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정리8을 정리해보면,

- 독특한 실재들(=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양태들)의 관념들

이 두 가지가 대응관계다. 여기서 공통된 것은 독특한 실재인데, 이것은 어떤 인상을 주냐면, 형상적 본질은 독특한 실재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인데,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무관하게 양태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것.

 

* 정리8의 따름정리

1)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

-> 사물이 갖고 있는 현상적 본질

2)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 사물이 갖고 있는 현행적 본질

- 지속 개념은 3부의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 정의2와 연관 지어 보면 실존하는 사물이 있어야 코나투스가 존재하고 실존하는 사물이 없으면 코나투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할 때만 함께 존재하는 현행적 본질이다. 3부 정리8을 보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함축한다라고 하는데, <<<코나투스의 시간은 무한정하다= 그 사물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 그럼 코나투스의 시간은 지속이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실재가 끝나기는 끝날 것인데, 언제 끝날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

 

- 1부 정의8에서 영원을 다뤘고 2부 정의5에서는 지속을 다루고 있다(”지속은 무한정한 실존의 연속이다“)

- 5부 정리21에서는 정신은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이 아니라면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고 과거 실재들을 회상할 수도 없다라며, 정신이 상상/기억/회상을 하는 건 신체의 지속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정리22에서는 하지만 신 안에는 영원의 관점에서 이 또는 저 인간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리21지속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신체의 본질이고, 정리22영원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신체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현행적: 지속. 신체 / 형상적: 영원. 신의 속성 안

- 5부 정리21, 22를 연결해서 생각하면, 현행적 본질은 지속의 차원에서 규정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면 형상적 본질은 영원의 차원에서 규정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실재는 지속의 차원에서는 현행적 본질을 갖는데 영원의 차원에서는 형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들 각자가 다 영원의 차원에서 (지속의 차원에서 갖고 있는 코나투스와는 또 다른)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형상적 본질은 현행적 본질을 포괄하는 것 아닌가? 지속도 영원에 포괄되는 것 아닌가?

- 또한 이렇게 되면, 플라톤이 감각적 세계와 형상적 세계/이상적 세계 두 개를 구별했듯이 스피노자도 지속의 차원과 영원의 차원, 현행적 본질의 차원과 형상적 본질의 차원 이렇게 두 개의 세계로 구별하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플라톤주의가 되어버리는, 플라톤주의적인 세계상으로 가게 되는 것인데, 사실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스피노자 철학이랑 잘 맞지 않는다. 1부 정리17의 주석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 플라톤주의 철학과 스피노자 철학

- 여기서 보면 창조적 지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니까, 신이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 -> 곧 창조, 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을 지각하거나 식별하거나 발견하는 것,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지성은 본성상 사물이 먼저이고 우리의 지성이 그 다음에 오거나, 혹은 동시에 온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적수들에 따르면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니까, , 뭔가를 인식한다는 것=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 지성이며,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플라톤주의적인 신학이다.

- 이것과는 약간 다른 형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앞에서는 신의 지성을 창조적 지성이라고 했는데, 그와 다르게 신의 의지를 지성하고 구별하는 경우다. 그때는 신의 지성이 인식하는 것을 ideal type, 원형으로서 이해한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이데아로서의 원형이 있고, 신의 지성이 그걸 인식하고 그것을 의지를 통해 창조한다. ideal type으로서의 원형들, 이데아들은 다 영원한 것이다. <- 이것 역시 플라톤적인 생각이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런 생각들을 전부 인정하지 않는다.

 

-스피노자 초기 저작 중 하나인 <형이상학적 사유>에 나오는 구별법을 염두에 두는 것도 필요하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스피노자가 생전에 자기 이름으로 출판한 유일한 책이자 유럽철학계에서 아주 큰 명성을 얻은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 일종의 부록으로 덧붙여진 저작인데, 스콜라 철학에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 책이다. 스피노자 자신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기보다 당대의 대학에서 가르치던 스콜라철학 용어들을 정리해서 그 개념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형이상학으로 부르는 것은 스콜라철학을 말한다.

