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에게 세상을 묻다 - 모르면 당하는 정치적인 모든 것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일기 외 옮김 / TENDEDERO(뗀데데로)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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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나드 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로선 19세기와 20세기를 살았던 이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극작가는 익숙지 않다. 그렇지만, 엉뚱하게도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보다 묘비명으로 더 유명해졌다.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이 단출한 문장만으로도 우린 쇼의 번득이는 유머와 철학을 맛보게 된다. 1856년생으로 94세까지 장수하면서, 그는 화려한 경력을 쌓는다. 그는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의 공동 설립자였고, H.G 웰스, 버트란트 러셀과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이비언협회를 창립해 일평생 활동했다.

 

극작가로서 그의 명성은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진다. 1964년 개봉한 오드리 헵번 주연의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 희곡 <피그말리온>을 지은 이가 그다. 평생 60여 편에 이른 희곡을 발표하며, 세익스피어에 비견되는 극작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음악과 미술 스포츠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피아노 연주와 권투, 서핑 등 못하는게 없는 팔방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몰락한 귀족집안 출신으로 어린 시절 가난과 싸워야 했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일랜드 국립박물관과 런던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서 독학하며, 훗날 작가로 성장할 토대를 닦는다. 일평생 채식주의자였고 해진 옷을 입을 정도로 극도의 검소한 삶을 살았다. 남긴 작품으로서가 아닌 그의 삶을 통해서도 배울점이 있다.

 

만년에 이르러서까지 그는 열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했다. 88세의 고령에 집필한 작품 <쇼에게 세상을 묻다>의 원제는 "Everybody's Political What's What? 모르면 당하는 정치적인 모든 것" 이다. 일평생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평 작업을 해왔던 작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회와 정치' 비평의 정수를 남겨 놓았다. 그의 순수한 의도는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 속 `마치는 글'속에 담겨 있다.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정치 안내서'쯤 된다. 나의 정치적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요즘에는 누구나 정치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대부분은 아주 기초적인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중략) 그들은 정치를 삶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정치가 사회생활의 과학이 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일 뿐이다." 645쪽, 조지 버나드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넓게 보아 그가 논한 것은 정치 사회 현상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는 세상의 거의 모든 일에 관여하는 꼼꼼함을 보여준다. 정치와 사회를 비롯한 교육과 종교, 전쟁과 군인, 지방자치와 의료, 총파업과 사형제도 등을 논했다. 주제들이 논하기에 쉽지 않고, 독자들이 일독하기에 만만한 것도 아니다. 지난 2세기에 걸친 시대상은 아무래도 현재와 동떨어지기 마련이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바탕을 둔 서술은 지루하기도 해서 상당한 인내를 요한다. 하지만, 쇼의 문장은 유머와 위트가 넘치고 풍자와 해학이 살아 숨쉰다. 그의 문장은 그 유명한 묘비명이 괜히 나온게 아님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가 이 책에서 논하고자 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을 형성하고 분화하면서 맞게 되는 파국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통해 모든 모든 인간은 자유로울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고 주장할 걸 갖고, 쇼는 `멀쩡한 사람 입에서 나온 최악의 거짓말'이라며 특유의 과장된 논법으로 성토한다. 왜 그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부모의 보호아래 무기력한 존재로 태어나며 커서는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그런데, 정부가 노동자에게 합당한 일자리를 찾아주지 못할 때 인간은 자유가 아닌 `빈민과 노예'로 전락한다. 쇼가 루소의 자유권의 개념을 논박한 이유이자, 온건 사회주의자로서 정치적 정체성을 획득한 사유다.

 

쇼는 `모두가 정치적으로 박식하다는 가정 하에서 누구나 투표권을 갖는' 보통 선거권에 우려를 표한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라 할 수 있는 보통 선거권을 쇼는 왜 부정했을까? 대중의 무지와 편견, 판단력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쇼는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생존경쟁과 장시간 노동에 치여 정치나 종교에 신경쓸 여유가 없고, 부유층은 향락을 즐기느라 논쟁을 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역설을 고발한다. 즉, 여가의 결핍과 과잉이 사람들의 머리를 굳게 하고 있다고 질타한다. 그 비근한 예를 쇼는 다음과 같이 든다.

 

"농민들 딴에는 잘 해보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든 사회적 가치와 명예를 옹호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실제 투표장에서는 게으름, 낭비, 사치, 비굴함, 가난, 노동착취 등 이기적인 자본이 만들어낸 모든 악덕에 표를 보탠다" 12쪽

 

이러한 문장들을 만날때마다 독자들은 현대사회의 익숙한 정치,사회 풍경을 보게 된다. 오늘날 자신의 계급에 상반되는 투표 행위는 일상적이다. 예술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여가를 향략으로 소비하고 인생을 낭비하는 악습을 막아준다. 그런데 왜 대중은 예술과 미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됐는가? 이 책은 이렇게 답한다. "특정 계급이 토지를 전용하면서 임금노동자 계급이 생겨났고, 이들이 먹고 살기 급급해" 문화와 여가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소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밥벌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전혀 이상하거나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어떻게보면, 하루 밥벌이보다 자신의 사회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하루의 투표가 더 중요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쇼가 700페이지에 가깝게 논하는 그 다양한 주제를 모두 소개하는 것은 독자로서 벅찬일이다. 쇼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정치,사회적으로 많은게 바뀌었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전혀 바뀐게 없다. 1,2차 세계 대전을 모두 겪은 쇼는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 이성의 황폐함에 치를 떨었다. 더불어 `의무복무제도를 문명화된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완벽한 노예제'라고 비판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정치,종교,문화,인종을 이유로 들어 전쟁이 계속되고 살육이 멈추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투표일이 다가오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국민을 위한 정책들을 내놓지만, 일단 당선되고 나면 말을 바꾸고 공약을 수정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는 어리석고 정치인은 간악하다.

