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페셔널의 조건 피터 드러커의 21세기 비전
피터 드러커 지음, 이재규 옮김 / 청림출판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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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사가 귀찮아지는 순간이 있다. 때는 3월, 연초의 다부진 각오는 온데간데 없다.  프랭클린 플래너 속지 잉크가 말라가기도 전에, 나의 1년 계획은 1,2월을 통해 무참히 실패하고 좌초 되었다.  좌초된 배는 서서히 가라앉는 것외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요즘 내 심정이 딱 그와 같았다.  의욕을 잃었던건 계획한 모든 것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조  때문이었다.  이 지점에 내가 꺼내들 최후의 수단은 피터 드러커를 펴드는 것 뿐이다. 

경영학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이름을 올렸던 그는 2005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경영외적인 분야에서도 남다른 열정으로 노익장을 과시했던 학자였고 세기의 지성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상찬이 아니다.  그의 책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 열정적인 할아버지의 풍부한 지식과 미래지향적 안목에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학자적인 기본능력일 뿐이다. 내가 그의 책 한 권 한 권을 접하면서 크게 배운 교훈은 자신의 학문 세계에 대한 놀랄만한 열정과 성실성이다.  90세의 나이에도 은퇴를 고려해본적이 없고, 할 생각도 없다고 자신감을 피력하는 모습에선 이미 애늙이처럼 살아가는 청년들의 몹쓸 패배주의와 의기소침을 한방에 날리고도 남을만한 의기가 전해온다.  피터 드러커 할아버지를 보면 나이란 진정 숫자에 불과하단 얘기가 허언이 아님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피터 드러커는 이 책에서 지식노동자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다시 내리고 있다. 그가 많은 책에서 지식 노동자를 정의하고, 그들의 특징과 진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즉,  피터 드러커는 1960년대 이미 지식노동자의 출현을 최초로 예언했던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육체노동자와 달리 지식노동자는 독창적인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우량기업의 평균 생존년수가 30년을 넘지 못하는데 반해 지식노동자는 자신의 지식을 통한 이동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기업이 망해도 살아남는다. 더이상 그는 특정 회사에 국한되어 일하지 않는다.   즉, 그는 노마드족이다. 일종의 지식 유목민인 것이다. 

기업의 전통적인 생산요소로 우리는 자본과 노동, 토지 등을 들어왔다.  그러나 드러커는 이들 요소에 하나를 더 보태고 있다. 그것은 지식과 근로가 결합된 지식노동자라는 개념이다. 더불어 기업의 생산요소 가운데 최우선을 지식노동자의 생산성,  즉 독창적 지식에 두는 점은 매우 특이하다. 어떻게 이러한 순위를 도출했을까?  드러커는 지식과 지식을 결합시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을 보유한 지식노동자는 여타의 생산요소들인 자본과 노동, 토지까지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회사의 진정한 주인은 경영자가 아니다.  회사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일반 노동자가 아니다.  그는 풍부한  아이디어와 정보로 지식 생산성을 소유한 지식 노동자다. 그는 회사의 운명을 결정할 능력을 보유하며, 어느 회사로도 전직할 능력이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회사의 경영자이며 실제 주인이다.

이렇게 지식 노동자의 지위를 최고로  끌어올린 드러커는 어떻게 지식 노동자가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고, 기업의 운명과 상관없이 오래도록 자신의 이동성을 장점으로 생존할 것인지 그 존재조건들 하나하나를 열거한다.  그에 더해, 생산성 높은 지식노동자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방법들을 이 책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정말이지, 지식은 오늘날 의미 있는 유일한 자원이다. 이제 전통적인 `생산요소들' - 토지,노동,자본 -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것들은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며, 더구나 지식이 있다면 아주 쉽게 얻을 수도 있는 것들이다. 새로운 의미의 지식은 실용성으로서의 지식이고,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지식이다. " p. 57 <프로페셔널의 조건>, 피터 드러커 

지식노동자로 성장하기 위해 피터 드러커는 프로페셔널로서 자기를 관리하고, 자신의 강점 파악과 시간을 분석해서 재설계하고,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전략을 쓸 것을 권고한다.  프로페셔널을 위한 몇가지 기초지식으로서 그는 효과적인 의사결정 방법, 조직 내의 커뮤니케이션, 리더쉽이 어떻게 발휘되며, 각 개인이 자신의 강점을 업무에 적용하는 방법 등을 설명한다.  지식 노동자는 여타의 직원들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는 회사에 자신의 지식을 통해 공헌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것이 지식노동자의 존재이유다. 지식노동자는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리더쉽을 발휘하며, 수많은 단점 가운데서 오직 강점만을 활용하여, 회사에 공헌할 수 있다.  완벽한 인간은 한 사람도 없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단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식노동자는 자신의 강점을 활용함으로써 오직 회사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실현을 위해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할 것을 강조한다. 많은 사회,경제적인 변화 환경속에서는 이제 평생직장이나 직업이란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그 자리를 일류기업보다 긴 노동수명을 갖고 있는 지식노동자가 대체하고 있으며, 그들은 각 개인이 각자의 생산도구라 할 수 있는 지식을 갖고, 회사의 운명에 종속되지 않은 직업이동성 아래서 오랜 시간 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책은 변화하는 환경과 미래를 대비해, 조직속의 개인이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하는 점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90세가 넘어서까지 경영학의 일선에서 은퇴하지 않고, 지속적인 학문적 열정아래 숱한 저작과 강의를 진행했던 피터 드러커 자신이 바로 지식 노동자의 대표격에 속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단순히 학문적 열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의 성실함은 어디서 연유하는 걸까?  제 3 장을 이루는 한 페이지에서 그 힌트를 얻게 된다. 

