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 안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고 있다는 말. 나는 스피노자가 그 장대한(적어도 나에게는 장대하게 느껴졌던) 1부의 마지막을 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정리로 마무리 지은 것이 좀 감동적이었다. 이걸 조금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내가 <다뉴브>에서 묘하게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구절, ”나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세상의 연극에 출연하는 모든 단역 엑스트라처럼 내게도 어떤 중심역할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 직접적으로 떠맡은 정확한 책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산토끼 앞에서 부끄러운 감정이 든 것만은 확실하다에서 받았던 슬픈 위안과 뒤따르는 혼란스러운 책임감과도 비슷하다.

 

나는 <다뉴브>의 저 구절을 어제, 416일에도 떠올렸었는데 가끔씩 인간 따위, 혹은 나 따위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실체로서의 나는 양태로서 소멸해도 우주의 작은 진공 하나 만들지 않는존재라는 사실이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줄 때가 있는데- 그게 세상에서의 나일 때나 누군가에게 있어서 나일 때나 어떤 조직에서의 나일 때나 단 한 번도 존재의 미미함에 대해 서운해 본 적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본 적도 없는데- 나는 이런 위안이 매우 비겁한 거라고 생각한다. 존재감에 대한 욕심이나 인정욕 같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를 잘 아는 오랜 친구들, 심지어는 가족들까지 나를 뭔가 굉장히 초연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대하는데, 실상은 존재감의 무게만큼 얻게 되는 책임감이 두려워서일 뿐이다. 내가 무언가의 원인이 되고 싶지도 않고 무언가를 산출하고 싶지도 않고 그게 결정적이고 중요한 어떤 것일수록 아무런 관여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세상의 연극이라는 비유를 끌어올 필요도 없이, 나는 유치원 때부터도 학예회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으면 어떤 꾀병을 부려서라도 단역 엑스트라를 맡고야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사회 구조를 만들며 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필요 없는 일이라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동시에 나는 권력자도 아니고 정책결정권자도 아니고 어떤 사회적 조직에 속해있는 사람도 아닌 그냥 소시민이라, 나는 세상의 연극에 출연하는 단역 엑스트라이며 내게 어떤 중심역할이 있는 게 아니라서,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책임이 있다는 것에 너무 괴롭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어떤 책임을 어떻게 지고 어떻게 응답해야하는지, 그 적정선은 어디인지 혼란스러워서 안개 속을 질척질척 헤매는 기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보내고, 서명을 하고, 실질적 보탬이 될 수 있는 어떤 굿즈나 책을 사고, 내 주변 타인에게 이타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혹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피해는 적어도 주지 않기 위해 정신 차리고 조심하며 사는 것? 투표를 열심히 하고 내 자리에서 공부를 하는 것?

 

가끔은 내가 뭐라고, 나는 그냥 이 세상에 먼지 같은 존재인데 세상의 중심인 것 마냥 어떤 일에 책임감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느냐고, 오만이라고, 너는 단역 엑스트라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그 엑스트라 역할로 쉽게 도망치곤 한다. 나 하나 여기서 동선 잠깐 틀려도 연극을 망칠 일은 없으니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서 어? 나 어제보다 율동을 잘 하네? 어제보다 다른 사람들 대사가 잘 들리네? 이런 걸로 혼자 소소하게 재밌어하며 사는 게 나에게는 세상의 연극을 즐기는 최고의 방식이자 행복이고 평안이니까. 하지만 어떤 비극적인 현실을 마주할 때면 내게 "어떤 중심역할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 직접적으로 떠맡은 정확한 책임도 없"다는 사실이 침대같이 폭신한 유혹적인 위안인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도 가시지 않는 두통처럼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괴로움이 된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라고 1부의 막을 내릴 때, 마음 놓고 무대 뒤에서 놀고 있다가 연출감독에게 너희들 중 이 연극의 완성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역할을 하나도 없다(그러니 정신차려라)“라는 말을 듣고 뜨끔해진 아이처럼, 어제까지는 별 생각 없이 무대 위에서 까불까불 놀았는데 갑자기 나의 팔 동작, 나의 표정 하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진 아이처럼, 마치 이런 이야기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일기장을 열고 저 문장을 조심조심 옮겨 적었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래서 정말 무겁고 무서운 말. 도망치지 말아야 하는 말.  


