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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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이유는 고상하거나 거창하지 않다.  책 읽는 일이 힘들고 책읽는 사람이 귀하다보니, 그것을 때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책을 보는 이유나 영화 한 편을 보는 이유도 따지고 들어가보면, 뭔가 내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한 행위다. 순수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런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 가운데 얻는 재미조차도, 지금 우리 욕망이 그걸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증표다.  변화는 앎에서 온다. 평이한 말과 언어에서 변화를 바랄 수 없다.  지금 막 생산된 언어라는건 가볍고 검증되지 못했다.  수천년 전 문명과 사회가 출현할 당시부터 지금껏 수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연구되어 다양한 주해로서 살아남은 책들이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삶속에 초대해 볼만한 경지에 이른 문장들이다. 이것을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읽히는 고전은 지금 매우 한정 돼 있고 편향 돼 있다. 동양 특히 한국의 근대화는 서양철학과 종교가 전파되는 수단과 방법을 의미했다. 철학이라하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근대로 넘어오면 칸트나 헤겔, 현대로 오면 사르트르나 키에르케고르 등 철학자의 이름이 굴비엮이듯 나온다. 비록 그 철학에 대해 알바 없지만 우리는 고전을 서양위주로 읽고 이해했다.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낮았고, 그것은 아마도 20세기에 공산화된 중국에 대한 소원함도 그 이유였을 듯하다. 또, 동양사상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는 한자어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과 일반 대중들이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동양고전에 대한 지식인들의 굼뜬 번역 작업도 원인이다. 그러한 점에서 신영복의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은 특별하고 귀중한 저작이라 본다.

2016년 1월 타계한 신영복은 박정희가 독재로서 나라를 어지럽힌 시절, 조작된 용공사건으로 구속돼 만 20년 2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한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20년 이상을 양심수로 수감된 지식인은 흔치 않다. 그는 출소 후 곧바로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수감시절 책을 놓지 않았고, 공부에 매진했다.  출소 후 사석에서 감옥을 언제나 `나의 대학시절'로 부르기를 주저치 않았을 만큼 그는 감옥에서의 시간동안 배움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인문학 공부를 지속했다.  그의 `감옥 인문학'은 몇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첫째, 그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출신인 엘리트로서 보통의 지식인이 가진 관념에 머문 지식을 타파한 곳이 감옥이었다는 점이다.  사형수에서 감형돼 무기수가 된 그는 수많은 잡범들과 격의 없이 지내며, 지식인이 가질만한 우월의식이나 책속에 매몰된 협소한 인문학에서 벗어난다.

둘째, 감옥이라는 특수성은 지식인이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해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점이 신영복의 공부를 특정한 영역으로 내몰게 된다.  많은 책을 반입할 수도 없고, 지닐 수도 없는 감옥에선 얇거나 두꺼운 고전 한 권이 요긴했다. 쉽게 읽고 넘길 수 없는 동양고전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수감생활 동안 벗할 수 있고,  하나의 자구를 몇날 며칠이고 머릿속에 두고 생각할 수 있는 방편이 되었다.  신영복은 <강의>에서 십수년 동양사상을 홀로 공부하며, 익히고 사색한 내용을 풀어 놓는다. 그 분야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독서하고 궁리한 깊이가 문장에서 느껴질 정도다.  무엇보다 이 책의 뛰어난 장점은 `써머리'라 부를 수 있는 분량임에도, 수천년간 동양을 지배해온 춘추전국시대의 다채로운 사상에 입문하고, 본격적으로 그 분야를 독서하기 전 충분한 워밍업을 할 만큼의 적절한 깊이와 수준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영복은 <강의>에서 독자들의 고전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풀 수 있도록 돕는다. 흔히 사상가와 그들의 경전을 금지옥엽인냥 떠받드는 경향이 일반 독자들이 고전을 읽고, 고대 사상가를 대우하는 수준이었다.  공자의 <논어>라고 하면, 비판의식보다는 그 자구 하나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해석하고자 주력하곤 했다.  이 책에서 신영복이 춘추전국 시대의 사상과 사상가들을 풀이하는 방식은 비판과 견제에 가깝다. 맹자가 공자를 노자가 공,맹을, 순자가 묵자를 천하를 통일한 법가 철학의 한계를 비판하고 논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런 서술 방식은 공.맹을 비롯해 고대 사상을 추종하는 독서에 주력해왔던 독자들에게 사유의 자유로움을 선물하고, 관념적인 사상의 추종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신영복은 동양 고전을 읽는 하나의 독법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선을 긋는다.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다. 공자의 사상이 당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해, 그 반민주적 반민권적 요소에 관해 폄하할 수는 없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은 폭력적이다"(141쪽) 그렇다면, 고전의 논리를 어떻게 현대로 끌어올 수 있겠는가. 신영복은 그 시제를 혼돈하지 않으면서, 사람[人]과 백성[民]에 대한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고전의 담론을 그대로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의>는 춘추전국시대 중국 고대 사회 형성기 사상들을 다루고 있다. 즉, 서양 고전이 아닌 동양 고전에 대해 탐구한 책이다.  신영복은 서양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해왔던 동양사상을 고전 강독이란 형식으로 풀어 쓴 이유를 동양 사상의 그 지극한 현실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에 두고 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이념은 모두 서양의 것이지만, 그 모순은 세계를 종교,경제적으로 분열시키고 반목하게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정치,종교,경제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갈등하며,  전쟁과 테러라는 반인본주의적 모순속에 휩싸여 있질 않은가.  신영복은 이것이 서양문명을 지탱해온 두 개의 축, 즉 종교와 과학의 모순된 구조에서 시원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과학과 종교가 자기의 논리를 극단으로 이끌면서, 인간중심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염두해 두면, 동양사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서양의 과학과 종교가 인간을 배제하고 신이나 극단의 이성주의에 매몰돼 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에 반해, 동양 사상은 지극히 인간사회의 현실주의적 소용과 관계에 치중한다. <논어>는 정치 사상이기 전에,  인간관계론의 보고다.  인[仁]과 덕[德], 그리고 예[禮]를 크게 보면, 임금과 신, 민이라는 위계에 적용할 수 있는 가치이지만 동시에 사회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맺기에 있어 모두 응용 가능한 가치들이다. <논어>를 읽어본 사람은 공자가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경원[敬遠])는 논리를 펼때 가장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공자는 유토피아가 있다면 저 먼 하늘이 아닌 지금 이곳에 당장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형이상학과 종교에 빠져 현실 감각을 잃고 결국엔 인간을 수단으로 가치전락시키는 지금 세계에 필요로 가르침이기도 하다. 

