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철학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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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칠칠하지 못한 정치판을 한국사회의 가장 큰 허물이라고 여깁니다. 서민들을 위해 일해야 하는 심부름꾼이 툭하면 돈 먹고 으밀아밀 짬짜미하며 북치고 장구친다면 자르든가 마땅히 혼쭐내줘야 하겠지요. 사람들의 뜻이 제대로 담기도록 물갈이하듯 정치판을 뒤집을 필요가 있습니다.



 

러나 정치만 개혁하면 살기 좋아질까요? 정치는 커다란 물레방아로써 쿵덕거리며 사회를 돌아가게끔 하지만, 정치‘만’ 달라진다고 모든 게 싹 좋아지지 않습니다. 정치판이 큰 힘을 갖고 있지만, 세상살이는 정치판에 따라 결정되는 꼭두각시가 아니니까요. 정치판의 변화와 아울러 거듭나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정치에 눈독들이면서 끝내 생활세계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진보 담론은 좋다. 그러나 그것만이 정치적으로 옳고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금 정치 상황이나 생활세계의 막가파 행태를 볼 때, 부족한 것은 오히려 자유주의적 관점들이다. 솔직하게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최소한 남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훈련이 제일 필요한 듯하다.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시민들이 제일 피부로 느끼는 것도 자유의 상실 아닌가? 따지고 보면 지금 정치판만 엉망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나마 선거라는 정치가 있어서 갈아버릴 기회나마 있다. 더 엉망인 것은 생활세계의 막무가내이고 막가파인 듯하다. 정치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각자의 행동과 생활을 바꾸지 못한 채, 선거를 비롯한 정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 <더러운 철학>[2010. 개마고원] 


지은이 김진석씨는 모든 걸 신자유주의나 자유주의 탓이라고 돌리는 데 반대하며, 자유주의가 사회에 올곧게 뿌리내리기를 바라더군요. 자유주의를 건너뛰어 진보하기란 만만치 않으니까요. 맑스도 <공산당 선언>에서 “저마다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 되는 연합체”를 가질 거라고 하듯, 낱사람들의 자유가 없으면 세상이 바뀐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자유’란 말을 올바로 헤아려야 하겠지요. 정치사회를 잘 모르지만 TV는 빠꼼이라며 자랑하는 ‘자유로운 정신상태’나 정치사회는 다 거기서거기 아니냐며 ‘차가운 웃음을 흘리는 자유’는 진짜 자유가 아니죠. 사람살이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상식’에 사람들이 ‘무식’하다면, 그 사회에 사달이 났단 뜻이죠. 자신만의 밥통을 들여다보는 자유가 아니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지식’을 나누고 더불어 살려는 자유가 한국사회에 깔려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생활세계가 더 바뀌어야 해요. 거의 모두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거의 모두가 비슷한 옷차림을 하며, 거의 모두가 비슷한 직장을 욕망할 때, 그곳은 자유주의사회라기보다 전체주의사회겠죠. 이런 휩쓸림이 너울대는 곳에선 성숙하고 자유로운 시민으로 자라기 힘겹습니다. 자유주의가 똑바로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고 서로를 베끼면서 남의 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느라 넋이 나가니까요.

 

한국의 이른바 보수들이 보신주의를 자유주의랍시고 떠벌린다면, 말도 안 된다며 따지고 파헤쳐야 하겠지요. 그러나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에 붙들려 짜증과 슬픔으로 삶을 얼룩지게 해선 안 됩니다. 어차피 한국의 우익이라는 사람들은 엉터리니까요. 그들이 한국사회를 곪게 하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에 매섭게 몰아붙이고 바꾸고자 애써야겠지만, 그들을 비판하는 데만 열을 올려선 안 되겠지요.