그는 "인생을 바꾼 7가지 지적 경험"이란 페이지에서 젊은 시절의 일화 한가지를 기록해 놓았다. 대학생이던 드러커가 어느날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폴스타프를 처음으로 관람했다. 이 오페라의 열정과 활기에 놀란 그는 베르디라는 작곡가에 대해 찾아 보다가 그가 여든 살의 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열 여덟 살의 풋내기 대학생인 피터 드러커에게 여든이란 나이는 까마득했다. 더군다나 그 당시 평균 나이가 50을 넘지 못했다.  작곡가 베르디는 어느 인터뷰에서 "19세기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미 유명인이 된 사람이, 왜 그런 벅찬 주제로 더구나 고령의 나이에, 굳이 힘든 오페라 작곡을 계속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음악가로서 나는 일생 동안 완벽을 추구해 왔다. 완벽하게 작곡하려고 애썼지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늘 아쉬움이 남았다.  때문에 나에게는 분명 한 번 더 도전해 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열여덟 살의 나는 그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성숙하지 못한 풋내기였고, 그리고 나약했다.  그로부터 15년이 더 지나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나는 내게 어떤 소질이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를 진실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에 나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베르디의 그 교훈을 인생의 길잡이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나이를 더 먹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진하리라고 굳게 마음 먹었다. 살아가는 동안 완벽은 언제나 나를 피해 갈 테지만, 그렇지만 나는 또한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리라고 다짐했다."  p.157, <프로페셔널의 조건>, 피터 드러커 

피터 드러커의 책은 이번이 세번째다. 경영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을뿐더러, 나는 경영학도나 경영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피터 드러커의 책을 읽으면 그의 경영이론은 난해하고 지루한 반면, 얻을 것이 참 많단 느낌이 든다.  그것은 경영이란 개념이 단순히 기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중심으로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은 경영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것도 경영이다. 막무가내로 읽는것보다는 계획을 세우고 읽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경영이다. 회사일에만 파묻혀 살고, 가정과 멀어지면 업무에 성공했다해도, 인생에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피터 드러커의 경영학 서적들은 넓게 보자면 우리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더불어, 그의 저서속에서 미래에 대한 그의 예언들은 몹시도 의미심장하며, 어느 미래학자의 조언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평생 직장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있고, 사라질 것이기에, 미래를 위해 두번째 직업을 준비하라는 그의 조언과 함께 좀더 포괄적으로 이 책의 마지막 장에 기록된 것처럼,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가"라는 인생에 방향성에 대한 드러커의 심오한 질문은 독자들에게 지금 당장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힘을 발휘한다.  96세의 나이로 영면할때까지 피터 드러커는 젊은 시절의 열정과 성실성을 그대로 유지했던 보기드문 학자였다. 어떻게 자기 실현을 할 것인가를 지식 노동자의 입장에서 정리한 이 책은 그 내용의 풍성함과 미래지향성에 앞서, 독자가 드러커의 인생을 교훈으로 삼을만한 근거를 제시해준다.

"나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종교 과목을 배웠는데, 그 선생님은 진실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선생님은 어느 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들은 죽은 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물론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있다가,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너희들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50세가 될 때까지도 여전히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봐야 할 거야"  p. 354  <프로페셔널의 조건>, 피터 드러커

책의 대부분은 경영과 업무환경 속에서의 지식 노동자의 역할과 조직의 효율성에 관해 다소 지루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고, 이 책에서 설명한 지식 노동자라는 개념도 명확하지 않은 면이 다소 있다.   그리고 산업혁명 시대 생산성 혁명으로 얻은 열매의 대부분을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가 가져갔다고 하는 파격적이 주장을 하며 마르크스의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경영 효율과 생선상 향상을 위해, 노동자 해고를 당연한 듯이 긍정하는 언급도 한다. 평생을 경영자들의 컨설턴트로 일했던 드러커의 친자본,친경영자적 경향을 책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성향은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가 한 개인의 공헌에 대해 언급할 때 든 예처럼 이 책에서 나는 그의 단점보다는 강점을 더 많이 보았으며, 그것으로 만족했다.

"자본주의 산업 헉명의 지정한 수혜는 `자본가'가 아니라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블루칼라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였던 것이다." p.52  <프로페셔널의 조건>, 피터 드러커  

이제 피터 드러커 할아버지의 말씀을 받들어, 작심삼일이 되어 버린 올해의 나의 계획들을 하나둘씩 추스려 다시 목표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고자 한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렸다.  소중한 것을 항상 먼저해야 함에도 하고 싶은 것을 먼저 해 버리고, 시간을 집중해서 사용하지 못했으며, 작은 유혹들에 넘어가 버린 것을 깨닫는다. 3월, 연초의 계획을 추스리기엔 그리 늦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길을 잘못들어섰으니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라는 말이 나온다.  풀이하자면 "허물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것, 그것이 허물이다" 라는 뜻이다.  

 


 

2009.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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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내음가득히 2009-03-20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살님께서 쓰신 글이라기엔 참으로 문체가 시원하고 멋지세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개츠비 2009-03-21 22:32   좋아요 0 | URL
^^ 반가워요. 근데 18살 아니랍니당...18살이었음 좋겠네용^^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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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상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한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할때만큼 평화로움을 주는 것은 없다.   응당, 그것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학생이 있어야 할 곳은 술집이나 유흥주점이 아니라, 도서관이나 학교다.  학생은 도서관에서 책을 볼때나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 제 자리에 있는 것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요즘 졸업식장에서 교복을 찢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한동안 자신들을 규율이라는 통제속에서 감금했던 것이 교복이라고 상상했기에, 그것을 찢는 행위는 해방이고 자유인으로서의 권리선언쯤 된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이런 학생들이 3년이란 시간동안 학교 생활을 제대로 했다고 상상할 수는 없다. 배우는 것을 직분으로 알고 감사히 배우고, 깨닫는 과정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자신의 직분을 상징했던 교복을 찢어발기는 것이다.  이들의 몇년후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본문에 성실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귀중한 인생의 한 순간을 허비했다는 증거다.  이들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들의 불성실이다.   학생시절때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대개 사회속에서도 성실하지 않다.

지식인이란 단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는가?  이상적인 지식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 단어가 내포하는 함의는 무엇인가?  박학다식, 교수, 박사, 오피니언 리더, 출세, 성공, 돈, 관직. 대개 이런 단어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것이다.  내가 지식인이란 단어에서 꺼내들 수 있는 고정관념은 그들의 기상(氣像)이고 의기(義氣)다. 즉, 사람의 타고난  마음씨, 혹은 정의감에서 우러나오는 기개같은 것들 말이다. 그들은 정의로워야 했고, 또 선견지명이 있어야 했고, 앞서 말달리는 용맹함과 기세가 있어야 했고, 명석해야 했다. 즉, 나는 지식인의 정의를 이렇게 마음속에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지식인의 정의는 좀 다른가 보다.  아니 21세기 대한민국 지식인의 정의는 좀 달라져야 한다. 일단,  학벌이 좋아야 한다.  반드시 미국에서 박사를 받아와야 한다. 이것이 첫째다.  더불어, 유명 대학의 교수가 되어야 하며, 교수로서 연구에만 몰두하면 안 된다. 반드시 정계에 입문해야 한다. 즉 폴리페서가 되어야 한다.  즉, 교수라는 것은 정계나 재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나 다름 없다. 그러기 위해선 제일 중요한 것은 선거때 줄을 잘 서야 한다.  소신?가치관? 이런 것들은 내다버려라. 폴리페서에게 소신이나 가치관을 구한다는 것은 사창가의 여인에게 순결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허무맹랑한 일이다.  많은 교수들이 선거철이면 특정 후보의 선거캠프에 들어가려고 안달이다. 소신이나 가치관은 개한테나 줘라.  먹고 사는데 소신이나 가치관이 무슨 상관인가 ?  세상이 요구하는 맞춤형 지식을 팔아먹어라. 이들 폴리페서 교수들이 갖고 있는 의미심장한 가치관이다.