" <논어>는 그러한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붕朋이건 예禮건 인仁이건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근본이라는 덕치德治의 논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논어>가 갖는 진보성의 근거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193쪽, 신영복 <강의>

맹자는 공자를 이어받아 자신의 사상체계를 다졌지만,  그는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진보적인 정치철학을 성립시켰다. 맹자의 민본주의는 이렇게 묘사된다. "한 국가에 있어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그 다음이 사직이며,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이다"(217쪽) 즉, 임금도 잘못하면 언제든 민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혁명의 논리를 편 것이고, 민에게 해를 끼치면 어떤 권위와 성역마저도 가차 없이 헐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노자와 장자는 공,맹을 비판하며 그들의 사상을 협소한 정치,사회 논리로 폄하 한다. 공,맹을 동양사상의 전부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던 독자들에게 노,장의 스케일은 놀랍게 포괄적이다.  노,장은 공,맹 사상을 패권 경쟁을 둘러싼 일체의 반자연주의적 무도無道한 작위로 단정하였다. 

이 책에선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묵자나 순자 사상도 다룬다.  특히 묵자는 겸애와 반전 평화 사상의 원조로 이 책에서 크게 다루어진다. 겸애 사상을 설파한 묵자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서 예수가 구사한 문장을 묵자가 말하고 있다는 점은 특이하다. 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패권 경쟁에서 모든 희생을 감수한 기층 민중들의 고통을 대변했다.  전쟁을 살인행위로 보았고, 단 한 줌의 의로움도 없는게 전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반전평화론의 원조로서 비록 우리 시대 그 이름이 많이 알려지진 못했지만, 그 사상은 언제든 인류의 잔혹한 역사앞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한다.  이런 묵자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이 바로 맹자다. 맹자는 묵자의 고결한 가치인 엄격성과 비타협성이 이상주의적이자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평가절하 했다.  

신영복은 자신의 고전 강독을 자평하며, 방대하고 깊은 동양 사상을 지면과 시간의 한계에 막힌 수박 겉핥기라고 언급한다.  하나의 사상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은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저자의 고민이 얽혀 있는 말이다.  신영복은 동양 사상에 대한 강독을 통해 주요한 사상을 요약하고, 그것이 우리 시대와 현실에 적용 가능한 통로와 의미는 무엇인지를 찾는다.  이런 작업은 우리가 고전에 어떤 자격을 부여하고, 읽고,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다. 그 점에서 신영복의 동양 고전 강독은 `써머리'에 그치지 않고 고전 공부의 방향과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신영복은 동양 고전을 인간관계론에 치중해 읽는다. 그는 동양 고전이 결국 지향하는 것은 `인성의 고양'이라고 결론 내린다. 

인성의 고양이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성은 혼자 있을 때 고양되는게 아니라, 어울리며 관계를 맺어가며 한 단계 성숙해 나간다. 그는 인성이 이웃과 함께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하며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회를 만들고, 결국 좋은 역사를 함께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허황된 형이상학을 주입하고, 관계보다는 개인에 치중한 서양 사상이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를 동양의 고전들이 다가서고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것은 서구적 가치가 개인의 존재성을 강화하고 개인의 사회적, 물질적 존재 조건을 확대하고 해방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구별됩니다. 서구적 가치는 인성의 고양보다는 개인의 존재 조건을 고양하는 것이며 그 존재 조건들 간의 마찰과 충돌을 합리적으로 규제하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06쪽

신영복의 책에 자주 손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식인으로서 그는 독보적인 장점을 지닌 사람이었다. 최고 학부을 나와 한 시대의 엘리트로 살았고, 깊은 내공을 쌓은 지식인으로서, 단연 그의 언어와 사유는 사려 깊고 충실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장점은 아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만 20년 20일간 갖혀 있던 감옥에서의 삶에서 떨어져 나온, 겸손과 인간 이해의 세심함이 전해져 온다. 그가 인생의 삼분의 일 이상 의식주를 함께 한 이들은 소위 세상에서 밑바닥 취급을 당한 `잡범들'이었다.  신영복은 그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인간학의 최고봉을 수료했다. 그것은 이론과 상상이 아니라 현실과 실천이란 관점을 제시하며, 그의 공부와 성품에 남다른 식견과 자세를 갖게 했다.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 세상에 나온 것은 십 수년 전의 일이다. 신영복은 당대의 문제의식을 배려한 문장을 곳곳에 심어놓았다. 그같은 문제는 십 수년 전이니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고전을 어떻게 읽고 우리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지 알려 준다. 더불어, 특정 사상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고대 사상가, 그 자신들의 견제와 비판의 자세에서도 배울 수 있다. 공,맹의 유가 철학과 노,장의 도가철학은 상반되는 세계 인식과 정치,도덕을 설파하면서도, 그 나름의 가치와 철학을 함유하고 있다. 비판이 금지된 사상과 관념은 인간에게 득보다 해가 더 크다.  서양 역사에 빗대보자면, 중세의 종교적 독단이 한 시대를 암흑기로 내몰았다는 점이 한가지 예가 될 수 있겠다.  

나는 좀 더 자유롭게 생각하고, 살아가기 위해 책을 읽는다.  동양 고전은 신영복의 말대로, 인간관계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철학이다. 그것은 중국 역사상 고대국가 형성기에 다채롭게 피어난 철학이었다.  그들의 철학은 심오하고, 나름의 의미와 깊이를 담고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 이식되는 가르침은 언제나 `취사선택'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구분하는 실력과 기술을 단련시키는 것은 독자들의 의무가 아닌가.  많이 배우면 교만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  지식이 부족하면 귀가 얉아 진다. 자기의 삶과 자신의 역사와 한 시대의 흐름을 읽는 능력을 키우는 일은 배움, 독서를 통해 가능하다.  특히, 고전 독서야말로 옛 시대를 읽고, 옛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다.  신영복이 앞서 걸어간, 깊고 풍성한 사유와 겸손한 인간 이해에 밑바탕 둔 고전 독서를 많은 독자들이 뒤따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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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로마서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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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척 천천히 책을 읽고 있다. 쫓기듯 책을 읽고, 서평을 쓰던 오래된 습관과는 확연히 달라진 풍경이다. 4월에 출간된 <도올의 로마서 강해>는 예전 내 독서습관 같았다면 이미 읽고, 서평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한 달 넘도록 잡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깊이 읽고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런데, 도올은 이 책을 탄핵정국이 진행되던 몇 개월만에 짓고 탈고까지 했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할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민초들의 촛불이 타오르던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였다.  그는 이 광장에서 "나의 존재의 그룬투가 뒤바뀌고 시간의 움직임이 새로운 카이로스를 향해 컨버전을 일으키는 그런 혁명의 빛줄기"(13쪽)의 전율을 느꼈다고 전한다.