 

도리어 저들과 달리 즐겁고 신나는 일들을 즈런즈런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괴물을 미워하다보면 괴물을 닮아버리듯 한국의 기득권층을 보면서 부아를 내지만 정작 저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사는 이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정치민주화가 모든 걸 다 풀어준다는 믿음은 20세기에 끝났습니다. 이젠 일상의 자유로움이 더 늘어나야 할 성싶어요. 이것이 정치의식의 진짜 발전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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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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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씨의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동녘. 2010)는 무척 맛깔난 말투로 생태를 뼈저리게 생각하게끔 하네요. 그 가운데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위알을 품은 암탉의 이야기인데, 뜬금없이 에디슨이 생각나네요. 에디슨이 알을 품었을 때 누가 막지 않고, 에디슨도 온 마음을 다해 품었다면 혹시?

 

처음 하루 이틀은 거위 암컷이 알을 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암컷은 그때뿐, 마당에 나와서 놀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싶어 다가가 보았더니 암탉이 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이 역할분담과 관련해 모종의 합의 과정을 거쳤을까? 그것 역시 인간인 내가 알 도리가 없다.

 

거위알을 왜 암탉인 무꽁지가 품었는지 참 알쏭달쏭하면서도 솔깃하네요. 알을 낳고 마당에 나와 노는 거위와 자기가 낳은 알도 아니면서 온 몸으로 품고 있는 암탉, 퍽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즐거운 모습이 아닌가 싶네요.

 

무꽁지가 거위알을 품은 지 6주째, 지난 화요일, 마침내 거위 다섯 마리가 세상에 태어났다. 동물들 스스로 새 생명을 이 행성에 내놓은 것이다. 그것은 실로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곱 개 알들 중, 다섯 개의 알이 생명으로 나아갔고, 나머지 두 개는 생명으로 나아갈 마음이 없었던 모양이다.

 

무꽁지가 알을 품고 부화의 순간을 위해 집중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무꽁지는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이 품고 있는 생명체들이 세상에 나오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동안 정작 알을 세상에 내놓은 거위 암컷과 수컷은 마냥 놀기만 했다. 봄에 피는 꽃들을 즐겼고, 땅바닥에서 새로 돋아나는 풀잎을 즐겼다. 한가롭게 마당 바깥 개울가를 산책했고, 다시 맞이한 봄에 겨워 거억거억, 울어 젖히곤 했다.

 

궁금증이 확 생깁니다. 이제 새끼들이 태어났는데, 암탉을 따를까? 그렇다면 거위들은 가만히 내버려둘까? 도대체 어찌 될까? 아니나 다를까 사달은 쾅 하고 터집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태어난 것은 거위새끼 다섯 마리인데, 정작 알을 품은 것은 다른 종인 암탉 무꽁지였던 것이다. 동물행동학자 로렌츠의 경험과 학설을 떠올릴 것도 없이, 당연히 거위새끼들은 자신의 애미를 무꽁지로 생각했다. 무꽁지 역시 샛노란 거위새끼 다섯 마리를 철석같이 자기 자식으로 믿었다. (…) 그러나 거위들의 생각은 달랐다. (…)

 

무꽁지와 거위들의 생각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기어이 작은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가만히 있던 거위 수컷이 나섰다. 수컷의 이름은 철근이인데, 철근이가 무꽁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위는 야생 기러기에서 날지 않기로 결심하고 인간과 같이 살기로 작정한 하얀 새로서 잡식을 한다는 것 외에도 그 성격이 거친 것이 여러 특성들 중의 하나다. 철근이는 긴 목을 땅바닥에 낮추고 마치 어뢰처럼 부리를 앞세우고 무꽁지를 공격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느닷없는 모성본능이 발동했을 뿐인 평범한 암탉은 자기 새끼를 빼앗겨 울화가 치민 세 살배기 수컷 거위의 상대가 안 된다. 옆구리와 몸통을 찍힌 무꽁지는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그러자 놀란 새끼거위들이 일제히 무꽁지를 향해 몸을 피했다. 무꽁지의 몸은 순식간에 앙증맞은 거위새끼들로 둘러싸였다. 그것은 딱히 혈통상의 아빠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품어 만든 무꽁지 엄마를 보호하기 위한 의도여서라기보다 어떤 무서운 하얀 새가 화를 내니까 겁이 나서 그들이 태어나서 처음 느끼고 만났던 몸체를 향해 피신하는, 그런 방어적인 몸짓이었다.

