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힘 -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레이먼드 조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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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생이 불행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사람은 셀 수 없이 불행의 조건들을 댈 수 있는 존재다. 사람마다 부족한 것이 다르다.  욕망과 욕구도 다르다.  불행의 목록이 넘쳐나는 건 그 때문이다.  반면,  행복의 조건들은 그 종류가 간소하지만 쉽게 얻을 수 없다.   하여,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모든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불행의 이유가 다르다"고 말한 적이 있다.  행복은 어디서 오는 걸까?  재력과 건강은 행복의 기본 요소다.  삶의 여유를 보장하는 적당한 돈과 육체가 온전하지 않다면 사람이 어찌 말로만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래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그리 신용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불행에 곧장 이르는 고속도로는 있는 법이다.  사람사이의 관계,  소위 만인의 직장인들이 오늘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과감히 사표까지도 던지고 싶어하는 인간관계의 실패다.  일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힘들다, 는 말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공감 백배로 통용되는 문장이다. 모든 관계가 어렵고 힘들지만, 타인과 타인이 하나의 목적의식으로 모인 직장은 인간관계의 최전선이자 긴장감 높은 화약고에 다름 아니다.  인간관계의 비밀을 밝힌 책들이 있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은 이 분야의 고전적 이론서다.  반면, 신간 레이먼드 조의 <관계의 힘>(한국경제신문,2013) 은 소설 형식을 빌려 인간관계의 황금률을 풀어내는 흥미로운 책이다.

 

물론 딱딱한 이론서보다야 독자들의 공감력과 감성적 흡수율이 월등히 높다.  직장이란 공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사내 정치를 그 바탕에 깔면서, 저자는 인간관계의 내밀한 본질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풀어낸다.  문장은 가볍고 이야기는 단순하다.  하지만, 인간관계의 본질을 알려주는 잠언체의 문장들이 깊이 있다.  이 간소한 이야기 속에선 현실과 밀착한 직장인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관계를 다루는 이론서들이 가진 치명적 약점이 있다.  가르침대로 행하면 관계가 이상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인간 관계의 실패 가능성을 열어두는 점이 마음에 든다. 더불어 지극히 한국적인 직장과 비지니스 상황을 책으로 옮겨온 것도 눈여겨볼 만 하다.

 

국내 최대 완구업체인 `원더랜드'의 창업주 백회장의 장례식장에서 기획 2팀의 `신팀장'은 조문객의 접객과 안내를 맡는다.  원더랜드는 백회장이 죽은 후,  두 아들인 큰 백이사와 작은 백이사 사이의 경영권 쟁탈전을 예고하고 있다. 어떤 라인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앞날이 바뀔 운명에 처한 직원들은 두 파로 나뉘어 대립한다.  `신'은 장례식장에서 백회장과 고향 친구라는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신에게 성공하기 위해선, 행복해지기 위해선, 인간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신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회의적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재산을 강탈한 숙부들과 사회에 적응하며 경험한 경쟁관계의 삭막함을 통해, 그는 동료 인간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힘을 잃어버렸다.

 

신에게 말을 걸어온 노인네는 원더랜드의 공동 창업주인 조이사로 밝혀진다. 작은 백이사 라인에 줄을 댄 신은 조이사로부터 위임장을 받아내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조이사는 위임장을 내걸고 신에게 일주일에 한 명씩 친구를 만들어 그 과정을 레포트로 제출하라는 조건을 내건다. 이야기는 이제 인간에 대한 짙은 회의와 비난에 익숙한 신이 조이사의 숙제를 풀어내는 가운데 인간관계의 숨겨진 진실을 찾는 과정을 담는다.  신이 연륜과 지혜가 넘치는 `조이사'라는 멘토를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이야기를 풀어가며 조이사는 인간관계의 해법에 관한 통찰력 있는 잠언들을 쏟아낸다. 

 

" 자네 등 뒤에는 보이지 않는 끈들이 이어져 있네, 그 끈들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 인생의 전부라네....정말 그게 전부라네"

" 무슨 거창한 끈이기에 인생의 전부라 단언하시는 겁니까?"
"관계"     51쪽, <관계의 힘> 레이먼드 조

 

조이사라는 인물은 현자일까?  젊고 패기 가득하지만, 관계에 상처받아 독기를 품은 신이란 인물에게 관계를 회복시키는 치유자 역할에 충실한다. 하지만, 그는 공동창업주로 알려진 백회장에게 사업적이자 인간적인 배신을 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아픈 기억을 담고 있는 인물이다. 그도 한때는 백회장을 넘어뜨릴 기회가 있었지만 그걸 실행하진 않는다.  자신의 사사로운 복수심 하나로 수많은 직원들이 실업자로 전락하고, 관련 업체들이 부도를 맞았다면, 그것은 겉보기엔 이겼지만 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수보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을 잃어버리면 모두걸 잃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회를 배신과 책략, 속임수가 난무하는 정글로 생각한다.  그렇게 때묻히고 살아야 남보다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조이사의 삶과 생각은 그 반대편에 가 닿고 있다. 

