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와 그 적들 - 콤플렉스 덩어리 한국 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고 사는 법
이나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최근 국제적으로 황당한 뉴스가 두가지 있었다.  첫째는 후쿠시마에서 태평양으로 단 한 방울의 방사능 오염수도 흘러나오지 않는다고 단언한 일본 아베 총리의 지원 연설 아래, 일본이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지로 최종 선정 됐다는 뉴스였다.  물론 이웃 나라의 경사에 축하를 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방사능 완전 차단 발언은 문제 해결의 주체인 도쿄 전력도 고개를 갸웃하는 거짓말이란게 대체적 인식이다.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겠다고 국가총리가 사실 관계를 호도하면 안 되는것 아닌가?

 

두번째 황당한 뉴스는 8년째 OECD 자살률 1위를 지켜낸 한국 사회에 대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청소년(10~24세) 자살 증가률 2위(OECD 31개국 中)를 기록하며 10년간 57%나 상승한 점이다.  통계의 오류나 허구란 말도 있지만, 8년째 1위 수성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이, 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살이란 극단으로 몰고가는 것일까?  성인, 청소년 할것 없이 모두가 죽지 못해 사는 나라는 그 자체가 병리적 분석이 요망되는 사회다.  한국 사회의 특정한 그 누가 아닌, 한국 사회 자체가 심리학적 치유가 필요한 시점이다.

 

분석심리학의 권위자이자 융 심리학을 전공한 정신과 전문의 이나미 씨의 신작 <한국 사회와 그 적들>(추수밭,2013)은 이런 시점에 한국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문제를 살펴보기에 적합한 책이다. 부제를 `콤플렉스 덩어리 한국 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고 사는 법'으로 달았다.  콤플렉스 예방을 위한 방법론을 기대하는 부제지만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에 관한 짧은 칼럼들을 모아논 책이다.  특별한 처방전이 아닌 분석심리학자의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비평하는 수준에 머무른 책이라 약간 실망했다.  뭔가 심도있게 파고든 책이란 착각은 아마도 제목이 차용하고 있는 영국 철학자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란 저서의 역사적 무게감 때문일 게다.

 

칼 포퍼는 이 책을 히틀러가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던 1943년에 집필하여 1945년 출판한다. 칼 포퍼는 전체주의를 열린 사회의 대척점에 두고, 급진적 변혁과 폭력 혁명을 부정한다.  하여, 인류에게 교조주의적 가르침을 통해 사회변혁을 시도했던 마르크스, 헤겔, 플라톤을 역사적으로 `닫힌 사회'로 이끈 열린 사회의 적들로 규정한다.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한 사회 개선을 주장한 `점진적 사회 공학'을 내세운 이 책의 반향은 평화와 민주적 원칙에 입각했기에 암울한 시대에 합리론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물론 주간지에 연재한 가벼운 칼럼들을 묶어낸 이나미의 책과는 제목의 유사성 외에는 특별히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저자가 붙인 `한국 사회와 그 적들'은 꽤 단도직입적이라 모종의 호기심을 불러온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총체적 문제점은 내부의 적에게서 발원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적들의 정체를 꽤 다양한 방면에서 분석하고, 해설한다.   이나미는 정신분석과 분석심리학을 총동원해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쉬운 문체와 오랜 상담경력을 통해 알기 쉽게 풀어낸다.  하지만, 이 책이 특별히 신선한 느낌이 들지 않는건 왜 일까?   우리 스스로도 알고 있는 콤플렉스와 한국인의 특성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구태의연한 특성이 한국 사회를 정의하고 이 사회의 흐름을 만들어 왔다.

 

성형과 명품 중독에 빠진 여인들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책임성, 매카시즘을 연상케 하는 이데올로기의 과잉, 실속이 아닌 허세에 빠진 습성,  술과 유흥에 매몰된 직장문화, 책을 멀리하는 국민 정서 등 칼럼의 소재가 될만한 문제점들이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정치인들의 전횡이다. 그들이 권력을 통해 미치는 영향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4대강 하나만 보더라도 단군이래 강 바닥이 뒤집혀지는 참극이 벌어지고,  여름철만 되면 녹차라떼 수돗물을 연례행사처럼 마시고 있다.  누가 정치인에게 5천년을 유유히 흐른 강을 뒤집을 권리를 주었나?  상식을 가진 그 누가보더라도 4대강 공사의 결론은 실패이고 막장이었다. 정권이 바뀌고서야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썪는다는 그 자연법칙을 깨달은 능청맞은 바보들이 꽤 많다. 그리고 이제서야 반성문을 쓰고 감사를 한다, 고발을 한다 야단법석이다.

