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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 보리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꾸려가는 일은 하나의 방법만 있는게 아니다. 삶에는 모범답안이 없다. 누가 어떤 삶을 모범답안으로 제시하고, 그것이 오직 유일한 길이라고 명명할 순 없다. 그런데 우리가 소위 현재를 절망하는 이유는 대개 모범답안이 있다는 획일적인 사고에서 기인하는 듯 하다. 다수가 걷고 있는 대로에서 벗어나 한적한 오솔길을 걷는 이들의 삶은 주류에서 벗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답에서 벗어났다 말할 수 있을까?
주류가 만들어낸 문명이란 수많은 오류로 생명파괴에 익숙한 반 생태적 삶을 강제하고 있다. 문명은 편리와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삶의 질을 끌어올렸다고 자찬해 왔다. 그런 문명의 혜택 덕분에 사람의 생명은 연장되고, 생활은 더 나아지고, 삶은 행복해졌다고 자위한다. 그러나 깊이 파헤쳐 들어가보면, 실상은 정 반대다. 더 좋은 물건을 소비하고자 사람들은 더 많이 일하고, 필요하지 않는 물건을 대량소비하면서 환경을 파괴시킨다. 더 맛있고 많은 음식에 대한 탐욕 때문에 비만해지고, 건강을 해쳤다. 가공식품의 천국인 현대문명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수년간 유통시키기 위해, 식품을 거의 방부제와 첨가물 덩어리로 무장시킨다. 늘어나는 자동차는 사람들의 폐를 오염시키고, 소음공해와 사고율을 높였다.
이러한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의 진보된 문명이 결코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데 있다. 경쟁은 현대 사회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 요즘엔 초등학교부터 시험점수로 학생들을 줄세우는데 앞장서고, 그에 반대하는 소신있는 교사는 파면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일도 다반사다. 학교는 학생들을 이 세계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생각없고, 철학없는 공산품인냥 대량 생산해 내고 있다. 학교는 결국 좋은 사람이 아닌, 경쟁력 있는 인간 양성에 교육의 목표를 두고 있는 듯 하다. 현대 문명은 이 체제가 좋다고 선전하고, 주체적인 인간들을 기계처럼 교육시킨다. 넓게 이 문명은 개인을 집단무의식속에 감금시켜 버렸다. 그러나 문명은 양심있는 사람들을 오래 속일 순 없었다. 그리고 이제 문명이란 창살없는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른 것이다.
20세기를 온전히 살아냈던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의 삶은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스콧 니어링은 문명세계의 대량생산과 획일화된 가치들이 난무하던 시대 올곧게 자연주의에 기반을 둔 인간적 삶을 가르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강단에서 두번씩이나 쫓겨났던 인물이다. 젊은 시절, 헬렌 니어링은 인도 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기도 했다. 뒷날 그와 헤어지고 스콧 니어링과 스물 한살이라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아내이자 학문적 동료로서 미국의 미개발 지역인 버몬트와 메인 숲속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평생의 삶을 일군다. 아내 헬렌 니어링이 87세에 지은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원제: 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는 남편 스콧 니어링이 100세의 나이에 죽고, 8년 뒤인 그녀의 나이 여든 일곱에 저술한 책으로, 그녀의 젊은 시절과 스콧 니어링과의 생애, 자연에 몸담고 평생 예술과 학문 그리고 땅에 흘린 땀방울만큼 가치있는 노동안에서 살았던 일생을 담담히 회고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초반부에 헬렌 니어링은 부르주아 가정에서 문제의식 없이 살았던 어린 시절, 그리고 음악에 심취했던 젊은 한 때, 유럽 여행중에 만난 크리슈나무르티와의 인연, 그와의 결말이 좋지 못했던 아픈 이별 등을 소상하게 기록해 놓는다. 오늘날 제법 유명한 인도 사상가로 기억되는 크리슈나무르티와의 인연을 기록한 장면을 보면, 헬렌 니어링이 평생 그와의 교제에서 받은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암시받게 된다. 한 개인의 모든 성품이란 완벽할 수가 없고, 한 개인이 한 인간의 삶을 완전하게 정의내릴 수도 없다. 그러한 면에서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은 헬렌 니어링 본인의 개인적인 느낌만으로 채워졌으며 그것을 독자는 걸러서 독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뒷 얘기는 대부분 남편 스콧 니어링과의 일생을 다룬다. 이 책속에 펼쳐진 그들의 삶의 기록은 책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감과 감동의 산물이라 부를 만 하다. 특히 황폐한 문명의 부속품으로 기계적인 노동과 소비에 익숙한 삶을 당연시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하나의 큰 감명을 전해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부부의 삶은 문명에 강제당하는 종속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자신의 생각대로 설계하는 주체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애써온 삶은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다. 검소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자립하는 그 삶은 우리 이마에 땀을 흘려 생계를 꾸리고, 고용주나 어떤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먹을 양식을 기르고 살 집을 지으며, 필요한 나무를 베고, 자신의 생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돈이 거의 필요 없었고, 쓸 일도 없었다. 물건을 살 돈이 없으면, 우리가 손수 만들거나 그냥 없이 지냈다. 우리 뜻은 우리가 먹고 자고 입고 집을 덥히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바깥세상의 도움없이 해결하면서 읽고, 쓰고, 연구하고, 가르치며,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그런 일들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 p. 124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이들 부부는 자연속에서 농장을 일구며, 강연 활동, 저술활동 등에도 열정을 쏟았다. 대학강단에서는 쫓겨났고 또 20세기 전반에는 이들의 자연주의와 반 문명적 삶이 주목을 받지 못했다. 남편인 스콧 니어링의 사상은 매우 급진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노동력 착취와 전쟁, 환경 파괴 등으로 상징되는 주류 문명은 그들의 삶을 이단아로 내몰았다. 그러나 스콧 니어링은 평화와 자연주의, 빈민에 대한 관심 등 사회복지적 측면을 강조했고, 그러한 사상을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의 사상이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미국의 산업문명과 국가 폭력성이 인간소외와 전쟁이란 결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점차 많은 이들이 스콧 부부의 농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자연속에서 인공을 가미하지 않고도 건강하고 넉넉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던 이들 부부의 노력의 결실이 점차 드러난 것이다. 이들 부부는 스물 한 살이라는 나이 차와 각기 남다른 개성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평생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조화로운 생을 살아낼 수 있었다. 비록 아이를 갖지 않았지만, 평생 서로를 존중했고 서로의 일을 도왔으며, 함께 농장일에 매진했다. 또 함께 자신들이 살 집을 손수 지었으며, 일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틈틈이 많은 책을 읽었고, 또 많은 책을 썼다. 헬렌 니어링의 이 책이 감동을 더하는 것은 자신의 주체적인 삶이 그녀의 성실한 독서와 자연안에서의 깊은 사색으로부터 왔음에 기인하기도 한다.
