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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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 없는 곳이 없죠. 회사에서 발표할 때도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언어가 필요합니다. 친구와 얘기할 때도 인터넷에서 영상을 볼 때도 언어가 필요하죠.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감각하고 사유하고 상상하고 표현합니다. 문화는 언어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사람은 언어를 익히면서 비로소 사람다운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언어를 잘 쓰고자 하죠. 언어의 영역,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중에서 인류가 온 힘을 기울여 다듬어 온 분야가 쓰기입니다. 글쓰기는 언어 감수성과 피나는 노력이 맞물려야 제대로 할 수 있기에 그 누구라도 글쓰기 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한두 줄 쓰다가 지쳐버리기 일쑤죠. 좋은 글은 예술과 노동이 참된 만남을 할 때 피어나는 언어의 꽃입니다.

 

그럼에도 글쓰기가 뭔지 아직 느낌이 안 오고, 막막한 분들이 많이 계시죠. 그런 분들을 위해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쓴 작가 이만교씨가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2009. 그린비]에서 글쓰기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들을 풀어놓네요. 수십 년 쌓여온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글을 잘 쓰고 싶은 누군가에게는 ‘필살기’가 되겠네요.

 

글쓰기란 무엇인가? 왜 글을 쓰려 할까? 마음으로 밑줄 쳐 놓은 씨앗문장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진실이 ‘어떻게 해야 좋은 글을 쓰는지 나도 모른다’는 사실 뿐이었다고 지은이는 정직하게 얘기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뭘 좀 안다고 착각을 했었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죠.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을 자신이 잘 모른다는 절급한 자각이야말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밑천이었다고 지난날을 털어놓습니다.

 

자만하지 않고 사뭇 조심스럽게 평생 해온 글쓰기를 다시 짚어보죠.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 ‘연구 공간 수유 + 너머’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글쓰기란 무엇인지? 나는 왜 글을 쓰려 하는지? 글쓰기를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사람들을 만나서 같이 고민하고 함께 공부합니다. 선생으로서, 같은 학생으로서.

 

사람은 누구나 새롭게 감각하고, 깊이 있게 사유하고, 자유로이 상상하고, 새로운 각도로 삶을 인식하고, 용기 있게 살고 싶어 하죠. 글쓰기는 자신의 인생이 배어나오는 작업으로 평생 익혀나가야 하는 과정이죠. 자기 삶이 녹아나기 때문에 글이 좋으려면 삶이 좋아야죠.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고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지요. 좋은 글을 쓴다는 건 매력 있긴 하지만 지극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죠.

 

그럼에도 우리가 글을 쓰고자 하는 건 씨앗 문장 때문이죠. 모든 글쓰기는 바야흐로 씨앗문장에서 비롯되었으며 마침내 씨앗문장으로 돌아가게 되니까요. 씨앗문장이란 마음으로 밑줄 쳐 놓은 문장을 말해요. 손에서 책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나아가 자신도 그런 글을 써보고 싶게 만든 문장들이죠. 이러한 씨앗문장이 글을 쓰게 부추기는 가장 기본 동인이 되죠. 어떻게 이렇게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겸허한 경탄과 더불어 자기도 바로 이러한 문장과 이러한 사유를 펼치고 싶다는 즐거운 질투를 느끼게 하는 문장이죠.

 

누구에게나 씨앗문장이 있을 겁니다. 그 문장을 만났을 때, 온 세상이 떨렸으며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가슴이 콩닥거리게 되죠. 이러한 씨앗문장에서 느꼈던 감동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글쓰기를 하는 거죠. 또한 그러한 씨앗문장을 일구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는 거죠. 한 사람의 삶과 세계를 뒤흔드는 씨앗문장이 쉽게 생기지 않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죠. 거저 주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오직 정진과 전념뿐이죠.

 

스스로 언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 언어감수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

 

악기를 다뤄본 사람은 압니다. 악기란 미묘하죠. 조금만 소홀히 다루어도 그 음색이 기운을 잃죠. 다루는 사람의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줍니다. 악기뿐이 아니죠. 미술이든 사진이든 모든 예술 매체들은 다루는 방법, 기술과 집중력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됩니다. 자신이 다루는 악기가 또는 붓이, 또는 사진기가 얼마나 예민한 친구들인지 수없이 절감했을 터이죠. 그 도구를 다루는 기초기술 익히는 데만도 3, 4년은 족히 투자해야 하죠.

