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정리8을 정리해보면,

- 독특한 실재들(=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양태들)의 관념들

이 두 가지가 대응관계다. 여기서 공통된 것은 독특한 실재인데, 이것은 어떤 인상을 주냐면, 형상적 본질은 독특한 실재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인데,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무관하게 양태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것.

 

* 정리8의 따름정리

1)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

-> 사물이 갖고 있는 현상적 본질

2)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 사물이 갖고 있는 현행적 본질

- 지속 개념은 3부의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 정의2와 연관 지어 보면 실존하는 사물이 있어야 코나투스가 존재하고 실존하는 사물이 없으면 코나투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할 때만 함께 존재하는 현행적 본질이다. 3부 정리8을 보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함축한다라고 하는데, <<<코나투스의 시간은 무한정하다= 그 사물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 그럼 코나투스의 시간은 지속이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실재가 끝나기는 끝날 것인데, 언제 끝날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

 

- 1부 정의8에서 영원을 다뤘고 2부 정의5에서는 지속을 다루고 있다(”지속은 무한정한 실존의 연속이다“)

- 5부 정리21에서는 정신은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이 아니라면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고 과거 실재들을 회상할 수도 없다라며, 정신이 상상/기억/회상을 하는 건 신체의 지속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정리22에서는 하지만 신 안에는 영원의 관점에서 이 또는 저 인간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리21지속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신체의 본질이고, 정리22영원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신체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현행적: 지속. 신체 / 형상적: 영원. 신의 속성 안

- 5부 정리21, 22를 연결해서 생각하면, 현행적 본질은 지속의 차원에서 규정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면 형상적 본질은 영원의 차원에서 규정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실재는 지속의 차원에서는 현행적 본질을 갖는데 영원의 차원에서는 형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들 각자가 다 영원의 차원에서 (지속의 차원에서 갖고 있는 코나투스와는 또 다른)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형상적 본질은 현행적 본질을 포괄하는 것 아닌가? 지속도 영원에 포괄되는 것 아닌가?

- 또한 이렇게 되면, 플라톤이 감각적 세계와 형상적 세계/이상적 세계 두 개를 구별했듯이 스피노자도 지속의 차원과 영원의 차원, 현행적 본질의 차원과 형상적 본질의 차원 이렇게 두 개의 세계로 구별하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플라톤주의가 되어버리는, 플라톤주의적인 세계상으로 가게 되는 것인데, 사실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스피노자 철학이랑 잘 맞지 않는다. 1부 정리17의 주석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 플라톤주의 철학과 스피노자 철학

- 여기서 보면 창조적 지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니까, 신이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 -> 곧 창조, 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을 지각하거나 식별하거나 발견하는 것,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지성은 본성상 사물이 먼저이고 우리의 지성이 그 다음에 오거나, 혹은 동시에 온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적수들에 따르면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니까, , 뭔가를 인식한다는 것=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 지성이며,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플라톤주의적인 신학이다.

- 이것과는 약간 다른 형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앞에서는 신의 지성을 창조적 지성이라고 했는데, 그와 다르게 신의 의지를 지성하고 구별하는 경우다. 그때는 신의 지성이 인식하는 것을 ideal type, 원형으로서 이해한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이데아로서의 원형이 있고, 신의 지성이 그걸 인식하고 그것을 의지를 통해 창조한다. ideal type으로서의 원형들, 이데아들은 다 영원한 것이다. <- 이것 역시 플라톤적인 생각이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런 생각들을 전부 인정하지 않는다.

 

-스피노자 초기 저작 중 하나인 <형이상학적 사유>에 나오는 구별법을 염두에 두는 것도 필요하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스피노자가 생전에 자기 이름으로 출판한 유일한 책이자 유럽철학계에서 아주 큰 명성을 얻은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 일종의 부록으로 덧붙여진 저작인데, 스콜라 철학에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 책이다. 스피노자 자신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기보다 당대의 대학에서 가르치던 스콜라철학 용어들을 정리해서 그 개념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형이상학으로 부르는 것은 스콜라철학을 말한다.

- 12. 형상적 본질은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실재가 현행적으로 실존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데, 모든 실재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들의 본질들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한다

-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가리킨다. 이것은 신이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창조와 독립해서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하는, 17세기 철학에서 영원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창조된 것이라는 것은 영원성을 지니지 않은 지속의 차원의 존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형상적 본질은이 양자와 다르다고 주장. 왜냐하면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티카> 1부 정리25에 보면 신적 본질에만 의존한다는 뜻에 대해 스피노자는 정확히 이렇게 말하다. 신은 실재들의 실존의 작용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의 작용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본질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원인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신이 생산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실존뿐만 아니라 본질까지도 신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 이런 것들만 봐도 플라톤주의는 스피노자 철학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정리17의 주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1부 정리33의 주석이나 정리31의 주석만 봐도 스피노자가 여러 대목에서 플라톤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주의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는 것은 스피노자 철학과 맞지 않는다.

- 플라톤주의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신과 무관한 영원성의 세계를 상정하게 되고, 이것은 또 뭔가 초월적인 세계를 상정하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초기저작부터 계속 이런 초월성을 비판해왔기 때문에 플라톤주의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기에는 뭔가 걸리는 것들이 많다.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정신하고 잘 맞지 않는다.

 

-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2부 정리8, 5부 정리21, 22에서, 스피노자가 영원성과 지속을 상당히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고 2부 정리8을 보면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을 아주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다. 이게 정리8이 매우 troublesome한 정리라고 말했던 이유다. 스피노자 철학하고 플라톤주의는 뭔가 잘 맞지 않는데, 어떤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플라톤주의를 연상시키는 이런 이원론적인 모습들이 군데군데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영원과 지속,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 본질과 실존, 이런 식으로. 또 하나 유명한 대목은 1부 정리18에 나온다.

-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원인 개념을 두 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내재적/ 타동적. 타동적 원인causa transiens 우리말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 영어로는 transitive cause. 타동적 원인은 결과를 자기 바깥에 생산하는 원인을 말한다. 그러니까 원인과 결과 사이에 외재적 관계가 있는 것. / 내재적 원인은 신이 자신이 생산한 결과를 신 바깥에 산출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안에 산출하는 것이다.

- 그래서 신은 모든 것의, 즉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문장 자체만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것은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기 아주 좋은 대목이다. 신이 만물에 내재적 원인이라면 만물끼리는 어떻다는 말일까? 신과 만물 사이에는 내재적 인과관계가 있는데 그러면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거기에도 신과 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적 관계가 있을까? 스피노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니까 신과 만물사이에는 내재적 관계가 있는데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타동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 여기서 1부 정리28을 찾아보자. 모든 독특한 실재, 곧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 후자의 원인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1부 정리28은 바로 사물과 사물 사이, 특히 유한양태와 유한양태 사이의 관계를 아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정리이다.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를 이원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신과 만물 사이에는 내재적인 관계가 있는데, 각각의 사물과 사물들 사이에는 정리28과 같은, 타동적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우주에는 신과 만물 사이의 인과관계- 사물과 사물 사이의 인과관계, 이 두 가지 인과관계가 이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이 1부 정리18과 정리28에 나타난 이원적인 인과관계, 2부 정리8에 나오는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의 이원적인 본질 관계, 5부 정리21과 정리22에 나오는 지속과 영원의 이원적 관계...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 철학은 한편에서 보면 매우 반플라톤적인 철학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여러 대목들을 보면 매우 이원론적인 것들이 있다.

 

-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는 일관성이 없다, 어디서는 이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영원성이라는 단어, 신에 대한 사랑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아주 무신론자로 보일만큼 반신학적인 반기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에티카>15년이 걸린 책이기 때문에 쓰면서 초기 생각하고 후기 생각하고 많이 달라져서 이 책은 한 권의 책이 아니다, 여러 권의 책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일관성이 없다고 일축해버리는 것은 너무 편리한 방법이다. 어쨌든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일관성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게으른 사람들이다. 열심히 보면 충분히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다. (<- 이게 바로 학자들의 논쟁법이다ㅋㅋ)

 

*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같은 개념이라는 관점에 대하여

 

-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분명히 본질에 대해 두 개의 개념, formal essenceactual essence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스피노자의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다른 개념이 아니다. 같은 개념이다. 한 개념을 두 가지 상이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지 그것을 아예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 그런데 우리가 후자처럼 주장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해명해야만 한다. 일단 우리가 처음에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눠서 설명하게 만들었던 그 대목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이것이 무슨 이야긴가. ”신의 속성 안에서만 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무슨 말인가. 이런 것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예를 들어서 1부 정리8의 주석2

- 하지만 변양은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으로, []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실체]의 개념에 따라 그 개념이 형성되는 것들로 이해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체들은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지성 바깥의 실체들의 진리는 오직 그것들 자신 안에만 존재한다.“

 

-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관념 대상들이 없는 관념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주장은, 변양들이 지성 바깥에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그것들의 본질은 (그것이 다른 것에 의존하는 변양인 한에서)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실존하지 않는 변양에 대해서도 우리는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다른 것이라는 것은 뭘까? 이 다른 것이 실체, 또는 물체의 경우라면 연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너무 자명한 만큼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거의 없으니까, 우리는 약간 더 구체화시켜 명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도움이 될 만한 텍스트를 끄집어내보면 1부 정리11의 두 번째 증명이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와 매우 다른 근거율을 제시하고 있다.

 

*** 라이프니츠의 <이성에 토대를 둔 자연과 은총의 원리> 7. “어떤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곧 어떤 것도 사태를 충분하게 인식하는 이에게 왜 그것이 다른 식으로가 아니고 그처럼 존재하는가에 대하야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원리가 정립되면 우리가 첫 번째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도대체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왜 도대체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무는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 충족이유율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PSR 충분한 근거의 원리

- noting without sufficient reason.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태를 충분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왜 도대체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무는 더 단순하고 쉬운 것인데. 세상에는 이렇게 더 단순하고 쉬운 무이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이 왜 많은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무에 대한 이 질문이 여전히 나는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물론 그 결과가 은총이라는 것이 매우 찬물을 끼얹지만ㅋㅋ)

- 라이프니츠의 질문에서 어떤 것은 논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것, 존재자, 자연, 더 나아가 이 세상,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역시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존재는 무에 대하여 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우월성을 지니지 않는다. 만약 무 대신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선택의 결과이다. 창조의 선택. 은총.

- 그러니까 라이프니츠는 존재에는 어떤 신학적인 사건과 선택이 개입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입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논리.

 

*** 스피노자에게도 무가 존재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처럼 형이상학적 무가 아니라, 존재해야 마땅한 어떤 것이 어떤 이유내지 근거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단순히 실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유가 요구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 별다른 이유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가 더 당연한 상태니까)

- 라이프니츠에게 무라는 것은 대등하게 맞서있는 것 VS

스피노자에게 무라는 것은 (존재의 한가지 양상으로서)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것,

-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전제) 있어야 할 자리에 어떤 이유로 무언가가 사라진 상태가 무이다. 왜 없을까? 불에 타서 사라졌을까? 질병을 앓아 죽었나? 같은 설명이 필요한 상태. , “존재해야 마땅한데왜 존재 안하지? 이런 논리.

- 스피노자에게는 무는 항상 이미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존재의 한 방식이다. 이미 를 포괄하고 있다.

 

*** 그렇다면 라이프니츠는 존재만이 설명의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무일 때는 딱히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불교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라이프니츠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 스피노자에게는 본성상 실존하지 않는 것은 없나?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무? 없다. 스피노자가 신학적인 것을 거부하는 이면이다. 자연은 영원하고, 자연이 영원하다는 것은 창조의 순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초나 기원, 끝점이 없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신의 역량이 너무나 무한하기 때문에, 충만하게 넘쳐흐르는 생산적 본질이라서 무엇이 있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게 없다? 있어야 하는 것이 없다? 그러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한다. 존재라는 것이 무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존재와 대립하는 형이상학적인 무가 아니라, 스피노자에게 무는 항상 실재 속의 무이다. 실재 속에 항상 있어야 했는데 어떤 이유로 사라진 것.