 

버나드 쇼는 역사를 학교에서 배운게 아니라, 고전 문학 속에서 배웠고 15세에 학교를 자발적으로 나와, 도서관에서 살며 당대의 지성으로 우뚝섰다. 우리는 쇼를 통해 꾸준한 독서가 교양인과 위대한 지성의 산실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의 논의를 달리 요약하면, 대중이 어떻게 교양시민으로 성장할 것인가? 일 게다. 교양시민이 왜 필요한가? 올바른 정치와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다. 과중한 노동과 가벼운 유희에 빠져든 대중은 독서할 시간과 멀어지니 정치인들만 좋을 일이다. 정치인이 가장 좋아하는 유권자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사회 정학에 무지한 사람들이다. 정의와 민의가 왜곡된 대표가 정치를 맡게 될 때, 사회는 표류하고 정치는 격랑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 밑바탕엔 무지하고 게으른 유권자가 버티고 있다.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일까? 쇼는 거창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세계 평화? 유토피아? 아니다. 모든 인간이 적당히 일하고, 적당한 여가를 갖게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여가'야 말로 인간이 이 지상에서 실현시켜야 할 유토피아의 일부라고 쇼는 말한다. 그 여가를 통해, 지성을 계발하고, 미적 취향을 즐기며, 시와 음악과 그림과 책을 감상하며 건강한 문화적 삶을 소비할 줄 아는 시민을 양산해 내야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 `폭음과 폭식, 성적탐익'외에는 어떠한 즐거움도 모르는 성인들이 정치인들을 제대로 감시하고, 올바른 정치인을 대표로 뽑을 수 있을까?

 

"영웅 정치에는 희망이 없다. 우상화된 개인이 통치하는 나라에서는 성숙한 시민사회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로서 가장 안전한 정치체제는 자격이 검증된 시민들로 의회를 구성하고 그들이 엄격한 감시와 교체, 해임에 주기적으로 노출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도 정치는 그렇게 자격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고, 정치인의 자격을 검증할 때 살펴야 할 항목들을 제안하기 위해서다." 603

 

빈부격차와 양극화, 자본가들의 횡포와 전쟁의 공포, 정치인들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시절을 버나드 쇼는 살아왔다. 자신이 무덤속에 잠들기 전, 버나드 쇼는 한 시대의 지성으로서 깊은 책임과 의무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책의 절절한 울림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여전히 왜곡된 사회정의가 정치를 병들게 하고, 다시 사회 구성원들을 위기로 내모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세계 곳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빈곤의 현상들이 사라지지 않은 채, 인류를 괴롭히는 이 때 인생을 걸고 습득한 정치,사회적 지혜를 독자들에게 전수하려 열변을토해내는 쇼의 노력이 눈물겹다.

 

 

 

2013년 3월 23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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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2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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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론의 충돌 -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경제민주화
이병천 지음 / 후마니타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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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란 말이 있다.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선 싸움보단 흥정이 낫겠다. 하지만, 학문 분야로 오면 이 말은 적절하지 않다. 어떤 학문이 발전한다는 것은 더 많은 논쟁과 다툼이 학자들간에 일어나야 가능하다. 정연한 논리와 에티켓을 갖춘다면, 학문세계의 논쟁은 오히려 장려돼야 마땅하다. 그 좋은 예가 작년 장하준 그룹과 진보경제학 진영 사이에 벌어진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 논쟁이 아닐까 한다.

 

장하준 그룹은 작년 의미 있는 책 한 권을 내놓으며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 한복판에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장하준과 정승일, 이종태의 쾌도난마 한국경제'란 부제가 붙은 책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2012,부키 펴냄)를 두고 하는 소리다. 장하준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세계적 경제학자다. 그가 이명박 정권에서 펴낸 경제학 서적들은 불티나게 팔렸다. 많은 진보성향의 독자와 학자들은 그가 내놓는 저서들을 열독하며 신자유주의와 재벌옹호의 경제정책을 펴는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장하준의 저서들은 2010년 무렵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서적에 포함되면서, 그 주가를 최고치로 끌어 올린다.

 

그런 그가 작년 대선을 몇 달 앞둔 미묘한 시점에 여당 대선 주자와 보수적 경제학자들, 그리고 재벌들이 환호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중 경제서적을 내 놓았다. 그들이 <선택>에서 내놓은 담론은 무척 포괄적이었다. 한국 경제의 성격, 신자유주의 재정의, 재벌 경영권의 옹호, 박정희 경제 정책의 긍정, 재벌과의 대타협을 통한 복지사회 구상 등 그 자체로 무수한 논쟁거리를 양산할 만한 이야기들로 책은 꽉 채워졌다. 장하준을 꾸준히 읽어온 일반 독자들부터 진보쪽의 경제학자들까지 <선택>의 논의에 어리둥절해 했다.