 

하하,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껄끄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기 새끼들을 찾겠다고 수컷 거위가 암탉을 몰아치는데, 거위 새끼들이 암탉을 둘러싸니, 거위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요.

 

무꽁지를 공격했던 철근이는 참으로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공격의 자세에서 다시 고개를 허공에 높이 쳐들면서 어이없어했다. 철근이의 아내인 구리(거위 암컷)는 이 설명할 길 없는 난해한 사태에 봉착하여 물끄러미 상황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낳았으되 품지 않은 대가가 이렇게도 아플 줄은 몰랐다는 슬픔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더 책에 나오진 않지만, 많은 걸 생각하게끔 해주네요. 동물들은 단순한 자동기계가 아니라 정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죠. 이 지구란 별에서 동물 없이 사람들만 행복할 수 있을까? 글쓴이는 따끔하게 묻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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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공부론 - 인이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다
김영민 지음 / 샘터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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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씨가 쓴 <공부론>[2010. 샘터]엔 솔깃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술에 대한 풀이가 따끔하게 와 닿네요. 잘못된 정치사회문화에 회초리를 서슴지 않는 지식인들조차 술 마시는 일이 노상이라 술문화에 대한 반성이나 고민은 찾아보기 쉽지 않은 터라 김영민씨의 글은 무척 반갑죠. 김영민씨는 한국인들이 이다지도 술을 찾는 까닭을 이렇게 적습니다.

 

각박한 교환의 셈평 속에서 아등바등하다가 도시의 조각난 어스름에 업혀 술자리를 찾는 것은, 술에 묻어나는 탈자본주의적 사이비 자연성이 풍겨 내는 증여의 환상, 그 넉넉한 이미지의 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팍팍한 버거운 일상을 술이 마치 벗어나게끔 해주는 것처럼 노릇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며 피로하고 지친 삶과 다르게 술잔이 오가면 정이 오가는 거 같고, 술기운에 왠지 기분이 좋아지니 어둑어둑해지면 자연스레 술집으로 향할 수밖에요. 이런 분위기가 깔려있기에 흥청망청 술을 마셔도 너그럽기 그지없습니다. 오히려 그만큼 힘들게 살아왔다는 걸 드러내어 사람들의 위로를 받거나 아니면 술 잘 먹는다고 칭찬을 받기 일쑤죠.

 

그러나 오늘날의 술은 낭만을 자아내며 살가움을 나누는 매체라기보다 삶이란 쳇바퀴를 구르게끔 하는 항우울제 같은 구실을 합니다. 술은 이미 자본주의의 그물에 단단히 붙들려있습니다. 술에 낭만이 잔뜩 묻어나고 특별한 뭔가가 있는 거 같아도 주머니가 빈 사람에게 술 주는 곳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고, 술값 없는 사람과 술자리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것과 다르게 술엔 뭔가 유난스러움이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내 삶의 양식이 지닌 완강함에 틈입한 술은 어느 순간 자본주의적 체계를 키우고 빛나게(!)한다는 점이다. 술을 자본제적 체계의 양식과 별개로 논의하려는 개인주의적/낭만주의적 태도는 이미 그것 자체가 자본제적 체계가 술과 인간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후적 현상으로 여겨져야 한다. 술의 장(champ)에 안팎으로 스며든 제도와 사회정치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술이 개인의 자율성이나 창의성, 그리고 대면적 대화관계와 호의적으로 습합하는 부분에서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태도로부터(학인이라면!) 우선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술은 입으로 들어와 몸에 스며들었다가 오줌으로 빠져나가는 단순한 액체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일상을 쥐락펴락하는 연모는 곧 생각과 사람살이의 테두리를 딱 긋기 마련이죠. 그러므로 술을 막무가내로 좋아라하기보다 술이라는 매체를 그루터기 삼아 피어나는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한국사회의 산업구조를 매섭게 따져야 합니다.