- 삼각형이 실존한다면 왜 실존하는지 그 이유가 필요하고, 부재한다면 부재의 이유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도 스피노자 근거율에 따르면 이유가 있다. 그냥 당연히 실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걸 실존하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 , 정리하면- 1부 정리8의 주석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 1부 정리11의 두 번째 증명에서 봤듯이 뭔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걸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 ->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이라고 하면 그 변양들의 실존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 그렇다면 이 다른 것을 우리가 굳이 실체나 속성이라고 하지 않고 그보다 더 가까운 좀 더 구체적인 사물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주석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제빵학원에 다니면서 빵, 아이스크림 만드는 법을 배워서 어제 집에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은 내가 아이스크림에 대해 적합한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만들어서 다 먹었고 맛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아이스크림은? 실존하지 않게 됐다. ? 내가 먹었으니까. , 아이스크림이 부재하는 원인을 지정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살이 쪘다.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그 아이스크림은 뭔가 효과를 내면서 사라졌다(유령처럼 나의 뱃살에ㅋㅋ)

- 이 아이스크림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이다. 이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에 대해 어떤가. 아이스크림은 실존하지 않는데 실존하지 않는 아이스크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지 않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분명 어떤 관념을 갖고 있다. 더욱이 그 적합한 관념을 갖고 있다. 내가 원하면 거기에 상응하는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는 것= 적합한 관념.

-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관념을 내가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념은 적합한 관념. 그리고 이 적합한 관념이라는 것은 독특한 실재의 형상적 본질에 대한 관념이다. 이 독특한 실재를 독특한 실재로 만드는 형상에 대한 관념, 독특한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그 form, form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독특한 실재에 대한 적합한 관념이다.

- cf) 데카르트 <성찰>에 유니콘의 예가 많이 나오는데 그걸 가리키는 스피노자의 용어가 있다. “사고상의 존재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ena rationis라고 쓴다.

 

*** , 정리하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에 대해 내가 관념을 갖고 있는데 그 관념은 적합한 관념이다. 나는 레시피를 갖고 있고 실제로 만들어서 성공을 했으니까. 적합한 관념이라는 것은 뭐냐면 이 실재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것.

- 지금 이 독특한 실재에는 actual essence 현행적 본질은 없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현행적 본질은 없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인식하고 있는 독특하 실재다. 그렇다면 이 실재의 형상적 본질은 현행적 본질과 같은 걸까, 다른 걸까? 다르지 않다. 왜냐면 지금은 현행적 본질이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고, 그것을 적합한 관념에 따라 언제든지 현행적으로 바꿀 수 있다.

- 그러니 우리가 형상적 본질을 뭔가 초월적인 것이라든지, 뭔가 영원한 어떤 것이라고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저 예에서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이 지금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행적 본질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다른 것은 아니다.

- 4부 정리4와 증명으로 가보자.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게 되는 것은 없으며 (=인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능동적일 수 없다), 그의 본성만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인간이 적합한 원인이 되는 그러한 변화들만을 겪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인간은 항상 외부원인에 의한 작용을 겪는다)

- 증명을 가면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보존의 역량은 신의 일부, 자연전체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현행적 본질이라는 말을 딱 두 번 쓰는데 3부 정리7과 바로 여기, 4부 정리4의 주석에서다. 두 번 다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따라서 인간의 현행적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인간의 역량은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역량, 곧 신 또는 자연의 본질의 일부다 때문에 인간이 뭔가를 원인으로서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 자연 전체의 원인의 역량의 한가지 표현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스피노자 공부를 하는 것도 다 자연전체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바람과 물과 땅과ㅋㅋ 모든 것들이 다 기여한 덕이다. 좁게는 부모님과 형제자매와 선생님과 이 강의를 알게 해준 사람들 같은 여러 외부 원인 덕분이다.

 

*** 그래서 최종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는 영원의 차원에 있고 속성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지속의 차원에 있고 유한성의 속하는 두 개의 본질처럼 보이지만,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대목들을 참조하면 꼭 그렇게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을 이원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의 본질 개념이 다른 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존재한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바로 그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정신, 지양에 더 잘 들어맞는다. 앞으로 우리가 더 나아가다보면 이런 이야기들을 되풀이할 기회들이 계속 있을 것이다.

 

-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다. 2부 정리8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되어/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뜻하려는 것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파악되어 있는 이 관념들에 상응하는 (왜냐하면 이 관념들은 참된 또는 적합한 관념, 곧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관념들이기 때문이다) 실재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스피노자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형상적 본질들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이 신의 지성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의 지성 안에 있는 것은 형상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존재이며,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형상적 본질

- 또한 스피노자가 2부 정리8의 증명에서 언급하는 앞의 정리는 사실 정리7의 따름정리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2부 정리7의 따름정리가 말하는 것은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에 상응하는 형상적 본질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

- 따라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6의 따름정리, 2부 정리8,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형상적 본질= 현실적 실재표상적 존재= 관념의 구별이다. 실재= 관념의 관계. 렇다면 스피노자가 형상적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구별되는 또 다른 본질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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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설명을 통해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가 기원으로서의 신의 관념이 아니라, 관념이라는 것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틀이라는 의미가 더 명확히 다가왔다. 재미있는 설명이었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 신이 원인이지 대상은 원인이 아니다.“ : 대상이 우리를 자극해서 관념이 생겼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내가 눈앞의 컵을 인식한다. 컵이라는 물체/대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컵이라는 대상이 여기 있으니까. 컵이라는 대상이 촉발돼서 내가 이것을 지각한 것. 그렇다면 컵이라는 대상이 원인이 될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은 컵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는 말은 신의 관념이 기원이라든가 최초의 원인이라든가 시원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관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런 틀이라는 이야기다. 신의 관념으로 인해 모든 관념이 가능하다. 신의 관념을 통해 모든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의 관념 없이는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고 인식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2. 알튀세르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몰랐지만, 강의 첫 시간부터 거칠게 말하자면 시치미를 뚝 떼고 약간 의뭉스럽게 을 가져다 쓰는 스피노자의 방식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스피노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에티카 1부를 하나하나 따라가다가 어떤 정리나 문장들은 차후에 신학자들에게 먹일 한 방을 위한 밑밥들처럼 느껴져서, 참으로 밑밥도 촘촘히 깔아놓으시네 진짜 못 당하겠다 싶어 혼자 웃은 적도 있었다. <에티카> 초반부는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면서도 정밀하고 신랄하면서도 우아한 블랙코메디 아닐까. 더글러스 애덤스의 근대 철학자 버전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 덕에 혹은 그 탓에 유난히 스피노자는 오해를 많이 받는 철학자인 것 같다.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 스피노자를 교조주의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고, 신을 초월적 영역에 놓고 생각하는 범신론자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몇 년 전에 A”B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가 스피노자다라고 한 걸 듣고 사람들이 B가 의외로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오해했었던 것도 생각나고. 지금도 얼핏얼핏 스피노자에 대해 묻거나 찾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가 신을 찬양하고 신 안에서 은총과 평안을 얻어 지구 종말의 그 날에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온건한 사람 정도의 느낌으로 알고 있다. 누구보다 우아한 방식으로 과격(?)했던 사람인데.

 

나도 스피노자를 오랫동안 오해했었다. 내가 읽었던 책들에 언뜻언뜻 나오는 스피노자 인용구들을 보면 그는 너무나 구조주의자고 너무나 유물론자로 보였던 것. 이 오랜 오해가 풀린 건 주디스 버틀러 세미나에서였다. 그 세미나가 아니었으면 스피노자 <에티카>를 강독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고 나는 평생 그가 구조주의자 아니면 유물론자라고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심지어 에티카 1부 강의 중반까지도 나는 그런 틀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적진 속에 들어가서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워 적을 내파하는 것. 사실 메갈에서 썼던 미러링이 일종의 이런 방식인 건데 그 판의 성격과 미러링 하는 대상의 성격과 수준 때문에 메갈의 미러링은 혐오발언 문제와 겹치며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되었지만(여기에 대해서 나는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발언>에 대체로 동의한다. 물론 언어의 상처에 저항하는 언어들은 상처를 재실행하지 않고서 그 상처를 되풀이해야 한다.“라는 게 현실적으로, 특히 물리적 위협과 연결되었을 때 어디까지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 스피노자식으로 마무리해서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ㅋㅋ),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우는 것은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기기에는 매우 효율적인 것 같다. 어쨌거나 10년 동안 보이지 않는 것이었던 페미니즘 이슈를 보이는 것으로 리부트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굉장한 위력이었던 것. 미러링 그 이후-(”그 이후에 이미 찍어야할 마침표가 들어가 있지만 사실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에 대해 더욱 같이 고민해야겠지만.

 

아무튼 적진에 들어가서 적의 언어로 적을 해체하는 스피노자 멋있어. ”너희가 말하는 그런 신 따위 없어!“라는 외침을 이렇게 길고 기하학적으로 아름답게 쓰고 있는 걸 본다는 것.

 

* 스피노자는 왜 자연법칙이라고 쓰지 않고 이라고 썼을까.

 

스피노자가 기독교신학적인 용어법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두고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적인 게릴라 전술이다라고 말했다ㅋㅋㅋ 적진에 들어가서 적으로 단장하고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운다. 만약 스피노자가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자연법칙’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어휘를 갖고 이야기했으면, 스피노자 적수들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쟤하고 나는 어차피 노선이 다르니까, 쟤는 아예 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니까 각자 갈길 가자. 그런데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신이 무한하시고, 신이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 신에 의지하고, 마치 교조적인 독실한 신자인 것처럼, 아주 철저한 신학적인 어휘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학하고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적의 진지 속에 들어가서 파괴하는.

 

3. 자크알랭 밀레가 스피노자의 용어법을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개념에 적용했고, 저 적용이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이나믹하게 만들었는지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 아직은 여의치 않다. 언젠가 만약 내가 구조주의를 공부하게 된다면 그때 풀 숙제로 남겨 두기로.

 

자크알랭 밀레는 60년대에 이런 개념을 쓴다. 구조의 작용/ 구조의 행위. 구조화하는 작용/ 구조화되는 작용. 스피노자의 철학의 용어법, 산출하는 자연-산출되는 자연을 가지고 와서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 개념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인과 결과가 들어가면서 가령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이 굉장히 다이나믹해진다. 60년대에 이런 시도들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전에는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1960년대-70년대 프랑스 철학에 굉장히 중요한 사상적인 원천을 준 것이 스피노자 철학이다.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4. 그 유명한 2부 정리7을 들어가는 날, 강의 시작 전에 어쩐지 폭풍전야같은 고요한 긴장이 내 마음에서 느껴졌다ㅋㅋ 자세히 파고들자면 한 달은 다뤄야할 정리7에서 기본적으로 꼭 알고 넘어갈 것만 뽑아서 설명해주신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걱정했던 것보다는 매우 명료하게 다가왔고 그 이전 정리들에서 구름 사이로 보듯이막연하게 보였던 어떤 의문들도 같이 또렷해졌다. 들뢰즈의 3중 평행성을 찾아 읽은 게 이해를 돕는 데에 한 몫 했다. 무엇보다 정리7이 좀 더 깊게 다가왔던 것은 선생님의 이 표현 때문이었는데, 내가 언젠가의 스피노자 일기에도 썼었던,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이면 표본이 너무 작지 않은가라는 의문. 지울 수 없었던 의문이었는데 이날 마침 선생님이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정리7이다라고 했을 때 정리7이 좀 굉장하게 느껴졌다. 저 정리7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입장의 상당부분을 결정할 것 같은 느낌. 그러니까 결정적 모멘트 같은. 그 이전에도 여러 논쟁적이고 당대 및 후대 철학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던 마치 스피노자의 선언 같은 정리들이 있었는데도 나에게는 정리7이 그 무엇보다도 크게 다가왔다. 커다란 세계를 결정짓는 최종 결제 도장 같은.