경향신문이 기획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시리즈는 21세기 한국 지성인의 현주소를 명확히 고발하고 있는 기획물이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쿠테타 정권에서 민주 정권으로 이양된지 20년 가까이 우리 국민은 순진하게도 우리 사회가 민주화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5년 임기의 대통령제는 안착되었고, 국민의 자유선거로 우리는 정부권력과 의회권력을 선출해 왔다.  군사정권 아래서 자행된 숱한 반민주적인 행태들은 이 사회에서 사라졌으며, 언론통제와 반공이데올로기의 기만은 중지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쿠테타 권력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자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앞에 철저히 포위당했고, 그 권력은 민주주의라는 교묘한 체제의 착각속에서, 사람들을 신자유주의의 가장 무섭고, 엄혹한 권력앞에 줄세우도록 강요했다.  경향신문이 기획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기초로 21세기 대한민국 지식인이 어떻게 민주화 된 20년간 , 지성을 변질시켰으며 스스로 지식을 내다파는 싸구려 잡상인으로 전락했는지, 지식인의 현상과 본질을 여실히 추적하고 있는 보고서라 할 만 하다.

"민주화라는 기만적 주술로부터 풀려났으면 좋겠습니다. 민주화된적이 없잖아요. 민주화라는 게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기만 중에 가장 나쁜 기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도적 정당 경쟁이 도입된 건 사실이고, 군사 집단이 물러나서 숨겨져 있는 자본 독재 체제로 접어든 것은 사실입니다만, 민주화는 자기 기만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는 경제 부문에서는 기초적 민주주의도 없습니다. 유럽 대다수 기업의 운영위원회를 보면, 노동자들이 대표의 3분의 1을 차지하거든요. 한국 사회에서 경영 참여가 있습니까? "  p.86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박노자 

"언제부터인가 지식인에게 앎과 삶의 불일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지 오래고, "낮엔 진보, 밤엔 보수로 사는 것이 생활의 지혜가 된 지 오래되었다" 라고 21세형 한국 지식인의 현 주소를 이 책은 서문에서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지식인상은 이렇게 추잡스러운 행태를 띠고 있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 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 이었던 것이다.  즉, 오늘날 대중지성, 다중지성이란 이름으로 지식인을 새롭게 정의내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전통적 지식인이 변절, 변질되어 죽은 후에  새로운 지식인상이 정립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네르바는 가장 대표적인 지식인의 이상과 모범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학벌과 권위만 내세우면서, 현실적으로 사회와 대중일반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정권과 자본, 시류에 휩쓸려 지식을 팔고 있는 노점지식인들은 구속된 미네르바가 이 사회를 위해 무슨 기여를 했는가?  곰곰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지식인이 변질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국책연구원들은 자신들의 소신이나 국가의 거시적인 장래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당대 정권의 입맛에 맞게 연구 논문을 생산해 내고 월급을 받는 것이 그들의 소임으로 전락했다.  최고 지성들이 모인 국책연구원이 대기업 연구소보다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이 그 반증이다.  대학교수들은 대기업의 후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재벌을 비판하는 것을 회피하고 학생들을 기업의 효용에 맞게 교육시키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자본에 종속된 것은 대학 사회뿐만은 아니다.  시민단체에 이름을 올린 지식인들은 단체의 이념에 수긍하기에 그 자리를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정계나 재계로의 출구로서 시민단체를 이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민단체의 임원들이 대기업의 사외 이사로서 활동하면서 활동비를 지원받고 있는 것은 자본과 지식인의 친숙한 결합이라 불릴 만 하다. 그 어디를 찾아봐도, 올곧은 지식인의 가치관과 이념 소신 따윈 찾아볼 수 없다. 매판 자본과 매판 지식이 판치는 세상이다.

"한국의 지식인처럼 명예와 돈과 권력을 모두 갖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 그 자체가 이미 권력이다."   p.7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그러나 저항형 지식인 김수영이나 참여형 지식인 사르트르처럼, 우리는 이상적인 지식인을 상상하는것을 멈출 순 없다.  자본이나 권력욕에 물들지 않고, 사회의 바른 방향을 지시하고, 그른 방향을 질타할 줄 아는 지식인은 도처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보석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은 그러나 대중의 감시안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요즘 국회에선 미디어법 상정 문제로 말들이 많다. 그러나 다수 국민은 국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도 모른다. 미디어법이 이 정권이 설명하는 것처럼, 국민경제에 보탬이 될 거고 경제 살리고 일자리 넓히는데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국회에서 쌈박질이나 한다고 싸잡아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변질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지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양심적인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 반대편에는 머리좋은 사기꾼도 존재하는게 이 세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양심적인 사람이고 누가 사기꾼인가를 판별할 줄 아는가 하는 문제다.  이 책은 지식인의 변절적인 몰락을 비판하고, 진단하지만 나는 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 각자가 지식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리좋은 지식 사기꾼들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고, 밀알속에 은밀히 감추어진 쭉정이를 감별하기 위해선 국민이 똑똑해져야 한다.  20세기 초 히틀러의 독일이 가능했던 것은 멍청한 국민들 때문이지 히틀러의 비열한 인간성 때문이 아니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꽃보다 남자>의 재벌2세 구준표나 보면서 침을 흘리며 희희낙락 할 때가 아니다. 국회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감시하자.  매일 저녁 9시면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뉴스가 있으니  뉴스도 골라서 시청하자.  요즘 대학생들 졸업시즌이다.  졸업하면 바로 백수다.  정부가 청년 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청년 인턴제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인턴근무의 메리트가 없다고 한다. 인턴기간을 경력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하니, 그 짓을 왜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언발에 오줌누기처방이다.  정권 5년간 인턴이란 이름으로 백수들의 불만을 좀 달래주는거 빼고는 없다. 5년간만 욕 안먹으면 장땡이다.  경제가 어려워 정규직도 뽑질 않는데 이미 기업들은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들의 월급을 친절히 미리 깍아놓고 있다. 기존 직원과 월급체계가 다르다고 하니, 한마디로 IMF시절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보다 처지가 더 곤란할 일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정부가 잘못했는가?  아니다. 이 정권은 선거철 자신들을 뽑아준 계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들의 기대에 백십프로의 정책으로 보답하고 있는 민주주의 정신에 충실한 정권이다.  조중동이 무슨 불만을 제기하는걸 본적이 있는가?  그것은 조중동을 애독하는 계층을 위해, 이 정권이 외교,남북,경제 정책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요즘 불만가득한 세력인 미네르바류나 졸업 백수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선거날은 놀러가는날, 하루 쉬는 날, 개념없이 사람 찍는 날로, 아님 충실히 하루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는 날로 여겼던 사람들이다.  요전날 인터넷 기사를 보니 미네르바와 그의 가족들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을 믿고, 그에게 몰표를 던졌다고 한다. 이 정권은 역사상 가장 많은 지지표를 안고 정권을 잡은 민주 정부인 것이다.