 

그들이 <선택>에서 주장한 내용들은 황당무계한 것들은 아니라서 더 뜯어보고 고민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경제학 지식이 일천한 독자들을 대신해 그의 주장을 논리 정연하게 반박할 경제학자들의 논의가 필요했다.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인 이병천의 <한국 경제론의 충돌>은 장하준의 경제론을 곱씹어 볼 중요한 반박 논리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병천은 이 책에서 <선택>의 주장 하나하나를 다른 관점에서 반박하고 수정한다. 더불어 부록으론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관한 보충적인 해석과 보다 학문적인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에 관한 이병천 교수의 논문이 담겨 있다. 일단 장하준 그룹이 <선택>에서 논란을 지핀 주장부터 살펴보자.

 

장하준은 먼저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을 앞세운다. 최근 미국과 유럽의 위기는 시장경제에서 통제되지 않는 자유가 그 근본원인이라는 것이다. 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관치를 하는 게 맞다'고 까지 주장한다. 금리인상를 비롯한 모든 국가 중대사에 반드시 정부가 개입해야 된다. 이같은 주장은 박정희 시대의 산업 정책과 정책 금융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박정희로부터 시작된 국가주도 경제를 현대 주주자본주의에 대응하는 주요한 `전통'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장하준은 한국인들의 박정희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낸다. 한국인들은 그를 너무 극단적으로 해석하는데, 사실 그를 그 시대의 구조속에서 파악하자는게 그의 생각이다. 즉, `박정희라는 개인의 결정이 한국의 역사에 미친 효과'같은 것을 보는 눈이 필요하단 얘기다. 가령, 1960년대 미국과 세계은행은 포항제철을 세우려는 박정희의 계획에 반대하며, 후진국이 어떻게 제철산업을 하겠다는 만용을 부리느냐고 질타한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제철 산업과 건설, 중화학 공업화라는 결단을 내리며, 결국 그게 성공으로 이어진다. 관치경제에 대한 장하준의 긍정은 박정희 경제정책에 대한 긍정을 내포한다. 단, 정치적 독재 행위 모두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긴 한다.

 

재벌개혁에 대해서도 장하준 그룹의 생각은 진보 진영과 갈린다. 진보계열 경제학자들은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재벌개혁을 감초처럼 들고나온다. 그에 반해, <선택>에서 장하준은 `재벌해체가 투기 자본을 위한 잔칫상'이라며 이에 반대한다. 장하준이 생각하는 경제민주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들은 복지국가를 최종적인 한국 경제의 목적지로 생각한다. 즉, 재벌들에게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부자 증세와 복지국가 건설에 협조를 받아내는 것이다. 진보 진영에서 말하는 경제민주화는 주주자본주의와 통한다. 그들은 재벌의 무책임한 방만 경영이나 불투명한 밀실경영을 재벌 개혁의 목표로 삼고, 기업 투명성과 책임 경영을 주주자본주의를 통해 이뤄낼 수 있다고 봤다. 반면, 장하준 그룹의 생각은 이와 상반된다. 주주 자본주의가 국민이 아닌 주주들을 위한 책임에 한정돼 있다고 질타하는 것이다. 즉, 주주는 국민이 아니라 일부 특권층으로 한정 돼 있으니 경제 민주화는 요원하단 논리다.

 

이병천은 <한국경제론의 충돌>에서 이같은 장하준 그룹의 논리를 직격한다. 그들에게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가능케 하는 힘은 그저 국가에 맡겨져 있는 국가 만능주의다. 더불어 재벌과 타협을 통해 복지국가를 이루자는 장하준의 견해는 `특권 재벌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병천은 장하준 그룹이 신자유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메스를 가져온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월스트리트를 주체로 한 세계화된 금융자본에 한정해, 결국 국내 재벌을 한국 신자유주의 지배 세력에서 떼어내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벌은 한국 경제의 부정 부패, 혼란, 양극화의 주범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라고 이병천은 보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을 단지 금융자본의 지배로만 좁게 바라보기보다는, 지배계급 복합체의 보수적 복원, 즉 인간과 세계를 재상품화하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새로운 타협 기획이라고 좀 더 폭넓게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37쪽, <한국 경제론의 충돌>, 이병천

 

이병천은 장하준이 긍정한 박정희 경제 정책의 문제점을 국가와 재벌의 지배 동맹이란 말로 요약한다. 국가와 재벌이 권력과 경제력을 통해 `노동과 국민 대중의 참여를 정치적으로 배제'하면서 독재국가와 독점적 재벌의 지배연합을 이뤘다는 것이다. 즉, 이병천은 장하준이 박정희 경제와 재벌 체제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수많은 경제적 부작용을 외면했다고 말하고 있다.

 

"박정희 개발독재 정권이 엄청난 특혜를 제공하고 비용의 사회화 정책, 노동자 배제를 통해 그 골격을 세워 주었고, 이어 전두환 신군부정권이 참혹하게 노동자와 농민, 서민, 진보 세력을 억압하고 사회 기강을 바로잡는 정치경제적 구조 조정 및 금융 자유화를 통해 공고화시켰으며, 민주화 이후에는 노태우, 김영삼 정권이 쩔쩔매다 마침내 그 포로로 붙들리고 말았던 문제의 주인공이 바로 재벌 체제 아닌가." 64쪽

 

장하준과 이병천의 두 책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와 <한국 경제론의 충돌>은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장하준의 논의는 한국과 세계 경제를 포괄하며 특유의 쉽고 재미있는 비유와 예화를 유창한 언변에 담아냈다. 반면, 이병천의 책은 장하준에 대한 반박으로선 유용하지만, 꽤 읽기가 난해한 논문체의 글이다. 아마도, 독자들은 이유가 어찌됐든 장하준의 논의에 혹할 가능성이 있다.

