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로마서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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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척 천천히 책을 읽고 있다. 쫓기듯 책을 읽고, 서평을 쓰던 오래된 습관과는 확연히 달라진 풍경이다. 4월에 출간된 <도올의 로마서 강해>는 예전 내 독서습관 같았다면 이미 읽고, 서평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한 달 넘도록 잡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깊이 읽고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런데, 도올은 이 책을 탄핵정국이 진행되던 몇 개월만에 짓고 탈고까지 했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할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민초들의 촛불이 타오르던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였다.  그는 이 광장에서 "나의 존재의 그룬투가 뒤바뀌고 시간의 움직임이 새로운 카이로스를 향해 컨버전을 일으키는 그런 혁명의 빛줄기"(13쪽)의 전율을 느꼈다고 전한다.

대한민국 한 타락한 대통령의 탄핵 정국과 2000년 전 골수 율법주의 바리새인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개심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컨버전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역사적 예수를 지우고, 유대민족을 넘어 보편적 인간의 부활하신 구세주라는 그리스도로 예수를 규정하고, 만들어낸 바울은 오늘날 `기독교'의 시조와 다를 바 없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은 어떤 맥락에서건, 바울의 공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명료한 논리를 담은 <로마서>의 주석과 해설을 통해 도올은 우리 시대와 <로마서>에 담긴 메세지 사이에서 어떤 통찰을 끌어내고 생성하려 하는 것인가.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본격적인 로마서 강해에 앞서, 서론이라 할 수 있는 `입오(入悟)'가 500여 페이지 가운데, 반을 차지 한다.  서론이 책의 절반인 셈이고 역설적으로 책의 핵심이다. 서론 부분에서 도올은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 로마서가 쓰여지기까지의 역사적 배경, 예수 시대에 앞서 BC 10세기 앞 뒤의 시대적 맥락을 역사와 문헌에 대한 해박한 분석을 통해 파고든다.  도올이 간추린 그리스 로마 역사는 유대민족의 정체와 예수의 출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도올은 모두가 수긍할 만한 우리 시대 대지식인이다. 그처럼 열심히 책을 읽고 연구에 몰입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지식인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도올에 대한 비호감이 존재한다고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시대 호학(好學)하는 이들은 도올의 해박함과 지식에 대한 그의 일생의 열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도올은 어머니의 남다른 신앙심으로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에 깊이 몸 담았고, 체화된 인물이기도 하다.  청년시절, 신학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다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도 익히 유명한 일화다.  내가 도올과 그의 학문을 마주하게 된 것은 논어와 공자 강연를 통해서였다.  

2000년 초반 KBS에서 진행되었던 도올의 논어 강의는 알찼다.  그는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확고한 논리와 땀을 쏟고 쇳소리가 나는 열정적인 강연으로 사람들을 혼을 빼 놓았다. 이후, 그가 보여준 지식에 대한 열망 가득한 일생은 공자의 호학에 빗댈만큼 전방위적이었다.  그가 지식을 확장해나가는 방식도 주목해야 된다.   한 분야를 섭렵하기 위해, 가용한 모든 문헌을 읽고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세계를 자기의 안방인냥 오가는 열정은 <도올의 로마서 강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역사적 시점에 다가서기 위해, 서론에서 도올은 헬레니즘의 역사와 문화, 철학을 빠짐없이 검토한다.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을 검토하면서, 성서가 아닌 역사적 지평위에서 예수 시대를 먼저 훑어보는 것은 기존 신학자들의 태도와 다른 길이다.

도올이 <로마서강해>를 통해 드러낸 자신의 신앙과 종교에 대한 태도는 보수적 기독교의 입장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매우 상식적이며 수긍할만 하다.  종교가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일은,  그 종교를 어떻게 믿게 되었으며, 어떤 믿음을 유지하고 키워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일맥상통 한다. 인간을 도륙하고 있는 `IS'도 언제나 신의 뜻(알라)에 따르고 있다 주장하질 않는가.  도올은 한국 기독교가 망해가고 있다고 일침을 놓는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고, 그의 부활을 믿는다에서 멈춰서는 안되는 문제다.  예수가 구현한 부활사건을 내 몸속에 구현하며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당한 고통과 번뇌과 죽음의 체험을 지금 이 시대에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매순간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려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 도올의 생각이다. 