대한민국 한 타락한 대통령의 탄핵 정국과 2000년 전 골수 율법주의 바리새인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개심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컨버전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역사적 예수를 지우고, 유대민족을 넘어 보편적 인간의 부활하신 구세주라는 그리스도로 예수를 규정하고, 만들어낸 바울은 오늘날 `기독교'의 시조와 다를 바 없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은 어떤 맥락에서건, 바울의 공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명료한 논리를 담은 <로마서>의 주석과 해설을 통해 도올은 우리 시대와 <로마서>에 담긴 메세지 사이에서 어떤 통찰을 끌어내고 생성하려 하는 것인가.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본격적인 로마서 강해에 앞서, 서론이라 할 수 있는 `입오(入悟)'가 500여 페이지 가운데, 반을 차지 한다.  서론이 책의 절반인 셈이고 역설적으로 책의 핵심이다. 서론 부분에서 도올은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 로마서가 쓰여지기까지의 역사적 배경, 예수 시대에 앞서 BC 10세기 앞 뒤의 시대적 맥락을 역사와 문헌에 대한 해박한 분석을 통해 파고든다.  도올이 간추린 그리스 로마 역사는 유대민족의 정체와 예수의 출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도올은 모두가 수긍할 만한 우리 시대 대지식인이다. 그처럼 열심히 책을 읽고 연구에 몰입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지식인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도올에 대한 비호감이 존재한다고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시대 호학(好學)하는 이들은 도올의 해박함과 지식에 대한 그의 일생의 열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도올은 어머니의 남다른 신앙심으로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에 깊이 몸 담았고, 체화된 인물이기도 하다.  청년시절, 신학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다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도 익히 유명한 일화다.  내가 도올과 그의 학문을 마주하게 된 것은 논어와 공자 강연를 통해서였다.  

2000년 초반 KBS에서 진행되었던 도올의 논어 강의는 알찼다.  그는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확고한 논리와 땀을 쏟고 쇳소리가 나는 열정적인 강연으로 사람들을 혼을 빼 놓았다. 이후, 그가 보여준 지식에 대한 열망 가득한 일생은 공자의 호학에 빗댈만큼 전방위적이었다.  그가 지식을 확장해나가는 방식도 주목해야 된다.   한 분야를 섭렵하기 위해, 가용한 모든 문헌을 읽고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세계를 자기의 안방인냥 오가는 열정은 <도올의 로마서 강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역사적 시점에 다가서기 위해, 서론에서 도올은 헬레니즘의 역사와 문화, 철학을 빠짐없이 검토한다.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을 검토하면서, 성서가 아닌 역사적 지평위에서 예수 시대를 먼저 훑어보는 것은 기존 신학자들의 태도와 다른 길이다.

도올이 <로마서강해>를 통해 드러낸 자신의 신앙과 종교에 대한 태도는 보수적 기독교의 입장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매우 상식적이며 수긍할만 하다.  종교가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일은,  그 종교를 어떻게 믿게 되었으며, 어떤 믿음을 유지하고 키워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일맥상통 한다. 인간을 도륙하고 있는 `IS'도 언제나 신의 뜻(알라)에 따르고 있다 주장하질 않는가.  도올은 한국 기독교가 망해가고 있다고 일침을 놓는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고, 그의 부활을 믿는다에서 멈춰서는 안되는 문제다.  예수가 구현한 부활사건을 내 몸속에 구현하며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당한 고통과 번뇌과 죽음의 체험을 지금 이 시대에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매순간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려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 도올의 생각이다. 

" 바르트의 말대로, 교회가 그 자체가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고 끊임없이 부활해야 하지 않을까?  부활이 어찌 AD 30년경에 일어난 한 사건이겠는가?  부활이 우리의 삶의 지평의 모든 순간순간의 사건이 아니라면 부활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나는 이 땅의 종교혁명을 위하여 이 책을 쓴다"    256쪽, 도올 <로마서 강해>

도올의 강의, 그가 쓴 기독교 관련 책을 읽어보면, 그는 기독교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도올의 로마서 강해>는 신앙 고백이 없지는 않아서, 그의 신앙인으로서의 진정성이 담겨 있지 않은건 아니나, 그를 평균치의 한국기독교인의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긴 힘들다. 도올은 수많은 강연에서 기독교의 논리나, 일반적인 기독교인의 신앙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수준의 담론을 펼쳐왔다.  이 책에서 근엄하게 <로마서>를 쓴 바울의 역사, 실존적 정체와 논리, 신앙을 추적하면서도 그의 이런 태도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가 전반부에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 가운데서 유대인의 뿌리와 구약의 성립배경을 논하면서 드러낸 신앙관은 역사적 측면에 큰 비중을 둔다.  장황하게 500여 페이지를 서술하였지만, 그의 결론은 `예수가 역사'라는 문제의식으로 귀결된다.

이 역사라는 관점은 신앙이라는 믿음과는 대척점에 선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바울이란 사람은 예수를 실제로 만나보지도 않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기독교 신앙의 논리를 설계하고 이방인 선교에 성공함으로써, 오늘날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예수의 제자가 열 두 명이나 있었음에도, 기독교 부흥의 공은 오히려 예수를 추종하는 제자들과 신자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골수 유대인 율법학자 바울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바울은 역사적으로 예수를 만난게 아니라, 광야에서 환상속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대각(大覺)의 체험을 한 사람이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고, 한국 내에서만 자칭 재림예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흔하고, 또 그를 추종하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도올이 <로마서 강해>에 앞서, 서론 부분에서 유장하게 다루고 있는 서양과 유대인의 역사적 뿌리에 대한 탐구는 바울이 만든 기독교가 `역사속의 실존인물인 예수'의 정체를 생략하거나 축소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해 둔 것이다. 로마라는 제국에 대항해, 수많은 혁명가와 반제국 인사가 활동했던 예수 시대였건만, 왜 예수는 민족주의자로서 아닌 인류보편적 구원을 요망하는 메시아로서만 바울의 기독교적 논리속에 담겨 있는가.   

미국의 종교학자인 레자 아슬란은 <젤롯>(와이즈베리,2014)이란 책에서 도올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드러낸 적이 있다. 그는 바울이 만든 그리스도가 역사적 예수를 완전히 집어삼켜버렸다고 말한적이 있다. 무력을 통해 제국을 뒤엎고자 했던 유대 열심당(젤롯)원으로서 혁명적 기질의 예수,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의 권위에 반발한 탈권위의 매혹적 설교자에 대한 기억, 로마의 압제에 도전하다 실패한 과격 민족주의자에 대한 기억이 바울을 통해, 모두 역사의 뒤편으로 자취를 감췄다고 그는 썼다.   즉, 바울이 로마라는 정치적 실체를 의식해 로마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는 종교를 만들고 전파하기 위해, 예수에게서 당대의 정치적 색채를 지워버렸다는 의심이다.

"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든가, 자신이 `메시아'라든가 하는 의식이 없이 평범하게 산 위대한 인격체(갈릴리의 하씨드)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에게는 용납될 수가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한다. 예수는 부활한 구세주이어야만 한다. 바로 이 `어야만 한다must'가 기독교라는 일대종교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동년배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든 위대한 사상가라고 동시에 생각한다. 바울의 `만듦'이 없이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바울의 위대함이요 또한 바울이 인류사에 남겨놓은 비극이다."  396쪽

도올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당대에 상상할 수 있는 두가지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 첫째는 유대민족의 유일신인 야훼와의 계약의 증표인 율법을 철저히 고수하는 민족주의(선민주의)적 태도이고 둘째는 로마제국에 물리적으로 항거하고 무력투쟁을 전개하는 젤롯(열심당)이 되는 길이었다. 골수 율법주의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그 두가지 길을 가지 않고, 파격이라 할 수 있는 제 3의 길을 갔다. 그 길은 유대민족에겐 반역의 길이었던 친로마적 행보다.  바울은 "유대인에 의한 정치혁명의 가능성을 제로로 보았고, 대각 체험 이후에는 자기가 속한 유대교 집단이 얼마나 비전없고 부패하고 완악하고 융통성 없는 죄악 집단"인지를 생생하게 깨닫게 된다. 