 

장하준은 이명박 정권 하에서 신자유주의와 세계 금융, 선진국의 개발논리를 치밀한 논리를 통해 비판해 온 세계적인 학자다. 이 점은 이병천도 인정한다. 이병천은 장하준의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 대해 `대중에 다가가는 문필력과 흥미로움'이 넘친다며 극찬한다. 반면, 이병천은 경제 민주화를 재벌 개혁으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주장하며 장하준이 한국 경제를 논하는데 있어, 중요한 주체인 노동과 노동자를 소외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장하준이 박정희 관치 경제를 극찬하는 것에서 사실 전태일과 같은 노동 주체를 소외시킨 것은 맞다. 이병천은 재벌 개혁의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는 면에서 장하준의 쉽고 논리정연한 문필력 사이에 감추어진 빈틈이 있음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킨다.

 

경제시민에게 이들의 논의는 그 자체가 한국 경제의 현실을 치우침없이 살펴보는데 유용하다. 장하준이 <선택>에서 그 전 저서들보다 우편향 하는 듯한 진술을 보여주긴 하지만, 세계적인 학자답게 시야를 글로벌 경제에 두고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의 방향을 다르게 볼 뿐이란 변명이 가능한 것이다. 이병천은 재벌과 타협해 복지국가를 이룬다는 장하준 그룹의 생각을 순진한 이상으로 바라보는 듯 하다. 한국에서 군사독재의 비호아래 성장한 재벌을 수술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에 급선무라고 충분히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병천의 <한국 경제론의 충돌>은 경제시민들을 위한 대중서를 표방하기엔 쉽게 읽히지 않는 문장과 고답적 논리를 담고 있다. 이병천의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아마도 왜 장하준이 우리 시대 최고의 대중경제학 저자인지 깨닫게 될 것 같다. 유려한 문필력은 소설가나 경제학자에게나 교양서적을 집필하는 모든 저자들에게 필수적 재능이다. 이병천의 논의가 장하준 경제론의 균형점을 유지시키긴 하지만, 대중들에게 어필하는데 그 딱딱한 문장들이 장애가 될 것 같다. 책의 긍정적 논의에도 평점에 짠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2013년 3월 7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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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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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은 국경을 초월하는 나름의 언어를 갖는다. 그것은 실제 문자나 기호가 아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공감력 같은 걸까? 문화와 역사적 배경이 이질적인 작품이지만 낯선 거리감보다는 지리를 초월하는 감동으로 독자를 매료시킨다. 그런 작품에서 받은 좋은 느낌은 유럽이나 미국, 혹은 한국이나 중국 할것없이 동시대의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힘이 있다. 그 좋은 예가 위화의 장편 소설 <허삼관 매혈기>다.

 

허삼관이 살아가는 시대를 작가는 20세기 중후반으로 설정했다. 중국 공산당이 건국을 주도하고, 집권을 시작하며, 부국강병 정책들을 구사하던 때다. 그 시절은 정치가 개인의 일상을 통제하던 시절이자 문화대혁명기로서 개인주의와 사상의 자유는 종적을 감춘 정치 과잉의 시대이기도 했다. 소설은 그 시기를 배경으로 감싸안고 있지만 정치적 암흑기를 고발하거나 기억하고자 하는 의도로 읽히지는 않는다. 위화는 주어진 조건을 인내하며 살아가는 `개인'과 `가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족이란 이름이 가진 숭고함은 세계의 어떤 정치적 환경이나 경제적 위치에서건 변하지 않는 좌표를 점한다.

 

허삼관은 `성안의 실공장에서 누에고치를 대주는 일을 하는 노동자'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허옥란이란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된다. 허옥란은 미모와 솜씨를 겸비한 여자인데 허삼관과 혼인 전 하소용이란 사람과 사귄 경험이 있다. 결혼 후, 허삼관은 세아이를 두는데 그들의 이름은 순서대로 일락,이락,삼락이다. 소설은 이 가족의 일대기를 시간순서대로 그리며 허삼관이 아버지로서 겪어내는 부침많은 인생을 담아낸다.

 

위화는 최근작인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에서 어린 시절 매혈의 광경을 묘사한 적이 있다. 각 병원에선 필요한 피를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매혈을 통해 얻곤 했다. 병원의 수혈실엔 관리자인 `혈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피를 팔려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위세를 부린다. 소설 속 허삼관은 이웃동네 사람인 `방씨와 근룡'을 따라가 처음으로 피를 팔아 돈을 벌게 된다. 방씨와 근룡은 피를 팔기 전에 강물을 마셔가지고 배를 채운다. 그게 그들에겐 피의 양을 많게 해 더 많은 피를 팔 수 있는 노하우였던 셈이다. 또, 그들은 피를 팔고 나선 반드시 동네 승리반점에서 돼지 간볶음에다 황주를 시켜먹곤 했다. 쇠약해진 몸을 보신하기 위해서였다.

