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희망이 없다는 것은 절망하고 있다는 것과 다르다."  알베르 카뮈
 



1. 논픽션과 소설의 경계점


리사 제노바의 장편 소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원제:Still Alice>를 읽었다. 이 생소한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오직 내 손에 잡힌 것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한 편의 소설이다.  작가 프로필을 보니 하버드 대학에서 신경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는 것과 지금 매사추세츠에 거주한다는 것 정도였다.  첫 장편 소설인 이 작품은 그의 전공과 무관하지 않는 소설인 듯 하다.  신인이니 그의 이력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무위하다.  이 작품을 통해 리사 제노바는 2008년 브론테상을 수상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작품 하나로 무척 큰 성취를 이뤄냈다고 봐도 좋겠다.   조발성 알츠하이머 환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허구의 `소설'장르와 실화를 기반으로 쓰여진 `논픽션'의 경계점에 닿아 있다.

리사 제노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한 할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알츠하이머란 좀 생소한 의학 용어가 아닌가?  레이건 前 미국 대통령이 걸렸다던 병,  광우병과 증상이 유사한 질병,  한국인에겐 `치매'라고 해야 그 의미가 명확해질 것 같다.  치매 환자들은 우리주위에 흔하게 존재하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껏 치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치매 환자의 입장이 아닌, 그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과 그 주위 사람들의 고통과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왜 그랬을까?  정작 병을 통해 고통받는건 환자 본인이 아니라, 그 주위의 가족이란 인식을 우린 자연스럽게 공유했기 때문이리라.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알츠하이머 환자 본인의 1인칭 시점을 통해 그같은 우리들의 인식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질병인 알츠하이머는 그 병의 악화를 본인이 `물리적 고통없이'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가장 잔인한 운명이 될 수 있다.

작가는 기억이 사라져가는 병인 알츠하이머의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등장인물의 상황에 `조발성'이란 설정을 더한다.  일반적으로 조발성 알츠하이머는 흔한 케이스는 아니다.  조발성 환자는 대개, 4,50대에 병변이 관찰되고 급속하게 악화되는 특징을 갖는다.  나이가 들면 치매는 흔한 질병일 수 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나이에 치매를 앓는 것은 그리 큰 불행이 아닐 수도 있다.  치매는 피부의 노화처럼, 뇌의 일부가 퇴화되는 자연스런 증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여, 환자 본인의 수치스러움이 반감된다. 가족의 고통이 덜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가족이 받을 충격과 환자 본인의 고통은 어쩌면 `조발성'에 비하면 미미할 수 있겠다.  즉,  모든 정신활동이 왕성하게 정상적어어야 할 50대의 장년에 비하면 말이다.

논픽션은 별다른 장치가 없어도 큰 감명을 준다.  다큐멘터리는 실체적 현실을 통해 호소력을 지닌다. 기구한 사연이란 사람마다 존재하는 법이다.  타인에게 한 사람의 인생역정이란 새롭고도 친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논픽션과 허구가 조합된 소설이다.  충분한 자료조사를 통해, 작가는 조발성 알츠하이머 환자의 기억이 사라져가는 2년이란 시간을 추적하면서, 동시에 그 환자 본인의 시선과 언어와 생각을 통해 한 여인의 인생이 어떤 과정을 담고 추락하는지, 그가  일생을 걸고 추구했던 가치가 얼마나 허망한것인지, 다시 사랑이 얼마나 가치있고 위대하며 놀라운 힘을 갖고 있는지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은 기억이 저무는 시간들에 맞서 여전히(Still) 세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로 남고 싶어하는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종신교수 앨리스(Alice)의 가슴벅찬 투쟁의 이야기이며, 모든 알츠하이머 환자의 절망과 희망에 관한 한편의 장대한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2.  기억이 저무는 시간