도올이 광화문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광장 한복판에서 <로마서 강해>를 집필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부패한 정권과 한통속이 된 기성보수 기독교 종단과 대형교회 목사들의 아전인수식 몰상식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도올은 한국 기독교가 살 궁리만 하고,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일격을 가한다.  도올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재검토하자고 주장한다 . 더불어, 동서양의 역사철학에 해박한 도올같은 사람에게 기독교의 편협한 논리가 얼마나 답답한 구속이 되는 것인지 독자들은 느낄지 모른다.  일반독자의 눈에, 이 책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책장 곳곳을 열면 도올이 직접 여행하고 찾아가본 유대역사속의 장소들이 펼쳐진다.  그가 지식을 체득하는 방식은 답답한 문헌 속에서만은 아니다.

비기독교인으로서 <로마서 강해>를 꼭 읽을 이유가 없었지만, 도올이라는 믿을만한 지식인의 학문적 깊이와 공정성, 정치적 상식과 비전을 믿고 책을 잡았다.  단언하건대, 도올이 펼치고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의 비판적 성찰과 반성, 그리고 인문과 종교를 넘나들며 펼치는 그의 지식세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감과 감화를 불러오고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면서도, 그에게는 종교적 독선이 없다. 오늘날 보수종단의 기독교인들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균형감각, 달리말해 정치,사회적 상식이다.  도올은 책의 도입부에서 새로운 정권의 주체가 될 사람에게 세가지를 요구하는데, 그 첫째가 남북 화해다. 둘째가 경제민주화다. 셋째가 풍요로운 농촌이다. 이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도올은 남북 화해를 첫째로 내걸었다.  

내가 평소 도올을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시대를 읽어내는 지식인으로서 그의 식견 때문이다. 대북 압박 국면이니 하면서, 남북 대결만 추종하는 세력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우리 시대 대표 지식인 도올은 `남북화해'를 주문했다.  따지고들면, 한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현 시대의 모든 정치,경제,사회적 불평등까지의 문제가 남북 분단과 대결 때문에 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는 방송,강연,저술을 통해 줄곧 기회 있을 때마다 남북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발언을 해왔다.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남북 사이의 제2의 전쟁은 민족의 멸망이다. 그 이후는 한반도의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우리 시대, 지식인들은 침묵에 능하다.  민감한 문제에는 입을 닫는다.  하지만, 도올은 그렇지 않다.  그러한 직설을 종교,정치,사회,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일생 내뱉는다는 건 쉽지 않다. 

공자의 <논어>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을 고르라면, 나는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라는 인물이 지극히 평범한 언어로 자신의 호학(好學)을 강조하는 부분이라 말하고 싶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있지만, 오늘날 대중과 호흡하며 그들에게 끊임없이 지식과 배움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는 이가 몇이나 될까.  도올 김용옥, 그가 일흔 넘는 나이가 무색하게 공부에 전념하고 지식을 연마하는 모습, 그것을 통해 사회와 세계에 대한 바른 비전을 제시하며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가 시대의 본보기다. 어린 시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를 통해 얻은 신앙을 붙잡고,  일흔 나이가 되도록 그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은 인간적이며, 그것이 사람의 한계란 생각도 든다.  한달 동안의 느린 독서는 도올의 사상과 지식에 대한 열망에 감화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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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의 도구들 - 1만 시간의 법칙을 깬 거인들의 61가지 전략
팀 페리스 지음, 박선령 외 옮김 / 토네이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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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기계발서의 시대는 한물 간지 오래다.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자기계발을 해도, 세상은 개인들이 가진 출중한 능력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의 스펙은 단군 이래 최고라지만 그런 스펙으로도 사회와 세상에서 능력을 인정받기 어렵다. 스펙이 평준화된 세상이다.  자기계발서는 그렇게 조용히 서점가에서 사라졌었다.  과거, 나는 자기계발서를 종종 읽었다.  살다보면 의기소침해지는 날이 있고, 그런 날들에 이런 종류의 책들은 동기부여의 근거가 돼 주고, 용기을 건네주었다.  유명 강연가 김미경은 자기계발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못한것을 염두해 두고 "자기계발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인문학"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요즘 심한 의기소침을 겪었다.  1월에서 3월 사이에 너무 규칙적으로 살아서였을까. 4월 한달 동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몇시간 글을 쓰는 일이 무용하게 느껴졌다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대통령 없는 정부처럼 불안했던 4월은 이래저래 많은 이들이 안보 스트레스에 휩쓸렸을 것이다. 그런 여파도 있었다. 아무튼, 어떤 책을 골라 읽어도 새롭지 않았고 글을 쓰고자 하는 동력은 바닥이 났다. 그 사이에 빨간 책 한 권이 나타났다.  내가 오랜 시간 읽기를 피해온 자기계발서였다.  <타이탄의 도구들>(토네이도, 2017)은 전혀 내 관심을 끌지 못할 책이었다.  하지만,  읽는 동안 `번 아웃' 돼 버린 나는 차츰 기운을 차렸다.  자기계발서 무용론을 이제 내가 반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 책이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와 다른 특징을 한가지 들자면, 그 독특한 기획에 있다. 저자 팀 페리스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기업가 정신'을 강의하며, 자신이 집필한 책 4권을 모두 뉴욕타임스와 아마존의 베스트셀러에 올려 놓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팟 캐스트 방송 `팀 페리스 쇼'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그 방송에서 그는 수백만 청취자의 요구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들 200명'을 뽑아 출연시키는데 성공했다. 사실 <타인탄의 도구들>은 이 기획에 따라 진행한다면 성공이 보장될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유명인 200명이 들려주는 각자의 인생론을 그대로 옮겨적기만 해도 그것은 막강한 컨텐츠가 될게 분명하니까.

그 200명은, 과히 세계적인 유명인사들이다.  알랭 드 보통, 세스 고딘, 말콤 글래드웰, 파울로 코엘료 등의 작가로부터 구글,픽사,트위터, 페이팔, 인스타그램 등의 창업가와 CEO들, 그리고 예술가, 전문직 종사자, 피트니스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인물들이 한마디씩, 자신의 삶과 성공 노하우, 인생에 관한 생각들을 특유의 입담으로 조언한다.  팀 페리스의 팟캐스트 방송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2016년 말, 아이튠스 3년 연속 최고 청취율에다, 팟캐스트 비즈니스 분야 다운로드 수 1억회를 돌파했단다. 이 방송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놀라운 것은 이 방송의 성공이 아니라, 팀 페리스라는 인물의 섭외력과 기획력이라고 본다.  이 젊은 작가이자 강연가, 비지니스 맨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이 거인들과 친구가 됐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했다.