" 바르트의 말대로, 교회가 그 자체가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고 끊임없이 부활해야 하지 않을까?  부활이 어찌 AD 30년경에 일어난 한 사건이겠는가?  부활이 우리의 삶의 지평의 모든 순간순간의 사건이 아니라면 부활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나는 이 땅의 종교혁명을 위하여 이 책을 쓴다"    256쪽, 도올 <로마서 강해>

도올의 강의, 그가 쓴 기독교 관련 책을 읽어보면, 그는 기독교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도올의 로마서 강해>는 신앙 고백이 없지는 않아서, 그의 신앙인으로서의 진정성이 담겨 있지 않은건 아니나, 그를 평균치의 한국기독교인의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긴 힘들다. 도올은 수많은 강연에서 기독교의 논리나, 일반적인 기독교인의 신앙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수준의 담론을 펼쳐왔다.  이 책에서 근엄하게 <로마서>를 쓴 바울의 역사, 실존적 정체와 논리, 신앙을 추적하면서도 그의 이런 태도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가 전반부에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 가운데서 유대인의 뿌리와 구약의 성립배경을 논하면서 드러낸 신앙관은 역사적 측면에 큰 비중을 둔다.  장황하게 500여 페이지를 서술하였지만, 그의 결론은 `예수가 역사'라는 문제의식으로 귀결된다.

이 역사라는 관점은 신앙이라는 믿음과는 대척점에 선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바울이란 사람은 예수를 실제로 만나보지도 않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기독교 신앙의 논리를 설계하고 이방인 선교에 성공함으로써, 오늘날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예수의 제자가 열 두 명이나 있었음에도, 기독교 부흥의 공은 오히려 예수를 추종하는 제자들과 신자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골수 유대인 율법학자 바울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바울은 역사적으로 예수를 만난게 아니라, 광야에서 환상속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대각(大覺)의 체험을 한 사람이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고, 한국 내에서만 자칭 재림예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흔하고, 또 그를 추종하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도올이 <로마서 강해>에 앞서, 서론 부분에서 유장하게 다루고 있는 서양과 유대인의 역사적 뿌리에 대한 탐구는 바울이 만든 기독교가 `역사속의 실존인물인 예수'의 정체를 생략하거나 축소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해 둔 것이다. 로마라는 제국에 대항해, 수많은 혁명가와 반제국 인사가 활동했던 예수 시대였건만, 왜 예수는 민족주의자로서 아닌 인류보편적 구원을 요망하는 메시아로서만 바울의 기독교적 논리속에 담겨 있는가.   

미국의 종교학자인 레자 아슬란은 <젤롯>(와이즈베리,2014)이란 책에서 도올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드러낸 적이 있다. 그는 바울이 만든 그리스도가 역사적 예수를 완전히 집어삼켜버렸다고 말한적이 있다. 무력을 통해 제국을 뒤엎고자 했던 유대 열심당(젤롯)원으로서 혁명적 기질의 예수,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의 권위에 반발한 탈권위의 매혹적 설교자에 대한 기억, 로마의 압제에 도전하다 실패한 과격 민족주의자에 대한 기억이 바울을 통해, 모두 역사의 뒤편으로 자취를 감췄다고 그는 썼다.   즉, 바울이 로마라는 정치적 실체를 의식해 로마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는 종교를 만들고 전파하기 위해, 예수에게서 당대의 정치적 색채를 지워버렸다는 의심이다.