 

반칙을 통해 앞지른 삶은 겉보기의 성공과 다르게 또다른 반칙과 증오를 남긴다. 백회장의 반칙과 증오가 그 형제들에게 되물림 되어, 우애를 넘어선 경영권 쟁탈전으로 변질된 것이 그 증거다.  조이사는 사업의 성공 조건으로 먼저 사람을 상상하라고 가르친다. 구체적 실행방법은  "관심, 먼저 다가가기, 공감, 진실한 칭찬, 웃음" 이다. 서툴지만 신은 레포트를 쓰며 팀원들에게 이 다섯가지를 하나씩 실천해 본다. 결과는 의외였다.  먼저 상대에게 관심을 주었더니 고스란히 되돌아 왔다.  대화를 시작하려면 먼저 대화를 청하라.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 남이 나에게 대우받길 원하는 바대로 먼저 행하라.  바로 인간관계의 황금률(golden rule)이다.  3세기의 로마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문장 한 구절을 금으로 써서 거실 벽에 붙였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  황금률의 기원이 된 일화다.

 

"관계가 끊어지면 모든 걸 잃는 거야......물론 힘들고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관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네.

상처를 주는 것도 인간이지만,  상처를 치유해줄 유일한 약도 인간이라네.

그게 인생이야"     229쪽

 

사람은 동물이나 식물에게 상처받지 않는다. 사람은 오직 사람에게 상처받기 마련이다. 인간을 배신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하지만, 상처받는 것이 무서워 관계를 단절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삶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선택이다. 삼라만상이 관계 짓기로 엮인게 세상이다.  코스모스를 보라. 행성 조차도 서로를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이 작용한다.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생을 포기하는 것이다.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을 관계의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것이 이 책의 가르침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그 누구도 일방적인 피해자나 가해자는 없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비난'이 아닌 `연민'이다.  행복에 관한 오랜 연구들은 노년의 행복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관계'라고 단정한다. 업무능력이 출중한 사람보다 대인 관계가 원활한 사람이 훨씬 높은 연봉을 받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행복의 90%는 인간관계에 달려 있다"고 잘라 말한다.  달라이 라마는 "혼자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도 했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관계를 회복하라.  작가 레이먼드 조의 따뜻한 우화 한 편이 얼어 있는 당신의 심장을 녹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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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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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구소련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민스크에 있는 벨라루스 국립대를 나왔다.  그의 출신지와 대학이 자리하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민스크 등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직접 피해지역이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경 우크라이나 공화국 수도 키예프시 남방 130km 지점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총 4기의 원자로 가운데 마지막 4호 원자로가 폭발했다. 구소련이 몰락 후 공개된 KGB 보고서에 따르면 체르노빌은 1982년에도 방사능 오염 사고를 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 방사능이 유출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체제는 이것을 비밀에 부쳤고 원전 사고가 재발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도 무시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제작된 체르노빌 원전의 부품은 불량으로 드러났다. 이 사고는 총체적 인재였으나 이후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체르노빌 원전 반경 30km 주변 인근 100개 마을이 거주 불능 및 사용 불가능 지역으로 선포된다.  또, 인근 12개 주 2000개 마을이 방사능 피해를 입었고 방사능 구름대는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다.  직,간접 인명 피해는 300만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어린이는 100만명에 육박했다.  몇 해 뒤 기형아 출산과 사망이 두 배 증가했고, 어린이 암 환자가 10배에 육박한다.  피해 주민의 60%가 갑상선 질환에 걸렸다. 폭발이 발생한 후 소방대원들은 즉각 출동해 화재를 진압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제대로 된 방호복을 입은 이는 없었고, 대부분 며칠 후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한다.  구 소련 당국은 사건 자체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무려 36시간이 지난 후에 주민 소개를 명령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소련은 체르노빌의 사후 수습을 위해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을 투입한다.  그것은 또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실화이며, 이것은 20세기의 대재앙으로 기록된 역사다.  저자 스베틀라나는 스스로를 체르노빌의 증인이라고 밝힌다. "무서운 전쟁과 혁명이 20세기를 지나갔지만 체르노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건" 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 권의 책에 담고자 했다.  "미래의 연대기"라는 부제가 붙은 (<체르노빌의 목소리>, 새잎 펴냄)는 소방대원으로부터 마을 주민, 아이, 해체 작업자, 군인 등 체르노빌을 겪은 모든 사람들의 경험담이자 증언록이다. 2005년 전미 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한 문제작이다.  과거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미래를 예언한 책으로 부상했다.  책 읽는 시간이 힘겨울 때가 있다. 바로 이 책과 같이 고통을 경험한 이들의 가감없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경우다.

 

"무언가 듣지도 못한 것이 나의 세상을 파괴했다.  그것이 기어오르며, 내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과학자와의 대화가 기억난다. `수천 년은 갈겁니다' 그가 설명했다. `우라늄이 붕괴하려면 238번 반감해야 하는데, 그걸 시간으로 환산하면 10억 년입니다.  토륨의 경우 140만년입니다.' 50, 100, 200년, 그 이상이라고? 그 이상은 충격이야!  그때부터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건가? "   190쪽,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

 