"당신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줄 사람이 필요한가?  그에 적합한 인물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정신이 번쩍 나도록 세차게 뺨을 때려줄 사람을 원하는가?   그에 적합한 수많은 인물들이 또한 여기에 있다. 당신의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절실한가?  당신 삶을 빠르게 바꿔놓을 계기가 필요한가?  좋다. 이 책에서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당신 삶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줄 지헤로운 도구들을 갖춘 거대한 창고다."  11쪽, <타이탄의 도구들>, 팀 페리스 

페이팔의 창업자이자 페이스북을 비롯한 100개 이상의 기업을 발굴, 투자해 억만장자가 된 피터 팔은 목표와 실행 사이의 간극에 대해 조언 한다.  "인생을 걸어볼 목표를 찾아라"  젊은 독자들은 목표가 생겼다면 대개 10년 계획을 세우지만 `왜 그 일을 6개월 안에 시작하지 못하는걸까?'  피터 팔은 `지금 당창 무모하게 시작해서는 절대 안되지, 10년이 걸릴 거창한 거니까 진지하고 신중하게 시작해야 해'라는 변명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자기합리화가 목표를 무력화 시킨다는 얘기다.  테슬라 모터스의 CEO 앨런 머스크는 화성 식민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스페이스 X 프로젝트를 생각해 낼때, 인생을 걸 만한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타인이 절대 대체 할 수 없는 나만의 사명을 찾다보니, 화성에 이르렀다고 회고한다.  

"찾다가, 찾다가 오죽했으면 화성에 갈 생각을 했겠는가? 이건 아무도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더니 웃음이 사라지고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46쪽

구글 임원이자 벤처 금융의 성공 신화를 썼던 크리스 사카는 인생의 두가지 패턴에 대해 요약한다.  "공격적인 삶과 수비적인 삶"이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돈을 잃고 싶지 않다면 수비적 삶을, 돈을 벌고 싶다면 공격적 삶을 살라고 조언한다. 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상관없지만, 한가지는 알아야 한다. 돈을 벌고 싶다면 공격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승부를 결정짓는 골은 대부분 공격수들이 넣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최연소로 미스터 유니버스 타이틀을 획득한 보디빌더이자 영화배우, 캘리포니아 주지사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진 아널드 슈워제너거는 "눈에 잘 띄는 곳에 존재하라" "버티는 자가 이긴다"라는 말로 자신의 인생론을 설파한다.  아널드가 처음 할리우드에 진출할 때, 제작자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더스틴 호프만, 알 파치노, 우디 앨런 처럼 체구가 작고 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배우들이 각광받던 시대라서다.

하지만, 아널드는 태연했다. 사람들이 잘 생기고 매끈한 배우에게 점점 식상해지는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모두가 살을 빼고 금발 미남처럼 보이려 노력할 때 내가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그들처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한 것은 그저 버티는 것이었다. 제작자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계속 머물면서 팝콘이나 먹는 것 말이다."(79쪽) 실제로 그는 <트윈스>의 메가폰을 잡은 이반 라이트 감독의 눈에 띄었고 영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더군다나 이 영화 출연 조건은 노개런티였다.  영화 성공에 따른 러닝개런티 즉 성공보수를 받기로 했는데,  놀랍게도 영화는 3억 달러 흥행 수익을 올렸다.  아널드의 예언대로 기다린 사람에게 그의 시대가 온 것이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사라지지 마라. 그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볼 때까지 기다려라. 퇴장만 하지 않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나를 기어이, 본다."  81쪽

책을 읽고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조언을 건넨 인물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미래를 얻는다"  인터넷 사이트 구축 프로그램 워드프레스의 개발자, 매트 뮬렌웨그는 회사 입사 서류를 오직 이메일로만 받는다.  지원서류의 완성도를 보고, 사원채용을 결정하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그의 철학 때문이다. "글의 명확성이 곧 사고의 명확성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굳게 믿는다. 디지털 시대가 발전하면 할수록 글을 쓰는 사람이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오늘날 큰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 모두는 말하기와 글쓰기에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을 우리는 어렵잖게 발견한다."(92쪽)

사회 초년생들,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전략 자문 회사를 운영하는 CEO이자 작가인 라이언 홀리데이는 "안테암불로가 돼라"는 말을 건넨다. 안테암불로는 로마 시대 후원자를 위해 앞장서 길을 터주고, 메세지를 전달하고, 심부름을 하며 후원자의 생활 편의를 도와주는 사람을 말한다.  라이언은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을 때, 초년생들은 자발적으로 안테암불로가 돼야 할 이유로, 상사와 동료가 잘 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도와주는 일이 결국엔 자기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직장에서 타인(상사)을 섬기겠다는 자세로 일하는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고, 위기에 처했을 때 모욕감 없이 자존심을 굽힐 수 있게 해주고, 편견 없이 모든 유용한 조언들을 스폰지처럼 흡수하며,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며 깊게 마음에 와 닿는 예화 한 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CD베이비 라는 온라인 음반 스토어를 창업해 성공한 크리에이터이자 CEO,  데릭 시버스는 자전가 타기에서 터특한 인생론을 들려준다.  그는 산타모니카 해변에 살때, 한 친구 덕분에 자전거 타기에 푹 빠진 적이 있다. 그곳엔 40km의 자전거 도로가 뻗어 있었다. 그는 자전거를 탈때, 그 거리를 빠른 시간내에 완주하기 위해 새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페달을 밟곤 했는데, 매번 운동이 고통스러웠다. 하루는 "너무 빨리 달리지 말고, 그렇다고 느리게는 아니고, 그냥 좀 느긋하게 달려보자"란 생각으로 페달을 밟았다.  그러자, 평소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하늘을 나는 펠리칸, 바다 쪽에서 유영하는 돌고래, 얼굴에 와 닿는 바람과 대자연의 풍광들.  그 모든 걸 즐기고도 전보다 2분 정도밖에 늦지 않았고, 그 이후 그는 인생을 접근하는 시각을 완전히 바꿨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온갖 군데서 돈을 최대한 짜내고 분초를 다투면서까지 시간을 빈틈없이 쓰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멈추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으악'하는 소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게 신호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틈틈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상 신호를 감지하고 멈출 줄 아는 것, 그리고 좋은 신호를 얻기 위해 2분 정도 기다려줄 줄 아는 것, 그것이 곧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공입니다." 87쪽