 

들뢰즈의 3중의 평행성

1) 양태들의 평행성 (관념과 그 대상(가령 물체)의 평행성) <- 이것이 평행한 이유는 2)

2) 속성들의 동등성/상동성 (사유속성, 연장속성...) <- 이것이 동등/상동하는 이유는 3)

3) 존재의 동일성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5. 정리7의 주석을 보면서 스피노자가 <정신교정론>에서 했던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 같이 생각났다. 수업을 듣기 전인 과거의 나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싶다.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모순이게 아니게? 분명 모순이지!“라고 대답했을 것이다ㅋㅋ

 

어떤 히브리인들이 신과 신의 지성 및 신이 인식한 실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구름 사이로 보듯이 보았던 게 바로 이 점인 듯하다.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causarum connexionem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6.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세 가지 모델을 통한 설명과, 거기에 페히너가 덧붙인 네 번째 모델, 스피노자의 방식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페히너의 방식을 두고 수업시간에 다른 분들이 억지 같다고 했지만, 선생님도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아마도 떨어져있는에 방점이 찍히는)가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지만, 그래도 페히너의 의도가 매우 명료하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이 비유를 최대한 살려주고 싶어서 잠깐 생각 해봤는데. 그럼 하나의 커다란 몸체에 두 개의 시계가 나란히 붙어있으면서 같은 매커니즘으로 움직이는, 몸체에 달려있는 태엽과 초침을 움직이는 힘이 양쪽에 매달려있는 두 개의 시계에 동시에 작용하니까 같은 질서와 연관으로 움직이게 되는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을까? 이 시계라면 두 개의 다른 시계이기도 하면서 하나의 같은 시계이기도 한, 두 개의 시계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하나의 시계라고(가게에서 저런 모양의 시계를 산다고 했을 때 분명 저거 하나주세요라고 말할 테니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도 역시 억지고 무리일까?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 더 정확히 말해서 서로 독립적인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시계의 비유를 든다. 라이프니츠가 1695년에 짧은 글을 하나 쓰는데, 그 중 하나가 <실체들 사이의 소통에 관한 새로운 체계>. 정신이라는 실체, 신체라는 실체 사이에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일치가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을 두고 여러 사람이 반론을 제기하니까 거기에 반해서 라이프니츠가 몇 차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해명을 쓰는데, 그 중 하나의 해명이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동일한 두 개의 시계는 평행성에 대한 비유다. 하나의 시계는 관념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다른 시계는 사물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이 시계가 똑같은 시간을 가리킨다는 것은 상응한다는 이야기.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 모델이 있다.

 

1)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연동하여 작용하게 만드는 방식. (데카르트주의)

하나의 시계가 작동하면 다른 시계도 따라서 작동하도록 연결을 만들어놓은 시계

2) 두 개의 좋지 못한 시계가 서로 항상 일치하게 만드는 길은, 능력 있는 시계공이 두 시계를 조정해서 그들이 매 순간마다 서로 일치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 이것은 니콜라 말브랑슈가 제시한 것이다. 17세기의 프랑스의 사제이며, 포스트 데카르트주의자라고 불리는.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노선은 조금 다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occasionalism 기회원인론. 기회라는 말을 썼냐면, 예를 들어 내가 손을 든다고 하면 그에게는 내가 손을 드는 것이 하나의 occasional, 내가 손을 들 때,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 자신이 원인이 돼서 손을 든 것도 아니고, 나로 하여금 신이 손을 들게 하도록 원인으로서 작용을 미친 것이다, 라는 의미다. 어떤 기회에 어떤 작용이나 사건, 어떤 행위가 일어나면 그 모든 것의 진정한 원인은 신이라는 것이 기회원인론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굉장히 재미있다. 마치 구조주의 같은 느낌. 이 두 번째 방식은 기회원인론적 방식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두 개의 별로 좋지 못한, 자꾸 느려지거나 해서 오차가 나는 시계는 방향이 안 맞을게 분명한데, 이 두 시계의 방향이 계속 일치하도록 아주 능력이 뛰어난 시계장인이 매 순간마다 두 시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들 때 신이 나를 통해 작용하듯이 시계에도 매번 시계공이 작용해서 시간을 일치시키는 것. 엄청 바쁘겠죠ㅋㅋㅋ

*** 말브랑슈 malebranche: 기회원인론 occasionalism

- 유한한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사물들이 행위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다. 내가 이렇게 손을 든다면, 내가 손을 드는 이것이 바로 오케이션, 이 기회의 원인이 신이다. 말브랑슈 철학에서는 개인과 개체는 꼭두각시다. 신에 의해 규정되어 움직이는. 하지만 생각보다 미묘하다. 손을 드는 원인은 신인데, 말브랑슈 이야기는 이 근육의 운동,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팔근육의 작용방식, 그러니까 팔을 들 때 근육이 이완되고 팽창되고 하는 방식, 이것을 신이 정해놓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의 신체를 규정하는 생리학적인 법칙. , 내가 움직이는 것은 임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규정하는 근육의 운동 패턴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3) 두 시계를 처음부터 대단한 기술과 정교함으로 제작하여 그것들이 이후에 서로 일치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방식.

- 이게 라이프니츠 자신이 제시하는 방식이다. 예정조합. 아주 완벽하게 만들어서 알아서 둘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설명에 제일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스피노자는 어떻게 했을까?

 

19세기 후반 독일의 아주 유명한 학자 게오르그 페히너 georg fechner, psychophysics라는 학문을 만든 사람이다. 심리물리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개척한 사람. 오늘날식으로 말하면 뇌과학? 신경생리학? 같은 것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사람이다. 프로이트 초기저작에서 페히너에 대해 얼마나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지를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에게도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심리물리학. 그냥 psychology도 아니고 physics도 아니고 psychophysics 학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ㅋㅋㅋ 이 결합된 이름 자체가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일치하는, 이것을 통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에게서 parallelism을 가지고 온다. 평행성, 평행론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심리물리학에 저것의 기본원리들을 채택했다. 심리적인 사건과 신체적인 사건이 일치하는 이유, 그 매커니즘을 밝히려는 학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한 이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이렇게 언급한다.

 

라이프니츠는 세 개의 방식만 이야기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방식들 이외에 네 번째 방식이 있다. 그 네 번째 방식이 바로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스피노자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페히너의 답은 두 개의 시계가 사실은 하나다“ ”두 개의 동떨어진 시계가 아니라 하나의 같은 시계다“, 그러니 당연히 시계가 일치한다. 이게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페히너의 취지는 이해가능 하지만, 사실 이게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스피노자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정신과 신체의 관계,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라는 모델이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가 여기에 스피노자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도 뭔가 스피노자의 철학,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설명이 자기 모델에 맞지 않고 부적절해서였을 수도 있다.

 

7.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스피노자와의 대비로서 잠깐씩 접할 뿐이지만, 그럴 때마다 받는 인상은, 조금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의 세계는 어쩐지 로맨틱하다는 것이다.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아무 것도 없는 라는 상태도 존재와 대등한 것이라며 던졌던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그의 질문도 그렇고, 관념이 어떻게 정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정신을 굉장히 내면화되고 사적인 것으로 여기며 이런 개별적인 정신과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던지는 질문도 그렇다. 나에게 그의 철학적 세계는 어쩐지 (신을 향해서든 스피노자에 대해서든) 구애적이고 다소 맹목적이고 따뜻하고 의리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병약하고 나이브한 소년의 그것 같은 느낌이다. 그에 비해 스피노자는 매우 냉정하고 단호하면서 이성적이고 강건한 느낌(물론 이건 아무 근거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비평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대체적으로 로맨틱하고 나이브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지ㅋㅋㅋㅋ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을 보기 전에는 스피노자의 관념론에 개별적인 정신,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보편적인 정신만 존재하고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깨닫지 못한 건 아니다.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고 보편적이고 물성이 있는 어떤 것, 그러니까 계량이 가능하고 법칙화가 가능한 어떤 것으로 본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이면에 숨어있는 뜻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정신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 당연히 정신을, 선생님 표현을 빌면, public한 것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은 당연히 public한 것이고 사물 같은 것이고 계량화할 수 있고 법칙화 할 수 있고 보편적이고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좀 더 거칠게 말해 개개인마다 갖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매우 특별하고 고유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어떤 결여가 있다는 것을 추호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하나의 사건을 접할 때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 때 외부 자극을 받았을 때 사람마다 갖는 감정 느낌 기억들은 다 다르고 그것대로 특별하겠지만, 그것들을 외부로 끄집어내어 죽 늘어놨을 때(그렇다, 나는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그걸 건져낼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면 정신을 외재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해독해낼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을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문제제기를 한 것을 보고나서야 아,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구나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자기 자신, 혹은 인간이라는 종의 어떤 내면이나 정신을 유달리 특별하고 내밀하고 굉장히 사적이며 조금 중22한 표현을 빌면 아무도 내 마음 알 수 없어“ ”나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어라고 여기는 유형의 사람을 매우 피곤해하는 편인데 이런 상태를 뜻하는 창문이 없는이라는 표현이 무척 좋았다.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지상을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 창문으로 그 안을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데, 집 안에 있는 사람만이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한 번도 보지 않는 바람에 자신의 집에 창문이 달려있는 줄 전혀 모르는. 그래서 아무도 이 집 안을, 집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혹은 니까 나의 정신이나 내면 안에 무언가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특별함이 한 두 개쯤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하고, 나의 감정은 특별한 어떤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기에 스피노자에게 납득하지 못하는 라이프니츠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것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관념은 사물이나 마찬가지라고 확 깨부수어 버리는 스피노자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참 무자비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정신, 나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다 못해 어떤 특출한 정신과의사도 믿지 못하고 의사들이 몇 번의 상담, 백 마디도 안 되는 말들 속에서 나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알 수 있냐며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한다거나,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혼자 피해의식의 집을 쌓고 그 안으로 자꾸 들어가 버린다거나(아마도 그 집은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일 것이다), 아집 속에서 듣기 좋은 말,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는 것은 더 무자비한 일이다..

 

나는 관념을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독자적인 사물,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는 스피노자 철학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마음에 든다. ”모든 것이 정신화 되어있다는 말도 무척 좋다. 이런 점들이 시사하는 바를 라이프니츠의 비판 덕에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기억에 남을 라이프니츠의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

 

[“모든 것이 정신화되어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2부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라이프니츠 비판의 또 다른 논점은 관념과 정신, 관념과 영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영혼(정신) 안에 관념들이 담기는 것이고 영혼(정신) 안에서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 스피노자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신을 관념이라고 생각한다니.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수 있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담겨있다.

 

심리학 또는 심리철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이다라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거나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introspection이라는 말을 한다. 내성. 자기성찰. 어떤 심리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시기에는 내성의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20세기 중반쯤 미국에서 행태주의라는 게 나오면서 심리적인 것을 어떤 외재적인 행동처럼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식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인간의 심리, 정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방식, 스피노자는 후자의 방식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정신, 심리적인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문이 없는 것.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이라는 건 관념이고, 나중에 정리11에 가게 되면 정신은 무한지성의 일부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이라는 건 전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것. public한 것. 그러니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의 생각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를 반박한 이 글의 제목에 보편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별적인 정신, 마음, 이런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무한지성 같은 보편적인 정신만 있지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그런 정신은 없는 것이다. 개채성.