 

피를 뽑기전 배터지게 물을 마시는 것이나, 그 후 돼지 간볶음에 황주를 곁들여 먹는 것은 허삼관이 일평생 실천하는 매혈기 가운데 결코 빠지지 않는 습관이 된다. 이 절차들은 자못 진지하지만 작가는 그 진지함이 가난과 무지로부터 기원하는 것임을 애써 숨기지 않는다. 그들만의 잘못된 의학지식과 지혜는 비참한 삶을 헤쳐나가는 인물들의 처지를 묘사하면서 동시에 무지와 순박함에서 오는 유머를 불러온다. 허삼관을 혈두에게 인도했던 방씨가 방광이 터져 죽는 것이나 근룡이 매혈 후, 승리반점의 탁자에서 숨을 거두는 후반부 장면이 그 증거다. 특히 비참한 이야기를 태연하게 서술하며 은연중 웃음을 유발하는 작가의 재능이 돋보인다. 허삼관은 `매혈 스승'의 교훈을 져버리고, 강물을 배가 터지도록 들이켜고 3일에 한번 피를 파는 기행을 일삼게 된다.

 

허삼관은 목숨을 걸고서까지 왜 피를 팔아야 했을까? 허삼관의 아들 일락은 본래 그의 아들이 아니다. 자식중에 가장 믿음직스러워했고 사랑했던 아들은 실은 허옥란이 하소용과 혼전 관계로 잉태된 애였다. 이를 알고, 허삼관은 일락이를 미워하고 가정이 파괴될 위기에 처한다. 아내 허옥란에 대한 분노 때문에 허삼관도 공장의 동료인 임분방이란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허삼관이란 인물은 복수심에 바람을 피우고 죄없는 아들 일락이를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로 핍박한다. 피를 담보로 희생하는 아버지 상으로서 허삼관은 교훈적이지 않고 흠 많은 보통 사람이다. 위화는 평범한 가정과 평범한 인물을 내세워 그들이 가족 해체와 사회적 빈곤의 위기를 넘고 사랑과 희생으로 하나가 되는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가족의 눈물겨운 생존의 과정속엔 중국 근현대사의 장면들이 감초처럼 묻어 있다. 배급제에 실패한 당국 때문에 가족이 굶주림에 처할 때나 무고한 사람들을 반혁명분자로 지목해 심판하고, 젊은이들을 연고없는 농촌으로 하방시켜 고통을 주는 역사가 이들 가족의 삶에 그대로 투영 된다. 후반부로 갈수록 허삼관은 정치적 역사와 가족의 운명을 온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힘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환원된다. 그는 그 때마다 피를 팔아 가족의 주린 배를 채우고, 피를 팔아 가족 해체를 막아내며, 피를 팔아 아들의 생명을 구한다. 그렇게 흠많고 시기심 넘친 평범한 인간 허삼관은 아버지라는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비로서 사랑스럽고 존경할만한 캐릭터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 우리 다섯 식구는 지난 오십칠 일간 옥수수죽만 마셨습니다. 전 지금 몸속의 피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구요. 제발 제 몸속의 피 두 사발만 가져가주십사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래서 돈이 생기면 그 돈으로 식구들한테 오랜만에 맛있는 밥 한 끼 사주려구요. 도와주십시오. 나중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168 쪽, 위화 <허삼관 매혈기>

 

아버지의 희생과 헌신은 흔한 말이다. 때론 너무나 흔해서 그게 그렇게 위대한 일인지 우린 까마득히 잊고 산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다. 그가 특별히 강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런게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 뿐이다. 소설 속 허삼관은 그저 현실의 아버지들을 상징화 한 인물이다. 피를 파는 아비는 자신의 `고통'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가족을 배불리 먹이고, 병을 고치며,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는 피보다 더한 것도 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우리의 진실한 모습이자 실상이다. 소설 속 허삼관의 매혈기가 모든 오해를 벗고 애틋한 아비의 사랑으로 독자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위화라는 작가는 얼마 전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를 통해 처음 접한 중국 작가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통해, 이제 그의 소설을 읽어보게 됐다. 우연히 고른 두 권의 책을 통해 정치와 사회, 그리고 역사 가운데서 인간이 처한 곤란한 상황을 이해하는 위화의 문학에 깊숙히 빠져들게 됐다. 그의 작품들은 두가지 문학 비평 용어로 설명가능하다. "곡진함"과 "핍진함"이다. 문장에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는 의미에서 그의 문장은 `곡진하며', 중국의 투박한 정치사가 소시민의 삶을 좌우하는 모습을 내밀한 필력으로 그려낸다는 것에서 그의 작품은 `핍진하다'.

 

19세기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의 문학을 흔히 "유머와 페이소스(연민)"의 조합으로 설명하곤 한다. 그는 또 자서전에서 "살아있는 가슴에서 나온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정의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중국의 작가 위화의 작품을 보며 내가 느낀 것도 바로 그것이다. <허삼관 매혈기>는 페이소스와 유머가 뒤섞인 소설이다. 가난과 비참함에 포위된 소시민이자 아버지 허삼관의 일생을 위화는 유머러스하고 연민에 들어찬 작법으로 그려보인다. 이 작품은 `살아 있는 가슴속 뜨거움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자 세상의 모든 아비들에게 보내는 헌사에 다름 아니다.

