬 뒤에서 한 여자가 수그린 자세로 여기저기 기어다니는 것 같다. 나는 그게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궁금해한다 -- 생각하기 시작한다 -- 존이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었으면! " 172p. 샬롯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
화자의 서술은 실제의 현상을 설명한 것은 아니다. 화자는 미쳐가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페미니즘의 서곡을 알리는 작품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여성 참정권은 1920년대에야 전 연방주들에서 인정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1892년에 쓰여진 작품이다. 여성의 권리와 여성의 자기실현이란 힘있는 남성들에 의해 항상 제압당했다. 그것은 폭력성을 띠기도 했지만, 때론 암묵적으로 사회적 관습인냥 치부되기 마련이다. 남편이 아내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이나,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쓰기를 남편이 금지하는 모습은 그 당시 여성들을 억압하는 상징성을 나타낸다. 오래된 관습이란 때로 미풍양속으로 포장돼 여성들의 권리를 억압하곤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남편과 오빠는 내과의사로서, 아내를 자신의 방식으로 치료하고 도우려 한다. 특별히 나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 남성들이 여성의 언어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양은 남편에 의한 감금이 된다. 공포로 치부되는 공간을 벗어나려고 1층으로 방을 옮기자고 요구하는 화자의 주장에 남편은 "신경과민일 뿐이야"라는 친절한 무시로 일관한다. 여전히 남편은 아내의 고민을 무시하고, 자신의 논리로 그 주장을 묵살한다. 친절하게 거부하는 것이 더 잔인한 법이다. 이 작품은 여성 해방을 작품의 말미에 암시적으로 담아낸다. 자신을 노란벽지가 있는 공간속에 계속 가둬둔 남편을 향해, 아내는 그 벽지를 찢어냄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나 드디어 나왔어요, 내가 말했다. `당신과 제니의 반대를 무릅쓰고요. 그리고 내가 벽지 대부분을 벗겨냈으니, 당신이 나를 도로 집어 넣을 수는 없어요!'" p.184
이 작품은 대학시절 영어원문으로 읽고 작품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샬롯 퍼킨스 길먼의 노란 벽지를 이 작품집에서 만난게 무척 반가웠다. 십수년 전 원문을 더듬더듬 읽어내려가면서 작품을 분석하고, 의미를 해석하려 노력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기억에 돋아났다. 난 그 당시 어떻게 이 작품을 분석했을까?
3. F.스콧 피츠제럴드 <겨울 꿈>
<위대한 개츠비>를 몇 해전에 읽은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을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이란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향을 많이 보아 왔다. 그런데 그러한 측면에서 해석하려 들수록 작품은 난해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엔 번역상의 문제로 치부했는데, 창비의 단편선집에서 발견한 피츠제럴드의 단편 <겨울 꿈>을 읽고서, 그러한 내 생각을 수정하게 됐다. <위대한 개츠비>를 하나의 보편적인 연애소설로만 읽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이 단편은 장편으로 큰 성공을 거둔 <위대한 개츠비>의 초고 수준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부유한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과의 실패한 사랑 이야기라는 설정이 비슷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랑의 끌림이란 주제의식도 많은 부분 겹친다.
1960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가 최대의 성공을 거둔 소설 작품은 <이방인>이란 소설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기 전에 그는 하나의 작품을 습작으로 내놓은 바 있다. 바로 <행복한 죽음>이란 소설이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방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행복한 죽음>의 실패를 통해서였다. <겨울 꿈>은 피츠제럴드에겐 <위대한 개츠비>의 전초가 되는 작품 같다. 그러나 카뮈와 다르게 피츠제럴드의 단편은 그 자체로 훌륭한 성공을 이룬다. 장편의 난해함을 걷어내고, 사랑과 연애의 실패담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들을 담아내기에 <겨울 꿈>은 충분히 아름답고 멋드러진 작품이다.
부유하지만 순정적인 사랑에 집착하는 남자 덱스터와 아름답지만 자유분방하고 인생에 숙명론적 기질을 품고 있는 여인 주디 존스의 비극적인 젊은 날의 사랑의 실패담을 이 소설은 피츠제럴드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미국편을 이루는 단편선집 가운데, 번역상의 문제이긴 하지만, 문체상의 독특함은 몇 개의 소설에서밖에 살아나지 못하는데 바로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번역으로 한번 걸려진 이후에도, 그 애틋하고 살가운 문체의 힘이 곧바로 독자의 가슴을 울려주는 힘을 잃지 않는다.