그러니 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부터 잘하자. 잘난 지식인들, 그들의 생산도구는 그들이 몇십년간 공들여 획득한 학위, 즉 지식이다. 그들이 지식을 어떻게 팔아먹던지 그것은 그들 맘이다. 이상적인 세계를 상상하자면 지식인은 선구자이고,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는 초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당신이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없듯이 그들도 이상적이지 못하다. 그들도 성공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한다.  이제 세상은 똑똑한 국민이 만들어 가야 한다.  변질된 지식인의 선동이나 언론 매체의 왜곡에 속았다고 비난하지 말자.  속아넘어간 바로 당신이 문제의 본질이니까.  죽어야 할 것은 지식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무지와 착각인 것이다.  우리 시대 지식인은 죄가 없다.  바로 당신이 죄인이다.


 

20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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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 보리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꾸려가는 일은 하나의 방법만 있는게 아니다. 삶에는 모범답안이 없다.  누가 어떤 삶을 모범답안으로 제시하고, 그것이 오직 유일한 길이라고 명명할 순 없다. 그런데 우리가 소위 현재를 절망하는 이유는 대개 모범답안이 있다는 획일적인 사고에서 기인하는 듯 하다. 다수가 걷고 있는 대로에서 벗어나 한적한 오솔길을 걷는 이들의 삶은 주류에서 벗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답에서 벗어났다 말할 수 있을까?

주류가 만들어낸 문명이란 수많은 오류로 생명파괴에 익숙한 반 생태적 삶을 강제하고 있다.  문명은 편리와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삶의 질을 끌어올렸다고 자찬해 왔다.  그런 문명의 혜택 덕분에 사람의 생명은 연장되고, 생활은 더 나아지고, 삶은 행복해졌다고 자위한다. 그러나 깊이 파헤쳐 들어가보면, 실상은 정 반대다.  더 좋은 물건을 소비하고자 사람들은 더 많이 일하고, 필요하지 않는 물건을 대량소비하면서 환경을 파괴시킨다. 더 맛있고 많은 음식에 대한 탐욕 때문에 비만해지고, 건강을 해쳤다.  가공식품의 천국인 현대문명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수년간 유통시키기 위해, 식품을 거의 방부제와 첨가물 덩어리로 무장시킨다.  늘어나는 자동차는 사람들의 폐를 오염시키고, 소음공해와 사고율을 높였다.  

이러한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의 진보된 문명이 결코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데 있다.  경쟁은 현대 사회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  요즘엔 초등학교부터 시험점수로 학생들을 줄세우는데 앞장서고, 그에 반대하는 소신있는 교사는 파면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일도 다반사다. 학교는 학생들을 이 세계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생각없고, 철학없는 공산품인냥 대량 생산해 내고 있다.  학교는 결국 좋은 사람이 아닌, 경쟁력 있는 인간 양성에 교육의 목표를 두고 있는 듯 하다.  현대 문명은 이 체제가 좋다고 선전하고, 주체적인 인간들을 기계처럼 교육시킨다. 넓게 이 문명은 개인을 집단무의식속에 감금시켜 버렸다. 그러나 문명은 양심있는 사람들을 오래 속일 순 없었다.  그리고 이제 문명이란 창살없는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른 것이다.

20세기를 온전히 살아냈던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의 삶은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스콧 니어링은 문명세계의 대량생산과 획일화된 가치들이 난무하던 시대 올곧게 자연주의에 기반을 둔 인간적 삶을 가르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강단에서 두번씩이나 쫓겨났던 인물이다.  젊은 시절, 헬렌 니어링은 인도 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기도 했다.  뒷날 그와 헤어지고 스콧 니어링과 스물 한살이라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아내이자 학문적 동료로서 미국의 미개발 지역인 버몬트와 메인 숲속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평생의 삶을 일군다. 아내 헬렌 니어링이 87세에 지은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원제: 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는 남편 스콧 니어링이 100세의 나이에 죽고, 8년 뒤인 그녀의 나이 여든 일곱에 저술한 책으로, 그녀의 젊은 시절과 스콧 니어링과의 생애, 자연에 몸담고 평생 예술과 학문 그리고 땅에 흘린 땀방울만큼 가치있는 노동안에서 살았던 일생을 담담히 회고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초반부에 헬렌 니어링은 부르주아 가정에서 문제의식 없이 살았던 어린 시절, 그리고 음악에 심취했던 젊은 한 때, 유럽 여행중에 만난 크리슈나무르티와의 인연, 그와의 결말이 좋지 못했던 아픈 이별 등을 소상하게 기록해 놓는다.  오늘날 제법 유명한 인도 사상가로 기억되는 크리슈나무르티와의 인연을 기록한 장면을 보면, 헬렌 니어링이 평생 그와의 교제에서 받은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암시받게 된다.  한 개인의 모든 성품이란 완벽할 수가 없고, 한 개인이 한 인간의 삶을 완전하게 정의내릴 수도 없다.  그러한 면에서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은 헬렌 니어링 본인의 개인적인 느낌만으로 채워졌으며 그것을 독자는 걸러서 독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뒷 얘기는 대부분 남편 스콧 니어링과의 일생을 다룬다.  이 책속에 펼쳐진 그들의 삶의 기록은 책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감과 감동의 산물이라 부를 만 하다.  특히 황폐한 문명의 부속품으로 기계적인 노동과 소비에 익숙한 삶을 당연시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하나의 큰 감명을 전해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부부의 삶은 문명에 강제당하는 종속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자신의 생각대로 설계하는 주체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애써온 삶은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다. 검소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자립하는 그 삶은 우리 이마에 땀을 흘려 생계를 꾸리고, 고용주나 어떤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먹을 양식을 기르고 살 집을 지으며, 필요한 나무를 베고, 자신의 생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돈이 거의 필요 없었고, 쓸 일도 없었다.  물건을 살 돈이 없으면, 우리가 손수 만들거나 그냥 없이 지냈다. 우리 뜻은 우리가 먹고 자고 입고 집을 덥히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바깥세상의 도움없이 해결하면서 읽고, 쓰고, 연구하고, 가르치며,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그런 일들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   p. 124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이들 부부는 자연속에서 농장을 일구며, 강연 활동, 저술활동 등에도 열정을 쏟았다.  대학강단에서는 쫓겨났고 또 20세기 전반에는 이들의 자연주의와 반 문명적 삶이 주목을 받지 못했다. 남편인 스콧 니어링의 사상은 매우 급진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노동력 착취와 전쟁, 환경 파괴 등으로 상징되는 주류 문명은 그들의 삶을 이단아로 내몰았다. 그러나 스콧 니어링은 평화와 자연주의, 빈민에 대한 관심 등 사회복지적 측면을 강조했고, 그러한 사상을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의 사상이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미국의 산업문명과 국가 폭력성이 인간소외와 전쟁이란 결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점차 많은 이들이 스콧 부부의 농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자연속에서 인공을 가미하지 않고도 건강하고 넉넉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던 이들 부부의 노력의 결실이 점차 드러난 것이다. 이들 부부는 스물 한 살이라는 나이 차와 각기 남다른 개성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평생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조화로운 생을 살아낼 수 있었다.  비록 아이를 갖지 않았지만, 평생 서로를 존중했고 서로의 일을 도왔으며, 함께 농장일에 매진했다. 또 함께 자신들이 살 집을 손수 지었으며, 일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틈틈이 많은 책을 읽었고, 또 많은 책을 썼다.  헬렌 니어링의 이 책이 감동을 더하는 것은 자신의 주체적인 삶이 그녀의 성실한 독서와 자연안에서의 깊은 사색으로부터 왔음에 기인하기도 한다. 

