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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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는 한국 문단에 따끔히 내려치는 죽비입니다. 책을 안 읽는다고 대중에게 덤터기씌우면서 여러 연고로 나뉘어 으밀아밀하던 사람들에게 ‘1Q84 열풍’은 정신 차리라는 회초리나 다름없죠. ‘1Q84 열풍’은 무라카미 하루키에 견줘 한국에서 글 쓴다는 사람들이 조금은 게으르지 않았나 돌아보는 문턱입니다. 책이 영상에 밀린지 한참이지만, 얼마든지 ‘읽을 만한 글’이면 사람들은 찾아서 읽으니까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요즘 사람살이의 쓸쓸함을 건드립니다. 그의 소설마다 깃들어있는 우울함과 함께 조금의 상큼함, 그러면서도 흔하디흔한 외로움은 ‘하루키 열풍’의 알짬이라 할 수 있겠죠. 일본 소설가지만 일본 냄새가 잘 나지 않고,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읽어도 고개 끄덕일만한 글이라는 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점이죠. 한마디로 대중들의 정서에 살갑게 와 닿는 글을 쓴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이런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1Q84의 뜨거운 바람이 썩 좋게만 보이진 않습니다. 단순히 ‘통속 소설’이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성을 낮잡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글들이 기운을 내게 하기보다 헛헛함을 일으키기 때문도 아닙니다. 문학이 꼭 대단한 세계를 그려내거나 읽는 이들을 북돋워줘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요.

 

다만, 이 소설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떠서 찾아봐야 할 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도마 위에 올리고자 하는 건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체이기보다 그를 소비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쏠쏠한 재미를 주지만, 이 뜨거운 용솟음 밑엔 거품이 잔뜩 껴있지 않나 살피자는 거죠.

 

장밋빛 희망을 섣불리 만들기보다 세상의 거무튀튀한 속살을 까발리는데, 그런 점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관이고 그게 사람들에게 먹히는 이유지만, 그렇다고 해도 1Q84 열풍은 좀 많이 지나치죠. 출판사에서 광고를 어마어마하게 때리고, 언론 여기저기서 하나같이 1Q84가 대단하다며 떠받드는 장사놀음에 사람들이 용춤 추고 있는 게 아닐까요? 몇 백 만이 어떤 영화를 봤다고 하면 덩달아 영화관에 가는 것처럼, 온통 1Q84로 도배가 되니까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가는 거지요. 마치 자신도 안 보면 큰일 난 것처럼.

 

사실 어느 글이 좋은지, 어떤 글을 읽어야 할지, 요즘에 어떤 소설들이 나오는지 모르기에 남들의 말이나 언론에 기댈 수밖에 없는 판이고, 이런 밑절미에서 1Q84를 안 본다면 그게 더 야릇하겠죠. 죄다 1Q84 얘기뿐이고 모조리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니까요. 평소에 책과 담을 쌓던 사람들이 조금은 지루한 그의 글을 낑낑대며 읽는 까닭은 어쩌면 이런 흐름에 휩싸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꺼운 그의 책이 날개 단 듯 팔려나가 책 읽는 문화의 발판이 된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을 듯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진짜’ 좋아서 꼬박꼬박 책을 읽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는다기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문화기호’를 소비하고 있을 따름이니까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헐리웃 영화나 이마트와 그리 다르지 않게 소비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노르웨이의 숲>으로 ‘하루키 열풍’을 지구고을에 일으켰고, 한국에서도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많은 공감을 자아내며 꾸준히 읽혔던 무라카미 하루키지만, 1Q84란 회오리는 달갑게만 느껴지지 않네요. 왜 일어났는지를 따지기보다 우선 일어났으면 모든 사람들을 몽땅 빨아들이는 이 회오리가 섬뜩하기까지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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