이 책에 등장하는 유명인들의 삶은 저자도 인정하듯이, 완벽하지 않다. 그들은 누구도 예외없이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며, 자신의 성공이 필연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모두가 실패와 의기소침, 고통과 불안을 경험했다.  저자 팀 페리스는 그 점을 강조한다. 그들이 비록 성공했지만 그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 말이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완화치료 전문의 BJ 밀러는 이 책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로 우리는 충분히 보상받고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감사할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불행의 이유로 삼는다.  생각을 바꿔, 내가 가진 것을 되돌아보면 갖지 못한 것은 보완하고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일, 그것이 인생의 비밀이자 아름다움 아닐까.  한 권의 자기계발서가 던지는 위안과 지혜는 어떤 인문서의 가르침보다 직접적이고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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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 선재 스님의 삶에서 배우는 사찰음식 이야기 선재 스님 사찰음식 시리즈 2
선재 지음 / 불광출판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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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는 것 없이 다 먹는 나로서는 편식 같은 건 모르고 살아 왔다.  모시고 있는 팀장님과 점심을 같이 먹다가 그가 밥에 들어가 있는 야채들을 가려내는 것을 보고 퍽이나 재밌었다.  지천명의 나이에 아이처럼 야채를 가려내다니. 그는 아이들을 키우며 편식에 대해 뭐라고 가르쳤을까, 궁금했다.  고기 먹을 땐, 상추도 싸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기 본래의 맛을 방해한단다.  그분의 건강이 조금 걱정이 됐다. 하지만, 편식만 하지 않을 뿐 나의 식습관이 좋다고 볼 수도 없다.  얼마전까지 밥을 먹고나서도 부엌 선반을 뒤져, 과자 부스러기를 몇 개 먹는게 습관이었다.  식후엔 믹스 커피 한 잔은 마셔야 직성이 풀렸고 밥은 무척 빨리 먹었다. 

식습관에 대한 이런 나쁜 습관들과 결별하고자 노력했다.  몇 달 전부터,  술을 끊었다.  음식을 천천히 씹기 위해 노력했다.  과자류의 섭취를 철저히 제한했다.  식후 마시던 커피를 끊었다.  라면 등 면류를 먹지 않는다.  술,과자,커피,라면?  삶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들을 끊고 과연 나는 행복했을까?  담배처럼 금단증상도 없었다.   몸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고 할까.   뱃살이 줄었고,  몸이 그 전처럼 많이 피로하지 않았다.  건강에 좋지 않다고 무척 잘 알려진 음식들과 결별은 인내와 약간의 불편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선재 스님의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불광출판사, 2017)를 읽다가, 건강을 위한다면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나쁜 음식을 먹지 말라는 이야기가 눈에 와 박혔다.  `기특하게도' 지금 내가 바로 실천하겠다고 노력하고 있는 삶 아닌가. 

하지만, 그 음식들과 결별하기까지 내 건강이 결코 우호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쁜 음식들과 지금껏 결별하지 못한 이유는 음식과 건강의 인관관계에 대한 안이한 사고 때문이다.  나쁜 습관이 쌓여 삶을 망친다는 것을 잊고선 말이다.  스님들이 절에서 해먹는다는 사찰음식에 관해 단순히 해설해 놓은 책이란 상상과는 다르게, 이 책은 바른 먹거리와 음식 문화, 식습관과 건강 그리고 불교철학에 관해 쉽고 공감가는 이야기들을 담아낸 에세이집이다.  불교계에서 `사찰음식 명장'이란 칭호를 최초로 받은 선재 스님은 우리나라에 사찰음식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오랜 수행 기간 내내, 사찰음식 대중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40여년 동안 사찰음식을 연구했고, 자신의 병을 사찰음식으로 다스렸으며, 지금도 사찰음식 수업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불교 음식 문화를 전수하고 있다.

그런 그도,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때 1년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적이 있다.  본래 몸이 약했으나 출가 후 몸을 혹사하며 수행하고 공부하느라 건강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수행이 여기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자신이 승가대학 졸업 때 쓴 <사찰음식문화 연구>라는 논문을 한 자 한 자 다시 읽기 시작한다.  죽음이 목전에 와 있던 시절 읽은 자신의 논문을 통해, 그는 "내가 쓰고도 정작 나는 글대로 살지 못했구나"라고 후회한다.  의사가 선고한 1년의 시간, 그는 철저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먹고, 살아보겠다고 작정했다.  부처님 말씀에는 모든 병은 음식으로 치료하며, 음식은 곧 약이라는 말이 나온다. 

약이 되는 음식이란 무엇인가. "자연 그대로의 음식, 제철 음식, 때에 맞는 음식, 깨끗한 음식 등이 부처님 법에 맞는 음식입니다."(30쪽) 그때부터 그는 모든 가공식품을 끊었다.  건강하지 못한 몸에 무리를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간장과 된장, 고추장을 전통방식으로 직접 담가 먹었다.  아침은 가볍고 맑게, 점심은 든든하게 먹고, 저녁은 아침보다는 많게 점심보다는 적게 먹었으며, 밤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간장과 된장 등의 장류와 김치를 먹었고 제철에 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었습니다. 충분히 쉬었고 명상과 염불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인스턴트 식품은 사탕 한 알도 먹지 않았습니다. 자연식이 아닌 것은 철저히 가렸습니다. 한 번쯤이야, 한 모금쯤이야. 한 끼쯤이야,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야 내 몸에서 일어나는 사찰음식의 효과를 제대로 가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며칠이 흐른 뒤 나는 점점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몸에 나쁜 음식을 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말이지요."  31쪽, 선재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싯다르타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왕자 신분일 때의 이름이다.  당대 유행하던 고통을 통한 깨달음이란 수행법을 따르고자 그는 곡기를 끊고 자발적인 고행을 거듭한다.  번뇌의 원인이 육체의 욕망에서 온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은게 아니라 뼈와 가죽만 남은 채, 혼미한 정신 상태로 쓰러질 찰나에 도달했다.  싯다르타는 겨우 몸을 추스리고 강물에 몸을 씻은 후, 근처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여인에게서 유미죽 한 그릇을 얻어 먹었다.  죽을 먹고 나자 온몸에 기운이 돋았고,  강가의 보리수나무 밑으로 걸어가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깊고 고요한 명상에 들어가 이윽고 부처가 되는 깨달음을 얻는다.  

불교에서 음식이 가진 가치를 이야기할 때, 잊어서는 안되는 예화가 바로 부처의 깨달음이 고행에서가 아닌 육체의 건강과 편안함에서 나온 결과물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음식에 대해 저자나 부처와 같은 절박함과 깨달음을 갖고 살까.  바쁘다는 이유로, 외식, 맛있다는 이유로, 인스턴트, 편리하게 한끼 해결 가능한 편의점 음식이 인기다.  음식에 대한 절제나 철학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유투브를 점령하고 있는 먹방들은 음식을 전투적으로 먹는다. 그들이 먹는 음식이 거의 인스턴트다.  한발 더 나아가 `푸드파이터'들은 인스턴트 음식을 누가 더 많이 빠르게 먹는가로 승부를 가른다. 음식을 먹는다기보다는 자기 몸을 혹사하고 학대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선재 스님은 이 책에서 사찰음식에 담긴 철학을 다음 몇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지금 당신의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라.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은 한가한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다.  암에 걸려서도 자신이 준비하는 논문 때문에 음식할 시간이 없으니 사찰음식을 잘하는 분을 소개시켜 달라는 어느 여교수의 부탁을 받고, 그가 해준 말이다.  둘째, 사찰음식은 수행자들이 최선의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오랜 세월 수많은 지혜를 모은 산물이다.  인간의 몸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과 생명의 윤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몸을 맑게 만드는 음식이다.  셋째, 사찰음식은 생명의 음식이다.  채식과 자연식, 소식을 지향하는 사찰음식의 밑바탕에는 이러한 생명 존중이 담겨 있다.  넷째, 입에만 맞는다고 음식이 아니다. 배가 부르고 기분만 좋아진다고 음식이 아니다. 정말 좋은 음식은 내 몸에 약이 되는 음식이다. 그런 생각을 갖는 사람은 아무 음식이나 입속에 넣지 않는다.