소방대원 바실리 이그나텐코는 갓 결혼했다. 아내 류드밀라와 항상 손을 잡고 다닐 정도로 사랑이 넘쳤다. 남편은 그날 새벽 " 창문 닫고 자, 발전소에 불이 났어, 빨리 들어갈게" 라는 말을 남기고 체르노빌 원전 화재 현장에 투입됐다. 방호복은 없었다.   방사능의 분진, 열기 속에서 불타는 흑연을 발로 차며 불을 껐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화재인줄 알았지만, 그곳은 시간은 수천 뢴트켄이 흘러나오는 방사능 지옥이었다.  아침 7시 남편이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서둘러 달려갔지만 경찰은 구급차가 피폭됐으니 다가오지 말라는 소리뿐이다.  남편은 온 몸이 부어 있었다. 남편은 곧바로 모스크바로 이송됐고 그 후 14일간 급성 방사능 장애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14일간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시간이었다.  괴물처럼 변해 죽어가는 남편옆을 지키고자 하는 아내 류드밀라에게 누군가 소리친다. " 잊지 마세요.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능 물질이이에요.  죽고 싶어요?  정신차리세요"(42쪽)

 

바실리 보리소비치 네스테렌코는 전 벨라루스 과학 아카데미 핵에너지 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방사능 피폭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물리학자였다.  4월 26일 체르노빌 원전 4호기가 폭발할 때, 그는 모스크바에 출장중이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민스크에 있는 벨라루스 중앙위원회 일등 서기관 슬륜코프에게 전화했으나, 그와 연결되지 않는다. 정부 전화는 KGB의 도청을 받고 있었고, `사고'라는 말만 꺼내도 통화가 끊어졌다. 4월 27일 발전소에서 불과 수십킬로 떨어진 우크라이나 경계의 고멜 주에 갔다. 시간당 3만 퀴리가 넘는 방사능 오염지역이었지만 사람들은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있었다. 다가오는 부활절 준비로 케이크를 굽고 시장은 흥정하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방사능 구름 아래서... 1등 서기관 슬륜코프에게 위기 상황을 보고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슬륜코프는 곧 모스크바로 승진돼 전보될 예정이었다. 그는 상부의 지시에 충실해야만 앞날이 보장된 관료였다. 

 

" 핵 전시 훈령에 따르면 핵사고, 핵 공격의 위협이 발생하면 바로 국민을 대상으로 요오드 치료법을 시행해야 한다. 위협이라고 했다.  여기는 이미 방사선 수치가 시간당 3천 퀴리였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권력을 걱정했다. 사람의 나라가 아닌 권력의 나라였다.  국가가 중요하다는 데엔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 생명의 귀중함은 온데간데 없다."   361쪽

 

두가지 예화는 일부다. 수천,수만 명의 비극적 사연이 존재할 것이다.  이 책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를 담아냈다.  공산주의 소련 체제는 정보에 대한 통제 아래, 생명보다 권력을 지켜내는데 열중한다. 수킬로 떨어진 마을 주민들은 폭발 당시 화재를 보기 위해 집 옥상에 올라가거나, 발전소 주위에 몰려들기도 했다. 정보가 통제된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공장에서 근무하던 근로자들은 어느날 갑자기 체르노빌 소집 명령을 받는다. 수많은 군인들이 명령에 따라 체르노빌 수습작업에 동원 된다.  헬기 조종사들은 수천 뤤트켄의 방사능이 흘러나오는 지붕 위에서, 정확한 조준을 위해 헬기 창문을 열고 모래와 납, 흑연 등을 떨어뜨린다.  그들은 훗날 공산당의 영웅으로 묘사되지만, 거의 대부분 피폭으로 사망한다.  만약 그들이 희생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조사에 따르면, 유럽 전체가 영원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했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저자가 왜 체르노빌을 20세기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하는지 명확해 진다.

 

체르노빌은 과거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도 과거의 일이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책에서 배웠다. 체르노빌은 기억 저 편에도 없다.  학교에서조차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발생한 일은 옛일도 치부하고, 발생하지 않은 일은 가정으로 위안을 삼는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어리석다는 표증이다. 20세기는 물리와 과학의 세기였다. 인간이 나약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을 이용하고 지배하는 존재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과학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체르노빌이 후진적이고 전체주의적 기술과 권력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후쿠시마는 선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이다. 그럼에도, 그들 정부는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안정성과 기술력을 자랑했다. 원전 사고는 인간의 힘으로 수습될 수 없다는 것을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보여준다.

 

지금부터라도 인류가 자연을 지배하겠다는 오만을 버리고 자연의 일부로서 겸손해질 순 없을까?   방사능 사고 후 검출되는 세슘이나 스트론튬 등 수백개의 방사능 물질은 자연상태에선 검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인공 물질이다.  인간의 자만과 오만이 잠든 지옥의 물질을 현실로 가져온 것이다.  방사성 물질은 인간의 DNA를 변형시킴으로써, 암과 기형을 유발한다.  한번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토양에선 사람이 살 수 없다.  방사성 물질의 반감기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초과한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고 한국어판 서문을 끝맺는다.   체르노빌은 정말 과거일까?  그것은 그저 한갓 교훈이며  역사일까?  혹시 인류의 낯익은 현재이자 미래는 아닐까?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분명 이러한 고통스런 질문과 마주하게 될 테다.

 

 

 

 

 

2013년 10월 2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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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우 2013-10-27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원자력으로 얻는 전기는 편해서 좋기는 하지만 사고가 나면
수습이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 같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책을 사서 읽고 싶군요. 글을 스크랩 해 갑니다. 그리고 제 네이버 블로그에도 올리고 싶네요.
원치 않으시면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평안한 저녁 되세요.