 

2.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것 순서로 좌측에서부터 죽 나열을 한다면 초월이라는 것은 당연히 가장 오른쪽에 위치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가장 지상에서 붕 떠있고, 평범하고 기본적인 것 너머의 어떤 것을 가리킬 것만 같은데 완전히 허를 찔렸다. 초월이 기본적인 것을 초월해서 기본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초월이었다니, 이거야말로 상상 초월()이다. 아니 보통 초월이라고 하면 땅 위의 하늘을 생각하지 땅 아래 더 깊은 땅을 생각하지는 않잖아. 칸트의 transzendental을 모르지 않았으면서 강의에서 초월의 뜻을 들었을 때 놀랐던(?) 것은 나 역시 칸트 연구자들 때문이다. 칸트 철학은 꽤 오래전 선험적 원리라고 번역된 버전으로 접한 게 전부라서 처음에 초월론적이라고 들었을 때 선뜻 이어지지가 않았던 것. 그래, 초월론적이라고 이해하니까 훨씬 더 명료하고 명확해진다. 칸트에 대해 오해했던 부분이 풀림 (그러니까 칸트도 스피노자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을 풀었으면 좋겠.......)

 

- 초월적 언어란 중세철학에서 매우 자주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라는 책 이래로 서양철학에서 제일 중요한 파트 중에 하나인 범주론. 범주론은, 기본적인 개념, 우리가 사고하고 대화할 때 기본이 되는 개념을 말한다. 그러니까 범주를 다른 말로 하면 근간이 되는 개념/ 기초적인 개념.

- 그런데 이 중세철학이나 신학에서 쓰이는 초월적 언어는 기본적인 개념으로서의 범주보다 더 일반적이고 더 기본적인 용어들을 말한다. 범주를 초월하는. 이를테면 존재자, 실재, 어떤 것, 일자, . 이 얼마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들인가. 존재자만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니까.

- 즉 초월범주란 범주를 넘어서 범주보다 더 일반적인 것. 일반적인 범주를 초월해서 더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것. (굉장히 아이러니하기도 한 재밌는 작명이다ㅋㅋ 일반적인 걸 초월해서 독특해지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걸 일반적인 degree를 초월해서 더더 일반적인 것이 되다니...)

 

 

3. “시간과 공간은 객관적이고 자연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는 말. 지금의 나로서는 인식의 근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우리 내부에서 찾으라는, 가능성을 내부에서 찾자는 칸트의 철학에 반 정도만 공감할 수 있지만, 그래도 저 말에는 공감이 갔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는 말. 시간과 공간의 자리에 다른 많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겠다. 칸트가 말하는 감성즉 직관과 스피노자가 말하는 직관은 전혀 다른 것이라지만, 그리고 나는 속성에 대한 객관적 해석론을 주관적 해석론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 스피노자와 칸트의 비슷한 점보다는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시간과 공간의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임의의형식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스피노자도 저 말에 동의하지 않을까.

 

- 칸트가 transzendental이라고 말했을 때, 그 가능성의 조건을 칸트는 우리의 주관, 우리 주관 안에 내재해있는 선험적인 인식의 틀, 경험적인 틀에서 찾았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역시 객관적이고 자연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범주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사물을 사유하고 추론하고 인식하기 위한 제일 기본적인 개념들도 우리의 주관에 내재해있는 인식의 틀이라는 이야기다. 이게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 , 사유 인식의 존재의 근거를 우리 주관 외부에서 찾지 않고 우리 주관 내부에 내재해있다고 보고, 인식의 근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우리 내부에서 찾자고 하는 것이 바로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 초월론적 철학.

- transzendent 철학은 외부에서 객관적인 세계에서 근거를 찾는 것(가령 신이라거나) transzendental 철학은 내부에서 찾는 것. 가능성을 내부에서 찾는 것.

 

4. 명제에 숨어있는 공리, “무는 특성들을 갖지 않는다

 

- 이 명제 다음에 나오는 논증은 이러한 자명성을 부여하는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우리가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1부 정리9에서 다루었던 명제다. 각각의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이나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이러한 명제 자체에는 숨은 공리가 있다. 그것은 무는 특성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서부터 가장 완전한 존재자또는 절대적인 존재자에 이르기까지 실재성이나 완전성의 정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5. 그렇게 (불구스들을 향해) 차이점을 부르짖었던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가, 스피노자의 철학 안에서 결국은 같은 뜻의 말이 되는 것. 나는 이런 게 너무 멋지다고 생각한다.

 

- 1부 정리35 우리가 신의 권능potestas 안에 존재한다고[신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때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능력이라는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스피노자가 여기서 이 능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집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능력이라는 말은 실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좀 더 잘 할 수도 있고 좀 덜 잘 할 수도 있는 것인데, 1부 정리35에서 스피노자는 (신의) 포테스타스는 그렇게 실현되고 말고 덜 되고의 여지가 없이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라며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 즉 역량으로 그 뜻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이해하면 그건 필연적인 역량으로서 포텐시아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 그러니까 원래 있던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스피노자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이라고, 포텐시아라고 의미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서 보면 포테스타스라는 말과 포텐시아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이나 불구스들 같은 경우에는 자유의지에 따르는 능력하고 이것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에 따라 실행되고 실행되지 않는 능력의 여지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른 능력,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능,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둘 다 필연적인 능력으로서의 포텐시아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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