"아픈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면 제일 먼저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을 종이에 적어보라고 말한다. 종이에는 육류 위주의 음식과 가공식품, 탄산음료, 여기에 남성들은 술이 빠지지 않고 적혀 있다.  맛으로 보면 짠맛, 매운 맛, 단맛에 집중되어 있다. 종이에 적은 것을 다시 보여주면 대부분 놀라면서 멋쩍어한다.  생각없이 먹고 살았구나 싶은 것이다.  단지 음식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 음식을 선택하는 `나'의 욕심과 게으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음식은 곧 내가 살아온 모습이다."  148쪽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에 절대적인 믿음과 확신을 갖기 마련이다. 그것이 종교수행자의 경우라면 일반인보다 더할 수 있다. 선재 스님의 사찰음식 예찬은 거의 종교적인 신념의 수준에 올라와 있다. 그것이 아마도 읽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세상의 건강한 음식을 어찌 사찰음식에서만 찾을 수 있겠는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촌의 종교가 불교는 아닐 것이다.  그의 음식에 대한 종교적인 신념은 자신의 병을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이 사찰음식 덕분이라는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는 속성이 강하다.  그런 종교적이자 광적인 집착을 책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매우 상식적인 수준의 건강한 식습관 철학이 곳곳에 배어 나온다. 또, 분명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을 갖고 잘못된 음식의 홍수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쁜 습관과 결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찾지 말라.  지름길 따위는 없다.  오직 결단이 있을 뿐이다.  좋지 못한 음식을 바로 지금 이순간부터 먹지 않는 것이다.  좋은 습관을 들이고, 좋은 음식을 먹고, 매일 운동을 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 따지고 보면 책의 내용을 종교적 색채를 빼고 설명하면 이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단순히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한 생각과 삶을 위해서도 식습관의 변화는 필요하다.  뭐, 그렇게 안 먹는게 많냐?는 핀잔을 들어도 좋다.  내 몸을 사랑한다면, 좋은 음식을 찾아 먹지 말고 나쁜 음식부터 절제하는 습관이 필요할 듯하다.  

더불어, 음식 이야기를 하면서 종교 수행자로서 불교의 철학을 쉽고 평이한 언어로 풀어낸 점은 평가받을만 하다. 평생 음식연구를 한 분으로서는 믿기지 않게,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연과 사색을 글로서 풀어내는 저자의 내공은 깊이 있고 담백하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서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보석같은 문장들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삶이 갈수록 야박해지고, 분주해질수록 우리는 `살기 위해 먹는다'는 잘못된 인식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는 잘 먹기 위해 산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게 아닌가.  싯다르타가 깨달음에 이른 것은 유미죽 한 그릇 덕분이었다.  한갓 유미죽에서 깨달음이 왔다면, 음식은 영혼의 어머니이자 존재의 스승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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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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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을 20년 씩 나눠서 본다면 간결하면서도 의미 있겠다.  태어나 성년이 되는 20년까지는 내 마음이 아닌, 타인의 지도와 의지에 맡긴채로, 나머지 20년 장년 기간은 성숙과 안정의 단계로, 마흔에서 예순 까지는 인생의 결실을 맺는 시기로 말이다.  인생 100세 시대를 논하지만 20년이란 시간은 인생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긴 세월이다.  그 시간을 온전히 감옥살이로 보낸 사람이 작년 1월 15일 타계한 故 신영복 선생이다.  요즘엔 살인범도 정상이 참작되면 집행유예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만 20년 20일을 꼬박 징역살이로 보낸 그는 어떤 죄명 때문이었나?  박정희 독재권력이 만용을 부린 1968년, 통일혁명당 용공사건에서 반국가 단체를 조직하고, 참여한 혐의였다.  그것으로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고 결국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육사교관으로 군인신분이었던 20대의 청년 신영복은 사형이 확정된다면, 총살형이 집행될 예정이었고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수감동료가 총살형에 처해진 것을 소문으로 듣기도 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그에게 무기형으로의 감형은 새롭게 삶을 선물받은 것과 같았다.  선물이란 말이 모순되긴 하지만, 출소 후 20년 고통스런 징역살이를 `나의 대학시절'로 부르는 것을 주저치 않았을 만큼, 이 시간은 인간 신영복이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긴 여정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학자였고 지식인이었던 그에게 감옥에서 만난 수많은 잡범들과 의식주를 함께 나눈 20년은 책과 사색이 가르쳐 줄 수 없는 깨달음과 가르침을 선물로 되돌려줬다.


지천명의 나이에 감옥을 빠져나온 그는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다시 20년이 넘는 시간 자신이 겪고 배우고 깨달은 것을 가르친 후,  굴곡진 인생을 마감했다.  언제나 정갈한 언어와 다감한 표정으로 강단에 섰고, 책을 엮어냈던 그는 여느 지식인과 다를 바 없는 겉모습을 보여줬지만, 그 내면세계와 가르침은 사뭇 다른 면이 있었다.   앎은 두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경험과 지식이다.  경험은 지식이 체화된 형태며,  지식에 이를 때까지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다.  그래서 그것은 정확하다.  지식은 피상적이다.  책과 언어를 거쳐 흡수된 지식은 반듯하고 정연할 수 있지만, 지식이 지식을 배반하고 본질이 사라지고 껍질만 남을 수 있다.  세상 모든 지식이 대개 이같은 형태를 갖고 있으며, 지식인이 때로 안과 겉의 차이로 비난받는 이유다.  