개츠비 2013-10-30 14: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문제의식을 공유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국 사회와 그 적들 - 콤플렉스 덩어리 한국 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고 사는 법
이나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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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제적으로 황당한 뉴스가 두가지 있었다.  첫째는 후쿠시마에서 태평양으로 단 한 방울의 방사능 오염수도 흘러나오지 않는다고 단언한 일본 아베 총리의 지원 연설 아래, 일본이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지로 최종 선정 됐다는 뉴스였다.  물론 이웃 나라의 경사에 축하를 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방사능 완전 차단 발언은 문제 해결의 주체인 도쿄 전력도 고개를 갸웃하는 거짓말이란게 대체적 인식이다.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겠다고 국가총리가 사실 관계를 호도하면 안 되는것 아닌가?

 

두번째 황당한 뉴스는 8년째 OECD 자살률 1위를 지켜낸 한국 사회에 대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청소년(10~24세) 자살 증가률 2위(OECD 31개국 中)를 기록하며 10년간 57%나 상승한 점이다.  통계의 오류나 허구란 말도 있지만, 8년째 1위 수성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이, 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살이란 극단으로 몰고가는 것일까?  성인, 청소년 할것 없이 모두가 죽지 못해 사는 나라는 그 자체가 병리적 분석이 요망되는 사회다.  한국 사회의 특정한 그 누가 아닌, 한국 사회 자체가 심리학적 치유가 필요한 시점이다.

 

분석심리학의 권위자이자 융 심리학을 전공한 정신과 전문의 이나미 씨의 신작 <한국 사회와 그 적들>(추수밭,2013)은 이런 시점에 한국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문제를 살펴보기에 적합한 책이다. 부제를 `콤플렉스 덩어리 한국 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고 사는 법'으로 달았다.  콤플렉스 예방을 위한 방법론을 기대하는 부제지만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에 관한 짧은 칼럼들을 모아논 책이다.  특별한 처방전이 아닌 분석심리학자의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비평하는 수준에 머무른 책이라 약간 실망했다.  뭔가 심도있게 파고든 책이란 착각은 아마도 제목이 차용하고 있는 영국 철학자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란 저서의 역사적 무게감 때문일 게다.

 

칼 포퍼는 이 책을 히틀러가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던 1943년에 집필하여 1945년 출판한다. 칼 포퍼는 전체주의를 열린 사회의 대척점에 두고, 급진적 변혁과 폭력 혁명을 부정한다.  하여, 인류에게 교조주의적 가르침을 통해 사회변혁을 시도했던 마르크스, 헤겔, 플라톤을 역사적으로 `닫힌 사회'로 이끈 열린 사회의 적들로 규정한다.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한 사회 개선을 주장한 `점진적 사회 공학'을 내세운 이 책의 반향은 평화와 민주적 원칙에 입각했기에 암울한 시대에 합리론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물론 주간지에 연재한 가벼운 칼럼들을 묶어낸 이나미의 책과는 제목의 유사성 외에는 특별히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저자가 붙인 `한국 사회와 그 적들'은 꽤 단도직입적이라 모종의 호기심을 불러온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총체적 문제점은 내부의 적에게서 발원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적들의 정체를 꽤 다양한 방면에서 분석하고, 해설한다.   이나미는 정신분석과 분석심리학을 총동원해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쉬운 문체와 오랜 상담경력을 통해 알기 쉽게 풀어낸다.  하지만, 이 책이 특별히 신선한 느낌이 들지 않는건 왜 일까?   우리 스스로도 알고 있는 콤플렉스와 한국인의 특성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구태의연한 특성이 한국 사회를 정의하고 이 사회의 흐름을 만들어 왔다.

 

성형과 명품 중독에 빠진 여인들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책임성, 매카시즘을 연상케 하는 이데올로기의 과잉, 실속이 아닌 허세에 빠진 습성,  술과 유흥에 매몰된 직장문화, 책을 멀리하는 국민 정서 등 칼럼의 소재가 될만한 문제점들이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정치인들의 전횡이다. 그들이 권력을 통해 미치는 영향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4대강 하나만 보더라도 단군이래 강 바닥이 뒤집혀지는 참극이 벌어지고,  여름철만 되면 녹차라떼 수돗물을 연례행사처럼 마시고 있다.  누가 정치인에게 5천년을 유유히 흐른 강을 뒤집을 권리를 주었나?  상식을 가진 그 누가보더라도 4대강 공사의 결론은 실패이고 막장이었다. 정권이 바뀌고서야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썪는다는 그 자연법칙을 깨달은 능청맞은 바보들이 꽤 많다. 그리고 이제서야 반성문을 쓰고 감사를 한다, 고발을 한다 야단법석이다.