채식주의자이기도 했던 이들 부부는 100살이 될때까지 장수했으며, 남편인 스콧 니어링의 100세 생일 때에는 이웃 사람에게서 "당신이 100살 까지 살아서 세상이 좀더 나아졌습니다"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스콧 니어링의 죽음 또한 그들의 삶 만큼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이들 부부는 죽음에 앞서 삶을 연장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거부했으며, 죽음을 삶만큼이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훗날, 헬렌 니어링은 여든 일곱에 이 책을 쓰면서 남편 스콧 니어링에 대해 가장 명료하고, 단순하게 그의 삶과 생애를 해설한다.

"그이는 이상주의자였으나, 강인하고 실천하는 일꾼, 곧 실천하는 이상주의자였다.  또 타고난 종교인이었으나, 어떤 교회의 구성원도 아니었고 어떤 종교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학식있는 사람이었으나 땅벌레 같은 농사꾼이었고, 공적인 인물이었으나 은둔자로서 행복해 했고, 명망있고 우렁찬 웅변가였으나 보통 대화에서는 말수가 적었다. 그이는 음악을 이해하거나 느끼는 데는 무디었지만 언제나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연주하는 내 뒤에 있었다. 학문적인 주제에 관해 간결하고 사실에 바탕을 둔 글을 썼으나, 일상 생활에서는 웃음을 머금게 하는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p. 238,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스콧 부부의 삶을 보며 문명의 때가 끼지 않은 자연인으로서의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의 가능성을 상상해 본다. 세계적인 경제 한파와 반 생태적인 정치꾼과 개발업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스콧 부부의 삶은 가뭄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이 반갑고 소중한 교훈이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5백만 명이 같은 말을 해도 어리석은 말은 어리석은 말이다" 라고 쓴바 있다.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고, 다수의 삶의 방식이 반드시 바른 삶도 아니다. <월든>을 지은 19세기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 팔고 농노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경제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절망의 늪에 빠져 있다. 경기가 좋지 않아 자영업자들이 가게문을 닫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할것 없이 많은 이들이 대량 실업의 공포에 젖어 있다. 지난 발렌타인데이를 기점으로 수명이 지하철에 투신했다.  사람들은 지금 절망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나 경기게 있지 않다.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고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이나 성찰없이 하루하루 농노처럼 살아온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명은 인간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대량 생산을 위해 인간은 자본과 기계의 종속물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고, 그 존재만으로도 대우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그렇지 않다.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정확히 나뉘어진 세계는 용산철거민 사태에서 보듯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이다. 자연속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땅은 정직하고 심은대로 수확물을 돌려준다. 그러나 문명은 자연만큼 공정하고 정직하지 않다.  그것은 불공평하고, 인간을 착취한다.

대량소비사회는 편의와 효율성을 제공한 대신에, 인간성을 말살했고 인간의 가치를 추락시켰다. 아나톨 프랑스가 말한 5백만명에 들 필요는 없다.  소로우가 말했듯이 농노처럼 인생을 살 필요도 없다. 가난하지만 만족할 수 있고, 조금 불편하지만 영혼에 평화가 깃들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자연으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스콧 부부의 삶에서 19세기를 살다간 위대한 영혼, 소로우를 발견한다.  소로우는 20세기에 스콧 부부를 통해 부활했다. 스콧 니어링 부부의 삶은 소로우가 꿈꾸어온 이상적인 삶의 실천이다.  헬렌 니어링은 이 책에서 19세기 미국 작가 엘버트 허바드의 글 하나를 인용한다.  "건강, 책, 일, 그리고 여기에 사랑이 더해진다면 운명이 주는 모든 괴로운 고통과 아픔도 견딜 만해진다."  이제 절망을 한쪽으로 치워버리고,  생의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할 때다. 