 

 

 

 

201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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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이후 사이언스 클래식 14
스티븐 J. 굴드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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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신중한 사람이자 엉뚱한 인물이다. 그는 진화론의 증거들을 젊은 시절부터 수집하기 시작했지만, 완벽한 물증을 확보하기 전까지 <종의 기원>이란 저서를 발표하지 않고 미뤘다. <종의 기원>을 발표한 것도 거의 떠밀려서 였다고 한다. 다른 생물학자의 논문 발표로 자신의 업적이 뒤쳐질 것을 염려해 결국 미뤄왔던 <종의 기원>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런데, 그 당시 발표된 <종의 기원>의 상당 부분은 원작에서 축약된 것이었다. 논문 발표 이후, 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그는 두려워했다. 또, 그는 캐임브리지 대학 신학부 출신이다. 평생 박물학을 연구하면서 창조론의 대척점으로 다가가며 느꼈을 다윈의 혼란을 짐작케 한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생물 진화가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주장했다. 그는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였지만, 살아 생전에 그같이 과감한 자신의 생각을 대중앞에 나서 변론하지 않았다. 훗날 종교인들은 창조진화론을 통해 다윈의 사상을 `창조적'으로 흡수하려 했다. 진화조차도 신의 섭리 가운데 일부분이라는 논리다. 다윈의 사상을 `오해'한 것은 종교인만이 아니었다. 과학자들은 진화론의 성격을 `진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생물에는 하등 생물과 고등 생물이 있으며 인종도 마찬가지로 가장 열등한 인종과 진보한 인종이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성별에 따라 능력이 결정된다는 논리도 편다. 진화론은 그들에겐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근거였다.

 

이같은 혼란 가운데, 다윈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진화생물학자들의 노력이 20세기에 큰 진전을 이루게 된다. 그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20세기 진화 과학의 수호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스티븐 제이 굴드다. 그는 194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유대인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공룡의 화석을 본 이후, 굴드는 고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67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고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그 해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해 폐암으로 사망한 2002년까지 그곳 지질학과 정교수로 활약한다. 그는 1974년부터 2001년까지 무려 27년간 미국 자연사 박물관이 발간하는 잡지 <자연사>에 300편이 넘는 에세이를 연재한다. 그의 저서 <다윈 이후>는 이 에세이들을 묶은 첫 번째 모음집이다. 이 책에 수록된 수십편의 에세이들은 그의 연구를 다양한 소주제로 엮어 소개하고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동료 닐스 엘드리지라는 학자와 함께 1972년 ‘단속평형-계통점진설의 대안'이란 논문을 발표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그들은 생물 종의 진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된다는 기존의 학설인 `계통점진설'을 부정하고, 종(種)이란 오랜 기간 평행상태를 유지하다가 특정한 짧은 시기에 급격하게 진화적 변화가 진행된다는 단속평형설(斷續平衡説)을 내놓는다. 이들이 주장한 단속평형설이 왜 중요한가? 그간 창조론을 주장한 이들은 진화를 증거하는 중간단계의 화석들이 미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들어, 진화론을 부정해 왔다. 반면, 굴드가 주장한 단속평형설은 생물종의 변화가 거의 없는 안정평형 상태가 유지되다, `지리적 격리'나 `개체군이 소규모화'되면서 종분화가 나타날 때 비약적인 진화적 변화를 이룬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중간단계의 화석은 없어야 맞다. 그들의 주장은 창조론의 공격을 방어하는 논리로 자리잡았고, 고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을 접목시키며, 일약 현대 진화 생물학의 중요한 이론으로 발돋음한다.

 

<다윈 이후>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생각들은 철저히 사이비 진화론을 고발하고, 다윈에 대한 오독을 경계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1장 `다윈에 대한 오해와 이해'라는 곳에서 굴드는 다윈이 지향한 연구의 방향을 분명히 설정하고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할 당시, 생물학계는 진화에 대한 여러 논의가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또, 발표 후에도 변론에 신경쓰지 않는 다윈의 태도로 인해, 진화론을 오독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과 일체의 진화론에 관한 주장들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철학적 유물론'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진화론자들은 생명력, 진화의 방향성, 유기체의 노력, 정신의 불가분성 등을 말하며, 하느님이 창조가 아닌 진화를 통해 역사하셨다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기독교와 타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간다. 그러나 다윈은 오로지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만을 주장하며, 무신론적 유물론을 펼쳤다.

 