인간에게 기억은 존재의 근거다.  사람의 기억이란 잡동사니들의 모음이지만, 한 인간이 거쳐온 삶이 저장되고, 버려지는 과정속에서 인간의 온전한 삶을 상징하고, 담아낸다.  기억은 질긴 것이다.  또한 기억은 인간의 편의에 의해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아름다운 기억은 더 아름답게 포장되고, 추한 기억들은 망각의 강을 건너온것처럼 아득해진다.  인간에게 기억은 인간 자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보며, 우리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체험한다.   기억은 영혼의 내용물이다.  생물학적인 죽음이란 호흡의 정지이지만,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영혼의 사망선고와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외부의 모든 것이 그대로인 채 자신의 기억이 사라져 가는걸 지켜보는 일은 곧 영혼의 사멸을 목도하는 일인만큼  환자 본인에겐 몹시도 비참한 일이다. 

엘리스, 50세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그의 뛰어난 연구업적은 그녀의 비상한 두뇌에 기반하고 있다.  그녀는 뛰어난 기억력을 소유하고 있고, 인생에서의 승승장구는 그 비상한 기억력에 빚졌다.  엘리스는 심리학과의 저명 교수로 25년간 하버드에서 심리언어학 분야의 훌륭한 업적들을 쌓아 올린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지성인으로,  교수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종신교수직을 막 수락한 처지다.  그녀는 수많은 청중들 사이에서 자신의 연구업적을 설명하는 것에 능통하며, 대중을 사로잡을만한 지식과 유머를 가진 달변가였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강의를 하다가 말문이 막히는 증상을 인지한다.  한번도 자신의 기억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하버드 최고의 지성은 단어 하나가 입안에서 맴도는 이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며, 당혹스럽다.  그 이후 계속되는 사소한 건망증은 점차 그녀를 헤어나지 못할 수렁속으로 빠뜨린다.  모든 검사가 끝나자 의사는 엘리스를 불러 그가 50세의 나이에 조발성 알츠하이머 증상을 내보이고 있다고 통보한다.  

"지금까지 앨리스의 대화 상대들은 그녀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보여왔다. 하지만 병이 그녀의 훌륭한 정신을 점점 갉아먹게 되면 사람들은 그녀에게 커다란 존경심 대신 어떤 태도를 보일까?  연민? 겸손?  당혹감? "   p.115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환자복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동등하지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 천민과 귀족이란 암묵적인 계급이 존재하듯, 어느 병원을 가도 그곳엔 병의 경중에 따라 그 무엇이 환자의 신분과 대중의 인식을 갈라놓는다.  병이 나으려면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병을 숨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떤 병을 앓느냐 하는 것이 환자가 받아야할 사회적 인식을 구별짓게 한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간혹 감당키 어려운 병에 걸린 이들은 절망적으로 부르짖기도 한다. "차라리 죽을병에 걸렸다면 위로라도 받을 수 있었을텐데"  조발성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진단을 받게 된 이후, 엘리스는 딱 그 심정에 사로잡힌다.  아무래도 젊은 나이에 치매를 앓는 것은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기 힘들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하버드 최고의 지성에게 알츠하이머라니 ?  엘리스는  참담하고 인정할 수 없다.

하버드대 생물학과 교수인 남편 존은 앨리스의 진단 결과를 부인하려든다.  그럴리가 없다,고 부정하려 애써보지만 결국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 모든 사실을 실토한다.  부부는 변호사와 배우지망생인 두딸과 의대를 나온 아들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이들 가족에게 엘리스의 조발성 알츠하이머 진단은 믿을 수 없고, 믿기 싫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진실의 힘은 무서운 법이다.  부정할수록 진실은 힘이 세다는 걸 깨달을 뿐이다.  더군다나 조발성 알츠하이머는 유전성을 지닌다는 사실까지를 알게 된 이 가족 구성원은 철저히 혼돈속에 빠져든다.   사회적인  지위, 놀라운 업적, 행복하고 이상적인 가족을 소유한 엘리스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기억이 사라지고 영혼이 조금씩 파괴되는 스스로를 목도하며,  사람들의 연민과 회피를 참고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간직한 채 생을 깨끗하게 마감해야 하는가 ?   자발적 죽음과 삶 사이에서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그의 시론집 <시지프의 신화>의 첫 페이지를 인상적인 문장 하나로 시작한다.  "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카뮈가 이 문장을 썼던 시절엔 나치의 제노사이드(집단학살)가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던 시절이었다.  죽음이 일상화되고 종교, 철학적인 휴머니즘 가치가 흔들리던 시절에, 그는 이 문장 하나로 전 유럽의 젊은이를 열광시켰다.  그러나 카뮈의 이 문장은 그 이후 자신앞에 놓인 불완전한 생을 놓고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차용할 수 있는 문장으로 진화한다.  그가 인생의 미로속에 놓인 젊은이건, 50세의 나이에 알츠하이머란 몹쓸병에 걸린 하버드 대학 종신 교수건 간에, 공히 예외란 없다.   