 



  

2009.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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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어나갈수록 책 선택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을 습득하기 위해선 연습이 필요하다.  몇번의 실패를 해보아야만 모든 사람에겐 책을 고르는 안목이 자리잡게 된다. 그때까지 부단히 읽어야 하고, 무수한 책들과 만나봐야 한다.   독서가 중요하단 얘기를 많이 한다.  요즘 학생들은 예전보단 책을 많이 읽는다.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도 어린 학생들에게 책읽기의 효용을 적극 홍보하고 권장하는 분위기다.  대학 입시에서 논술 점수를 올리기 위해, 요즘 고등학생들은 좋은 책을 많이 읽고 또 글도 많이 써볼 것이다.  예전보단 그런점에서 학생들의 교양 수준도 높다.  그러나 근시안적인 목적을 위해 책읽기를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는 결코 오래가지 못하고 올바른 방향도 아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대개 이러한 독서열은 식어버리기 일수이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후엔, 논술이란 말은 쏙 들어가 버린다.  대신 그 자리를 토익이나 토플같은 것들이 차지해 버린다.  우리나라 성인 인구의 독서열은 미국,일본,프랑스는 말할것도 없고 후진적이라 생각하는 중국보다 더 떨어진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마디로 학교를 졸업한 어른들은 책에서도 영원히 졸업한다는 얘기다.   한달에 책 한 권 읽질 않는 어른들이 성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심각한 문제다.  직장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 주부들도 책을 읽지 않는다.  만약 가정주부들이 일일드라마에 쏟아붓는 시간과 열정을 책에 쏟는다면, 아마 그 파급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본인의 의식이 깨어 있게 마련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이 최소한 잘되고, 잘못된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주부들의 독서열이 높아진다는 것은 나라 전체의 교양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아이들과 남편들에까지 옮아갈 것이다. 

모름지기 주위에서 교양교육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한다.  교양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대학 교육을 받고, 대학원을 이수해서 학벌이 좋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으로만 교양 있는 인간을 논할 순 없다.  교양인을 양성하기 위해선 제도화된 교육만으론 부족하다.  교양 있다는 것은 지적 균형 감각을 가졌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지적 균형 감각은 어떻게 생기는가 ?  보다 많은 이론과 지식, 그리고 실천적인 성품까지를 갖고 있어서 자신의 지식과 이념 자체를 맹목적으로 신봉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둘을 알고 있고, 그 둘의 차이를 비교할 수 있는 시야를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견해만을 신앙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다 관대하고, 관용적이고, 생각이 열려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독서인구가 적다는 것은 그만큼 편협한 인간들이 넘쳐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사회 전체가 건강하지 않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요 며칠전 인터넷 서점을 서핑하다 메인 화면에서 눈에 확 띄는 신간 하나를 발견했다. <인문학 스터디>란 책이다.  부제는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다.    책을 읽는것도 중요하지만, 책을 선택하고 고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옛말에 악서를 읽는것은 시간낭비라고 하질 않았던가.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 앞서 내가 읽어야 할 책을 선택하는 독서의 예비적인 행위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어느정도, 이젠 책의 제목이나 분위기만 보아도 그 책을 내가 읽어도 후회가 없을거란 느낌이 들고, 요즘엔 어느정도 그 예감이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항상, 제대로 된 인문학 공부를 위해 어떤 책을 우선적으로 읽어야 하는가, 라고 하는 의문은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그같은 갈증을 해소해줄  좋은 책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이 책은 마크 C. 헨리라는 현대 미국의 학자가 쓴 것으로, 미국 대학에서 "서구 문명 커리큘럼"을 이해하고, 습득할 수 있도록 대학 신입생을 위한 가이드를 목표로 집필되었다.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 안내'라는 부제가 붙은건, 이 미국적인 인문학 공부 방향에 수명의 한국 편역자들이 개입함으로써, 한국 실정에 맞는 인문학 학습 방법을 독서목록으로 따로 정리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문학의 학습 영역을 크게 4가지로 구분해 놓았다. 

첫째, 문학 예술이다. 이 분야는 고전문학과 고전학, 근대문학과 예술학으로 이어진다. 둘째, 철학과 정치 분야다.  다시 이 분야는 고대 철학 입문과 근대 철학, 법과 경제 편으로 나뉜다. 세번째 역사학에선 고대 로마사, 19세기 유럽 지성사, 과학의 역사를,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영역인 기독교 사상 편에선 성서를 기반으로 한 1500년 이전의 기독교 사상을 다뤘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 책이 서구문명에 기준을 둔 인문학 공부 방향을 설정한 책이란 점이다. 동양고전 문학과 철학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이것은 이 책의 한계이지만, 보편적인 세계 시민을 기준으로 한 교양인의 양성이란 측면과 인문학이 서양적인 학문으로 인식해 왔음을 주지한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어차피 인문학 공부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며 공부가 아닌가?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은 동양과 서양의 질문법만 다를뿐, 같은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것이며,  그 공부의 기본적인 원전도 고전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에 추가로 동양 철학과 문학 작품에 대한 독서목록을 추가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다면,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라는 이 책의 부제에 더 적합했을 것이다.

"키케로는 풍자적 재능이 매우 뛰어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아테네로 스며들게 한' 장본인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생물학, 자연학, 천체의 운행 같은 자연(physis)의 움직임을 알고자 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알고자 했다. " p.63  <인문학 스터디>, 마크 C. 헨리

이 책은 체계적인 인문학 공부에 전념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가이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장의 끝부분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인문학 필수 원전과 그에 따른 참고도서 목록이 잘 정리돼 있어서, 그 분야에 깊이 있는 독서를 위한 책의 선택에 길잡이 역할을 한다. 따지고보면,  책읽기를 좋아하는 모든 이들은 어떤면에서 인문학 공부를 이미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실용서나 특정 전공의 이론서의 독서를 제외하곤 대개 잡식성 책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인문학적 독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또한 그런 면에서 언제나 독서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과 책의 선택에 항상 고민하고 어려움을 느껴왔다.  대개 많은 책을 읽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왔지만, 이 책읽기에 체계가 없다는 생각을 늘 해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원전과 참고도서들은 그 양이 매우 방대하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들이 비록 한국어로 번역돼 있다 하지만, 실제 읽어낼 수 있는 독자의 역량이란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

대표적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쇼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혹은 스피노자의 <에티카> 같은 서적에 도전할 수 있는 독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단계를 밟아갈 필요가 있고, 인문학 공부의 체계가 필요한 법이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텍스트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어 방법이 있다. 바로 여러번 읽고 비판적으로 읽는 일이다. "   p.123 ,  <인문학 스터디>, 마크 C. 헨리

노숙인과 제3세계 시민들에게 인문학 정규과정을 습득할 수 있도록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 수많은 이들이 인문학을 공부하고 그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시스템을 구축한 얼 쇼리스라는 세계적인 학자가 있다.  그의 저서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겐 너무나 잘 알려진 책이다.  이 책에서 얼 쇼리스가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하게 된 사연을 얘기한적이 있다.  소설가로부터 사회비평가, 언론인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던 그가 이 독특한 과정을 시작하게 된 것은, 미국의 한 중범죄자 여자교도소에서 한 여성수감자와 만나면서부터다.  