- 12. 형상적 본질은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실재가 현행적으로 실존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데, 모든 실재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들의 본질들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한다

-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가리킨다. 이것은 신이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창조와 독립해서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하는, 17세기 철학에서 영원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창조된 것이라는 것은 영원성을 지니지 않은 지속의 차원의 존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형상적 본질은이 양자와 다르다고 주장. 왜냐하면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티카> 1부 정리25에 보면 신적 본질에만 의존한다는 뜻에 대해 스피노자는 정확히 이렇게 말하다. 신은 실재들의 실존의 작용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의 작용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본질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원인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신이 생산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실존뿐만 아니라 본질까지도 신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 이런 것들만 봐도 플라톤주의는 스피노자 철학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정리17의 주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1부 정리33의 주석이나 정리31의 주석만 봐도 스피노자가 여러 대목에서 플라톤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주의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는 것은 스피노자 철학과 맞지 않는다.

- 플라톤주의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신과 무관한 영원성의 세계를 상정하게 되고, 이것은 또 뭔가 초월적인 세계를 상정하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초기저작부터 계속 이런 초월성을 비판해왔기 때문에 플라톤주의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기에는 뭔가 걸리는 것들이 많다.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정신하고 잘 맞지 않는다.

 

-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2부 정리8, 5부 정리21, 22에서, 스피노자가 영원성과 지속을 상당히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고 2부 정리8을 보면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을 아주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다. 이게 정리8이 매우 troublesome한 정리라고 말했던 이유다. 스피노자 철학하고 플라톤주의는 뭔가 잘 맞지 않는데, 어떤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플라톤주의를 연상시키는 이런 이원론적인 모습들이 군데군데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영원과 지속,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 본질과 실존, 이런 식으로. 또 하나 유명한 대목은 1부 정리18에 나온다.

-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원인 개념을 두 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내재적/ 타동적. 타동적 원인causa transiens 우리말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 영어로는 transitive cause. 타동적 원인은 결과를 자기 바깥에 생산하는 원인을 말한다. 그러니까 원인과 결과 사이에 외재적 관계가 있는 것. / 내재적 원인은 신이 자신이 생산한 결과를 신 바깥에 산출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안에 산출하는 것이다.

- 그래서 신은 모든 것의, 즉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문장 자체만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것은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기 아주 좋은 대목이다. 신이 만물에 내재적 원인이라면 만물끼리는 어떻다는 말일까? 신과 만물 사이에는 내재적 인과관계가 있는데 그러면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거기에도 신과 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적 관계가 있을까? 스피노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니까 신과 만물사이에는 내재적 관계가 있는데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타동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 여기서 1부 정리28을 찾아보자. 모든 독특한 실재, 곧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 후자의 원인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1부 정리28은 바로 사물과 사물 사이, 특히 유한양태와 유한양태 사이의 관계를 아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정리이다.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를 이원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신과 만물 사이에는 내재적인 관계가 있는데, 각각의 사물과 사물들 사이에는 정리28과 같은, 타동적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우주에는 신과 만물 사이의 인과관계- 사물과 사물 사이의 인과관계, 이 두 가지 인과관계가 이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이 1부 정리18과 정리28에 나타난 이원적인 인과관계, 2부 정리8에 나오는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의 이원적인 본질 관계, 5부 정리21과 정리22에 나오는 지속과 영원의 이원적 관계...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 철학은 한편에서 보면 매우 반플라톤적인 철학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여러 대목들을 보면 매우 이원론적인 것들이 있다.

 

-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는 일관성이 없다, 어디서는 이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영원성이라는 단어, 신에 대한 사랑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아주 무신론자로 보일만큼 반신학적인 반기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에티카>15년이 걸린 책이기 때문에 쓰면서 초기 생각하고 후기 생각하고 많이 달라져서 이 책은 한 권의 책이 아니다, 여러 권의 책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일관성이 없다고 일축해버리는 것은 너무 편리한 방법이다. 어쨌든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일관성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게으른 사람들이다. 열심히 보면 충분히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다. (<- 이게 바로 학자들의 논쟁법이다ㅋㅋ)

 

*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같은 개념이라는 관점에 대하여

 

-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분명히 본질에 대해 두 개의 개념, formal essenceactual essence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스피노자의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다른 개념이 아니다. 같은 개념이다. 한 개념을 두 가지 상이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지 그것을 아예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 그런데 우리가 후자처럼 주장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해명해야만 한다. 일단 우리가 처음에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눠서 설명하게 만들었던 그 대목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이것이 무슨 이야긴가. ”신의 속성 안에서만 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무슨 말인가. 이런 것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예를 들어서 1부 정리8의 주석2