 

그런데 그 어떤 악기나 그 어떤 매체보다도 예민하고 섬세하고 복잡한 성능을 지닌 것이 바로 사람의 언어예요. 아 다르고 어 다르죠.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생활에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언어를 잘 다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언치라고 하죠. 언치가 쓰는 문장들은 음치가 부르는 노래이며, 두터운 장갑을 끼고 세공을 한 사람의 도자기이고, 비염 환자가 킁킁 거리며 냄새 맡는 꼴입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언치라는 것을 모른다는 거죠. 자기가 쓰는 언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알지 못하고 그러한 인식조차 없이 살아가죠.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삶과 겹쳐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함부로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살아가죠. 그만큼 자기 삶은 망가지죠. 자기 편한 대로 거칠게 언어 쓰는 사람들의 삶은 세상 편한 대로 거칠 수밖에 없죠. 언어감수성이 둔한 이의 사람 관계 역시 둔할 수밖에 없어요. 언어에 대해 고민이 없는 사람은 삶에 대해 고민이 없으니까요.

 

미감이 둔한 요리사가 있을 수 없듯이 글쓰기에 있어서 언어 감수성은 가장 기초이며 반드시 필요한 요건입니다. 글쓰기는 오로지 100% 언어로만 의사소통하는 작업이어서 글을 쓰려면 반드시 언어에 대해 주의가 남달라야 하고, 언어에 대한 자극과 느낌 또한 예민하고 정확하고 풍부해야 하죠. 그러려면 언어를 많이 겪어봐야 합니다. 커피를 많이 마셔본 사람이 그 맛에 예민하고 정확해지듯 개를 키워 본 사람이 개의 반응을 누구보다 올바르게 읽어내듯.

 

자신에게 언어감수성이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지요. 감수성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이니까요. 커피 맛은 처음에 다 쓰기 마련이고 개의 반응은 처음에 무조건 귀엽게 보일 뿐이죠. 시간과 정력을 들여 공부하고 배워야하죠. 천재들이란 자기 일에 전념한 사람들일 뿐이죠. 다시 말하면, 자기 일이 좋아서 하루 열 시간씩 십년 쯤 몰두한 사람이 천재에요. 세상에 천재가 드문 건 자기가 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희귀하기 때문이죠.

 

언제나 후회만이 늦을 뿐, 행동은 결코 늦지 않아, 함께 삶을 쓰고 글처럼 살아야

 

안타까운 것은 천재는커녕 자기가 뭘 해야 되는지 뭘 바라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거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산다는 건 얼마나 놀랍고 끔찍한 노릇인가요?! 언어를 잘 모르는 만큼 삶도 잘 모르는 거죠. 그런 뜻에서 글쓰기는 자기 삶을 들춰내며 ‘참나’를 찾아가는 소중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 열심히 갈고 닦으면 반드시 자기 글과 삶은 변하게 됩니다. 변화는 언제나 애쓴 만큼 그 순간 그 순간 일어나고 있죠. 다만 아직 인식하는 틀이 갖춰지지 않아 인지하지 못할 뿐이죠. 땀 흘리는 만큼 분명히 삶은 달라집니다. 만약 정말로 무엇인가를 꿈꾸며 온 삶을 쏟아 붓는 사람이라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변화는 당연히, 반드시, 그리고 자연스럽게, 되도록 가장 빠른 속도로 현실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와 ‘조급히’를 헷갈리고, ‘최선을 다해’와 ‘욕심을 다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생각’과 ‘자기만의 고집’을 뒤섞어서 생각하고, 독특한 생각과 독선적인 생각을 혼동합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혼자뿐인 시간’을 가지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아니라 고지식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부려 살고 있죠. 자기 경계가 어떠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알아야 하는데, 이때 글쓰기가 도움이 되죠.

 

이만큼 나이 먹어서 뭔 글쓰기냐, 이러는 분들도 많이 계시죠. 하지만, 모든 행동은 미래에 견주면 절대 늦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후회만이 늦을 뿐, 행동은 결코 늦지 않습니다. 못마땅하거나 불만족스러운 자기 삶을 가장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을 바꾸는 겁니다. 그 마음을 변하게 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공부를 시작하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현실을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위대한 순간이죠.

 

삶은 짧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인생은 저뭅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서 온전하게 살아야 합니다. 미안한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은 사랑을 전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죠. 이 책 제목을 보면, 공작은 工作이 아니라 共作입니다. 삶은 홀로 만드는 게 아니라 같이 만든다는 거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삶을 쓰고 글처럼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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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3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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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형씨는 아흐리만이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정치게시판과 블로그에거 활약하는 20대 논객이죠. 고3 때, <조선일보>와 서울대 공동주최 논술대회에서 대상 수상 뒤,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함으로써 남다른 정치의식을 보여준 그는 또래들과 달리 사회정치를 평론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글을 쓰는 20대죠.