 

태탕(駘蕩)한 사치 속에 이미지의 빈곤이나 이미지의 죽음을 키우고 있는 술자리의 그늘진 품을, 모든 낭만과 상징의 영도(零度)를 스스로 마련하며 ‘체계적으로 관리되면서 그 만족을 내내 저지당하는 인간의 슬픈 욕망’에 바치는 자본제적 일상의 제전(祭典)으로서 기능하는 술자리의 지친 맨 얼굴을, 이제는 과감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술이 주는 아우라에 좋아라하기만 하기보다 자신이 왜 술을 마시는지, 여태 심드렁하게 지나쳤지만 술이란 씨앗을 머금고 피어나는 ‘악의 꽃들’이 어떠한지, 돌아보고 새로운 실천을 꿈꿔야 하겠죠. 술을 그냥 들이킬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짜고 있는 얼개들과 여러 매체들을 매만지면서 ‘더 나은 삶’을 애태웠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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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 개정4판 동녘선서 1
조성오 지음, 이우일 그림 / 동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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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엔 영국 셰필드 대학과 워릭 대학 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하여 닭이 없으면 달걀이 있을 수 없다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달걀 껍질을 만드는데 ‘오보클레디딘-17’(OC-17)이란 단백질이 꼭 있어야 하는데, 이 물질은 닭의 난소에서만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닭 없이 달걀이 있을 수 없다고 맺음말을 하네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건 누구나 한번쯤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수수께끼입니다. 오래 전부터 걸핏하면 툭 튀어나와 머릿속을 헝클어뜨리는 실꾸리죠. 이리 풀기도 까다롭고 저리 풀어내기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실톳입니다. 닭이 없는데 어찌 알이 있을 수 있겠냐 싶지만, 그럼 알이 없는데 어떻게 닭이 생겼을까 싶어 알이 먼저일 성싶기도 하지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물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가다듬으며 무엇이 맞는지 생각을 하게끔 해주는 좋은 문제죠. <철학에세이>[동녘. 2005]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쪽으로 눈을 돌리게끔 부드럽게 말을 건네며, 알이 먼저라고 차분히 일러줍니다.

 

닭이나 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즉 세상이 있으면서부터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닭이나 알은 모두 생물이 진화해 온 어떤 단계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이라는 커다란 관점에서 보면 답은 간단히 나옵니다. 먼저 알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겨 알을 낳는 여러 가지 동물이 나타나고 그 뒤에 닭이 생긴 것입니다. 이 문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알을 생각할 때, ‘닭의 알’이라는 식으로 좁게 한정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파리도 알에서 생겨나고 물고기도 알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넓은 안목으로 파악한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알이 먼저라는 것이 올바른 답입니다.

 

생각보다 답이 싱거운데, 고개를 아니 끄덕일 수 없게 하네요. 알을 닭이 나오는 둥그스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틀에 갇혀있기에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물음에 답할 수가 없었지요. 그렇지만 닭과 달걀만의 앞뒤 차례가 아니라 진화라는 커다란 흐름에서 생겨난 변화로 읽으면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물음은 골칫덩이가 아니게 되지요.

 