- 하지만 변양은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으로, []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실체]의 개념에 따라 그 개념이 형성되는 것들로 이해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체들은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지성 바깥의 실체들의 진리는 오직 그것들 자신 안에만 존재한다.“

 

-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관념 대상들이 없는 관념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주장은, 변양들이 지성 바깥에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그것들의 본질은 (그것이 다른 것에 의존하는 변양인 한에서)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실존하지 않는 변양에 대해서도 우리는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다른 것이라는 것은 뭘까? 이 다른 것이 실체, 또는 물체의 경우라면 연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너무 자명한 만큼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거의 없으니까, 우리는 약간 더 구체화시켜 명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도움이 될 만한 텍스트를 끄집어내보면 1부 정리11의 두 번째 증명이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와 매우 다른 근거율을 제시하고 있다.

 

*** 라이프니츠의 <이성에 토대를 둔 자연과 은총의 원리> 7. “어떤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곧 어떤 것도 사태를 충분하게 인식하는 이에게 왜 그것이 다른 식으로가 아니고 그처럼 존재하는가에 대하야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원리가 정립되면 우리가 첫 번째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도대체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왜 도대체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무는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 충족이유율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PSR 충분한 근거의 원리

- noting without sufficient reason.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태를 충분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왜 도대체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무는 더 단순하고 쉬운 것인데. 세상에는 이렇게 더 단순하고 쉬운 무이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이 왜 많은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무에 대한 이 질문이 여전히 나는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물론 그 결과가 은총이라는 것이 매우 찬물을 끼얹지만ㅋㅋ)

- 라이프니츠의 질문에서 어떤 것은 논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것, 존재자, 자연, 더 나아가 이 세상,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역시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존재는 무에 대하여 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우월성을 지니지 않는다. 만약 무 대신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선택의 결과이다. 창조의 선택. 은총.

- 그러니까 라이프니츠는 존재에는 어떤 신학적인 사건과 선택이 개입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입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논리.

 

*** 스피노자에게도 무가 존재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처럼 형이상학적 무가 아니라, 존재해야 마땅한 어떤 것이 어떤 이유내지 근거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단순히 실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유가 요구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 별다른 이유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가 더 당연한 상태니까)

- 라이프니츠에게 무라는 것은 대등하게 맞서있는 것 VS

스피노자에게 무라는 것은 (존재의 한가지 양상으로서)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것,

-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전제) 있어야 할 자리에 어떤 이유로 무언가가 사라진 상태가 무이다. 왜 없을까? 불에 타서 사라졌을까? 질병을 앓아 죽었나? 같은 설명이 필요한 상태. , “존재해야 마땅한데왜 존재 안하지? 이런 논리.

- 스피노자에게는 무는 항상 이미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존재의 한 방식이다. 이미 를 포괄하고 있다.

 

*** 그렇다면 라이프니츠는 존재만이 설명의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무일 때는 딱히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불교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라이프니츠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 스피노자에게는 본성상 실존하지 않는 것은 없나?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무? 없다. 스피노자가 신학적인 것을 거부하는 이면이다. 자연은 영원하고, 자연이 영원하다는 것은 창조의 순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초나 기원, 끝점이 없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신의 역량이 너무나 무한하기 때문에, 충만하게 넘쳐흐르는 생산적 본질이라서 무엇이 있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게 없다? 있어야 하는 것이 없다? 그러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한다. 존재라는 것이 무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존재와 대립하는 형이상학적인 무가 아니라, 스피노자에게 무는 항상 실재 속의 무이다. 실재 속에 항상 있어야 했는데 어떤 이유로 사라진 것.

- 삼각형이 실존한다면 왜 실존하는지 그 이유가 필요하고, 부재한다면 부재의 이유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도 스피노자 근거율에 따르면 이유가 있다. 그냥 당연히 실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걸 실존하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 , 정리하면- 1부 정리8의 주석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 1부 정리11의 두 번째 증명에서 봤듯이 뭔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걸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 ->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이라고 하면 그 변양들의 실존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 그렇다면 이 다른 것을 우리가 굳이 실체나 속성이라고 하지 않고 그보다 더 가까운 좀 더 구체적인 사물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주석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제빵학원에 다니면서 빵, 아이스크림 만드는 법을 배워서 어제 집에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은 내가 아이스크림에 대해 적합한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만들어서 다 먹었고 맛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아이스크림은? 실존하지 않게 됐다. ? 내가 먹었으니까. , 아이스크림이 부재하는 원인을 지정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살이 쪘다.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그 아이스크림은 뭔가 효과를 내면서 사라졌다(유령처럼 나의 뱃살에ㅋㅋ)

- 이 아이스크림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이다. 이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에 대해 어떤가. 아이스크림은 실존하지 않는데 실존하지 않는 아이스크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지 않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분명 어떤 관념을 갖고 있다. 더욱이 그 적합한 관념을 갖고 있다. 내가 원하면 거기에 상응하는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는 것= 적합한 관념.

