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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의 양지만을 거쳐온 당신께 묻습니까? 한번이라도 완전하게 세상을 부정해본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우여곡절의 연속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인생의 행로를 한번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잘 교육받은 부모밑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의 삶이란 대개 보지 않아도 명확합니다. 정규교육이란 평균치의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문명의 은밀한 제도이자 작용이지요. 그런 환경속에서 자라나는 인간은 세상을 부정하는 법을 모릅니다. 아니 서툴다고 해야 할까요? 언제나 긍정하도록 교육받기 마련이니까요. 만약, 누군가 정해진 행로를 이탈해 나가려는 존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소속집단에서 철저히 배척받고 비난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도속에서 길러진 어른들의 현재는 어떻습니까? 완벽해 보이나요? 완벽하다면,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이렇게 모순덩어리로 가득차진 않을 겁니다. 일탈을 꿈꿀 수 없도록 사방에 감시망이 쳐진 세상, 그러나 그들이 쳐놓은 감시망이란게 자신들의 잣대로 꾸려진 허위와 위선의 조각품 아닙니까?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지난 1월 27일 미국 뉴햄프셔 코니쉬의 자택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생전 단 한 편의 장편소설인 <호밀밭의 파수꾼Catcher in the Rye>을 발표하고, 세상과 영원히 담을 쌓고 지냈던 은둔의 작가는 그렇게 조용히 영면에 들었습니다. 미국의 언론과 미국인들이 뽑은 몹시도 자의적인 것이긴 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언제나 미국인들이 세계 100대 소설로 뽑고싶은 명작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지나친 비속어를 사용하고, 청소년의 정신건강에 해가 될 흡연,음주,성적문란함 등의 묘사로 한 출판사로부터 작품의 일부 개정을 요구받기도 합니다. 나중엔 이 출판사는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지요. 이후, 샐린저는 기분이 상한 나머지 다른 출판사를 통해 원본 그대로를 출판했고,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니까요.
평생 철저한 은둔 생활을 이어온 것 때문인지 세상 사람들은 샐린저를 괴짜로 취급합니다. 그 이후, 이 전설적인 작가와 소설에 얼킨 몇가지 일화들이 있지요. 그 연관성이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1980년도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넌을 권총으로 살해한 살인범 마크 칩맨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소지하고 있었고, 자신이 그 소설을 통해 영감을 얻었다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만약, 그의 살해 동기가 이 소설과 연관이 있다면 그날 그가 입고 있던 팬츠의 상표까지도 조사해볼 필요가 있는거 아닐까요? :D 소설의 인기에 끌려 많은 사람들이 작가와 작품을 세상속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요. 그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가 작품의 영화화를 위해, 샐린저를 찾았다가 문전박대의 수모를 당했다고 하는데 샘통이지요. 은둔의 삶을 트레이드 마크로 알고 사는 작가를 만나려면 사전에 만날 의향이 있는지 여부는 타전하고 방문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 지난해 들려온 흥미로운 뉴스 하나는, 작가의 허락없이 <호밀밭의 파수꾼> 속편을 쓴 작가가 셀린저에게 고소를 당했다는 겁니다. 이건 더 황당한 일이죠. 속편은 작가 본인이 써야지 왜 제 3자가 허락도 없이 씁니까? 이러한 내용들은 언론에서 샐린저와 그의 소설을 이야기하며, 가십거리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입니다. 기자님들께 묻습니다. 이러한 가쉽으로 독자를 낚는 것이 언론의 사명일까요 ?
작가를 평가하는 근거는 작가의 괴짜적 `프라이버시'가 아닌`작품'입니다. 작품을 읽지 않고 그저 가십거리나 즐기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대로 기사를 써대는 신문기자들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차라리 샐린저의 괴짜적 삶보다는 작품의 분석기사나, 기자들의 독후감 한 편을 더 읽고 싶습니다. 아니면, 일독을 권장하시던지..
