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편의 서가
신순옥 지음 / 북바이북 / 2013년 6월
평점 :
곧 이사를 간다. 결혼을 하고 지금의 집에 임대로 산 시간이 6년이다. 6년은 짧지만 긴 시간인가보다. 무척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집에 살게 된 이후로 난생 처음 서재를 갖게 됐다. 그리고 그 6년간 독서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또 책을 한 두 권 씩 모았다. 1~200백권 남짓하던 책이 그 6년간 1천권을 넘었다. 이사가는 날, 책 때문에 고달파질지 모르겠다. 이삿날이 다가오며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물론 새 집 서재를 꾸미는 일이다. 거실 서재는 내 책과 아이 책으로 거의 도배가 될 것이다. TV와 쇼파, 그리고 사진 액자를 제외하곤 책이 거실을 점령하는걸 꿈꾼다. 서재와 서재방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해선 아내가 전적으로 내 의견을 경청해 줬다.
이삿날에는 그간 모은 책들을 좀 버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독서일기를 쓴 이후로 나는 책을 잘 버리지 않았다. 한번 읽은 책은 반드시 서재에 보관했다. 책을 깨끗이 본 것은 아니다. 밑줄을 긋고 페이지들을 접고 메모도 했다. 하지만, 읽은 책이나 집에 들어온 책을 버리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책이 늘었다. 책이 늘수록 아내의 구박도 심해졌다. 결혼 초기엔 도서구입비로 한달 10만원을 넘게 썼더니 아내의 성화가 말이 아니었다. 그걸 5만원으로 줄였고 어떤 날은 책을 몰래 밖에서 구입해 들여 오다, 들통이 난 일도 있었다. 도서구입비를 글쓰기로 충당할 수 있는 지금은 그저 옛 추억이다. 하지만, 내 서재는 그런 사연이 담긴 애틋한 곳이란걸 말하고 싶다.
하지만, 아내는 그 누구보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열심히 읽어주는 사람이다. 물론 나는 내 책 읽느라 바쁘다. 삶이란 이렇게 절묘한 것이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아내가 아이 때문에 동화책을 그리 열심히 읽는 모습은 내게 무척 고무적이다. 언젠가 내 서가의 책도 아내가 분명 사랑해 줄 것이란 희망을 품게 한다. 출판평론가로 평생 책과 함께 살다 뇌종양에 걸려 마흔 다섯의 나이에 작고한 故 최성일은 행복한 독서가였다. 그의 아내 신순옥이 최근 남편의 서재에서 고른 책들을 읽고 서른 한 편의 독서일기를 모은 책 <남편의 서가>(북바이북, 2013년)를 펴냈다. 생전 남편이 책에 빠져 지내는 것과 집에 하나씩 늘어나는 책들을 그도 좋게만 보진 않았을 테다. 그런 아내가 남편의 손때가 묻은 책을 읽고 이제 어엿한 저자가 되었으니 남편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신순옥의 서른 한 편 독서일기를 읽다보니 부창부수(夫唱婦隨)란 고사성어가 생각났다. 최성일은 자신의 책에서 잘 밝히진 않았지만, 책을 사랑하고 남편의 일을 이해했던 현명한 아내를 둔 남자였다. 책의 핵심을 꿰뚫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스타일이 최성일의 도서평론이었다면, 아내는 차분하면서도 깊이있게 책과 일상 그리고 인생을 잘 녹여내는 글쓰기를 선보인다. 남편과 사별 후, 그는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에 `남편의 서가'라는 이름으로 독서일기를 연재해 왔다. 남편 못지 않은 필력과 삶에 관한 통찰력은 이 책을 받아든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신순옥의 독서일기에 묻어 있는 슬픔과 고통이 절제된 문장들이 더욱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연재를 하면서 나는 글쓰기가 얼마나 고달프고 힘겨운 것인지 조금 알게 됐다. 그것은 남편이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글을 써야 했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은 일이기도 했다. 환자로서 그는 고된 글을 쓸 게 아니라 휴식을 취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 점은 두고두고 미안하다. 글을 쓰기 위해 남편의 저서와 남편이 다룬 서평 관련 책을 보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작업이었으며, 남편으로 사는 일이기도 했다. " 7쪽, <남편의 서가> 中 서문, 신순옥