어떠한 무엇이라도 그 안에 답이 있기보단 ‘바깥’과 관계하며 답을 이루기 때문에 맥락을 짚지 않으면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게 되지요. 따라서 철학이 필요합니다. 철학은 자신의 선자리를 다시 돌아보게 해주는 거울이자 어디로 가야할지 일러주는 나침반이니까요. 나무만 보다가 숲을 못 볼 때, 좀처럼 길을 시원하게 못 찾을 때, 철학이란 연모를 지니면 보다 수월하게 자신의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983년에 초판이 나온 다음에 개정 1판은 17쇄, 3판은 24쇄까지 찍었던 책이지요. 4판도 11쇄까지 찍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얘기만 들어도 두통이 날 거 같은 철학개념들을 살갑게 풀어내었기 때문이죠. 수많은 젊은이들이 인생을 고민하며 이 책을 밤새워 읽었을 걸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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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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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는 한국 문단에 따끔히 내려치는 죽비입니다. 책을 안 읽는다고 대중에게 덤터기씌우면서 여러 연고로 나뉘어 으밀아밀하던 사람들에게 ‘1Q84 열풍’은 정신 차리라는 회초리나 다름없죠. ‘1Q84 열풍’은 무라카미 하루키에 견줘 한국에서 글 쓴다는 사람들이 조금은 게으르지 않았나 돌아보는 문턱입니다. 책이 영상에 밀린지 한참이지만, 얼마든지 ‘읽을 만한 글’이면 사람들은 찾아서 읽으니까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요즘 사람살이의 쓸쓸함을 건드립니다. 그의 소설마다 깃들어있는 우울함과 함께 조금의 상큼함, 그러면서도 흔하디흔한 외로움은 ‘하루키 열풍’의 알짬이라 할 수 있겠죠. 일본 소설가지만 일본 냄새가 잘 나지 않고,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읽어도 고개 끄덕일만한 글이라는 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점이죠. 한마디로 대중들의 정서에 살갑게 와 닿는 글을 쓴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이런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1Q84의 뜨거운 바람이 썩 좋게만 보이진 않습니다. 단순히 ‘통속 소설’이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성을 낮잡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글들이 기운을 내게 하기보다 헛헛함을 일으키기 때문도 아닙니다. 문학이 꼭 대단한 세계를 그려내거나 읽는 이들을 북돋워줘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요.

 

다만, 이 소설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떠서 찾아봐야 할 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도마 위에 올리고자 하는 건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체이기보다 그를 소비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쏠쏠한 재미를 주지만, 이 뜨거운 용솟음 밑엔 거품이 잔뜩 껴있지 않나 살피자는 거죠.

 

장밋빛 희망을 섣불리 만들기보다 세상의 거무튀튀한 속살을 까발리는데, 그런 점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관이고 그게 사람들에게 먹히는 이유지만, 그렇다고 해도 1Q84 열풍은 좀 많이 지나치죠. 출판사에서 광고를 어마어마하게 때리고, 언론 여기저기서 하나같이 1Q84가 대단하다며 떠받드는 장사놀음에 사람들이 용춤 추고 있는 게 아닐까요? 몇 백 만이 어떤 영화를 봤다고 하면 덩달아 영화관에 가는 것처럼, 온통 1Q84로 도배가 되니까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가는 거지요. 마치 자신도 안 보면 큰일 난 것처럼.

 

사실 어느 글이 좋은지, 어떤 글을 읽어야 할지, 요즘에 어떤 소설들이 나오는지 모르기에 남들의 말이나 언론에 기댈 수밖에 없는 판이고, 이런 밑절미에서 1Q84를 안 본다면 그게 더 야릇하겠죠. 죄다 1Q84 얘기뿐이고 모조리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니까요. 평소에 책과 담을 쌓던 사람들이 조금은 지루한 그의 글을 낑낑대며 읽는 까닭은 어쩌면 이런 흐름에 휩싸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꺼운 그의 책이 날개 단 듯 팔려나가 책 읽는 문화의 발판이 된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을 듯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진짜’ 좋아서 꼬박꼬박 책을 읽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는다기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문화기호’를 소비하고 있을 따름이니까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헐리웃 영화나 이마트와 그리 다르지 않게 소비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노르웨이의 숲>으로 ‘하루키 열풍’을 지구고을에 일으켰고, 한국에서도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많은 공감을 자아내며 꾸준히 읽혔던 무라카미 하루키지만, 1Q84란 회오리는 달갑게만 느껴지지 않네요. 왜 일어났는지를 따지기보다 우선 일어났으면 모든 사람들을 몽땅 빨아들이는 이 회오리가 섬뜩하기까지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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