 

" 하지만, 예수, 부처 같은 성인은 아니더라도, 만델라나 간디처럼 용서 못 할 적들도 포용하고 못 배우고 못사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겸손한 지도자도 역사에 존재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큰 그림으로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는 대신, 정치를 사적인 이익 창출의 도구로 생각해 자기에게 잘한 이들에겐 상을 주고, 자신에게 반대한 이들은 못살게 구는 것을 옳다고 밀어붙이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사악한 리더를 걸러 내는 것은 각 구성원들의 책임이다. `그래 봤자...'라며 조직의 명운에 냉소를 보내고 무관심한 이가 많은 집단일수록 부도덕한 리더로 인해 몰락할 가능성이 높다."  115쪽, <한국 사회와 그 적들>, 이나미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말하길 정치가 실현해야 할 궁극의 목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했다.  모든 인간이 적당히 일하고, 적당한 여가를 갖게 되는 사회, 그것이 바료 쇼가 희망한 정치의 목적이다.  쇼는 여가를 통해 지성을 계발하고, 미적 취향을 즐기며, 시와 음악과 그림과 책을 감상하며 건강한 문화적 삶을 소비할 줄 아는 시민을 양산해 내야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쇼는 결국 지성인과 교양인이 많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그런 사회가 자살률 1위를 기록할 수 있을까?  풍부한 감성이 넘쳐나고 작은 것들에 감동하는 사회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된다.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말을 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란 명구가 <백범일지>에 나온다.  그는 경제적 부강이나 군사적 강국이 아닌 문화 대국을 소망한다고 고백했다.

 

버나드 쇼나 백범 선생은 왜 문화를 강조한 것인가?  문화와 예술은 인간이 겪어내는 심리적 문제들에 대한 자가 치유 기능을 갖기 마련이다.  교양인은 자신과 세계의 운명을 해석하고 실제하는 고통을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  더불어, 책 읽는 지성인이 가득한 사회는 정치와 정책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가능한 사회다. 그 사회는 절대로 4대강 같은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많이 알고 배울수록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정치인의 관상에서 그들의 미래를 읽을 수 있다.  그러니 어찌, 괴상한 정책과 이념을 가진 지도자를 선거에서 걸러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나미의 책은 특별한 처방전이 없다. 그래서 싱겁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한번더 짚고 넘어갈 뿐이다.  그러나 읽다보니 한국 사회의 근본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남탓할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나태함과 게으른 속성에 있다.  고독하게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흔한 사회, 자신과 사회를 성찰할 여유가 없이 그저 앞으로만 달려가는 사회는 고장난 정신을 돌볼 여유가 없는 게다. 

 

"조금 아쉬운 점은, 그렇게 어울려 일하고 노느라, 혼자 책 보고 생각할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창조적인 작업, 내적인 성찰은 여러 사람과 함께하기보다는 혼자 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많은 심리학자의 실험으로 확인됐다. 선진국을 따라가느라 허덕인 지금까지의 스트레스를 넘어 지구촌의 선구자가 되려면, 혼자 하는 것도 잘하는 `고독의 힘'을 갖추어야 한다."  297쪽

 

한국 사회속에 잠재돼 있는 `적들'의 정체를 찾아내려면 끝도 없다. 남 탓 하는 것도 한국인의 특성 가운데 하나다.  그 많은 고약한 습성들이 모여 사회를 척박하게 하고, 사람들을 도구와 수단으로 대우하니 그 구성원들은 숨 쉴 여유를 잃은 것 아닐까?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들이 대우받는 사회라는 증거는 지금 유행하는 몸짱 열풍과 성형 중독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비주얼이 아닌 정신적 깊이와 그  내면에 대한 욕심을 추구하는 사회의 도래는 요원한가?  왜 지성과 교양에 대한 욕심은 이렇게도 부족한가?  다채롭고 막강한 한국 사회의 적들과 맞서는 힘을 나는 문화와 지성에서 찾고 싶다.  버나드 쇼와 백범의 선견지명이 증언한다.  내면의 지성과 교양을 키울 때 우린 쉽게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자아를 갖게 된다.  그것이 한국 사회의 적들을 상대하는 확실한 버팀목이다.

 

 

 

 

2013년 9월 20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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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서가
신순옥 지음 / 북바이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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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사를 간다. 결혼을 하고 지금의 집에 임대로 산 시간이 6년이다.  6년은 짧지만 긴 시간인가보다. 무척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집에 살게 된 이후로 난생 처음 서재를 갖게 됐다. 그리고 그 6년간 독서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또 책을 한 두 권 씩 모았다. 1~200백권 남짓하던 책이 그 6년간 1천권을 넘었다. 이사가는 날, 책 때문에 고달파질지 모르겠다. 이삿날이 다가오며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물론 새 집 서재를 꾸미는 일이다.  거실 서재는 내 책과 아이 책으로 거의 도배가 될 것이다. TV와 쇼파, 그리고 사진 액자를 제외하곤 책이 거실을 점령하는걸 꿈꾼다.  서재와 서재방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해선 아내가 전적으로 내 의견을 경청해 줬다.

 

이삿날에는 그간 모은 책들을 좀 버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독서일기를 쓴 이후로 나는 책을 잘 버리지 않았다. 한번 읽은 책은 반드시 서재에 보관했다. 책을 깨끗이 본 것은 아니다. 밑줄을 긋고 페이지들을 접고 메모도 했다.  하지만, 읽은 책이나 집에 들어온 책을 버리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책이 늘었다. 책이 늘수록 아내의 구박도 심해졌다. 결혼 초기엔 도서구입비로 한달 10만원을 넘게 썼더니 아내의 성화가 말이 아니었다. 그걸 5만원으로 줄였고 어떤 날은 책을 몰래 밖에서 구입해 들여 오다, 들통이 난 일도 있었다.  도서구입비를 글쓰기로 충당할 수 있는 지금은 그저 옛 추억이다.  하지만, 내 서재는 그런 사연이 담긴 애틋한 곳이란걸 말하고 싶다.