그 여성수감자는 감옥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철학을 전공으로 대학과정까지를 끝낸 사람이다. 어느날 그녀와 면담하면서 얼 쇼리스는 한가지 질문을 그에게 했다.  "사람들이 왜 가난한 것 같습니까 ?"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 아이들(거리의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부유한자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겁니다"  이 답변속에서 얼 쇼리스는 클레멘트코스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이 여성이 말하고자 한 것은 사실, 가난한 자들, 못배운 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에게도 인문학을 가르쳐서 그들이 정신적으로 깨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수감여성의 답변이 독특한 것은,  가난을 경제적인 이유들에서 찾지 않고 그들의 인문학적 교양의 부족에서 찾은 것 때문이다.  원인을 그들의 가정환경이나 악한 기질 등에서 찾질 않고, 인문학적 교양과 학습의 부족에서 찾은 것은 얼 쇼리스가 클레멘트코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데 기여했다.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했던 연설 한 대목은 인문학 공부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이 될 것 같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칩니다. 인문학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험한'사람들로 변화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갖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합법적인 힘이라든지, 민주주의와 같은 것들은 언제나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만, 그런 종류의 위험은 기꺼이 감수할 가치가 있습니다."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 2006년 1월 한국 방문 강연에서

소크라테스나 공자 말씀이 우리 삶에 어떤 보탬이 될까?  예수의 말씀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칸트나 니체의 철학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들이 논한 것은 밥벌이나 돈벌이, 즉 실용적인 학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고, 존중받고,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법칙과 세상의 근본이 되는 진리를 깨닫는 방법론에 관한 성찰이다.

요즘 대학에서 더이상 인문학은 인기가 없다.  실용적인 학문,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에 도움이 되는 학문, 평생 잘 먹고 잘 살아가는데 보탬이 되는 학과에 학생들이 모인다. 그래서 인문학의 사망선고가 대학내에서 선포되고 있다.   인류는 과학기술과 경제적인 진보를 이루어냈고 사람들의 삶은 보다 편리해지고 윤택해 졌다.  그것은 실용학문이 현실에 기여한 덕분이다.  문명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지만, 그 결과 실용적이지 않는 모든 것은 소외되었다.  대학에서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는 이들은 훗날밥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다.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들의 문명은 행복해 졌을까?  우리 세상은 보다 살기좋아 졌을까?  과도한 개발은 환경재앙을 불러왔다.  얼마전 수많은 희생자를 낸 중국 쓰촨성 대지진은 인근의 댐 건설에 따른 지반의 약화에서 기인했단 보도가 나왔다. 지금도 북극과 남극의 얼음은 녹고 있고, 지구 기온은 수십년간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  문명의 진보란 넓게 보면 생태의 파괴란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삶을 단순히 편리와 윤택에 두는 실용적인 태도 때문이다.  실용적인 학문으로만 무장한 지식인들을 양성해 내는 대학은 영혼이 없는 개발업자나 장사꾼만 세상으로 흘려 보내고 있다.  

영혼없이 살아가던 노숙자를 주체적인 인간으로 변화시켰던 얼 쇼리스의 클레멘트 코스를 교훈으로 삼는다면 아직 인문학엔 희망이 있다.   마크 C. 헨리의 <인문학 스터디>란 책은  왜 읽어야만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면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읽어야만 하는가? 라는, 독자의 고민에 체계적인 독서 목록을 제시하는 것으로 인문학 공부의 시작을 돕는다.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려는 이는 각자의 책장에서 어떤 책을 꺼내들까?  즉,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먼저 가져야 한다.   책읽기가 행복한 모든 이들의 영혼은 지금 이 시간 신선하다. 그들의 영혼은 타락한 세계에 물들지 않으며,  결국엔 부패하고 부덕한 세계에 희망을 공급할 것이다.   건강한 개인, 행복한 가정, 올바른 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인문학 공부에 있다.   



 

20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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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0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2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을 쫓는 아이 (개정판)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과거없이 현재를 말할 수 없다.  과거는 현재의 설계도이자, 눈밭위의 새겨진 발자국과 같다. 설계도가 잘못되었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의 건축물에 균열이 있을 것이고, 눈밭위를 아무렇게나 걸어왔다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정연하게 걷지 못한 자신이 추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고, 현재란 다가올 미래의 거울이다. 

어른의 세계엔 공감되는 과거가 있다.   그것은 유년이다.  어린시절 우리의 기억속에 각인된 모든 것은 무슨 빛깔을 하고 있을까?  그 빛깔의 색은 어른의 삶을 결정한다.  살아온 시절이 올바르고 덕스러웠다면, 그는 지금 성숙한 건축물이나 깨끗한 눈위의 발자국을 되돌아보며,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 어떤 이들에겐 유년이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채워져 있기도 하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과거의 특정 시점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대개 상처입은 유년기나 과거를 갖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우리의 뇌는 행복한 것을 잊지 않으려하고, 불행한 일은 되도록이면 빨리 지워버리고자 하는 본능에 지배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유년의 상처가 평생을 따라다니기도 한다.  할레드 호세이니 장편 <연을 쫓는 아이>의 주인공 아미르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어린시절 자신을 단 한번도 거역하지 않았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던 친구이자, 하인이었던 하산이란 아이와 얼킨 인연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과 부채의식으로 살아가는 상처입은 어른, 그가 바로 아미르다.   

그 부채의식은 아프카니스칸을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하고 미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성년까지 계속된다. 과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불행한 어른. 몸은 어른이지만 영혼은 아직 아이의 상처속에 정체된 이.  아미르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깊은 부채감을 자신의 하인이었던 하산에게 갖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하산이 하인으로서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자신을 좋아해주고, 또 자신을 대신해 희생해준것 때문만은 아니다.  아미르 자신에게 없었던 근본적인 성품이 하산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산은 아미르의 하인이었기에 고분고분했던게 아니라, 그 본래의 마음 가짐이 따뜻하고 헌신적이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람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고 연날리기 대회에서 우승하고자 하는 아미르를 도와, 최고의 영예라는 끊어진 연을 쫓아가서 그 연을 아미르에게 전달하려는 목적 하나로,  성폭행이라는 본인의 치욕조차 이겨낸다.

아미르는 부자 아버지를 두었고, 지배적 종족인 파쉬툰인이며, 소설을 쓸 정도로 명석하며, 글을 읽을 줄 안다.  모든 능력을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미르.  그러나 하산은 소수의 시아파 이슬람교도인 하자라인에다, 아미르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고 있고, 글을 읽고 쓸줄도 모른다.  이런 하산을 아미르는 적당한 거리감을 갖고, 친구로서가 아니라 하인으로서 대하는 일이 잦다.  그리고 고분고분한 하산을 상대로 가끔 그가 문맹이란 점을 이용해, 동화책을 읽다 스토리를 바꾸고 하산이 알지 못하는 단어를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사람들이 볼때는 하산을 친구로서 대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이 없을때만 하산을 자신의 친구인냥 대하는 이중성도 보인다.