1951년에 발표된 <호밀밭의 파수꾼>은 작가의 나이로 32살에 쓴 작품입니다. 1950년대에는 평균 수명도 그리 길지 않았으니 살만큼 살고, 산전수전 다 겪은 작가가 자신이 살던 마을의 어느 호텔방에 들어가 3주간의 칩거끝에 탄생시킨 작품인 것이지요. 이 작품의 주인공은 홀든 콜필드 입니다. 부유한 중산층 부모밑에 자란 그는 유명 기숙 사립학교인 펜시의 일원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퇴학을 당하고 맙니다. 퇴학의 이유가 여러가지겠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적부진입니다. 17살, 소년이 퇴학을 당할 처지에 놓이자 심적으로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3일후면, 퇴학 통지서가 부모님의 자택으로 배달될 것이 확실해 집니다. 3일후에 짐짝인냥 기숙사에서 쫓겨나느니, 차라리 야반도주를 선택합니다. 소설은 이제 뉴욕행 밤기차를 타고 부모님이 사시는 뉴욕으로 올라온 콜필드의 3일간을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나갑니다. 뉴욕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세상의 비릿한 풍경들을 훔쳐보고, 이 세상에 대한 느낌을 17살의 눈으로 그려보이지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내면의 불안, 자신이 꿈꾸는 삶의 불확실성을 앞에 놓고 17살 소년의 내면의 흐름과 변화를 놀랍도록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시대와 장소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여전히 17살 사춘기의 소년소녀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는 증거이겠죠. 홀든 콜필드는 어른들의 세계에 `이유있이' 반항합니다. 그 이윤 어른들의 행동이란게 모두다 `엉터리'라는 거죠.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그 반대를 가르치니까요.
"펜시의 토요일 밤 메뉴는 언제나 똑같았다. 저녁 식사로 비프스테이크가 나오는데, 그건 성찬이다. 학교측에서 그런 성찬을 베푸는 이유는 일요일에 학교로 찾아오는 많은 학부모들이 틀림없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젯밤에는 무엇을 먹었니?'하고 물을 것이고, 아들들은 `스테이크를 먹었어요'하고 대답할 것을 서머 교장이 미리 계산에 넣었기 대문이다." J.D.셀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 58
17살, 아직 여물지 않은 이성과 사유로 세상을 판단하려니 세상이 얼마나 바보처럼 보이겠습니까? 부모님이 사주신 타자기를 판 돈으로 여비를 마련한 콜필드. 뉴욕행 기차에 올라 우연히 한 여인과 마주칩니다. 말을 해보니 같은 반 친구의 엄마죠. 이 친구 얼마나 엉뚱하냐 하면, 그 엄마에게 반합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17살 소년이 40대의 아줌마에게 반해서 설레고 있다는 것. 그가 놀랍도록 솔직하고 순수하다는 증거이겠으나, 어른들의 눈에야 비행청소년으로 보이겠군요. 그러다, 이제 뉴욕의 한 호텔에 들어서지요. 그런데 왠일입니까? 호텔 건너편에서 못볼꼴을 보고 맙니다. 알만큼 아시는 어른들께서 호텔방에서 저마다 화려한 변태짓을 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을 흉내내고 싶어 술도 먹어보고, 춤도 쳐보고, 성매매도 합니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모든 것을 콜필드는 `경험하려' 합니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것은, 그게 나쁜 것이어서 그럴까요? 그러면 왜 어른들은 그 모두를 즐기는 겁니까?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홀든 콜필드는 특유의 상소리를 내맽게 되지요. " 엉터리,바보,변태들, 도저히 참을수가 없어"
주인공 콜필드처럼 이 소설은 당돌합니다. 읽는 사람을 저히 당황스럽게 하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엉터리니, 변태니 하며 덤벼드는 이 17살 꼬마한테, 일장 훈계라도 한소리 하고 싶은 어른들도 있을 겁니다. '임마, 네 나이가 몇인데 벌써 술먹고 담배나 피우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다 퇴학이나 당하니? 너 어른이 되면 뭐가 될래? 공부해야지, 성공해야지, 그래야 사람답게 산단다" 이렇게 말이죠. 어른들이란게 무척 단순합니다. 원래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지요. 그런데 몹시도 단순하게 만들어놓은건 무엇입니까? 콜필드가 혐오하는 `학교' 아닐까요? 단순하면서도, 덤으로 순수하지도 않는게 어른들의 특징이지요.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욕망의 동물'정도 될까요 ?