 

어쨌든 우리가 라이프니츠 인용문에서 보듯이 라이프니츠가 parallelism을 쓰는 맥락을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우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구별되는 자기 철학을 말하기 위해 쓴 용어다. 이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고 이론화하기에는 이 용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1)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고 2) 인식론적 평행론이 있다. 존재론적 평행론이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관이 모든 속성에 걸쳐서 펼쳐지고,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표현된다는 바로 이 부분. 평행론을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이걸 존재론적 평행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그 관념의 대상 사이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이고, 이것을 바로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본다.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에 두 가지 상이한 쟁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두 측면이 다 가능한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관념들을 표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2부 정리 7에 들어가 있는 것.

 

2부 정리32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7의 따름정리를 혼용하는 방식이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다. 그러니까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표상의 대상과의 일치. 그래서 이것을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관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에 대한 표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라는 말은 상당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재, 사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과작용을 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a는 관념b를 낳을 수 있고 관념b는 관념c를 낳을 수 있고... 이런 게 바로 형상적 실재다. 관념을 하나의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스피노자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관념을 이렇게 표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 반론한 게 바로 그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무언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작용 받을 수도 있는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그래서 정신도 관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정신이나 관념이나 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 구별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의 독특성은 관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제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로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관념이 하나의 사물이니까 이게 당연히 표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면, 관념이든 정신이든 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public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3부에 가서 정서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정을 굉장히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대한 나의 애틋한 사랑, 누군가의 비극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 이런 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정을 우리 개개인의 굉장히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서라는 것을 그렇게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퍼블릭한 것으로 여겼다. 이게 나중에 모방의 문제로 이어진다. 모방 욕망. 뒤에 가면 자세히 나올 것이다.

 

8. 나에게는 에티카 질문노트가 있다. 수업을 듣다가 질문이 생기면 적어두는 노트인데 바로바로 질문하지 않고 노트에 적는 이유는 나중에 가면 그 답이 나오겠지 싶어서다. 이미 그런 경우가 제법 있었어서 현재까지 나의 질문노트에 적혔던 23개의 질문 중에서 11개가 지워지고 12개 남아있다. 이번에 지웠던 열한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것,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들에 비해 우월한 속성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강의에서 그 답을 들었다. 물론 스피노자가 직접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스피노자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 담긴 답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 답을 듣는 순간 너무나 납득했고 조금 감동했다. “어차피 무한한데.” 아 너무나 논리적이면서 근사한 답 아닌가. 어차피 무한한데 무한한 것에 400을 곱하나 10000000을 곱하나 무슨 상관이야, 진짜. 스피노자에게는 시간조차도 아무 의미 없는 개념인데. “무한이라는 가늠도 상상도 제대로 해볼 수 없는 커다란 세계에서 사유속성이 연장속성보다 더 양이 많네 적네 따지는 것이 정말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12가지 색 물감 중에 보라색이 특권을 얻어 다른 색깔 물감보다 600000배의 양으로 물에 풀어진다고 한들 바다 색깔에는 변함없다.

 

*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 A속성에서는 a가 따라나오고 B속성에서는 b가 따라나오고 연장속성에서는 물체가 따라나오고, 사유속성에서는 관념이 따라 나오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속성들은 동등하다. 그런데 우리가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생각해 보면, 저기서 물체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있을 테고, a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b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게다가 또 관념 자신에 대한 관념도 또 있을 것이다. 관념1에 대한 관념2, 관념2에 대한 관념3, 관념3에 대한 관념4..... 그리고 저 관념에 대한 관념은 분명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이고, 관념이니까 다 사유속성에 속할 것이다. 게다가 관념1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이런 식으로 나가다보면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보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다 있으니까 + 게다가 각각의 관념이 형상적 실재가 될 수 있다면 계속해서 관념에 대한 관념으로 배가가 될 수 있으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더 커지지 않는가. 이런 문제제기.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니, 어차피 무한한데...ㅋㅋㅋㅋ 무한 곱하기 9를 하나, 무한 곱하기 30000을 하나 다 무한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ㅋㅋ 1부 정리15의 주석에 무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무한 양을 가정한 것에서부터 이런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누군가 직접 스피노자에게 저 질문을 던진다면 스피노자가 뭐라고 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물체에는 이런 경우가 전혀 없지만 관념들의 경우에만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관념의 관념의 관념의.... 이게 생겨나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은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속성들 사이의 동등성, 평등 이런 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9.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정리로도 유명하고, 스피노자를 잘 모르던 시절에도 평행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을 정도로 유명한 정리7을 바짝 긴장하고 들었다가 정리8로 넘어가면서 조금 마음을 놓았는데, 웬걸. 의외로 정리8이 만만치가 않았다.

 

일단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과 마찬가지인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에티카에서 만났던 어떤 것들 중에서도 가장 생경하고 낯설었다. 형상적 실재성-표상적 실재성의 개념도 이렇게까지는 낯설지 않았다.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같이 한 가지 특성만 갖고 있는 걸 말한다고? 살면서 이런 류의 개체를 상상한 적이 없어서 낯선 걸까?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과장적인 비유로서 일상에서 들어본 적은 있다. 예를 들어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숨만 쉬는 사람“ ”밥만 축내는 사람“ ”잠만 자는 기계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이렇게 한 가지 특성만 갖고 있는,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이기만 한 것은 아닌(부분적인 진실이 있는) 존재에 대해 이렇게 유형화를 하고, 거기에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게 SF소설이 아니라 철학책, 그것도 스피노자 <에티카>의 정리에 등장을 한다고? 이 사실이 어쩐지 생경하고 어색해서 내가 이해를 제대로 한 것이 맞는지 재차 확인했던 것이다. 재밌어ㅋㅋㅋ

 

따름정리도 재미있었다. 저 정리에서 놓쳐서는 안 될 키포인트인 글자는 인 것 같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실존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경험할 수도 없고 실존하는 개체로서 우리가 표상할 수도 없는 실재들이니까 오직 신의 무한지성 안에존재한다는 의미고, 그렇기 때문에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나 관념들은 신의 무한지성이 실존하는 한에서실존할 수 있고, 그것들을 유일하게 파악/포함하고 있는 신의 지성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들도 사라진다.

 

이어서 나오는 신의 속성 안에서 파악되고+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에 속하는 실재들은 정리8과는 다르게 시공간적인 개체성을 갖는, 아직 실존하지 않고 그게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정확히 모르지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들이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스피노자의 우주가 무한한 우주라는 것을 배워왔지만 정리8과 정리9는 정말 뭔가 우주적이고 SF소설 같은 느낌이잖아? 하지만 나에게 아직 주석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왜냐면 주석에서 예로 든 원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선 이외에 존재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과 직사각형들은 나에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가 아니라 정리9의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원 안의 선이나 직사각형은 시공간적 개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이 그림 속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 내가 저 원 안에 당장 선 하나만 그어도 생겨날 수 있는, 어떤 개체 형태를 갖고 있는지 우리가 분명 알고 있는 것들로서의 실재 아닌가? 주석에서 이런 커다란 의문이 남은 채로 일단 강의가 끝났는데 다음 강의에서 정리8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으니 기다려봐야겠다.

 

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그렇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에는 뭐가 있을까. 우리는 2부 공리1에서 신/실체는 본질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고 했지만,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곧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원인과 다르게 인간은 본질상 실존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본질과 실존 사이의 존재론적 괴리가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것들의 특징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사례로 생각되기 쉬운, 이를테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아직 출시되지 않은 아이폰 13 같은 것들은 정리9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정리8의 따름정리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따름정리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고 있다. 1)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이게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것), 2)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것. 이때 지속이라는 것은 우리식으로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시공간적인 어떤 개채성을 갖고 있는 어떤 것이다. 아이폰13이라든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아직 실존하고 있지 않지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보면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게 어떤 것인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와는 다른 것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가령 인간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인간은 본질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특성들, 웃을 수 있다/직립할 수 있다 같은 득성들을 갖고 있다.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직립할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데 앉아있다는 특성만 갖고 있는 소크라테스같은 그런 것. 이런 것들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이것들은 지속을 갖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 없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없고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같은 것. 그렇다고 이게 아주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말할 수 있는 특성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갖고 있는 특성이니까. 그러니까 한 가지 특성으로만 파악된 독특한 실재,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 그렇다면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직립하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이것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실존하는 개체로서 개별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오직 무한지성 안에만 있다는 그런 의미다.

- 스피노자가 정리8에서 이런 사례들을 든 이유는 그래야 정리8과 정리9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정리8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체적인 개체라고 상정할 수 있는 어떤 실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리8과 정리9는 구별되어야 하고, 정리8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현행적 실재라는 것은 아직 지속의 차원이 들어가지 않은, 구체적인 개체성을 갖지 않는 그런 독특한 실재다.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것.

- 스피노자의 주석을 보면 그림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예시하는 이 원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3권 정리35에 증명의 대상으로 나오는 도형이다. 수직으로 교차하는 선을 가진 원. 스피노자는 여기서는 이렇게 두 개의 선만 존재하지만 이 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 또는 직사각형이 있을 수 있고, 그게 실존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실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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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노자 자신이 쓰지 않은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왜곡이나 변형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인데, 2부 정리7을 워낙 평행성 명제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물론 모든 철학자들이 평행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철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2부 정리73부 정리2와 연결이 되어있다. ”신체는 정신이 사고하도록 규정할 수 없고 정신은 신체가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또는 그 이외에 (만약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다른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나 상호 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신과 신체가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은 아니다.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통해 표현되듯이, 그리고 동일한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이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때로는 연장속성 안에서 표현되듯이, 인간이라는 통일체 역시 때로는 정신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함의하는 것 중 하나는, <윤리학> 2부 정리7의 주석이 말하듯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3부 정리2의 주석 이 점은 2부 정리7의 주석에서 말한 것, 곧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인식되고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에서 인식된다는 점으로부터 명료하게 이해된다. 그리하여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간에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은 하나다. 결과적으로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신체가 능동적일 때 정신도 능동적이고, 신체가 수동적일 때 정신도 수동적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다르다. 5부 서문에 가면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데카르트는 신체의 힘이 너무 강하면 정신이 약해진다고 이야기한다. , 신체가 능동적일 때 정신은 수동적. 반면에 정신이 강해지면 신체가 약해진다. 의지력이 강해져서 신체가 통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정신이 능동적이면 신체가 수동적. 반비례 관계라고 생각한다.

 

2부 정리7을 평행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관념과 관념의 대상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다, 관념A는 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물A와 일치하고, 관념B는 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물B와 일치한다

는 관점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보게 되면 물체의 질서는 평행한데-> 평행하다는 것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인데-> 이 말은 정신과 신체 / 관념과 그 대상은 독립적이고 외재적이라는 말인데-> 이게 평행론적인 해석에 함축되어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관념과 그 대상이 어떻게 상응하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 더 정확히 말해서 서로 독립적인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시계의 비유를 든다. 라이프니츠가 1695년에 짧은 글을 하나 쓰는데, 그 중 하나가 <실체들 사이의 소통에 관한 새로운 체계>. 정신이라는 실체, 신체라는 실체 사이에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일치가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을 두고 여러 사람이 반론을 제기하니까 거기에 반해서 라이프니츠가 몇 차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해명을 쓰는데, 그 중 하나의 해명이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동일한 두 개의 시계는 평행성에 대한 비유다. 하나의 시계는 관념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다른 시계는 사물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이 시계가 똑같은 시간을 가리킨다는 것은 상응한다는 이야기.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 모델이 있다.