 

" 하지만, 예수, 부처 같은 성인은 아니더라도, 만델라나 간디처럼 용서 못 할 적들도 포용하고 못 배우고 못사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겸손한 지도자도 역사에 존재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큰 그림으로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는 대신, 정치를 사적인 이익 창출의 도구로 생각해 자기에게 잘한 이들에겐 상을 주고, 자신에게 반대한 이들은 못살게 구는 것을 옳다고 밀어붙이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사악한 리더를 걸러 내는 것은 각 구성원들의 책임이다. `그래 봤자...'라며 조직의 명운에 냉소를 보내고 무관심한 이가 많은 집단일수록 부도덕한 리더로 인해 몰락할 가능성이 높다."  115쪽, <한국 사회와 그 적들>, 이나미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말하길 정치가 실현해야 할 궁극의 목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했다.  모든 인간이 적당히 일하고, 적당한 여가를 갖게 되는 사회, 그것이 바료 쇼가 희망한 정치의 목적이다.  쇼는 여가를 통해 지성을 계발하고, 미적 취향을 즐기며, 시와 음악과 그림과 책을 감상하며 건강한 문화적 삶을 소비할 줄 아는 시민을 양산해 내야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쇼는 결국 지성인과 교양인이 많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그런 사회가 자살률 1위를 기록할 수 있을까?  풍부한 감성이 넘쳐나고 작은 것들에 감동하는 사회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된다.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말을 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란 명구가 <백범일지>에 나온다.  그는 경제적 부강이나 군사적 강국이 아닌 문화 대국을 소망한다고 고백했다.

 

버나드 쇼나 백범 선생은 왜 문화를 강조한 것인가?  문화와 예술은 인간이 겪어내는 심리적 문제들에 대한 자가 치유 기능을 갖기 마련이다.  교양인은 자신과 세계의 운명을 해석하고 실제하는 고통을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  더불어, 책 읽는 지성인이 가득한 사회는 정치와 정책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가능한 사회다. 그 사회는 절대로 4대강 같은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많이 알고 배울수록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정치인의 관상에서 그들의 미래를 읽을 수 있다.  그러니 어찌, 괴상한 정책과 이념을 가진 지도자를 선거에서 걸러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나미의 책은 특별한 처방전이 없다. 그래서 싱겁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한번더 짚고 넘어갈 뿐이다.  그러나 읽다보니 한국 사회의 근본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남탓할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나태함과 게으른 속성에 있다.  고독하게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흔한 사회, 자신과 사회를 성찰할 여유가 없이 그저 앞으로만 달려가는 사회는 고장난 정신을 돌볼 여유가 없는 게다. 

 

"조금 아쉬운 점은, 그렇게 어울려 일하고 노느라, 혼자 책 보고 생각할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창조적인 작업, 내적인 성찰은 여러 사람과 함께하기보다는 혼자 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많은 심리학자의 실험으로 확인됐다. 선진국을 따라가느라 허덕인 지금까지의 스트레스를 넘어 지구촌의 선구자가 되려면, 혼자 하는 것도 잘하는 `고독의 힘'을 갖추어야 한다."  297쪽

 

한국 사회속에 잠재돼 있는 `적들'의 정체를 찾아내려면 끝도 없다. 남 탓 하는 것도 한국인의 특성 가운데 하나다.  그 많은 고약한 습성들이 모여 사회를 척박하게 하고, 사람들을 도구와 수단으로 대우하니 그 구성원들은 숨 쉴 여유를 잃은 것 아닐까?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들이 대우받는 사회라는 증거는 지금 유행하는 몸짱 열풍과 성형 중독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비주얼이 아닌 정신적 깊이와 그  내면에 대한 욕심을 추구하는 사회의 도래는 요원한가?  왜 지성과 교양에 대한 욕심은 이렇게도 부족한가?  다채롭고 막강한 한국 사회의 적들과 맞서는 힘을 나는 문화와 지성에서 찾고 싶다.  버나드 쇼와 백범의 선견지명이 증언한다.  내면의 지성과 교양을 키울 때 우린 쉽게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자아를 갖게 된다.  그것이 한국 사회의 적들을 상대하는 확실한 버팀목이다.

 

 

 

 

2013년 9월 20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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