아내는 남편과 사별하고서 집안을 차지하고 있던 남편의 책들과 마주한다. 그것은 남편이 남겨준 유산이자 짐이었다. 남편이 평생 귀하게 여긴 책들은 쉽게 내다버릴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하여, 아내는 그 책들을 빼내어 읽기 시작한다. 남편의 유골함을 보러 공원묘지에 들르는 날이 줄어든 순간, 남편이 모으고 읽은 책들을 다시 펴보는 것은 아이들에게 아빠를 다시 만나는 일이고, 아내에겐 이른 이별을 위로받는 일이었다. 그렇게 남편은 죽어서도 서가의 책들을 통해 영원히 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 남편의 밥벌이였던 책과 글쓰기는 이제 아내의 생계가 되고, 아이들에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붙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책이 가진 특별한 역할을 독자들은 여기서 발견한다.
책은 누군가의 영혼과 인생에 개입하는 사물이다.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철저히 혼자가 된다. 책을 읽기에 최적의 장소는 조용하고, 은밀한 곳일수록 좋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고독하지 않다. 홀로 있어 고독한 순간이 책과 만나기에 최적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이와 같다. 장편 소설 <28>의 저자 정유정은 초고를 최단기간에 완성한 후 글이 막히자, 암자에 은거해서야 소설 전체를 다시 쓸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책과 글쓰기는 그 자체가 자신의 영혼을 마주하며 응시하는 일이다. 마주하고 응시할 때에라야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장막을 걷어낼 수 있다. 신순옥은 책읽기와 독서일기를 통해 그 긴 고통의 시간들을 온전히 치유하는 길을 발견해 냈다. 이것은 책과 글쓰기에 관한 그만의 간증이 아니다.
독서일기를 본격적으로 쓴 게 6년이다. 하지만, 스무살 어느 계절 이후로 나는 줄곧 책과 멀어진 적이 없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책읽기와 서재에 관한 사치를 꿈꿨다. 근사한 서재를 갖고 그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꿈꿨다. 그것은 나쁘게 말하면 한량으로서의 삶이다. 즉, 일평생 독자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이었다. 산다는 것은 매일 영혼을 조금씩 다치게 하는 일이다. 책을 읽는 사람,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영혼의 자가치유가 가능한 사람이다. 시간이 지나 책읽기와 글쓰기의 방향과 목적이 조금은 달라졌지만 그것을 시작하던 때 먹은 마음가짐은 변함없다. 그리고 이제 온전한 서재를 곧 갖게 된다. 꿈은 완제품이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그 무엇인가 보다.
무더운 이 여름에 이사를 가게 된 것은 고역이지만, 새롭게 꾸며질 서재는 나를 설레게 한다. 그 넓고 넓은 공간은 내가 모으고 정성껏 읽은 책들로 또 채워질 것이다. 나는 그 공간에서 책을 읽고 지금처럼 독서일기를 써 나갈 것이다. 그 공간에서 한 시대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서평가 최성일처럼 좋은 서평을 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아내가 신순옥처럼 내 서재의 책들을 하나씩 골라 읽고 어느순간 나보다 더 좋은 독서일기를 쓰는 날을 꿈꾼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서평가의 아내 신순옥이 펴낸 <남편의 서가>를 읽고 나는 지금 독서일기를 쓰고 있질 않는가? 세상의 모든 남편과 아내들이 책과 서재를 통해 삶과 죽음을 초월해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아름답다. 집안에 가족 모두의 영혼과 사연이 담긴 서재를 꾸며보자. 늦지 않았다.

2013년 7월 19일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