 

1)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연동하여 작용하게 만드는 방식. (데카르트주의)

하나의 시계가 작동하면 다른 시계도 따라서 작동하도록 연결을 만들어놓은 시계

2) 두 개의 좋지 못한 시계가 서로 항상 일치하게 만드는 길은, 능력 있는 시계공이 두 시계를 조정해서 그들이 매 순간마다 서로 일치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 이것은 니콜라 말브랑슈가 제시한 것이다. 17세기의 프랑스의 사제이며, 포스트 데카르트주의자라고 불리는.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노선은 조금 다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occasionalism 기회원인론. 기회라는 말을 썼냐면, 예를 들어 내가 손을 든다고 하면 그에게는 내가 손을 드는 것이 하나의 occasional, 내가 손을 들 때,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 자신이 원인이 돼서 손을 든 것도 아니고, 나로 하여금 신이 손을 들게 하도록 원인으로서 작용을 미친 것이다, 라는 의미다. 어떤 기회에 어떤 작용이나 사건, 어떤 행위가 일어나면 그 모든 것의 진정한 원인은 신이라는 것이 기회원인론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굉장히 재미있다. 마치 구조주의 같은 느낌. 이 두 번째 방식은 기회원인론적 방식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두 개의 별로 좋지 못한, 자꾸 느려지거나 해서 오차가 나는 시계는 방향이 안 맞을게 분명한데, 이 두 시계의 방향이 계속 일치하도록 아주 능력이 뛰어난 시계장인이 매 순간마다 두 시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들 때 신이 나를 통해 작용하듯이 시계에도 매번 시계공이 작용해서 시간을 일치시키는 것. 엄청 바쁘겠죠ㅋㅋㅋ

*** 말브랑슈 malebranche: 기회원인론 occasionalism

- 유한한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사물들이 행위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다. 내가 이렇게 손을 든다면, 내가 손을 드는 이것이 바로 오케이션, 이 기회의 원인이 신이다. 말브랑슈 철학에서는 개인과 개체는 꼭두각시다. 신에 의해 규정되어 움직이는. 하지만 생각보다 미묘하다. 손을 드는 원인은 신인데, 말브랑슈 이야기는 이 근육의 운동,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팔근육의 작용방식, 그러니까 팔을 들 때 근육이 이완되고 팽창되고 하는 방식, 이것을 신이 정해놓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의 신체를 규정하는 생리학적인 법칙. , 내가 움직이는 것은 임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규정하는 근육의 운동 패턴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3) 두 시계를 처음부터 대단한 기술과 정교함으로 제작하여 그것들이 이후에 서로 일치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방식.

- 이게 라이프니츠 자신이 제시하는 방식이다. 예정조합. 아주 완벽하게 만들어서 알아서 둘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설명에 제일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스피노자는 어떻게 했을까?

 

19세기 후반 독일의 아주 유명한 학자 게오르그 페히너 georg fechner, psychophysics라는 학문을 만든 사람이다. 심리물리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개척한 사람. 오늘날식으로 말하면 뇌과학? 신경생리학? 같은 것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사람이다. 프로이트 초기저작에서 페히너에 대해 얼마나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지를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에게도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심리물리학. 그냥 psychology도 아니고 physics도 아니고 psychophysics 학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ㅋㅋㅋ 이 결합된 이름 자체가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일치하는, 이것을 통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에게서 parallelism을 가지고 온다. 평행성, 평행론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심리물리학에 저것의 기본원리들을 채택했다. 심리적인 사건과 신체적인 사건이 일치하는 이유, 그 매커니즘을 밝히려는 학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한 이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이렇게 언급한다.

 

라이프니츠는 세 개의 방식만 이야기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방식들 이외에 네 번째 방식이 있다. 그 네 번째 방식이 바로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스피노자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페히너의 답은 두 개의 시계가 사실은 하나다“ ”두 개의 동떨어진 시계가 아니라 하나의 같은 시계다“, 그러니 당연히 시계가 일치한다. 이게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페히너의 취지는 이해가능 하지만, 사실 이게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스피노자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정신과 신체의 관계,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라는 모델이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가 여기에 스피노자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도 뭔가 스피노자의 철학,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설명이 자기 모델에 맞지 않고 부적절해서였을 수도 있다.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은 그가 1702년에 쓴 짧은 글로 상당부분이 스피노자에 대한 반박으로 이루어져있다.

 

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물체 안에서 발생하는 것 사이에 완전한 평행성parallelism을 확립해놓았다(<- 이게 바로 parallelism의 유래다. 예정조합.) ....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2의 주석에서 영혼과 신체가 동일한 것이며, 단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표현될 뿐이라고 말하며 2부 정리7에서는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가 하나의 동일한 실체, 곧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거나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라고 말한다 ... 나는 이점(<- 정신과 신체가 하나의 동일한 것)에 반대한다. 영혼과 신체는 능동의 원리와 수동의 원리가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서로 동일한 것이 아니다. ... [“모든 것이 정신화되어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2부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라이프니츠 비판의 또 다른 논점은 관념과 정신, 관념과 영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영혼(정신) 안에 관념들이 담기는 것이고 영혼(정신) 안에서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 스피노자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신을 관념이라고 생각한다니.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수 있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담겨있다.

 

심리학 또는 심리철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이다라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거나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introspection이라는 말을 한다. 내성. 자기성찰. 어떤 심리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시기에는 내성의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20세기 중반쯤 미국에서 행태주의라는 게 나오면서 심리적인 것을 어떤 외재적인 행동처럼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식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인간의 심리, 정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방식, 스피노자는 후자의 방식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정신, 심리적인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문이 없는 것.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이라는 건 관념이고, 나중에 정리11에 가게 되면 정신은 무한지성의 일부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이라는 건 전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것. public한 것. 그러니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의 생각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를 반박한 이 글의 제목에 보편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별적인 정신, 마음, 이런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무한지성 같은 보편적인 정신만 있지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그런 정신은 없는 것이다. 개채성.

 

어쨌든 우리가 라이프니츠 인용문에서 보듯이 라이프니츠가 parallelism을 쓰는 맥락을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우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구별되는 자기 철학을 말하기 위해 쓴 용어다. 이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고 이론화하기에는 이 용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다시 강조하면, 물체와 실재를 구분하는 게 정리7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실재는 관념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실재다. 관념들 자신도 실재의 하나다.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도 있고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도 있다. 그러니까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에서 관념이라는 말을 형상적 실재와 실재에 대한 표상, 이렇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관념을 형상적 실재로 본다는 말은 관념을 양태로 본다는 말이다. 하나의 어떤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의 특징 중 하나는 원인이 된다는 점, 어떤 것의 원인이 되고 작용을 하고 작용을 받는. 반면에 표상적 실재라는 것은 이 형상적 실재에 대해 내가 표상을 갖는 것. 자동차에 대한 표상을 갖는다, 신호등에 대한 표상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이런 외부 물체뿐만 아니라 관념도 표상적 실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1)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고 2) 인식론적 평행론이 있다. 존재론적 평행론이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관이 모든 속성에 걸쳐서 펼쳐지고,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표현된다는 바로 이 부분. 평행론을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이걸 존재론적 평행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그 관념의 대상 사이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이고, 이것을 바로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본다.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에 두 가지 상이한 쟁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두 측면이 다 가능한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관념들을 표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2부 정리 7에 들어가 있는 것.

 

2부 정리32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7의 따름정리를 혼용하는 방식이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다. 그러니까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표상의 대상과의 일치. 그래서 이것을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관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에 대한 표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라는 말은 상당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재, 사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과작용을 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a는 관념b를 낳을 수 있고 관념b는 관념c를 낳을 수 있고... 이런 게 바로 형상적 실재다. 관념을 하나의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스피노자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관념을 이렇게 표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 반론한 게 바로 그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무언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작용 받을 수도 있는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그래서 정신도 관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정신이나 관념이나 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 구별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의 독특성은 관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제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로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관념이 하나의 사물이니까 이게 당연히 표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면, 관념이든 정신이든 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public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3부에 가서 정서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정을 굉장히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대한 나의 애틋한 사랑, 누군가의 비극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 이런 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정을 우리 개개인의 굉장히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서라는 것을 그렇게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퍼블릭한 것으로 여겼다. 이게 나중에 모방의 문제로 이어진다. 모방 욕망. 뒤에 가면 자세히 나올 것이다.

 

*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 A속성에서는 a가 따라나오고 B속성에서는 b가 따라나오고 연장속성에서는 물체가 따라나오고, 사유속성에서는 관념이 따라 나오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속성들은 동등하다. 그런데 우리가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생각해 보면, 저기서 물체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있을 테고, a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b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게다가 또 관념 자신에 대한 관념도 또 있을 것이다. 관념1에 대한 관념2, 관념2에 대한 관념3, 관념3에 대한 관념4..... 그리고 저 관념에 대한 관념은 분명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이고, 관념이니까 다 사유속성에 속할 것이다. 게다가 관념1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이런 식으로 나가다보면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보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다 있으니까 + 게다가 각각의 관념이 형상적 실재가 될 수 있다면 계속해서 관념에 대한 관념으로 배가가 될 수 있으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더 커지지 않는가. 이런 문제제기.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니, 어차피 무한한데...ㅋㅋㅋㅋ 무한 곱하기 9를 하나, 무한 곱하기 30000을 하나 다 무한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ㅋㅋ 1부 정리15의 주석에 무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무한 양을 가정한 것에서부터 이런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누군가 직접 스피노자에게 저 질문을 던진다면 스피노자가 뭐라고 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물체에는 이런 경우가 전혀 없지만 관념들의 경우에만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관념의 관념의 관념의.... 이게 생겨나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은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속성들 사이의 동등성, 평등 이런 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주장했고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정신이 속해있는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질서는 별개의 질서다. 데카르트는 철학자 이전에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후, 그 과학적 수학적 발견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자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데카르트는 17세기의 과학혁명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을 배격하고 대신에 근대의 새로운 과학혁명을 이룩한 사람 중 하나다. 갈릴레이와 뉴턴의 중간 시기에 있었던 사람. 갈릴레이, 뉴턴, 데카르트들의 공통점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려고, 수학의 논리를 가지고-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기하학적인 방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했던 점이다.

 

뉴턴 이전에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다는 말은 자연으로부터 원인의 힘을 박탈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 자연에 내재해있는 걸로 생각했던 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원인은 굉장히 목적론적인 원인인데- 원인으로서의 힘을 자연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사물을 원이나 삼각형이나 원통 같은 도형처럼 환원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운동이란, 물체가 자기의 내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저 위치 이동일뿐이다. 다른 어떤 것에 밀려서 움직이는 것. 이렇게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은 굉장히 피동적인 세계가 된다. 어떤 내적인, 인과적인 힘이 없는. 외부에서 충격을 주는 대로 움직이는. 그게 관성의 원리 inertia (, 관성의 원리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한 결과는 자연으로부터 운동능력, 역량을 다 빼앗아간 것이었다. ? 이 시기에는 이 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라이프니츠나 뉴턴 때에 와서 미분적분법을 가지고 와서 운동에너지, 힘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어서야 자연의 사물들이 피동성에서 벗어나서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받게 됐다. 하지만 그 이전, 갈릴레이 데카르트까지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대가로 자연으로부터 힘을 다 박탈했다. 데카르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데카르트의 초기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작업을 가지고 이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 사물들을 환원해야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방법을 나름 탐구한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신체가 속해있는 물리적인 세계는 완전한 피동성의 세계다. 능동성이나 자발성이 전혀 없는 세계.