어느날 아미르의 영광을 위해 연을 쫓아 돌아오다 아세프 일당에게 걸려, 성추행을 당하는 것을 몰래 지켜보았으나 하산을 도우려하지 않는다.  그 전 아세프에게 괴롭힘을 당할뻔할때, 하산이 아미르를 구한일이 있었고, 이 일은 곧 자신을 구한 대가로 하산이 대신 받는 벌과도 같았다. 그러나 담벼락에 숨어 겨우 고개를 내밀고, 하산을 도와줄까 말까를 고민하다 겁에 질려 침묵속에 도망가 버리고 만, 자신의 행동, 그 이후 죄책감이 하산에 대한 공격성으로 바뀌어 그를 집에서 쫓아내려는 궁리를 이어가고, 결국엔 하산과 그의 아버지 알리를 누명을 씌어 쫓아내 버린, 아미르.

아미르가 하산을 미워한것은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즉, 자신이 갖지 못한 위대한 성품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 때문에 하산을 미워했던 것이다.  이같은 책략과 비열함에 대한 그의 후회가 평생 그를 괴롭히는 유년의 사건이었다.  그는 하산의 성품에 대한 배반에 대해 죄를 씻지 않고는 평생 비열한 인간이란 딱지를 뗄 수 없었던 사람이 되고 말았다.  뒤늦게라도 유년의 비열함을 속죄하려 한다는 점에서, 아미르의 인간성의 회복 가능성을 높게 평가할만 한다.  세상엔 현재 진행형으로 죄를 계획하고,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깨닫지 못하고 죄책감을 사치스럽다고 느끼며 살고 있는 `동물적인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연을 쫓는 아이>는 성장소설의 문법을 잘 따르고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개인의 성장이란 측면을 파고들긴 하지만,  역사라는 거시적인 관점을 잠시도 놓치지 않으려고 작가는 노력한다. 아프카니스탄이란 외국인들에겐 얼마나 생소한 나라인가?  그러나 할레드 호세이니는 이 왜소하고, 상처입고, 누추한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정을 이 소설속에 듬뿍 담아내고 있다.  왕정에서 공화제로 다시 쿠테타에 의한 좌익 친소정권으로, 강압적인 탈레반 정권으로, 9.11의  이후 미국의 침략으로 인한 친미정권이 들어서는 그 과정, 하나하나를 작가는 이념이 아닌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민초들의 관점으로 그리고 있다. 

"그가 까맣게 타서 부서져가는 작은 마을의 잔해를 가리켰다. 그것은 마을이라기보다 이제는 검게 변한, 지붕 없는 벽 더미에 불과했다.  개 한 마리가 벽에 기대 자고 있었다.  " 저곳에 한 친구가 살았는데 자전거 수리공이었어요. 솜씨가 아주 뛰어났었죠. 타블라도 잘 연주했고요. 그런데 탈레반이 그 친구와 가족들을 죽이고 마음을 불질러버렸어요." 우리가 불타버린 마을을 지나가도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  p. 364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아미르와 하산의 우정과 배신, 그리고 죽음과 재회 등은 이 아픈 역사와 함께 하나로 버무려져 있다.  개인의 비극은 곧 국가의 비극에 기원한다.  비록 그 체제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조국을 등져야 했고, 미국민으로 동화되었지만, 작가는 여전히 조국 아프카니스탄을 잊지 않는다. 자신이 결국에는 돌아가야 할 곳은 태어나고, 자라고, 그리고 하산과의 우정이 깃들어 있는 아프카니스탄의 황폐한 땅덩어리였음을, 작가는 은연중에 주지시키고 있다. 

수많은 상처를 받아온 땅 덩어리, 가난과 폭력이 난무하는 조국이지만 아미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조국은 아프카니스탄이었다.  연날리기, 연싸움, 케밥 등 조국의 풍습을 회고하는 장면은 떠나온 조국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다시, 유년과 역사를 훑고 온 소설은 이제 하나의 관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쓰여졌음을 독자들은 암시받게 된다.  그것은 인류 보편의 휴머니즘이다.  유년과 역사라고 하는 것은 성장소설이 갖고 있는 주관성의 한계를 드러낸다.   아미르와 하산의 우정, 아미르의 배신, 그리고 뼈아픈 역사는 민족과 이념을 초월한 하나의 교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씻고, 하산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조국으로 들어가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유년의 상처가 자신의 삶을 발목잡고 있기도 하지만 하산이 자신에게 보여줬던 무한한 믿음과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품, 곧 `선의'다.  

"우리 뒤에서 아이들이 뛰어가고 있었다. 줄 끊어진 연이 나무위로 높이 떠가는 것을 쫓아가며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눈을 깜박이고 다시 보자 소랍에게서 미소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미소를 지었고 내가 그것을 보았다. " 저 연 잡아다줄까?" 소랍이 침을 삼키자 후골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바람에 그의 머리가 들어올려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너를 위해서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해주마."  나는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p. 556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아미르에게 하산이란 한갓 어린 시절에 자신을 보좌했던 하인에 지나지 않았다.  아프카니스탄에서 하자라인은 천대받았고 그것은 당연시됐다. 쿠테타 정권, 탈레반, 미군 모두 아프카니스탄의 민중의 삶이나 생명은 천시하고, 오직 자신들의 목표아래 그 뭇 생명들을 깔아 뭉갰다.   앞뒤가 바뀌어버린 이 세계의 삶,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고 죄책감을 잃어버린 부덕한 세계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생명과 삶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로 되돌아가는 길,  보편적 휴머니즘을 실천하며 살아내는 일이다.  아미르가 하산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내걸고 다시 아프카니스탄행을 결정한 그 선택, 그것이 바로 보편적 휴머니즘 정신의 분명한 실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년의 뼈아픈 기억에서 출발해 민족의 슬픈 역사를 훑고, 곧 정의에 대한 욕망, 악에 대한 저항, 그리고 약자에 대한 예의, 곧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휴머니즘에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안착하고 있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은 독자의 유년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독자의 유년에 어떤 뼈아픈 역사가 흐르고 있었는가 되묻고 있다.  또 아미르와 하산의 삶을 통해, 수많은 만남과 관계속에서 맺어진 우정과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우리들의 삶이 지금껏 성장했음을 눈치채게 한다.   재미있고,슬프고,교훈적인 아니 인간미가 흘러넘치는 소설을 읽는 시간은 행복해서 짧게만 느껴진다. 

 




 

2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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