 

하지만, 아내는 그 누구보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열심히 읽어주는 사람이다. 물론 나는 내 책 읽느라 바쁘다. 삶이란 이렇게 절묘한 것이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아내가 아이 때문에 동화책을 그리 열심히 읽는 모습은 내게 무척 고무적이다. 언젠가 내 서가의 책도 아내가 분명 사랑해 줄 것이란 희망을 품게 한다.  출판평론가로 평생 책과 함께 살다 뇌종양에 걸려 마흔 다섯의 나이에 작고한 故 최성일은 행복한 독서가였다.  그의 아내 신순옥이 최근 남편의 서재에서 고른 책들을 읽고 서른 한 편의 독서일기를 모은 책 <남편의 서가>(북바이북, 2013년)를 펴냈다.  생전 남편이 책에 빠져 지내는 것과 집에 하나씩 늘어나는 책들을 그도 좋게만 보진 않았을 테다. 그런 아내가 남편의 손때가 묻은 책을 읽고 이제 어엿한 저자가 되었으니 남편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신순옥의 서른 한 편 독서일기를 읽다보니 부창부수(夫唱婦隨)란 고사성어가 생각났다. 최성일은 자신의 책에서 잘 밝히진 않았지만, 책을 사랑하고 남편의 일을 이해했던 현명한 아내를 둔 남자였다. 책의 핵심을 꿰뚫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스타일이 최성일의 도서평론이었다면, 아내는 차분하면서도 깊이있게 책과 일상 그리고 인생을 잘 녹여내는 글쓰기를 선보인다.  남편과 사별 후,  그는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에 `남편의 서가'라는 이름으로 독서일기를 연재해 왔다.  남편 못지 않은 필력과 삶에 관한 통찰력은 이 책을 받아든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신순옥의 독서일기에 묻어 있는 슬픔과 고통이 절제된 문장들이 더욱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연재를 하면서 나는 글쓰기가 얼마나 고달프고 힘겨운 것인지 조금 알게 됐다. 그것은 남편이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글을 써야 했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은 일이기도 했다.  환자로서 그는 고된 글을 쓸 게 아니라 휴식을 취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 점은 두고두고 미안하다. 글을 쓰기 위해 남편의 저서와 남편이 다룬 서평 관련 책을 보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작업이었으며, 남편으로 사는 일이기도 했다. "   7쪽,  <남편의 서가> 中 서문,  신순옥

 

아내는 남편과 사별하고서 집안을 차지하고 있던 남편의 책들과 마주한다. 그것은 남편이 남겨준 유산이자 짐이었다. 남편이 평생 귀하게 여긴 책들은 쉽게 내다버릴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하여, 아내는 그 책들을 빼내어 읽기 시작한다. 남편의 유골함을 보러 공원묘지에 들르는 날이 줄어든 순간,  남편이 모으고 읽은 책들을 다시 펴보는 것은 아이들에게 아빠를 다시 만나는 일이고, 아내에겐 이른 이별을 위로받는 일이었다. 그렇게 남편은 죽어서도 서가의 책들을 통해 영원히 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  남편의 밥벌이였던 책과 글쓰기는 이제 아내의 생계가 되고, 아이들에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붙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책이 가진 특별한 역할을 독자들은 여기서 발견한다. 

 

책은 누군가의 영혼과 인생에 개입하는 사물이다.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철저히 혼자가 된다. 책을 읽기에 최적의 장소는 조용하고, 은밀한 곳일수록 좋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고독하지 않다.  홀로 있어 고독한 순간이 책과 만나기에 최적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이와 같다. 장편 소설 <28>의 저자 정유정은 초고를 최단기간에 완성한 후 글이 막히자,  암자에 은거해서야 소설 전체를 다시 쓸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책과 글쓰기는 그 자체가 자신의 영혼을 마주하며 응시하는 일이다.  마주하고 응시할 때에라야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장막을 걷어낼 수 있다. 신순옥은 책읽기와 독서일기를 통해 그 긴 고통의 시간들을 온전히 치유하는 길을 발견해 냈다. 이것은 책과 글쓰기에 관한 그만의 간증이 아니다.

 

독서일기를 본격적으로 쓴 게 6년이다. 하지만, 스무살 어느 계절 이후로 나는 줄곧 책과 멀어진 적이 없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책읽기와 서재에 관한 사치를 꿈꿨다.  근사한 서재를 갖고 그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꿈꿨다. 그것은 나쁘게 말하면 한량으로서의 삶이다. 즉, 일평생 독자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이었다. 산다는 것은 매일 영혼을 조금씩 다치게 하는 일이다.  책을 읽는 사람,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영혼의 자가치유가 가능한 사람이다.  시간이 지나 책읽기와 글쓰기의 방향과 목적이 조금은 달라졌지만 그것을 시작하던 때 먹은 마음가짐은 변함없다.  그리고 이제 온전한 서재를 곧 갖게 된다. 꿈은 완제품이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그 무엇인가 보다.