 

그러면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신체가 물리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하면, 인간으로부터 뭐가 빠져버린 거지?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체성, 자발성, 의지, 이런 것들이 빠지는 것인데,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그 또한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그리고 데카르트는 인간의 제일 고유한 점이 의지라고 봤기 때문에 인간에게 뭔가 의지의 여지를 남겨줘야만 했다. 벌써 데카르트의 물리학이나 수학의 세계에서는 신체에게 그런 여지를 남겨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아있는 것은 결국 정신.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데카르트의 학문적인 관점(학문적인 맥락)에서 보면 필연적이다. 물리학자로서 보면 신체의 질서는 완전히 수학적으로 양으로 환원된 사물들의 질서인데, 거기서 그대로 놔두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지라든가 자유가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어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정신과 신체를 분리시킨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정신과 신체가 분리가 되고, 정신이 속해있는 사유의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연장의 질서가 완전히 다른데, 그럼 자연의 통일성, 우주의 통일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게 굉장히 수수께끼처럼 남는다. 또 하나,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서로 상이한 질서에 속해있기 때문에 상호작용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 정신과 신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합일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 데카르트의 질서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야 마땅하고 다른 질서에 속해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정신과 신체가 합쳐져 있다는 것을 일상경험에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두고 우리는 맨날 속고 있는 것이다라고 우길 수도 없고.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에 대한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데카르트가 1649년에 쓴 마지막 책인 <정념론>, 영혼의 정념이라는 책의 중요한 주제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근대철학자들,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말브랑슈 등이 제일 고심했던 주제도 바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였다. 라이프니츠가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제안했을 때 첫 번째 모델은 바로 데카르트주의에 입각한 설명이었다. 두 번째가 말브랑슈고 세 번째가 자기 자신. 그러니까 심신 문제는 당시 철학자들에게 굉장히 견고한 논의주제였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는 다르다, 분리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에 반하여 스피노자는 2부 정리7에서 정신과 신체는 같은 것이다로 출발한다.

 

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comprehendi 해석하기 참 까다로운 단어다. 이해된다, 파악된다/ 포함된다 포괄된다, 이렇게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스피노자가 여기서 continenturcomprehendi, 이렇게 다른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맥락상으로 보면 이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냥 같은 단어를 쓰지 다른 단어를 써서 차이가 있을까 고민이 계속 되지만 맥락상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 우리가 정리7에서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 같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게 초점이었다면, 여기서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초점이 된다.

정리9로 가게 되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이 초점이 된다.

정리7에서 8, 9로 가면서 조금씩 초점이 변하고 있다.

 

- 정리8을 보면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 사이에 마찬가지로라는 말이 들어갔으니 전자와 후자에 상응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 독특한 실재들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

- 2부 정의2에서 본질에 대한 정의를 살펴봤었다. 실재가 주어지면 본질도 주어지고, 그 본질이 주어지면 그 실재도 주어지고, 그 실재가 제거되면 그 본질도 제거되고 본질이 제거되면 실재도 제거되는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 그리고 이 정의의 본질과 상응하는 것이 3부 정의7의 코나투스.

- 저기서 코나투스를 그냥 본질이라고 하지 않고 현행적 본질이라고 했지만, 정리8에서는 형상적 본질formal essece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스피노자 주석가들 사이에서 크게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논문 쓰기 굉장히 좋은 문제ㅋㅋ actual하고 formal하고 달라?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거지?에 대한 문제로.

 

- 본질에 대한 아주 독특한 정의다. 스피노자의 본질은 종적 본질또는 여러 개체들이 공유하는 형상으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매우 개체적인 본질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이다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동물의 한 으로서 인간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에 있다고 보는 것. 곧 여러 동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고 말을 할 줄 알며 이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인간 중 어떤 한 사람이 사망한다고 해서 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본질 개념에 따르면 실재와 그 실재의 본질은 둘 중 하나가 정립되면 다른 것도 정립되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는 3부 정리7에 나오는 코나투스’, 정리9에 나오는 욕구내지는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현행적 본질 essentia actualis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2부 정리40에서 스피노자는 ‘ ’을 상상적인 관념/통념으로 규정하며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인간 전체‘ ’돌고래 전체같은 집합적 를 비판하고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를 불신한다.

 

- 그러면 스피노자에게는 이런 개별화된 본질개념 말고 다른 본질 개념은 없는가. 이를테면 종적인 본질같은 것. 있다.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에 나오는 형상개념. forma. 여기에 깔려있는 생각은 어떤 특정한 개인만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부르는 전체가 forma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이 말은 forma라는 것이 우리가 방금 정의2에서 본 것처럼 개체화된 본질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공유하는, 종적인 성질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forma 개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종적인 본질 개념이 녹아들어있는 것. (이 주석에서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정서를 갖는다라는 성질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갖고 있는데 이건 다른 종끼리 forma를 공유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인간도 정서를 갖고 동물도 정서를 갖지만 이것 역시 forma가 다른 것이다. 인간과 고양이는 forma가 다르니까 인간이 갖는 정서 forma와 고양이가 갖는 정서 forma는 다른 것이다)

 

-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4부 서문. ”변형된다“ mutetio mutation. 여기서 스피노자가 변형된다는 말을 어떻게 쓰냐면, 말의 고유한 form이 있는데 이게 벌레의 고유한 form으로 바뀌게 되면 말의 고유한 form이 해체되니까 파괴된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의 form이 다른 form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 스피노자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 종적인 형상, 종적인 본질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 본질 개념을 가지고서는 개별적인 본질, 개체적인 본질을 설명하기 적절하지 않으니까 2부 정의2에서는 바로 개체화된 본질을 정의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짐 끄는 말하고 경주용 말 사이의 차이가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차이보다 더 크다그러니까 들뢰즈는 form의 차이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들뢰즈는 이것을 affect의 차이라고 하는데-의 차이가 종적인 형상의 차이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말과 소라는 form의 차이보다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affect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생각과 가깝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다. 스피노자는 그렇게까지는 확실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이것은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과도 또 다르다.

 

<<<<<<<<<<<<<<<<< *** 현행적 본질 VS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가면 재미있는 논의로 이어지면서 어떤 문제가 제기가 된다. 한번 2부의 정의2로 가보자. 2부의 정의2는 실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본질개념을 정의해놓은 것이다.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 그러니까 여기에 따르면 A라는 사물이 있고 A라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러면 이 A라는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성립하면 A도 성립, 이것이 사라지면 A도 사라지는. 반대로 A가 성립하면 A의 본질도 성립하고 A가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지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본질이다.

- 그런데 이 정의2에 나오는 이 본질개념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이 본질은 굉장히 개체화된 본질이다. A라는 개체, A라는 사물과 뗄레야 뗄 수 없게 긴밀하게 연결된 본질. 이게 정의2에 나오는 본질이다.

- 그런데 우리가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사람의 본질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정리해보자. A라는 사람이 생겨나서 살다가 사라졌다. 2부 정의2에 따르면 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1부 정리17의 주석에 따르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남아있어야 한다. 영원본질이니까. 그런데 2부 정의2를 따르면 A라는 사람이 성립하면 A의 본질이 성립하고 A라는 사람이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상호관계가 성립. 그러나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 그리고 아까 1부 정리17의 주석에 삼각형의 본질 이야기도 나온다. 삼각형A의 본질이라고 안 하고 삼각형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본질은 보편적인 본질, 류적인 본질, 종적인 본질이다. 어떤 특정한 개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삼각형의 본질은 삼각형A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사람의 본질도 사람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그런데 2부 정의2에 나오는 것은 A가 사라지면 이 본질도 당연히 사라진다. 뭐지?????

 

- 3부 정리7로 가보자. “각각의(each)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코타투스를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현행적 본질이 바로 2부 정의2에서 내리는 이 본질이다. 이것은 그 사물이 성립하면 이 사물의 코나투스도 성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성립하면 이 사물도 존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없어지면 이 사물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 사물과 이 사물의 본질 사이에는 상호성, 상호전제관계가 성립한다. 이걸 스피노자가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그러니까 2부 정의2는 사실은 3부 정리7의 코나투스를 염두해두고 제시된 정의다.

 

- 그럼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이 본질은 현행적 본질인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영원진리로서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영원진리로서의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답은 나중에 5부에 나온다. 그것도 아주 첨예한 문제로 나온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사람과 관련해서 영원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는데, 지금 영원한 것은 다 신, 속성 이런 것들인데, 5부에서는 인간 같은 유한한 것과 관련해서 영원성을 이야기한다.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VS 2부 정리2에 나오는 본질: 현행적 본질) >>>>>>>>>>>>>>>>>>>>>>>>>>>>>>>>>>

 

- 여기서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를 다시 보자. 이 정리에서 신이 물체라면, 신도 분할될 것 아니냐, 물체는 분할되니까라는 적수들의 반론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체의 분할은 실체로서의 분할이 아니라 양태로서의 분할이다. 모든 물체가 분할하는 것은 아니다. 양태적으로 구별되는 것들로 물체를 이해할 때만 물체는 분할된다. 하지만 연장속성, 물질전체로서, 실체로서의 물체는 분할되지 않는다 (다시 들어도 딱 떨어지는 멋진 반박이다)

 

- 스피노자의 현행적 본질과 형상적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삼각형의 예를 들어보자. 삼각형을 독특한 실재의 사례라고 본다면, 삼각형의 형상적 본질이 있을 것이고, “내각의 합이 두 직각과 같다가 바로 형상적 본질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은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형상적 본질에서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 , 삼각형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성질들이 따라 나온다. 그것들 역시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 정리7과 정리7의 주석에서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이지만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원과 원의 관념은 사유속성에 따라서 표현되기도 하고 연장속성에 따라서 표현되기도 하고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스피노자는 정리8에서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정리7의 논법대로 하면 이것들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관념들, 이때 관념들은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들이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에는 뭐가 있을까. 우리는 2부 공리1에서 신/실체는 본질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고 했지만,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곧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원인과 다르게 인간은 본질상 실존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본질과 실존 사이의 존재론적 괴리가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것들의 특징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사례로 생각되기 쉬운, 이를테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아직 출시되지 않은 아이폰 13 같은 것들은 정리9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정리8의 따름정리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따름정리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고 있다. 1)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이게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것), 2)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것. 이때 지속이라는 것은 우리식으로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시공간적인 어떤 개채성을 갖고 있는 어떤 것이다. 아이폰13이라든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아직 실존하고 있지 않지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보면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게 어떤 것인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와는 다른 것이다.

- 지속 개념은 3부의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 정의2와 연관 지어 보면 실존하는 사물이 있어야 코나투스가 존재하고 실존하는 사물이 없으면 코나투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할 때만 함께 존재하는 현행적 본질이다. 3부 정리8을 보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함축한다라고 하는데, 코나투스의 시간은 무한정하다= 그 사물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 그럼 코나투스의 시간은 지속이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 그러니까 지속이라는 것은 정의상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정확히 말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게 그냥 쭉 계속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무한하지는 않고, 또 영원하지도 않은. 그래서 무한한이라고 하지 않고 무한정한이라고 한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수 있지만 무한하다, 영원하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 실존의 차원을 스피노자는 지속이라고 한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가령 인간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인간은 본질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특성들, 웃을 수 있다/직립할 수 있다 같은 득성들을 갖고 있다.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직립할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데 앉아있다는 특성만 갖고 있는 소크라테스같은 그런 것. 이런 것들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이것들은 지속을 갖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 없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없고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같은 것. 그렇다고 이게 아주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말할 수 있는 특성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갖고 있는 특성이니까. 그러니까 한 가지 특성으로만 파악된 독특한 실재,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 그렇다면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직립하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이것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실존하는 개체로서 개별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오직 무한지성 안에만 있다는 그런 의미다.

- 스피노자가 정리8에서 이런 사례들을 든 이유는 그래야 정리8과 정리9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정리8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체적인 개체라고 상정할 수 있는 어떤 실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리8과 정리9는 구별되어야 하고, 정리8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현행적 실재라는 것은 아직 지속의 차원이 들어가지 않은, 구체적인 개체성을 갖지 않는 그런 독특한 실재다.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것.