이에 반해, 홀든 콜필드는 무척 순수하고 생각이 깊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구요? 술,담배나 즐기고, 퇴학이나 당하고, 여자와 놀아나는 이 구제불능이 어떻게 순수하냐구요? 아닙니다. 그는 최소한 평균치의 어른들이 하지 않는 것 하나를 할 줄 알거든요. 그것은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할 줄 안다는 겁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거지요. 이 아이에게 훈계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어른들은 이 차이 하나로 욕망의 동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만들어진대로, 세상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는 수동적인 인간들이지요. 아무런 의문도 없고, 질문도 할 능력도 박탈당한 사람들, 그게 바로 평균치의 어른들입니다.
그가 벗어난 학교라는 공간은 이러한 평범한 어른들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공장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모습으로 길러지고, 또 그 체체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교육받습니다. 이 소설의 가치는 여기에 있습니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비행'은 그저 곁가지일 뿐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러한 반항을 통해, 어른들의 세상을 고발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콜필드가 학교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뭔가 통쾌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가방 따위를 모조리 손에 들고는 다시 계단 옆에 서서 마지막으로 복도의 저쪽 끝까지 바라보았다. 울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른다. 나는 빨간 사냥모자를 내가 좋아하는 식으로 모자 챙을 뒤로 돌려 쓰고 있는 목청을 다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바보들아, 잘들 자거라!'" J.D.셀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 58
맞습니다. 이 통쾌함은 아마도 우리의 경험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아요. 퇴학당할 정도의 경력을 가진 아이완 상종을 안해야하고, 안하는게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의 비행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작은 움직임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학창시절만의 문젠 아니죠. 세상을 변화시키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우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도를 안하는거죠. 학교에 범생이 있다면 회사엔 예스맨이 있겠죠. 회사의 예스맨들을 보십시오. 상사가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자리를 보전하는 최고의 비방이지요. 그래서 노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고 노우,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목이 서너개는 되는 괴물이겠죠. 자, 우리가 홀든 콜필드에 불편하면서도 통쾌함을 느끼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우린 도저히 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의 길을 가려는 아이에게 우린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냐, 우리에게 없는 한가지를 그가 가졌거든요. 바로 용기입니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나와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콜필드, 더 열받습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불량,저질 퇴학생이란 딱지를 매겼지만 어른들이 벌이는 얼간이 짓이 한 두개입니까? 작가가 활동했던 시대를 힌트로 삼는다면,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가던 시대입니다. 전쟁은 무수한 인간을 살육의 공간으로 내몰았지요.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보기좋은 명분을 내세우면서 젊은이들에게 총 한자루씩을 주고 살인을 정당화 합니다. 전쟁 자체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의 결과라는건 뻔하지요. 거기에 정의니 불의니 하니 이원론을 내세우는건,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이 정의라고 가르치는 세상, 그 시대만의 문젠 아니죠. 오늘날 수많은 전쟁의 당사자들은 정의를 내세워 인간을 살육하라고 등을 떠밀죠. 그게 어른의 체제를 수호하는 방법이거든요. 그러니 홀든 콜필드, 어른들의 세계가 정상으로 보이겠습니까? 이대로 가다간, 인류는 핵전쟁까지도 정의의 이름을 내걸고 벌일테니까요. 문제의식없이 수동적인 인간들을 양성해 내는 학교, 거기에서 어른의 가르침을 받고, 어른보다 더 영악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 그들을 비판하는 콜필드의 이야길 들어보십시오.