최고의 지성으로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아오던  완벽주의자 엘리스는  이제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오직 생이 근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그러나 이 질문은 너무 늦었거나 혹은 그녀의 생 전체에서 언제나 뒤로 미루어놓은 일이었을 것이다.  완벽주의자들은 흔히 자신을 온전히 신앙한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사랑하고,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이들의 패기와 자신감은 현실 사회속에서 위대한 성취로 나타난다.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라면, 지나친 자만이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망각과 겸손이란 미덕을 모르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허망한 진실앞에 그의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란 쓸모없는 휴지조각이 돼 버리지 않는가? 

엘리스는 이제 기억이 저무는 시간이 되어서야 세계안에 또다른 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삶은 그간 자신이 누려왔던 모든 것들과 결별해야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자부심, 이성에 대한 믿음, 자신감, 합리성, 이 모든 말의 반대는 부조리(不條理)일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목표가 존경받는 하버드 대학의 종신교수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불행한 일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앞에 겸손해지는 일, 그래서 능력이 부족하고, 가난하며,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을 되돌아 보게 된다는 점.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보다 더 확실한 죽음앞의 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기억이 저무는 시간, 조발성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엘리스가 자신과 같은 환경속에 놓인 다른 계급의 환자들과 만나서 소통하려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까?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법도, 신발 끈을 묶거나 걷는 법도 잊게 될 것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밀로이드의 축적으로 쾌락 신경이 파괴되어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을 즐길 수 없게 되리라.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리라. "  p. 157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3.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엘리스가 추구해 오던 가치는 이젠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기억을 잃어가는 대학 최고의 석학이란 무용지물이다.  엘리스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러나 삶을 선택한다.  왜, 자신에게 그러한 불행이 엄습했는가? 하고 수없이 묻는다.  자신이 모든 가족들의 짐이 될 것이 확실해 보이는 상황, 남은 것은 기억의 사멸과 초라한 아내의 자리, 자식에게 보여줄 실성한 엄마의 모습 뿐이다.  남편 존은 생물학자로서 이루어야 할 일이 많다.  기억을 잃어가는 여인 곁에서 시간을 허비하며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또다른 성취들을 포기할 순 없다.  사실, 남편 존은 엘리스와 함께 그녀의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까지를 함께 해야 하는지, 아니면 경쟁이 심해 추월당할 수도 있을 생물학 연구분야의 업적을 쌓아가는데 시간을 써야하는지, 그 둘 사이에서 고민한다.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다.  배우를 꿈꾸는 딸, 리디아는 출중한 재원으로 자라날 수 있을거라는 엄마 엘리스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이란 제도권을 벗어난 자유로운 형태의 삶을 꿈꾼다.  이 소설의 초반엄마와 가장 큰 마찰을 보여주었지만, 기억이 사라져가는 엘리스의 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자청한건 이 열린 생각을 지닌 딸, 리디아였다.

"넌 참 아름다워, 널 보면서도 네가 누군지 모를까 봐 두려워."
엘리스가 말했다.
"언젠가 엄마가 저를 몰라보게 된다고 해도 제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건 알 거예요."
"너를 보면서도 네가 내 딸이란 것도 모르고 네가 날 사랑한다는 것도 모르면 어쩌지?"
"그럼 제가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거예요. 엄만 제 말을 믿을 거고요."