- 스피노자의 주석을 보면 그림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예시하는 이 원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3권 정리35에 증명의 대상으로 나오는 도형이다. 수직으로 교차하는 선을 가진 원. 스피노자는 여기서는 이렇게 두 개의 선만 존재하지만 이 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 또는 직사각형이 있을 수 있다, 그게 실존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실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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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는 아쉬탕가 요가가 딱 한 타임 있었고 

그마저도 매주 가는 수업이랑 시간이 겹쳐서 한 번도 못할 줄 알았는데

지난 주 수업이 취소되는 바람에 3주 만에 아쉬탕가 요가 수업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가는 금요일 밤 수업이었다. 그것도 제일 마지막 타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한산했고, 

사람이 적으니 요가실도 매우 고요해서 

거리의 밤불빛들이 평소보다 소란하고 화려하게 창을 뚫고 들어와

적막이 남겨진 빈 공간들 사이로 흘러다니며 요가실의 가장자리를 감싸는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 금요일 밤이라는,

다른 밤보다는 조금 특별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 밤에 요가를 선택한 다섯 명의 사람들이

조용하게 그러나 그 안에서는 각자의 몸과 만나느라 뜨거워진 열기를 호흡에 실어내며 

한 시간동안 하는 요가에는 어쩐지 좀 황홀한 구석이 있었다. 

평소에도 요가할 때는 늘 내 몸과 마음만을 살피고 느끼느라 

종종 내 옆에서 요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 못할 때가 많지만 

이날에는 몰입의 정도가 그보다도 더 커서

끝나고 가만히 매트 위에 누워 사바사나를 하는 동안에는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아주 잠깐 다른 곳에 갔다가 막 돌아온 듯한 기분이 되어서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창틀에 걸려 끄트머리만 살짝 보이는 달을 한참 바라봤다.

금요일 밤 요가, 너무 좋구나.

나오는 길에 매니저님께 슬쩍 물어보니 금요일 저녁 요가들은 늘 이렇게 한산하다고.  

지금 듣고 있는 수업이 언젠가 끝이 나고나면 무척 허전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는데

그 대신 금요일 밤 마지막 시간에 요가를 할 수 있겠구나 그나마 참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생각이 앞으로 되감기며 지금 듣고 있는 수업이 끝나는 날이 떠올라 미리부터 서운해졌다.

그래도 아직 1년은 더 이어질 수업이라고 생각하니

끝내주는 소설을 아껴가며 읽다가 아직 뒤에 읽을 분량이 몇 권 더 남았다는 것을 떠올리며 안심하는 것처럼  

그 남은 1년에 감사했고, 매주 들을 수 있다는 지금이 더 애틋하게 느껴졌고, 

그러다보니 갑자기 나의 축구팀, 나의 일, 나와 함께하는 이들, 내가 존경하는 이들  

내가 요 1,2년 사이에 얻은 것들, 잃어서 다행인 것들이 함께 떠오르며 

내가 작년부터 내 인생에서 매우 소중한 어떤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다시 들었다.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도 느릿느릿 제대로 짚어가며 듬뿍 느끼고 즐기고 감각하며 보내고 싶고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금요일 밤의 요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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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ordo et connexio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증명 이는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원인지어진 것에 대한 관념은, 이것이 그 결과가 되는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현대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아주 분분한 중요한 정리. 자세히 파고들자면 한 달 동안 다뤄야할 정리이다

- 정리5: 관념에 대해서만. 관념/사유속성을 한정해서 이것들이 신을 원인으로 삼듯이-

- 정리6: 양태들(사유+연장+속성abc등등)도 실체로서의 신을 원인으로 삼고 있다. 사유속성은 사유속성으로 표현되는 실체로서의 신을 원인으로 삼고 있고 연장속성은 연장속성으로 표현되는 실체로서의 신을 원인으로 삼고 있고.

- , 정리5가 사유속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정리6은 이것을 모든 것으로 확장했다

- 정리6의 따름정리가 곧 사유의 양태들이 아닌 실재들의 형상적 존재가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면, 이는 신이 실재들을 미리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준 바, 관념들이 사유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과 동일한 방식,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이 실재들이 그것들 자신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도출되기 때문이다.“ 정리7로 직결

 

* 주석을 보면 어떨 때는 질서만 언급하고 어떨 때는 연관만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왜 질서만이 아니고 연관만이 아니고 왜 질서와 연관이라고 했을까? 왜 이 문장에서만 질서와 연관인 걸까? 질서나 연관이 아니고 질서와 연관인 걸까. (누가 편지로 질문 좀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 Martial Gueroult (1890-1974) 아주 중요한 주석서를 쓴 프랑스 철학사를 대표하는 마샬 게루. 그가 스피노자 윤리학에도 두 개의 주석서를 썼다. 1부에 대해 한 권(1968) 2부에 대해 한 권(1974). 사실 세 권으로 기획했는데 3권 서문만 쓰고 세상을 떠났다. 아마 3-4-5부는 한 권으로 묶어서 써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1권은 거의 600페이지가 넘고 2권은 더 두껍다. 마샬 게루가 질서와 연관에 대해 사변을 쓴 것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연관: 사물의 본질의 질서, 질서: 사물의 실존의 질서>를 표현한 것으로 연관이 질서보다 수준이 높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는 어디 있는가? 없다ㅋㅋㅋㅋ 딱히 근거가 없다. 어쨌든 스피노자가 서로 다른 단어를 쓰고 있으니까, 이것을 스피노자 철학 체계에 맞춰서 어떻게든 대결을 시켜야 속이 풀려서ㅋㅋㅋ

 

- comexio verum 이라는 표현이 있다. 상당히 오래된 표현이다. 고대 스토아학파 이래로 계속 전승되어 내려온 용어다. connection of things 저게 뜻하는 바는, 만물은 다 연결되어 있다. 만물의 연관, 만물의 연관성. 실재들의 연관. 사물의 연관. 그래서 매우 익숙한 표현인데 17세기는 과학혁명이 일어난 시기이고, 자연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이 생긴 시기인데, 새로운 과학 혁명의 요체는 기계론적 세계관, 질적으로 상이한 사물들을 양으로 환원해서 통일된 법칙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역학적 세계관. 이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보면 만물의 연관은 아주 시대착오적 생각이었다. 만물의 연관은 모든 사물을 한데 끌어 모았다가 퍼지게 하는, sympathy로 모였다가 antipathy로 헤쳐졌다가 하는, 밑바닥에 우리가 모르는 숨은 원리가 있고, 우리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 밑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사물을 움직이는 기운이 있다는 것까지 이어진다. 이를 테면 동양의 5부 서문에 나오는 오컬트 퀄리티 같은. 기계론적 세계관은 저것을 거부한다. 스피노자는 과학혁명을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인데 그런 그의 철학에 만물의 연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이 단어를 쓰고 있지만 아마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해서 새롭게 쓰고 있는 것일 확률이 훨씬 높다.

 

* 정리7은 이른바 평행론paralleism 명제라고 불린다. 이때 평행론 또는 평행성이 가리키는 것은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 평행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평행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평행론이라는 개념이 정리7을 규정하기에 적절한 용어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리7 자체에는 평행하다는 말이 없다. ”같은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걸 왜 평행론이라고 할까?

- 사실 이 용어 자체는 스피노자가 사용한 말이 아니라, 라이프니츠가 처음 사용한 것이다. ”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물체 안에 발생하는 것 사이에 완전한 평행성을 확립해놓았다따라서 라이프니츠가 사용한 말을 스피노자 철학에 적용하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해 여러 의문과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그냥 대세에 따라ㅋㅋㅋ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마샬 게루도 평행론 명제라고 부르고 들뢰즈도 그렇다. 들뢰즈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스피노자의 정리7 평행론에 대해 무려 두 챕터에 걸쳐 서술한다.

- 이 두 사람뿐이 아니다. 최근 들어 약간 엉뚱하게 스피노자 학계에서 평행론 논의에 매우 공을 많이 들이며 설왕설래중이다. 그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 Yitzhak Melamed. 요즘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스라엘 출신의 스피노자 연구자이다. 박사논문으로 평행론 문제를 다뤘고 그것을 발전시켜서 책을 냈다. 재작년에는 한국에서도 평행론 문제를 가지고 박사논문을 쓴 철학자가 있었고,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연구자들이 평행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평행론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인 평행론이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정리7에서 말하는 평행론은 다중적인 평행론이다.

- 어쨌거나 여러 주석가들이 평행론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쓰지 않을 수는 없는데 약간 이상하다. 스피노자가 평행론이라는 말 대신 같다라는 말을 썼는데 우리가 꼭 평행론이라는 말을 써야할까. 어떻게 보면 평행론의 논의가 복잡한 이유는, 스피노자가 쓰지 않은 단어로 스피노자 철학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자꾸 뭔가를 덧붙이게 되고 왜곡 변형하게 되면서 그런 게 아닐까.

 

* “실재들의 연관에서 우선 실재들이라는 개념에 주의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실재res는 연장속성에 속하는 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물체라고 혼동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제시될 수밖에 없다

 

1) 실재들 = 물체들이므로 관념들은 실재들이 아니다.

2) 따라서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A라고 하자)실재들의 질서와 연관”(B라고 하자)과 같은 것이라면, 이때 같음AB라는 서로 상이한 연관 사이의 일치 내지 상응의 문제가 된다

3) 이렇게 되면 이러한 일치와 상응이 어떻게 가능한지 수수께끼로 남게 되며 이를 서로 무관한 두 질서 내지 연관 사이의 평행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관념은 사유속성이고 물체는 연장속성인데 1부 정리2(상이한 속성을 지닌 두 물체는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에서 관념은 물체를 상정할 수 없고 물체도 관념을 상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하나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 독립적인 것. 한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가 다른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와 인과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 관념이 속한 사유속성과 물체가 속하는 연장 속성은 인과적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독립적이다. 그러니 관념과 물체가 절대 같을 수 없다. 논리적으로 인과적으로 관념과 연장은 합치하지 않는데 이게 어떻게 합치한다고 하는 걸까.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정리7의 실재를 물체로 해석하면 안 된다.

 

4) 따라서 왜 스피노자가 정리7에 대한 증명에서 1부 공리4(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한다)를 제시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서로 독립적인데 왜 원인과 결과야,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5) 더 나아가 뒤에서 보겠지만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을 동일한 연관, 동일한 질서라고 말하는 것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정리7이 스피노자 체계에서 지닌 중요성에 비하면 이 정리에 대한 증명은 너무 간단하다.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공리4의 논점이 원인지어진 것”, 결과원인사이의 관계를 제시한다는 점에 유념해야한다. 이는 곧 스피노자가 AB같은 것이라고 할 때 AB의 관계가 원인과 결과라는 점을 가리킨다.

6) 따라서 같은 것이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하는데, 같다는 것은 서로 외재적이고 (존재론적이거나 논리적으로 무관한) 두 개의 질서 내지 연관 사이의 일치 내지 상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니까 실마리는 실재라는 단어다. 물체만이 아닌, 관념도 실재, 신도 실재,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실재다. 물체로 한정짓지 않아야 한다.