"다윈은 자신의 노트에서, 그가 명명했던 이른바 `요새 그 자체(the citadel itself) - 인간 정신 - 를 비롯한 모든 생명 현상에 자신의 유물론적 진화론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만약 정신이 인간 두뇌의 산물 그 이상이 아니라면, 하느님이란 두뇌의 환상이 빚어 낸 또 하나의 환상 이외에 도대체 무엇일 수 있겠는가? 종간 변이를 적은 한 노트에다 그(다윈)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 너 유물론자여, 신에 대한 사랑은 생물 조직에서 비롯하나니!... 두뇌의 분비물인 사상이 물질의 성질인 중력보다 더 경이로워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우리의 오만, 우리의 자기 찬양에 지나지 않는다.' " 27쪽,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다윈을 잇는 20세기 생물학자 굴드는 다윈보다 용기 있다. 그는 수많은 사례들과 연구 결과물을 갖고, 과학와 종교가 인간 사회를 오도한 일들을 고발하며 비판한다. 종교 뿐만 아니라 과학이 사회를 진리의 반대편으로 이끈 경우가 허다하며, 그 이유는 인간을 자연과 분리해서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굴드는 인간과 유인원 사이에는 유형적으로 엄격한 연속성이 있음을 시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잃을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했을 때 단지 고루한 영혼의 개념이 퇴색 될 뿐, 우리와 자연은 하나라는 한층 겸허하면서도 고양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생물 진화의 역사에 인간을 포함시킨다는 의미다. 인간은 특별하고 색다르게 진화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들처럼 평범한 다양성 안에서 진화한 것이다. 다윈은 `인류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는 머지않아 서광이 비칠 것'이란 말로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을 에둘러 표현했다.

 

한 때 화려하게 뿔을 진화시킨 아일랜드 앨크의 사례에선 진화의 역설을 고발한다. 아일랜드 앨크는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뿔을 화려하게진화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화려한 뿔로 인해, 아일랜드 앨크는 변화된 주변 환경에서 도태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즉, 어느 한 시점에서는 유용했던 구조가 이후의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는 항상 유용할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교훈을 다윈의 진화론은 주고 있는 게다. 또, 생존의 주요한 세가지 방식을 이야기하며,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존재가 필수적인지 묻고 있다. 지구상에는 생존의 세가지 방식이 있다. 식물(생산)과 균류(환원)과 동물(소비)의 패턴이다. 굴드는 주요한 생명 순환은 `생산과 환원'으로 충분히 운영될 수 있고, 이 세상은 소비자들(동물과 인간을 포함) 없이도 충분히 잘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자만심의 관(棺)에 또 하나의 대못'을 박아 넣는다.

 

그는 인간 지능 연구를 둘러싸고 일어난 생물학적 결정론이 실제론 아무런 증거도 없다며, 그 허구를 주장한다. 근대 이후 많은 서양 과학자들이 식민지의 원주민에 대해 그 피부색이나 인종을 진화론적 개념을 들먹이며 열등과 하위로 구분짓곤 했다. 굴드는 인종과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결정론을 나름의 과학적 근거로 반박한다. 왜 그가 20세기 `다윈 이후'에 가장 명석하고 정직하며 공정한 생물학자로 기억되는지 이 책이 그 좋은 사례가 된다. 그가 27년간 <자연사>에 발표한 그 수많은 에세이들 가운데서도 수작을 뽑은 이 책을 읽으며 독자는 해박한 지식을 유려한 문체로 풀어쓰는 재능에 놀라게 될 게다. 그는 에세이의 시작을 가벼운 농담이나 흥미로운 이야깃 거리로 시작해, 독자를 진화생물학의 정수로 안내한다. 과히 20세기 천문학의 교사 칼 세이건의 명석함과 유려한 글쓰기를 연상케 한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뉴턴 이전에 우리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축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윈 이전에 우리는 자비로운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프로이트 이전에 우리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상상했다. 혈연 선택이 이런 후퇴 과정의 또 다른 한 단계를 증명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지배적인 위치에서 밀어내어 다른 동물들에 대한 존경과 통일적 유대 관계를 자각하도록 유도하는 긍정적 효과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379쪽

 

오늘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은 진리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살았던 16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같은 주장을 미치광이 과학자의 헛소리로 치부하며 형벌 위협을 가한다. 1992년이 되어서야 교회는 갈릴레오에 대한 사면 복권을 단행했다. 오늘날 진화론은 생물학계의 일반상식이 되었지만, 교과서에 진화론과 창조론 중 어떤 이론을 실어야 하는지 가끔 논쟁거리로 등장한다. 진화론은 지동설처럼 명백한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다윈 이후'에 종교나 과학 할 것 없이 다윈을 오독하고 진화론을 정치,사회,과학적으로 남용하는 사례를 이 책에서 적극 고발한다. 과학도 때론 종교만큼이나 기득권과 편견을 위해 봉사한 흔적을 우린 굴드라는 공정한 생물학자를 통해 알게 된다.

 

굴드는 과학적 진보(progress)를 `미신이라고 하는 무지에서 출발하여 계속해서 사실을 축적해 감으로써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라 정의한다. 진리에 관해 과학과 종교 모두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굴드가 이해한 다윈의 진화론은 변화무쌍한 자연의 다양성이란 말로 요약된다. 그 말은 진화가 `진보'와는 전혀 다른 개념임을 암시한다. 진화는 `무방향적'이며 `일방향적'이고, `점진적'이다가 `돌발적'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 나은 존재로 변화된다는 진보라는 개념을 애초 굴드는 상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확실성이란 괴물은 정치가와 목사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자신은 자연의 다양성을 즐기겠다는 말로 이 책을 끝맺는다. 20세기 진화생물학의 정수에다, 공정함과 솔직함, 유머와 위트를 겸한 `굴드표' 진화생물학을 만나는 기회를 주는 책이다.