                                                       p.297,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그녀가 알츠하이머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은 운이 나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발성이란 특성은 알츠하이머 유전자를 갖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더 운이 나쁜 축에 낀다.  그녀는 50세에 인생을 접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모든 업적과 가치는 일순간 무용한 것이 되어 버렸다.  어느 작가는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이야말로 인간에겐 가장 부조리한 죽음일 거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부조리한 죽음도 있다.  자신이 천천히 죽어간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인지하며,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했던 시간과 추억에 대한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면서 죽음에 이르는 것만큼 부조리한 일은 상상할 수 없다.  힘들게 고생하다 정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에겐 삶은 가장 역동적인 성취의 무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상에 있다, 한순간 추락을 통해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은 더이상 낙관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삶은 숭고한 것이다.  작가가 이 작품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인생의 숭고미다.  엘리스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했던 것은 가족의 사랑과 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신의 성취와 남다른 업적들이 아니라, 바로 가족과 타인의 관심과 사랑, 지지인 것을 우린 이 소설을 통해 확인한다.  죽음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이 삶에는 존재한다고 작가는 말하고자 한다.   다시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삶에 대한 잠언 한가지를 되뇌인다.  그는 희망이 없다는 것은 절망하고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의미심장한 문장을 남겼다. 

엘리스에겐 알츠하이머로부터 벗어날 희망은 본래 없었다.  아직 어떤 명약도 그 질병을 치유할 순 없다.  알츠하이머의 획기적인 치료제로서 이 소설속에서 가정된 "아밀락스"의 임상실험은 실패로 끝난다.  이 실험의 실패는 엘리스와 존에게 더없는 슬픔과 절망을 안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작가는 이 실험의 실패라는 기사 한 조각을 배치해 놓는다.  어떤 의미일까?

이미 기억이 상당부분 지워진 엘리스, 뇌속의 뉴런들이 파괴의 작동을 멈추지 않는 엘리스에게 희망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절망해야할 이유는 아니다. 알베르 카뮈가 희망이 없음이 곧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절망이 아닌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리라.  우린 조발성 알츠하이머란 다소 낯선 질병을 앓고 있는 엘리스를 통해 생이 가진 엄숙성과 완결성을 깨닫게 된다.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시와 둔감함이 시대의 조류를 이루는 시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생을 포기한다.  그러나 한 유기체가 생명을 얻고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지는 화분의 꽃나무 한 그루라도 가꾸어 본 사람은 안다.  좀더 인간적으로 말해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생명의 위대함이 지닌 가치에 공감할 것이다.  어떤 생명에도 자연과 인간의 무한한 사랑과 정성이 담겨 있다.  그러하기에 쉽게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범죄인 것이다.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 아닐 것인가?

그래서, 독자는 엘리스의 선택을 이해하고 지지한다.   이 소설의 원제는 Still Alice다.  `Still'이란 단어에서 변치 않는, 여전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는다.  어떤 짧은 시간동안의 여행도,  인생의 축약판이 될 수 있다.  여정안에 인생이 깃든다.  도로위를 달리는 차속에서, 풍경속을 거니는 둔중한 걸음속에서, 타인과 뒤섞인 여행자의 용기속에서, 여행은 많은걸 느끼게 해주며, 여행자에게 무수한 교훈들을 전달한다.  그 여정이란 언제나 미지의 영역에 있다.   여행이란 무방비로 쏟아지는 사건들에 인생을 내맡기는 것이다.  엘리스에게 조발성 알츠하이머는 그녀가 시작한 여행의 종착지를 상징하지 않는다.  알츠하이머를 통해 엘리스의 가족들은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는 사랑이 있다면, 희망이 사라진 곳에도 절망이 깃들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엘리스는 그래서 절망으로 가지 않고, 또다른 삶의 행로안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렇게 삶은 숭고하게 지속되는 것이다.



 

2010. 2.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