 

무더운 이 여름에 이사를 가게 된 것은 고역이지만, 새롭게 꾸며질 서재는 나를 설레게 한다. 그 넓고 넓은 공간은 내가 모으고 정성껏 읽은 책들로 또 채워질 것이다. 나는 그 공간에서 책을 읽고 지금처럼 독서일기를 써 나갈 것이다.  그 공간에서 한 시대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서평가 최성일처럼 좋은 서평을 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아내가 신순옥처럼 내 서재의 책들을 하나씩 골라 읽고 어느순간 나보다 더 좋은 독서일기를 쓰는 날을 꿈꾼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서평가의 아내 신순옥이 펴낸 <남편의 서가>를 읽고 나는 지금 독서일기를 쓰고 있질 않는가?  세상의 모든 남편과 아내들이 책과 서재를 통해 삶과 죽음을 초월해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아름답다.   집안에 가족 모두의 영혼과 사연이 담긴 서재를 꾸며보자.  늦지 않았다.

 

 

 

 

 

 

 

2013년 7월 19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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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셜록 홈스처럼 살고 싶다 - 돌직구 표창원의 나의 인생, 나의 공부 이야기 대한민국 실천 지성의 살아 있는 공부이야기 1
표창원 지음 / 다산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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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 이후로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에 대한 인지도가 확 늘었다. 대선 기간 중 일어난 사건과 논쟁 덕분이다. 대선 투표 다음날 그가 벌인 프리허그 이벤트엔 셀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이 행렬을 이뤘다. 이 열풍 한 가운데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다. 말로 정의를 이야기하긴 식은죽 먹기다. 행동으로 그것을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이 세상의 인심이고 법칙이다. 그런데 이 법칙에 역행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나타났던 거다. 바로 한국의 몇 안 되는 프로파일러 범죄 전문 수사관이자 경찰대 교수로 알려진 표창원 박사다. 대선을 즈음해 그에 대한 호칭이 바뀌었다. 인터넷에선 그를 `표창'이라 부른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정의에 대한 신념을 표출하는 돌직구 언행앞에 사람들은 `표창스타일'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과히 스타의 탄생이다.

 

지난 대선 때 그는 소위 국정원녀 댓글 조작사건에 휘말려 들었다. 범죄 의혹을 사고 있는 국정원녀 오피스텔 앞에서, 경찰은 `문 좀 열어주세요'란 뉘앙스를 뽐내며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후 표창원은 왜 경찰은 `경찰상 즉시강제'로 시건 장치를 부수고, 오피스텔에 진입해 범죄 증거물을 수집하지 못했는지 경찰을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에 발표했고 이것은 경찰공무원으로서 부적절한 언행이 될 게 뻔했다. 얼마 후, 그는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판단과 자유인으로서 발언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하며, 경찰대 교수직을 사임했다.

 

표창원의 회고록 <나는 셜록 홈스처럼 살고 싶다>엔 대선 당시의 심경이 프롤로그에 상세히 담겨 있다. 프롤로그의 제목도 "인생 2막, 내 삶에 터진 핵폭탄"이다. 경찰대 사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 날, 그는 밤을 꼬박 지새웠단다. 그 긴 밤 동안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내렸단다. 독자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념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는 ` 40 여 년 동안 살아온 삶의 허물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하는 과정을 겪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한다. 표창원은 어떤 사람일까? 그간 많이 궁금했다. 그가 대선 전 후로 보여준 인상적인 행동들은 감동 그 이상을 불러왔기에 말이다. 간단히 말해, 우린 정의가 종적을 감춘 시대에 불의를 향해 자신의 밥그릇을 던진 `기인'의 탄생을 목격했던 것이다.

 

표창원의 인생이야기인 이 책에는 40여 년 그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직업 군인이었던 엄한 아버지, 생활력이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반항기와 싸움꾼으로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이의 교육, 가난,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연락을 끊은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린 시절 자주 다퉜지만,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교육열 만큼은 남보다 뒤진적이 없었다. 표창원은 학창시절을 보내며 특유의 반골 기질을 드러낸다.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와 부잣집 아이들 사이에서 공부하며, 자존심과 반항심으로 학업에 매진해 좋은 성적을 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된 무도 수련은 인생에서 정의와 약한 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 원동력이 됐다고 회상한다.

 

" 무엇보다도, 정의에 대한 무한한 열망, 나보다 약하고 힘든 이들을 돕고 지키고 싶다는 삶의 방향을 몸에 깊숙이 각인하게 된 것도 무도 수련 덕분이었다.특히, 이론과 방법을 배운 뒤 실제로 행해보고, 잘되는 것은 반복하며 익히고, 잘 안 되거나 실패한 동작, 기술은 궁리하고 탐구해서 개선책을 찾아내는 `공부하는 태도'가 습관화된 것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성공비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2쪽, <나는 셜록 홈스처럼 살고 싶다>, 표창원

 