 

 

 

20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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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과 오바마
이하원 지음 / 김영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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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인 1880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김홍집은 귀국길에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란 책 한 권을 구해와 고종에게 바친다. 그 책은 일본에 주재하던 청국의 외교관 황쭌센이 지은 것으로 개항기에 조선이 처한 국제 정치적 위기의 타계책을 설명하고, 외교정책의 나아갈 방향을 설정한 저서였다. 청국의 외교관은 남하 정책을 추진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은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해서 국력을 키워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전략이 조선의 미래에 도움이 되었는가, 하는점은 논쟁거리지만 분명한 시사점 한가지를 건네고 있다. 즉, 조선과 오늘의 대한민국 사이 100여년이란 시간동안 여전히 4강의 영향권 아래서 한국 정치와 외교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면에서 세계 10대 교역국이 되고, 잘사는 나라들의 모임인 OECD에 가입하고, 자주적 국방과 외교를 추진하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이라지만, 우리에게 국제적인 운신의 폭은 4대강국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돌아가는게 현실이다. 이것은 근대화와 20세기 냉전 이후 한국이 처한 운명적인 조건이 됐다. 4대 강국 가운데 특히, 우리는 G2(주요2개국)로 불리는 중국과 미국의 외교정책과 방향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마침 2012년 중국은 제18차 당대회를 통해 5세대 지도부를 선출하면서 시진핑을 차기 주석자리에 앉혔고, 미국은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2기 행정부를 최근 출범시켰다. 더불어, 한국과 일본의 지도부가 동시에 교체되면서 2013년 벽두를 맞이하게 됐다. 우리에게 지금은 한말에 배포된 <조선책략> 못지 않은 정교한 논리와 전략을 담은 책 한 권이 필요한 때다.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워싱턴 특파원과 외교안보팀장을 역임한 이하원은 미국의 다양한 외교인사들을 동행취재한 전력과 하버드 대학 등에서 초빙연구원으로 국제정치를 연구한 식견이 남다른 저자다. 그는 2013년 새로 출범하는 한반도 주변의 신집권 세력의 성격과 외교정책을 검토하고 세계 G3(중국,미국,일본)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한반도의 정세를 분석한 저서로 `21세기 신 조선책략'이라 불릴만한 책, <시진핑과 오바마>를 최근 내놓았다.

 

 

저자는 G2의 지도자인 시진핑과 오바마의 출생과 성장배경, 성격과 정치역정으로 시작해, 그들이 대내외에 선포한 정치 비전을 분석해 들어간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갈등과 협력의 2중주'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많은 부분에서 부딛칠 것이 확실하지만 결코 양국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하진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왜냐하면, 이 두 거인은 일본의 스모 선수들처럼 한 선수가 쓰러지면 동시에 다른 선수도 역시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역학구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외교,군사면에서 대결하고 있지만, 경제면에선 두 나라는 운명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면 한반도는? 저자에 따르면, 한반도 유사시 매번 중국과 미국은 똑같은 반응을 해 왔다. 즉, 급변사태의 방지와 안정, 그리고 관리다. G2 어느 나라도 한반도가 격랑속에 빠져드는 일을 원치 않는다. 즉, 그들은 현상유지를 원하고 있다. 이 말은 평화와는 다른 뜻이다. 그들은 나쁜 방향으로도, 좋은 방향으로도, 변화를 원치 않는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결국, `신 조선책략'인 이 책에서 저자는 남북이 협력과 화해, 그리고 통일을 이루는데 민족의 자주적 역량이 가장 중요하다고 결론짓는다. 그 어느 나라도 편애하지 않고 자극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힘을 키워 궁극적인 통일의 시대를 예비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선택할 미래다.

 

 

 

" 양국이 말하는 한반도의 ‘안정’을 다른 말로 바꾸면 ‘현상 유지’다. 남북이 분단된 상태를 지속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미중이 한반도 정세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전될 수 있는데도 일시적인 혼돈이 두려워서 현상을 유지시키려 한다는 비판도 있다. 한반도에 위기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안정’만을 외치는 미국과 중국에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164쪽, 이하원 <시진핑과 오바마>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유엔 제재, 그리고 북한의 3차 핵실험 예고는 그 어느때보다 한반도의 정세가 급박히 돌아가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시진핑과 오바마는 G2 시대의 첫 중,미 지도자로 2013년 임기를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 사이의 대결 무대로 이용되곤 했던 한반도의 미래가 곧 결정될 것이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까? 미국과 북한은 대결과 평화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미국과 중국은 G2 체제에서 어떤 관계를 구축해 나갈까? 센카쿠 열도(중국명: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로 갈등하는 중국과 일본은 전쟁과 평화 가운데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가? 어느 하나 해결이 쉽지 않은 질문들이자, 2013년 동아시아의 구성원들이 풀어야할 난제들이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더불어,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병법이자 진정한 승리'라고 덧붙인다. 한국은 동아시아의 난제들을 풀어가야할 직접적 당사자이기에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파악하고, 관계국의 지도자들의 면면을 살펴야하며, 그들이 내세우는 비전에 주목해야 한다. 전쟁이라는 파국을 맞지 않고 평화가운데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직접적 난제들을 회피해선 안 된다. 이 엄중한 시기 어디서 지혜를 구할 것인가? <시진핑과 오바마>의 제 7 장의 주제는 `시진핑과 오바마 시대의 신 한국책략'이다. 국제관계에 정답은 없지만, 최선과 차선의 해답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책은 정답은 아닐지라도, 외교 전문가들의 정교하고 폭넓은 논리와 지식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바꿀 지혜와 전략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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