-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관념을 내가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념은 적합한 관념. 그리고 이 적합한 관념이라는 것은 독특한 실재의 형상적 본질에 대한 관념이다. 이 독특한 실재를 독특한 실재로 만드는 형상에 대한 관념, 독특한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그 form, form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독특한 실재에 대한 적합한 관념이다.

- cf) 데카르트 <성찰>에 유니콘의 예가 많이 나오는데 그걸 가리키는 스피노자의 용어가 있다. “사고상의 존재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ena rationis라고 쓴다.

 

*** , 정리하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에 대해 내가 관념을 갖고 있는데 그 관념은 적합한 관념이다. 나는 레시피를 갖고 있고 실제로 만들어서 성공을 했으니까. 적합한 관념이라는 것은 뭐냐면 이 실재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것.

- 지금 이 독특한 실재에는 actual essence 현행적 본질은 없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현행적 본질은 없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인식하고 있는 독특하 실재다. 그렇다면 이 실재의 형상적 본질은 현행적 본질과 같은 걸까, 다른 걸까? 다르지 않다. 왜냐면 지금은 현행적 본질이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고, 그것을 적합한 관념에 따라 언제든지 현행적으로 바꿀 수 있다.

- 그러니 우리가 형상적 본질을 뭔가 초월적인 것이라든지, 뭔가 영원한 어떤 것이라고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저 예에서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이 지금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행적 본질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다른 것은 아니다.

- 4부 정리4와 증명으로 가보자.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게 되는 것은 없으며 (=인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능동적일 수 없다), 그의 본성만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인간이 적합한 원인이 되는 그러한 변화들만을 겪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인간은 항상 외부원인에 의한 작용을 겪는다)

- 증명을 가면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보존의 역량은 신의 일부, 자연전체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현행적 본질이라는 말을 딱 두 번 쓰는데 3부 정리7과 바로 여기, 4부 정리4의 주석에서다. 두 번 다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따라서 인간의 현행적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인간의 역량은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역량, 곧 신 또는 자연의 본질의 일부다 때문에 인간이 뭔가를 원인으로서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 자연 전체의 원인의 역량의 한가지 표현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스피노자 공부를 하는 것도 다 자연전체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바람과 물과 땅과ㅋㅋ 모든 것들이 다 기여한 덕이다. 좁게는 부모님과 형제자매와 선생님과 이 강의를 알게 해준 사람들 같은 여러 외부 원인 덕분이다.

 

*** 그래서 최종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는 영원의 차원에 있고 속성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지속의 차원에 있고 유한성의 속하는 두 개의 본질처럼 보이지만,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대목들을 참조하면 꼭 그렇게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을 이원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의 본질 개념이 다른 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존재한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바로 그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정신, 지양에 더 잘 들어맞는다. 앞으로 우리가 더 나아가다보면 이런 이야기들을 되풀이할 기회들이 계속 있을 것이다.

 

-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다. 2부 정리8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되어/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뜻하려는 것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파악되어 있는 이 관념들에 상응하는 (왜냐하면 이 관념들은 참된 또는 적합한 관념, 곧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관념들이기 때문이다) 실재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스피노자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형상적 본질들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이 신의 지성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의 지성 안에 있는 것은 형상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존재이며,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형상적 본질

- 또한 스피노자가 2부 정리8의 증명에서 언급하는 앞의 정리는 사실 정리7의 따름정리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2부 정리7의 따름정리가 말하는 것은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에 상응하는 형상적 본질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

- 따라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6의 따름정리, 2부 정리8,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형상적 본질= 현실적 실재표상적 존재= 관념의 구별이다. 실재= 관념의 관계. 렇다면 스피노자가 형상적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구별되는 또 다른 본질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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