" `언제 시간 있으면 남학교에 가보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시험삼아 한번 가봐. 엉터리 자식들이 우글거릴 테니까. 놈들이 하는 일은 장차 캐딜락을 살 수 있는 신분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일뿐이야. 그리고 축구 팀이 지면 분해 죽겠다는 시늉이나 하고, 하루 종일 여자와 술과 섹스 얘기만 지껄여대는 거지. 게다가 더러운 파벌을 만들어 결속까지 하거든. 농구 팀은 그들대로 뭉치고, 천주교 신자들도 그들대로 뭉치고, 지랄 같은 지성인들도 그렇고 놀음하는 놈들은 저희끼리 뭉치거든. 심지어 월간 추천도서 클럽에 가입한 놈들도 끼리끼리 뭉친단 말이야. 그러니까 좀 똑똑하려면....' " J.D.셀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 58
그러나 언제까지 부정만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건 아니죠. 세상을 부정하는데만 능통한 콜필드에게 구원은 없는 걸까요? 콜필드의 10살짜리 여동생 피비가 오빠에게 묻습니다. "오빤 세상 모든 것이 싫다는 거야, 그럼 묻겠는데 좋은것 한가지만 말해봐" 이 당돌한 꼬맹이의 질문에 우리의 콜필드 얼굴색 변하며 당황해 합니다. 사실, 싫다는 소리만 주야창천 늘어놨는데 초등학생 여동생이 좋아하는걸 묻자, 쉽게 답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피비가 오빠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세상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입니다. 긍정과 부정 사이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 존재의 한계라는 것. 그게 세상이라는 것, 그러니 완전한 부정도, 완전한 긍정도 모두 부질 없는 짓이고 오직 `올바른 판단력'을 갖추는게 먼저라는 것을 이 꼬맹이가 오빠에게 가르쳐주려 합니다. 퇴학을 당하고, 어딘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않는 곳으로 도망하려는 콜필드를 막은 이도 피비입니다. 함께 떠나자며 10살자리 꼬마가 학교를 결석하고 오빠앞에 짐싸들고 나타납니다. 아무리 철없는 오빠라도, 명색이 오빠인데 콜필드, 피비를 자신이 도망왔던 학교로 선도하려 듭니다. 최초로 이 생을 긍정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지요.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 라는 이 말. 피비가 제대로 가르쳐줍니다.
자, 이것은 어찌보면 작품의 끝에 작가가 설치한 안전팬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소설 전체에 늘어놓은 세상에 대한 불만, 비난, 조롱, 일탈 등에 대해 작가는 부정적인 결론으로 이 소설을 마무리 지을 순 없었을거란 생각도 듭니다. 이 소설은 책의 99%가 부정적이지만, 마지막 1%의 긍정을 통해 겨우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남겨둡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중요한 것은 1% 긍정이 아니라, 99%가 묘사하는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누구도 용기있게 어른들의 세계를 조롱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얼굴에 침뱉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J.D 샐린저는 용감하게 이 작품을 썼습니다. 그래서 교양있는 부모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었지요. 여전히 지금도 미국의 어느주에선 이 작품을 청소년 유해 도서로 선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논쟁이 한창입니다. 미국의 학부모들은 이 작품을 교육자료로 선정한 교사와 학교에 집단 항의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감추고 싶은걸까요 ?
우리가 이 소설을 읽으며 깨닫는 것은 아이들은 성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도 성장합니다. 그 어느 한쪽이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 아인 분명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불구로 남게 됩니다. 제게 어느쪽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영혼의 성장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육체는 병들어도 병든체 살아갈 수 있지만, 영혼의 질병은 곧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읽히고 싶습니다. 판단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콜필드의 못된짓을 따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순탄하게 잘 자라는 것이 정답은 아닐 겁니다. 학교에서의 우등생이 사회의 우등생은 아닙니다.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영혼의 성숙을 얻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한번쯤 완전하게 세상을 부정해 보는 것입니다. 부정해본다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해본다는 것이지요. 성숙한 아이는 이 소설의 99%를 보고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의혹을 품고, 질문을 하는 법을 익힐 겁니다. 그래서 이 책은 무해한 책입니다. 이 책을 소지하고 영감을 받아 존 레넌을 쐈다는 마크 칩맨의 변명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99%의 부정은 따라하기 위해 있는게 아니라, 질문하기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이 오늘날까지도 읽히고 있는 이윤, 이 긍정적인 메세지 때문 아닐까요? 30대가 아니라, 20대 아니 10대에 이 소설을 읽어보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만약, 그 때 이 멋진 소설을 읽었다면 어쩌면 좀더 용기있고 담대하게 세상에 대한 판단력을 갖추었을 것 같네요. 또, 세상에 정답이 하나라고 가르친 어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속아넘어가는 일도 없었겠죠. 그리고 앞날을 걱정하는 주위의 호들갑스럽고 무뚝뚝한 어른들에게 이렇게 콜필드의 한마디를 들려주었을지도 모르지요.
"선생님,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정말입니다. 저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저는 지금 하나의 단계를 통과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나 여러 가지 단계를 거치는 것 아닙니까?" 홀든 콜필드

201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