채식주의자이기도 했던 이들 부부는 100살이 될때까지 장수했으며, 남편인 스콧 니어링의 100세 생일 때에는 이웃 사람에게서 "당신이 100살 까지 살아서 세상이 좀더 나아졌습니다"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스콧 니어링의 죽음 또한 그들의 삶 만큼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이들 부부는 죽음에 앞서 삶을 연장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거부했으며, 죽음을 삶만큼이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훗날, 헬렌 니어링은 여든 일곱에 이 책을 쓰면서 남편 스콧 니어링에 대해 가장 명료하고, 단순하게 그의 삶과 생애를 해설한다.
"그이는 이상주의자였으나, 강인하고 실천하는 일꾼, 곧 실천하는 이상주의자였다. 또 타고난 종교인이었으나, 어떤 교회의 구성원도 아니었고 어떤 종교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학식있는 사람이었으나 땅벌레 같은 농사꾼이었고, 공적인 인물이었으나 은둔자로서 행복해 했고, 명망있고 우렁찬 웅변가였으나 보통 대화에서는 말수가 적었다. 그이는 음악을 이해하거나 느끼는 데는 무디었지만 언제나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연주하는 내 뒤에 있었다. 학문적인 주제에 관해 간결하고 사실에 바탕을 둔 글을 썼으나, 일상 생활에서는 웃음을 머금게 하는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p. 238,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스콧 부부의 삶을 보며 문명의 때가 끼지 않은 자연인으로서의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의 가능성을 상상해 본다. 세계적인 경제 한파와 반 생태적인 정치꾼과 개발업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스콧 부부의 삶은 가뭄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이 반갑고 소중한 교훈이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5백만 명이 같은 말을 해도 어리석은 말은 어리석은 말이다" 라고 쓴바 있다.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고, 다수의 삶의 방식이 반드시 바른 삶도 아니다. <월든>을 지은 19세기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 팔고 농노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경제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절망의 늪에 빠져 있다. 경기가 좋지 않아 자영업자들이 가게문을 닫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할것 없이 많은 이들이 대량 실업의 공포에 젖어 있다. 지난 발렌타인데이를 기점으로 수명이 지하철에 투신했다. 사람들은 지금 절망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나 경기게 있지 않다.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고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이나 성찰없이 하루하루 농노처럼 살아온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명은 인간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대량 생산을 위해 인간은 자본과 기계의 종속물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고, 그 존재만으로도 대우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그렇지 않다.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정확히 나뉘어진 세계는 용산철거민 사태에서 보듯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이다. 자연속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땅은 정직하고 심은대로 수확물을 돌려준다. 그러나 문명은 자연만큼 공정하고 정직하지 않다. 그것은 불공평하고, 인간을 착취한다.
대량소비사회는 편의와 효율성을 제공한 대신에, 인간성을 말살했고 인간의 가치를 추락시켰다. 아나톨 프랑스가 말한 5백만명에 들 필요는 없다. 소로우가 말했듯이 농노처럼 인생을 살 필요도 없다. 가난하지만 만족할 수 있고, 조금 불편하지만 영혼에 평화가 깃들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자연으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스콧 부부의 삶에서 19세기를 살다간 위대한 영혼, 소로우를 발견한다. 소로우는 20세기에 스콧 부부를 통해 부활했다. 스콧 니어링 부부의 삶은 소로우가 꿈꾸어온 이상적인 삶의 실천이다. 헬렌 니어링은 이 책에서 19세기 미국 작가 엘버트 허바드의 글 하나를 인용한다. "건강, 책, 일, 그리고 여기에 사랑이 더해진다면 운명이 주는 모든 괴로운 고통과 아픔도 견딜 만해진다." 이제 절망을 한쪽으로 치워버리고, 생의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할 때다.

2009.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