"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든가, 자신이 `메시아'라든가 하는 의식이 없이 평범하게 산 위대한 인격체(갈릴리의 하씨드)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에게는 용납될 수가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한다. 예수는 부활한 구세주이어야만 한다. 바로 이 `어야만 한다must'가 기독교라는 일대종교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동년배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든 위대한 사상가라고 동시에 생각한다. 바울의 `만듦'이 없이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바울의 위대함이요 또한 바울이 인류사에 남겨놓은 비극이다."  396쪽

도올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당대에 상상할 수 있는 두가지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 첫째는 유대민족의 유일신인 야훼와의 계약의 증표인 율법을 철저히 고수하는 민족주의(선민주의)적 태도이고 둘째는 로마제국에 물리적으로 항거하고 무력투쟁을 전개하는 젤롯(열심당)이 되는 길이었다. 골수 율법주의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그 두가지 길을 가지 않고, 파격이라 할 수 있는 제 3의 길을 갔다. 그 길은 유대민족에겐 반역의 길이었던 친로마적 행보다.  바울은 "유대인에 의한 정치혁명의 가능성을 제로로 보았고, 대각 체험 이후에는 자기가 속한 유대교 집단이 얼마나 비전없고 부패하고 완악하고 융통성 없는 죄악 집단"인지를 생생하게 깨닫게 된다. 

도올이 광화문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광장 한복판에서 <로마서 강해>를 집필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부패한 정권과 한통속이 된 기성보수 기독교 종단과 대형교회 목사들의 아전인수식 몰상식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도올은 한국 기독교가 살 궁리만 하고,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일격을 가한다.  도올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재검토하자고 주장한다 . 더불어, 동서양의 역사철학에 해박한 도올같은 사람에게 기독교의 편협한 논리가 얼마나 답답한 구속이 되는 것인지 독자들은 느낄지 모른다.  일반독자의 눈에, 이 책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책장 곳곳을 열면 도올이 직접 여행하고 찾아가본 유대역사속의 장소들이 펼쳐진다.  그가 지식을 체득하는 방식은 답답한 문헌 속에서만은 아니다.

비기독교인으로서 <로마서 강해>를 꼭 읽을 이유가 없었지만, 도올이라는 믿을만한 지식인의 학문적 깊이와 공정성, 정치적 상식과 비전을 믿고 책을 잡았다.  단언하건대, 도올이 펼치고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의 비판적 성찰과 반성, 그리고 인문과 종교를 넘나들며 펼치는 그의 지식세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감과 감화를 불러오고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면서도, 그에게는 종교적 독선이 없다. 오늘날 보수종단의 기독교인들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균형감각, 달리말해 정치,사회적 상식이다.  도올은 책의 도입부에서 새로운 정권의 주체가 될 사람에게 세가지를 요구하는데, 그 첫째가 남북 화해다. 둘째가 경제민주화다. 셋째가 풍요로운 농촌이다. 이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도올은 남북 화해를 첫째로 내걸었다.  

내가 평소 도올을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시대를 읽어내는 지식인으로서 그의 식견 때문이다. 대북 압박 국면이니 하면서, 남북 대결만 추종하는 세력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우리 시대 대표 지식인 도올은 `남북화해'를 주문했다.  따지고들면, 한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현 시대의 모든 정치,경제,사회적 불평등까지의 문제가 남북 분단과 대결 때문에 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는 방송,강연,저술을 통해 줄곧 기회 있을 때마다 남북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발언을 해왔다.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남북 사이의 제2의 전쟁은 민족의 멸망이다. 그 이후는 한반도의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우리 시대, 지식인들은 침묵에 능하다.  민감한 문제에는 입을 닫는다.  하지만, 도올은 그렇지 않다.  그러한 직설을 종교,정치,사회,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일생 내뱉는다는 건 쉽지 않다. 

공자의 <논어>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을 고르라면, 나는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라는 인물이 지극히 평범한 언어로 자신의 호학(好學)을 강조하는 부분이라 말하고 싶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있지만, 오늘날 대중과 호흡하며 그들에게 끊임없이 지식과 배움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는 이가 몇이나 될까.  도올 김용옥, 그가 일흔 넘는 나이가 무색하게 공부에 전념하고 지식을 연마하는 모습, 그것을 통해 사회와 세계에 대한 바른 비전을 제시하며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가 시대의 본보기다. 어린 시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를 통해 얻은 신앙을 붙잡고,  일흔 나이가 되도록 그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은 인간적이며, 그것이 사람의 한계란 생각도 든다.  한달 동안의 느린 독서는 도올의 사상과 지식에 대한 열망에 감화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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