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이상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한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할때만큼 평화로움을 주는 것은 없다.   응당, 그것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학생이 있어야 할 곳은 술집이나 유흥주점이 아니라, 도서관이나 학교다.  학생은 도서관에서 책을 볼때나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 제 자리에 있는 것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요즘 졸업식장에서 교복을 찢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한동안 자신들을 규율이라는 통제속에서 감금했던 것이 교복이라고 상상했기에, 그것을 찢는 행위는 해방이고 자유인으로서의 권리선언쯤 된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이런 학생들이 3년이란 시간동안 학교 생활을 제대로 했다고 상상할 수는 없다. 배우는 것을 직분으로 알고 감사히 배우고, 깨닫는 과정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자신의 직분을 상징했던 교복을 찢어발기는 것이다.  이들의 몇년후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본문에 성실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귀중한 인생의 한 순간을 허비했다는 증거다.  이들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들의 불성실이다.   학생시절때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대개 사회속에서도 성실하지 않다.

지식인이란 단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는가?  이상적인 지식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 단어가 내포하는 함의는 무엇인가?  박학다식, 교수, 박사, 오피니언 리더, 출세, 성공, 돈, 관직. 대개 이런 단어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것이다.  내가 지식인이란 단어에서 꺼내들 수 있는 고정관념은 그들의 기상(氣像)이고 의기(義氣)다. 즉, 사람의 타고난  마음씨, 혹은 정의감에서 우러나오는 기개같은 것들 말이다. 그들은 정의로워야 했고, 또 선견지명이 있어야 했고, 앞서 말달리는 용맹함과 기세가 있어야 했고, 명석해야 했다. 즉, 나는 지식인의 정의를 이렇게 마음속에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지식인의 정의는 좀 다른가 보다.  아니 21세기 대한민국 지식인의 정의는 좀 달라져야 한다. 일단,  학벌이 좋아야 한다.  반드시 미국에서 박사를 받아와야 한다. 이것이 첫째다.  더불어, 유명 대학의 교수가 되어야 하며, 교수로서 연구에만 몰두하면 안 된다. 반드시 정계에 입문해야 한다. 즉 폴리페서가 되어야 한다.  즉, 교수라는 것은 정계나 재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나 다름 없다. 그러기 위해선 제일 중요한 것은 선거때 줄을 잘 서야 한다.  소신?가치관? 이런 것들은 내다버려라. 폴리페서에게 소신이나 가치관을 구한다는 것은 사창가의 여인에게 순결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허무맹랑한 일이다.  많은 교수들이 선거철이면 특정 후보의 선거캠프에 들어가려고 안달이다. 소신이나 가치관은 개한테나 줘라.  먹고 사는데 소신이나 가치관이 무슨 상관인가 ?  세상이 요구하는 맞춤형 지식을 팔아먹어라. 이들 폴리페서 교수들이 갖고 있는 의미심장한 가치관이다.

경향신문이 기획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시리즈는 21세기 한국 지성인의 현주소를 명확히 고발하고 있는 기획물이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쿠테타 정권에서 민주 정권으로 이양된지 20년 가까이 우리 국민은 순진하게도 우리 사회가 민주화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5년 임기의 대통령제는 안착되었고, 국민의 자유선거로 우리는 정부권력과 의회권력을 선출해 왔다.  군사정권 아래서 자행된 숱한 반민주적인 행태들은 이 사회에서 사라졌으며, 언론통제와 반공이데올로기의 기만은 중지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쿠테타 권력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자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앞에 철저히 포위당했고, 그 권력은 민주주의라는 교묘한 체제의 착각속에서, 사람들을 신자유주의의 가장 무섭고, 엄혹한 권력앞에 줄세우도록 강요했다.  경향신문이 기획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기초로 21세기 대한민국 지식인이 어떻게 민주화 된 20년간 , 지성을 변질시켰으며 스스로 지식을 내다파는 싸구려 잡상인으로 전락했는지, 지식인의 현상과 본질을 여실히 추적하고 있는 보고서라 할 만 하다.

"민주화라는 기만적 주술로부터 풀려났으면 좋겠습니다. 민주화된적이 없잖아요. 민주화라는 게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기만 중에 가장 나쁜 기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도적 정당 경쟁이 도입된 건 사실이고, 군사 집단이 물러나서 숨겨져 있는 자본 독재 체제로 접어든 것은 사실입니다만, 민주화는 자기 기만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는 경제 부문에서는 기초적 민주주의도 없습니다. 유럽 대다수 기업의 운영위원회를 보면, 노동자들이 대표의 3분의 1을 차지하거든요. 한국 사회에서 경영 참여가 있습니까? "  p.86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박노자 