회고록은 주관적인 기록이다. 하여, 과거의 삶을 미화하고 싶은 유혹에 저자가 굴복하기 쉽다. 하지만, 표창원의 글에선 정의를 가르치는 교사다운 결벽성이 엿보인다. 잘못된 것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의 단도직입적 태도는 오히려 담백하고 진실하다. 학창시절부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선생님의 몽둥이도, 학교의 규제도, 처벌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했던' 반골 기질이 자라기 시작했다. 훗날 그것은 경찰 조직에 들어가서도 변치 않았다. 그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이의를 제기했고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요구하며 거기에 저항했다. 그런 반골 기질은 물론 조직 사회에서 그를 이단아로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온 몸으로 항거하고 관철하는 태도는 표창원의 천성였음을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경찰 조직 내에서 준비된 승진과 안락한 삶을 버리고, 선진국의 범죄 수사 기법을 공부하기 위해 먼 이국 땅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장면이다. 그는 수 년간 경찰 조직을 떠나있으면 인맥과 승진길이 막힐 수 있다는 선배 경찰들의 조언 같은 건 깡그리 무시해 버린다. 승승장구한 인생보다는 배움에 대한 끝없는 열망 때문이었다. 유학시절 초반 언어와 문화적 편견이란 문제에 맞서 그 모두를 잘 극복해 낸다. 2년간의 국비유학과 다시 2년간의 자비를 들인 박사학위 기간을 합쳐 총 4년, 그는 선진 경찰의 첨단 수사기법을 습득한다. 박사학위 과정에서 마이클 러쉬 지도교수는 논문데이터 구축에 필요한 인터뷰를 위해 수십개의 영국 지역 경찰서 면담 스케줄을 잡아주며 도움을 준다. 그가 훗날 한국 최고의 1세대 프로파일러가 된 것은 스승과 자신의 이러한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이제 내 나이 47세, 인생의 반 정도를 산 것 같다. 이제 나머지 반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를 할 때다.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가능한 많은 것을 배우고, 새로운 도전에 몸을 내던지고, 문제와 장애와 난관을 피하지 않고 정면 대응해나갈 것이다. 여진히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고 실패도 겪고 있다. 하지만 `삶'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살 가치가 있다. " 351쪽

 

표창원은 일평생 무도를 수련한 것처럼 정의로운 삶을 꿈꿨다. 하지만, 표창원은 또 흠결없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온 반평생을 회고하며, 그는 숱하게 부끄러웠던 기억들을 되짚는다. 그는 잘못을 고백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다. 잘못에 대해선 그 누가 되었든 지위고하를 막논하고 따져 묻고 이의를 제기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삶, 그게 바로 표창 스타일이다. 하여, 나는 최근 논문 표절 논란에 대한 그의 정직한 사과와 해명을 신뢰한다. 지난 대선 즈음 그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던 경찰 조직을 떠났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국비유학생에 뽑혔다. 언어와 문화 차이를 극복하며 4년간 선진 경찰 제도를 연구해 박사가 됐다. 그 후, 그는 경찰대에서 경찰 후배들을 가르쳤다. 경찰 일선과 교육 현장을 두루 거친 그는 한국 최고의 엘리트 경찰 요원이다. 그런 그가 왜 대선 직전 명예로운 직위를 초개와 같이 버렸을까?

 

미국의 대표적 보수신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한국에서는 첩보기관이 정보 유출자"라고 비꼬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대선 댓글 조작 사건의 중심에 있는 한국의 국정원이 조직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뜬금없이 연관도 없는 노무현 정부시절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것을 놓고 한 말이다. 그러면서 신문은 "정보기관은 통상 비밀을 폭로하기 보다는 지키는 편이지만 한국의 국가정보원은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비밀 대화록을 공개하면서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직을 살려보겠다고 국제 망신을 자초한 셈이다. 그러니까, 표창원은 바로 몇 달 후 한갓 국제망신이 될 사건에 먼저 이의를 제기한 죄로 자신의 밥그릇을 잃고 만 것이다.

 

하버드 대학 교수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 때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국과 인연이 없는 센델은 정의를 가르치고자 처음으로 내한 하기까지 했다. 이같은 기현상은 한국 사람들이 정의에 굶주려 있다는 걸 반증한다. 표창원은 옳은 일을 하고도 자신이 사랑했던 경찰 조직을 떠났고, 최고의 범죄 수사 전문가로서 후학들을 가르칠 기회를 잃었다. 한국 경찰 조직에 큰 손실이라 생각한다. 그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들고, 국내외 여러곳을 방문해 강연회를 열었다. 한국에선 마이클 센델이 아니라 표창원이야말로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한국 사회에서 죽어가는 정의를 구하려다 모든 걸 잃었으니 그만한 적격자가 어디 있겠는가?

 

정의로 가는 길은 안전하고 편안하지 않다. 자신의 직업과 생명까지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쉽게 정의를 부르짖을 수 없다. 미국 정보기관의 통화감찰기록과 감시프로그램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처럼 공공의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노든은 미국정부에겐 간첩이겠지만 사찰 받은 피해자와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 사실을 몰랐던 타국 정부에겐 은인이자 영웅이다. 그 어디에 관점을 두느냐에 따라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하지만, 정의는 상대적이지 않다. 그것이 바로 정의가 가진 힘이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패악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책은 `표창스타일'이 완성되는 과정을 담은 진솔한 인생회고록이자, 우리 시대 정의의 환생을 목격하고 추적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네비게이터다. 불의를 향해 자신의 밥그릇을 던진 표창원 교수에게 이제 우리가 새롭고 튼튼한 밥그릇을 만들어줘야 하진 않을까?

 

 

 

 

 


2013년 7월 15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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