"덱스터는 더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으니 이제는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치 주디 존스와 결혼하여 그녀가 자기 눈앞에서 삭아가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 듯이 그는 더 소중한 무엇을 방금 잃어버렸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꿈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빼앗긴 것이었다." p.305 F.스콧 피츠제럴드 <겨울 꿈>
이 작품이 독자의 가슴에 큰 공명을 남기는 것은 젊은날 누구나 사랑의 열병 속에서 겪어봤음직한 상실과 그 열정의 허망함을 소설이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덱스터나 <위대한 개츠비>의 남자 주인공은 도덕과 관습 모두를 역행하는 사랑을 감행한다. 그것은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남자주인공들은 모두 부를 일구는데 일가견을 갖고 있지만, 사랑에 있어선 약삭빠르지 않다. 약삭빠르게 굴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사랑에서만큼은 진실되기를 원한다. 상대여성이 바람둥이고,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더라도, 그는 사랑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려든다. 어쩌면 그게 진짜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가는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건 사랑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놓인 거리감에 비할 바가 못된다. 우리는 살면서 끝없이 젊은 시절의 잃어버린 사랑과 마주앉는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속에 나오는 남자주인공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서도, 불가능한 사랑, 이미 식어버린 열정을 되찾고자 노력한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 즉 그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사라진 사랑의 열망이런지도 모른다. 그 진실을 드러내주는 작품을 피츠제널드는 썼던 것이다.
4. 그외의 작품들과 창비의 또다른 세계문학 선집들
선집에는 이외에도 너무나도 유명한 에드거 엘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가 담겨 있다. 어린 시절 한번 읽고 나서 내 기억속에 그 괴기로움을 각인시킨 명작이다. 마크 트웨인의 <캘레바래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는 최근에 내가 읽은 그의 자서전에서 잠깐 언급된 것이 기억난다. 마크 트웨인이 얼마나 입담 좋은 작가인지 깨닫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헨리 제임스의 <진품>이란 작품은 이 선집 가운데 읽는 재미가 솔솔한 작품이 될 것이다. 가짜가 진품을 대체하는 시대를 묘파하는 문장들은 오늘에도 그 비유가 다양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성형 미인들의 당당한 아름다움은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는 사회의 일반화를 드러낸다고 해야 할까?
창비의 미국편을 읽었지만, 창비 세계문학단편선집은 9개국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거대한 기획물이다.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장편들에 우리 독자들은 익숙했다. 문학 작품을 분량으로 평가할 순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간 장편에 너무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창비의 이 기획물들을 통해, 각국의 다양한 단편 문학을 앞으로도 섭렵해 보려 한다. 미국편은 눈에 익은 작가들이 많아 읽기에 그리 낯설지 않았지만, 중국이나 포르투칼, 라틴 아메리카 등의 작품 선집은 그 생소함이 매력이어서 나름 기대가 된다. 단편 문학 선집은 한 권으로 다수의 작가와 작품을 접할 수 있어 좋고, 그 다채로움 만큼 각국의 문화와 역사를 훑는 가장 손쉬운 방벙을 제공할 것이다.
야간 근무를 하는 새벽 시간, 밖은 비가 오고 있었다. 마침 나는 이 선집의 단편 중, 스티븐 크레인의 <소형 보트>의 난파선 표류기를 읽었다. 새벽 시간 잠이 오는 몽롱한 정신 사이로 창밖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 눈에 들어온 문장들은 100여년 전 작가의 실제 난파 경험을 묘사하고 있었다. 거대하고 육중한 바다 한 가운데 난파된 배에서 겨우 소형 보트에 옮겨탄 이들의 생명을 향한 끝없는 사투가 한 편의 문학 작품속에 현실감 있게 묘사된다. 자신의 실제 난파 경험을 작가는 이 소설에서 차용한다.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그 절박했던 기억속의 순간을 작가는 훗날 문학 작품으로 남겼다.
세계를 돌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스티븐 크레인은 29세에 요절 한다. 100여년을 훌쩍 뛰어넘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 문장의 힘은 무엇인가? 밖은 여전히 빗방울이 세차게 창을 두드렸지만, 내가 있던 공간은 스팀으로 따뜻했고 정적이 감돌았다. 그럼에도 내 눈에 비춰오는 문장은 나를 가슴조리게 하고, 결국 치열하게 삶을 사유하게 만들었다. 그 새벽에 내 영혼을 침식해 들어오던 그 듬직한 문장들이 바로 문학이 건내는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01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