신영복은 감옥에 들어가서야 서서히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때 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거죽의 사람이 아닌 "속사람"의 발견이었다. 사회 속 다양한 죄명을 걷어낸 이후, 그 죄명과는 한 점 상관도 없는 속사람에 대한 깨달음이다.  신영복의 언설을 통해, 우리 사회 지식인을 되돌아보고 지식의 의미를 반성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잡범들을 통해 인간을 알고 배울 수밖에 없었던 그의 20년 감옥생활의 다채로운 경험과 사색 때문이었다.  신영복의 말과 언어에선 지식인의 나이브함이 아닌 고통과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가 `양심'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한 인간이 있다. 일거리를 찾지 못해, 새벽녘에 대학병원에서 피를 팔아야 했던 한 재소자는 피를 더 많이 팔기 위해 물을 먹는다.  그는 물 탄 피를 팔았던 것을 회상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순진한 생각으로 물을 더 먹는다고 해서 피가 묽어지진 않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양심'을 말하고 가르쳐야 할 때면 어김없이 그 재소자의 진지한 표정에서 양심을 읽는다고 썼다.  `지식'과 `독서'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한 노인이 있다.  감옥 안 어느 지루한 일요일, 온종일 수필 한 편을 읽고 난 노인이 내뱉듯 소회를 말한다. " 자기 집 뜰이 좁아서 꽃을 못 심는다는 뭐 그런 걸 썼어"  신영복은 화려한 단어, 유려한 문장에 결코 현혹되지 않는 그의 통찰은 무식에서 온 것이지만, 무식이 날카로운 지성의 변증법이 되어 자신의 지식을 질타하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한다.


대전의 창녀촌 중동의 한 창녀는 별명이 `노랑머리'였다. 어떤 기둥서방(조폭)도 이 여자의 기를 잡지 못했다.  머리채를 잡혀 골목을 끌려 다녀도, 약을 먹고 유리창을 깨트려 배를 긋고 필 칠갑으로 덤볐다. 그곳 창녀촌에서 유일하게 `자주국방' 체제를 확립한 그런 여자였단다. 신영복은 묻는다.  만약 그 노랑머리에게 중산층 여성의 정숙성을 요구하거나 순결성의 소중함을 설교한다면, 그것은 선의인가 폭력인가. 한 사람이 발 딛고 있는 처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그 사람 개인에 대해, 그 사람의 생각에 대해, 관여하려고 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단언한다.  이 모든 경험은 관계를 통해서, 속사람을 겪어내며 깨달은 인간에 대한 이해였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설익고 자만심 가득한 엘리트 지식인은 관념성을 탈피하며, 인간과 지식에 대한 겸양과 지혜를 배운다.  신영복의 대학시절은 책과 스승이 아닌, 인간과 관계를 통한 커리큘럼이었다.


"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생각은 결국 자기가 겪은 삶의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느 개인에 대한 이해는 그가 처한 처지와 그 개인을 함께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관념성을 경계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해방식에 있어서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지요. 학교와 교실 공간에 충만한 관념적 논리가 `나의 대학 시절' 초년에 선명하게 드러나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식은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37쪽, 신영복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최고의 인문학은 `소설'이라고 본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철학이나 역사보다 오히려 `소설'이 가진 그 다채로운 이야기와 인간 관계속에서 나는 인문학의 본질인 `사람'을 주시할 수 있었다.  신영복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의 이야기는 한정되면서도,  되풀이 된다.  2년 간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에 몰입 하듯이,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세월 20년을 감옥에서 잡범들과 살 부대끼며 살아온 시간들에 관해,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이야기 출처가 감옥이란 것이 다를 뿐, 그것은 인간 사회의 이야기다.  인문학에 능통한 사람, 혹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은, 사람을 쉽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그가 살아온 시절을 알 수 없고,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영복의 `감옥 인문학'은 바로 이 지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그는 독방의 면벽 명상과 수많은 사연깊은 재소자들과 몸을 섞으며, 신영복의 철학이라 할 수 있는 `관계론'을 정립시켰다.  우리가 그간 배운 철학은 개인과 존재론에 큰 비중을 뒀다.  자아가 발견된 것이 역사적으로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영복은 감옥속에서 오히려 자아보다 타인을 통해 인간을 알고, 세계와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자아의 아픔과 기쁨의 근원이 언제나 관계였으며, 나 자신의 존재성이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어느날 위대한 깨우침이 찾아온다. "가장 강한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배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290쪽)  자기를 이긴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양심론과 나의 고통과 기쁨의 원천이 나의 내면에서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온다,는 통찰은 평이하지만 탁월하다.  신영복은 이 개인의 철학을 국가와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정치의 최우선 과제는 평화와 공존과 소통이라고 썼다.  그것이 남북의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덧붙인다. "나는 통일을 `統一'이라고 쓰지 않고 `通一'이라고 쓰기도 한다.  평화와 소통은 그것만으로도 통일 과업의 대부분을 담아낼 수 있는 틀이기 때문이다."(378쪽) 보수 정권 10년만에 남북이 다시 빙하기로 접어든 지금 이 시점에, 평화와 소통과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색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한 것은 2013년 신문지상에서였다.  타계하기 불과 3년 남짓으로, 신영복의 철학이 응집돼 있다고 풀어도 좋다.  2000년 6월을 기억할 것이다. 남북의 지도자들이 삼페인 잔을 놓고 앉아 남북 평화와 협력방안를 구상 했고, 개성공단에서는 남북의 근로자들이 함께 질좋은 상품을 생산했다. 휴전선에서는 반세기 이상 이어진 상호비방 방송의 전원이 그날 밤 바로 꺼졌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잘못된 길로 들어선걸까.  북핵을 안전하게 막아준다는 사드가 당당하게 배치를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진정 평화와 안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가. 


"나는 내가 읽고 생각한 것, 심지어 내가 온 몸으로 겪은 것에서마저도 껍데기만 얻고 있을 뿐이었고 껍데기로 누각을 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메마르고 비정한 연상 세계에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심어 나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관념적인 연상 세계를 풍부한 구체성으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181쪽 


지식인의 관념에 치우친 나약함을 질타하고 관계와 양심을 통해, 개인과 사회가 보다 더 나은 지점에 이르도록 채찍질 했던 그의 가르침은 유고, 속에서도 생동하고 있었다.  부도덕한 권력의 횡포에 젊음을 포획당하고, 만 20년 20일을 국가폭력과 감금의 희생양이 돼 살아온 시간들은 고스란히, 한 지식인을 삶과 앎이 일치하는 경지로 끌어올렸다.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호칭한 징역살이가 결코 낭만적이지는 못했을테지만, 그는 감옥안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책이 아닌 인간과 관계를 통한 배움이었다.  신영복의 유고, 그것은 관념이 배제된 살아 있는 가르침으로 여전히 새로운 독자들을 만날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신영복은 자아가 아닌 양심이요, 존재가 아닌 관계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는, 그 반대로 생각해 왔다.  무지를 벗어나는 것, 기만적인 정치세력의 농단을 알아채는 것, 똑똑한 유권자가 되는 것, 우민이 되길 원하는 그들에게 저항하는 시민이 되는 것, 전쟁과 공포로 내모는 일에 맞서 평화와 소통의 가치를 깨닫는 것, 그리고 주장하는 것, 세계의 지도자들이 가끔은 미치광이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받아쓰기 불러주듯 가르치려하는 멍청한 정치인들의 정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우리가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서 국가의 주권자로서 반듯하게 일어 서는 것, 그런 독자로 살겠다고 오늘 신영복의 글을 읽으며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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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3-1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 신영복 선생님, 사람과 양심. 읽다가 울컥하고 읽고 반성합니다.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개츠비 2017-03-23 10: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저도 무한 감동을 느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