"언제부터인가 지식인에게 앎과 삶의 불일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지 오래고, "낮엔 진보, 밤엔 보수로 사는 것이 생활의 지혜가 된 지 오래되었다" 라고 21세형 한국 지식인의 현 주소를 이 책은 서문에서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지식인상은 이렇게 추잡스러운 행태를 띠고 있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 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 이었던 것이다.  즉, 오늘날 대중지성, 다중지성이란 이름으로 지식인을 새롭게 정의내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전통적 지식인이 변절, 변질되어 죽은 후에  새로운 지식인상이 정립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네르바는 가장 대표적인 지식인의 이상과 모범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학벌과 권위만 내세우면서, 현실적으로 사회와 대중일반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정권과 자본, 시류에 휩쓸려 지식을 팔고 있는 노점지식인들은 구속된 미네르바가 이 사회를 위해 무슨 기여를 했는가?  곰곰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지식인이 변질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국책연구원들은 자신들의 소신이나 국가의 거시적인 장래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당대 정권의 입맛에 맞게 연구 논문을 생산해 내고 월급을 받는 것이 그들의 소임으로 전락했다.  최고 지성들이 모인 국책연구원이 대기업 연구소보다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이 그 반증이다.  대학교수들은 대기업의 후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재벌을 비판하는 것을 회피하고 학생들을 기업의 효용에 맞게 교육시키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자본에 종속된 것은 대학 사회뿐만은 아니다.  시민단체에 이름을 올린 지식인들은 단체의 이념에 수긍하기에 그 자리를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정계나 재계로의 출구로서 시민단체를 이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민단체의 임원들이 대기업의 사외 이사로서 활동하면서 활동비를 지원받고 있는 것은 자본과 지식인의 친숙한 결합이라 불릴 만 하다. 그 어디를 찾아봐도, 올곧은 지식인의 가치관과 이념 소신 따윈 찾아볼 수 없다. 매판 자본과 매판 지식이 판치는 세상이다.

"한국의 지식인처럼 명예와 돈과 권력을 모두 갖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 그 자체가 이미 권력이다."   p.7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그러나 저항형 지식인 김수영이나 참여형 지식인 사르트르처럼, 우리는 이상적인 지식인을 상상하는것을 멈출 순 없다.  자본이나 권력욕에 물들지 않고, 사회의 바른 방향을 지시하고, 그른 방향을 질타할 줄 아는 지식인은 도처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보석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은 그러나 대중의 감시안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요즘 국회에선 미디어법 상정 문제로 말들이 많다. 그러나 다수 국민은 국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도 모른다. 미디어법이 이 정권이 설명하는 것처럼, 국민경제에 보탬이 될 거고 경제 살리고 일자리 넓히는데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국회에서 쌈박질이나 한다고 싸잡아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변질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지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양심적인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 반대편에는 머리좋은 사기꾼도 존재하는게 이 세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양심적인 사람이고 누가 사기꾼인가를 판별할 줄 아는가 하는 문제다.  이 책은 지식인의 변절적인 몰락을 비판하고, 진단하지만 나는 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 각자가 지식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리좋은 지식 사기꾼들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고, 밀알속에 은밀히 감추어진 쭉정이를 감별하기 위해선 국민이 똑똑해져야 한다.  20세기 초 히틀러의 독일이 가능했던 것은 멍청한 국민들 때문이지 히틀러의 비열한 인간성 때문이 아니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꽃보다 남자>의 재벌2세 구준표나 보면서 침을 흘리며 희희낙락 할 때가 아니다. 국회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감시하자.  매일 저녁 9시면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뉴스가 있으니  뉴스도 골라서 시청하자.  요즘 대학생들 졸업시즌이다.  졸업하면 바로 백수다.  정부가 청년 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청년 인턴제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인턴근무의 메리트가 없다고 한다. 인턴기간을 경력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하니, 그 짓을 왜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언발에 오줌누기처방이다.  정권 5년간 인턴이란 이름으로 백수들의 불만을 좀 달래주는거 빼고는 없다. 5년간만 욕 안먹으면 장땡이다.  경제가 어려워 정규직도 뽑질 않는데 이미 기업들은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들의 월급을 친절히 미리 깍아놓고 있다. 기존 직원과 월급체계가 다르다고 하니, 한마디로 IMF시절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보다 처지가 더 곤란할 일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정부가 잘못했는가?  아니다. 이 정권은 선거철 자신들을 뽑아준 계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들의 기대에 백십프로의 정책으로 보답하고 있는 민주주의 정신에 충실한 정권이다.  조중동이 무슨 불만을 제기하는걸 본적이 있는가?  그것은 조중동을 애독하는 계층을 위해, 이 정권이 외교,남북,경제 정책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요즘 불만가득한 세력인 미네르바류나 졸업 백수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선거날은 놀러가는날, 하루 쉬는 날, 개념없이 사람 찍는 날로, 아님 충실히 하루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는 날로 여겼던 사람들이다.  요전날 인터넷 기사를 보니 미네르바와 그의 가족들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을 믿고, 그에게 몰표를 던졌다고 한다. 이 정권은 역사상 가장 많은 지지표를 안고 정권을 잡은 민주 정부인 것이다.

그러니 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부터 잘하자. 잘난 지식인들, 그들의 생산도구는 그들이 몇십년간 공들여 획득한 학위, 즉 지식이다. 그들이 지식을 어떻게 팔아먹던지 그것은 그들 맘이다. 이상적인 세계를 상상하자면 지식인은 선구자이고,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는 초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당신이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없듯이 그들도 이상적이지 못하다. 그들도 성공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한다.  이제 세상은 똑똑한 국민이 만들어 가야 한다.  변질된 지식인의 선동이나 언론 매체의 왜곡에 속았다고 비난하지 말자.  속아넘어간 바로 당신이 문제의 본질이니까.  죽어야 할 것은 지식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무지와 착각인 것이다.  우리 시대 지식인은 죄가 없다.  바로 당신이 죄인이다.


 

20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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