 

* 2부 정리7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연의 인과적인 동일성을 표현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6에서 신을 절대적 존재자, 곧 각자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로 규정한다. 속성들 각자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은 속성들 각자가 자율적이라는 것(스피노자의 전문적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유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성들은 외부의 어떤 것에도 제약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속성들은 서로 동등하다. 곧 속성들 중 하나가 다른 것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가령 사유속성은 연장속성에 비해 우월하지 않으며, 반대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정신을 비롯한 관념들)도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신체를 비롯한 물체들)에 비해 우월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듯 신 또는 실체의 절대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성이란 모든 것을 포함함을 뜻한다. 곧 신 또는 실체가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것은 실체가 각자 무한한, 각자 다른 것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체의 절대성은 실체의 절대적 동일성을 함축한다. (1부 정리11 신 또는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그러나 이때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나 신을 하나의 개체, 더 나아가 인격적 개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또는 신은 자연 전체이지 이러저러한 개별적 존재자가 아니다. 그리고 실체를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은 각자 자율적인 인과 연관 내지 질서이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해내는 인과관계들 전체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2부 정리7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을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은 동일한 하나의 연관 내지 질서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2부 정리7의 주석, ”우리가 자연을 연장의 속성 아래 인식하든 아니면 사유 속성 아래 인식하든 또는 그 어떤 속성 아래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발견한다 이 점은 3부 정리3의 주석에서도 다시 긍정된다.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간에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은 하나다.“

 

2부 정리7의 또 다른 논점은 속성들 사이의 실재적 구별이라는 논점이다. 스피노자가 자연의 인과적 질서과 연관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속성들 사이의 구별을 배재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유와 연장 같은 속성들이 각자 자신의 유안에서 무한하고 따라서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는 자율성을 유지하는 한에서, 사유와 연장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된다. 곧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 제약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런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 관계는 오직 각각의 속성 내부에서 전개될 뿐이다. 사유 속성에 속하는 양태인 정신과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인 신체 사이에도 아무런 인과관계 내지 상호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3부 정리2 신체는 정신이 사고하도록 규정할 수 없고 정신은 신체가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또는 그 이외에 (만약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다른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나 상호 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신과 신체가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은 아니다.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통해 표현되듯이, 그리고 동일한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이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때로는 연장속성 안에서 표현되듯이, 인간이라는 통일체 역시 때로는 정신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함의하는 것 중 하나는, <윤리학> 2부 정리7의 주석이 말하듯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평행성내지 평행론이라는 말을 라이프니츠가 처음 사용했지만 이 개념은 스피노자 철학에 더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3중의 평행성

1) 양태들의 평행성 (관념과 그 대상(가령 물체)의 평행성) <- 이것이 평행한 이유는 2)

2) 속성들의 동등성/상동성 (사유속성, 연장속성...) <- 이것이 동등/상동하는 이유는 3)

3) 존재의 동일성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신의 사유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행위역량“. 연장속성에 포함되어 있는 물체들의 역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유속성에도 적용된다. 신의 행위역량을 신체적인 또는 물리적인 행위역량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행위 역량이라고 부른 것은 연장 속성을 통해 발휘되는 물리적인 행위 역량= 인과 역량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사유속성을 통해 발휘되는 인식 역량을 가리키기도 하며, 더 나아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다른 속성들을 통해 발휘되는 또 다른 행위 역량들을 가리킨다. 곧 이러한 행위 역량은 모든 속성들을 통해 표현된다.

 

이렇게 이해할 때 그 다음 문장처럼 이야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연장 속성 안에서 물체로 나오는 모든 것, 사유 속성 안에서 관념으로 나오는 모든 것, 알 수 없는 속성abc...등등에서 나오는 모든 것, , 이 모든 각각의 속성에서 신이 행위적으로 결과로 산출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형상적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표상적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형상적 실재성은 어떤 사물을 그 자체로 고려했을 때 그 사물이 지니고 있는 실재성을 가리킨다. 반면 표상적 실재성은 정신 안에 재현된 것으로서의 실재성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우리는 태양으로부터 두 가지 실재성을 갖는다. 태양 자체의 실재성(태양계에서 제일 큰 항성 등등의 특성을 갖는 연장의 양태), 우리가 태양에 대해 갖는 관념의 실재성(정신 안에 재현된 것으로서의 태양). 전자가 형상적 실재성이고 후자가 표상적 실재성이다.

 

하지만 또한 관념들 역시 두 가지 실재성을 갖는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 : 사유 속성 내의 한 양태로서 고려되었을 때의 관념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 : 다른 관념에 의해 재현된/표상된 것으로서의 관념

 

따라서 마지막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신은 자신이 자신의 행위역량을 통해 산출한 모든 실재(이 실재는 형상적 실재를 의미)에 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 곧 모든 형상적 실재는 신의 관념 안에 그것과 일치하는 표상적 실재로 표상/재현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신은 자신이 절대적인 행위 역량을 통해 산출해내는 모든 형상적 실재들을 동시에 신의 관념 안에서 표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사유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동일한 질서 내지 연관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32에서 이런 말을 한다.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 idea 관념 ideatum ”그 대상이 되는 것관념의 대상이 되는 관념이 표상하는 것.

 

, 정리7의 따름정리의 마지막 문장에서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2부 정리32의 증명도 따르면 신 안의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신이 형상을 산출할 때 그에 대한 표상도 같이 산출하고, 신 안의 모든 관념은 그 대상과 합치한다. 신은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통해 형상적 실재를 산출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의 표상적 실재도 산출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방식, 동일한 연관에 따라 합치한다 (adaequatio 아다이콰치오 일치 상응. 지성 바깥의 관념과 사물이 딱 일치할 때 그것이 진리다) 그러니까 ideaideatum이 일치하면 진리다.

 

신의 사유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동등하다도 참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다. aequalis 아이콸리스 영어로 equal 인데, 평등하다, 동등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같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니 여기의 동등하다는 것을 좁은 의미의 동등함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넓은 의미의 동등함, 수학에서 이야기하듯이 equal, 같다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논점과 부합하는 것 같다.

 

주석 좀 더 진행하기 전에 앞에서 우리가 보여준 것을 여기에서 상기해봐야 한다.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어떤 히브리인들이 신과 신의 지성 및 신이 인식한 실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구름 사이로 보듯이 보았던 게 바로 이 점인 듯하다.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causarum connexionem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원인들과의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속성들에 대해서도 나는 이처럼 이해한다. 그리하여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지금으로서는 이를 더 명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1부 정의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를 조금 더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곧 여기에서는 1부 정의4에 나오는 지성이 무한지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무한한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하는 것은 바로 속성이다. 그리고 연장과 사유는 각각 신의 속성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유이한 속성들)이다. 스피노자는 연장과 사유를 때로는 연장되는 실체사유하는 실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1부 정의6 및 정리11에 따라) 모든 속성은 독자적인 실체를 구성하지 않고 유일한 절대적 실체로서 신에게 속하기 때문에, 연장되는 실체와 사유하는 실체는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며, 이 동일한 실체는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고 할 수 있다.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두 개의 속성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만 알고 있는데 우리가 과연 신을 인식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이면 표본이 너무 작지 않은가. 여론 조사 할 때 5000만 인구 중에 두 명을 표본으로 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5000만도 아니고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우리가 두 개의 속성만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신의 본질을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이 정리7인 것이다(ㅠㅠㅠㅠ)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여론조사와는 다르다ㅋㅋ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알아도, 혹은 사유 속성 하나만 알아도 우리는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 앞 문장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실체가 사유속성으로도 표현되고 연장속성으로도 표현되는데, 이것은 양태도 마찬가지다.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가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듯이, 연장에 속하는 양태와 그 양태의 관념 역시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곧 이것은 때로는 연장을 통해 표현되고 때로는 사유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단 이것은 실체가 아니라 양태다.

 

더욱이 연장에 속하는 양태와 그 양태의 관념 사이의 동일성은, 하나의 개별 양태에 속하는 어떤 특별한 성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사이의 같음또는 동일성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2부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신체와 신체에 대한 관념으로 이루어진 양태고, 인간은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정신으로 때로는 연장 속성 안에서 신체로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

 

이것은 3부 정리7로 가면 코나투스로 표현된다. 3부 정리9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가 정신과 신체로 동시에 표현되는 것이 욕구이고, 정신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의지라고 한다.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인간적 본질로서의 욕구가 신체를 통해서 표현이 되기도 하고 정신을 통해서 표현이 된다, 즉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때 스피노자가 코나투스라고 부르는 것은, 따름정리의 표현대로 하자면, 바로 행위역량, 또는 동일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이다

 

정리7의 주석의 저 문장을 잘못 읽게 되면 굉장히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 이것을 가령 인간의 정신과 신체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은 사건과 그 사건에 상응하는 정신 안의 관념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테면 신체라고 하지만 신체의 수준이 다 다른데, 아주 미시적인 수준으로 들어가면 세포가 있겠고, 그렇다면 이 세포가 죽으면 정신 안에 이 세포의 죽음을 인식한다거나 이 세포의 죽음을 애도하는 관념이 있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에 봉착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세포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저 문장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에 다 1:1 상응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가 다 상응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스피노자가 하려는 말은 그것과는 다르다.

 

주석의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을 이어서 다시 보면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존재하는 모든 양태는 일종의 관념을 다 갖고 있다. 인간이 신체와 더불어 정신을 갖고 있고, 이것이 하나의 동일한 양태를 구성하는 것처럼, 자연 안에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들을 다 갖고 있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무생명체도.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 다른 개체들-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데, 그러니까 인간을 제외한 다른 개체들, 무생명체까지도 상이한 정도이기는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있다는 말이다. 무생명체가 과연 어떤 식으로 정신화되어 있는지, 스피노자의 정신화가 뜻하는 바가 뭔지 논쟁이 분분하지만, 2부 정리7에 따르면 저럴 수밖에 없다. 왜냐면 실재가 때로는 연장 속성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사유속성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다른 속성들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동일한 실체, 또는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이듯이, 자연의 통일성이 그렇듯이, 양태들의 경우에도 하나의 동일한 양태가 때로는 연장속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유속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한 양태도 때로는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신체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욕구를 갖고 있듯이 다른 사물들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양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의 동일한 인과연관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스피노자가 정리6의 따름정리에서 속성으로부터 양태들이 따라 나온 방식은 동일하고 동일한 필연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정리7에서도 하나의 동일한 욕망, 하나의 동일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어떤 면에서는 일양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떤 히브리인들이 신과 신의 지성 및 신이 인식한 실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구름 사이로 보듯이 보았던 게 어떤 히브리인: 그냥 마이모니데스가 그랬다고 말해도 될 텐데ㅋㅋ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causarum connexionem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 스피노자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내지 연관을 더 정확히 원인들의 연관이라고 제시한다.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는 질서와 연관은 원인들의 질서내지 원인들의 연관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원인들과의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속성들에 대해서도 나는 이처럼 이해한다. : 이것은 유일한 실체로서의 신이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에서 표현되고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에서 표현된다고 말할 때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는 것은 한편으로 인과 관계는 각각의 속성 내에서 그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 사이에서 전개된다는 점(관념은 관념끼리, 물체는 물체끼리 등).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원인들의 연관은, 신이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연관 내지 질서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결과로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스피노자는 2부 정리7에서 1부 정의1의 자기원인 개념을 풀어쓰고 싶었던 것 같다. 1부 정리25의 따름정리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 곧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이점에 대한 증명은 정리15 및 정의5로부터 명백하다.” -> 신이 만물을 생산하는 인과작용은 신이 자기원인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작용이다. = 신은 만물을 생산할 때 만물을 제약하거나 한정하지 않았다. 만물을 원인으로써 산출한다(만물에게 원인으로서의 역량이 있게 산출한다) 만물이 능동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만물에게 능동적인 주체로 행동할 수 있는 달란트를 주었다 정도의 표현이 되겠다.

 

사유속성의 관념a 관념b 관념c .......

연장속성의 물체a 물체b 물체c ..........

A속성의 Aa Bb Cc ...........

B속성의 Ba Bb Bc...........

-> 관념abc의 연쇄, 물체abc의 연쇄, Aabc, Babc의 연쇄, 이 모든 연쇄들은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다.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의 연쇄이기 이전에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다. 그러니까 원인들의 질서와 연관은 한 속성 안에서가 아니라 모든 속성안에서를 의미한다. 들뢰즈의 3중 평행성의 표현을 빌면 평행론의 근거는 존재의 동일성. 실체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이 존재하기 때문에 속성들 사이에 동등성과 상호성이 성립하고, 속성들 사이에 동등성이 성립하기 때문에 양태들이 관념A-물체A 관념B-물체B가 상응하면서 양태들의 평행성도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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