 

한씨가 키보드 하나로 세상과 맞짱을 뜨겠다며 컴퓨터 앞에 앉은 지 어느덧 10년, 그 오랜 시간을 돌아보면서 쓴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2009. 텍스트]는 상당히 재미있는 21세기 초 기록물이네요. 제 2의 진중권을 꿈꾸는 20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엿볼 수 있고, 그가 보는 2000년대 한국 풍경은 어떠한지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안티조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실은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운동”

 

안티조선일보운동(아래 안티조선)은 한윤형 인생에 크게 자리하고 있지요. 안티조선에 최연소자로 참가하여 학교 선배들뿐만 아니라 나이 많은 누리꾼들, 수많은 지식인들과 만남은 그에게 소중한 경험일 테니까요. 강준만, 홍세화, 진중권, 김규항, 김정란 등등의 지식인들과 술 한 잔 나눌 때, 갓 스무 살 넘은 청년의 눈빛이 얼마나 반짝였을지 상상하면 살며시 흐뭇해지네요.

 

혹시 ‘안티조선’이 뭔지 벌써 잊으신 분들을 위해 짤막하게 돌아보자면, 조선일보는 최장집 교수를 사상 검증하겠다고 덤벼들었고, 여기에 강준만 교수가 반발하고 홍세화, 진중권 등 좌파지식인들이 적극 합류하면서 크게 불거진 언론개혁운동이에요. 2000년 8월 7일에는 조선일보 기고/인터뷰 거부 1차 지식인 서명에 무려 700명이나 참여를 했지요. 한윤형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말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실은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운동”이라며 10대 때 참여하죠. 조숙하네요.^^

 

사실 ‘해당언론사’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거에 비해 거쳐 온 역사를 살펴보면 아찔하죠. 멀리 내다보면 친일부역을 했으며, 1980년대는 전두환을 찬양하며 ‘1등 신문’으로 발돋움하고, 1990년대는 정치권력을 대신하여 좌익색출에 눈에 불을 켰고, 지금도 한국사회를 툭하면 냉전시대로 돌아가게 하는 재주를 지녔죠. 해당언론사가 어떤 글들을 썼는지 알만 한 뷴은 다 알게 되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크게 줄지 않았지요. 촛불정국을 겪으면서 뭔가 변화가 보였으나… 참 쓰읍…하죠.

 

안티조선 역시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 했지요. 조선일보라는 게 중요할 뿐 거기에 누가 쓰든 사람들은 중요하게 여기질 않았지요. 읽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권력은 언론이었지 교수가 아니었으니까요. 유시민이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라는 책을 낼 정도로 해당언론사는 ‘밤의 대통령’이라 스스로를 칭하며 반공과 증오를 오늘도 뱉어내고 있지요. 지은이는 안티조선 역사를 찬찬히 기록하네요.

 

노풍이 불어닥친 2001년, 진보정당 당원들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날선 공방

 

한국 정치사에 2001년은 가장 놀라운 해로 기록될 거예요. 지금은 ‘충청도 대통령’이 되어버린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나와 대통령되는 분위기였으니까요. 바로 그 때, ‘노풍’이 전국을 휩씁니다. 인터넷 정치토론의 중심은 안티조선이 아니라 노무현이 되었고, 때 맞춰 안티조선도 갈라집니다. 정권이 바뀌면 안티조선은 끝장이라며 정권재창출 운동으로 바꿔야 한다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측과 이에 반발하는 민주노동당원은 서로 으르렁거리죠.

 

그때 민주당 쪽은 ‘비판적 지지론’을 다시 내세웠죠.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지지를 부탁했던 논리로 극우에 맞서려면 우선 힘을 모아야하기 한다는 거죠.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노무현을 돕기 위해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였던 김민석을 밀어야 한다는 강준만 쪽과 노무현을 지지하는 그 이유 때문에라도 민주노동당 이문옥을 지지해야 된다는 진중권 쪽으로 나뉩니다. 결국 서울시장은 이명박이 됩니다. 재미있는 건 강준만이 진중권과 진흙탕 싸움을 하면서까지 지켜냈던 민주당 김민석 후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몽준 후보의 심복이 되어 노무현 후보를 끝까지 괴롭혔다는 거죠.

 

지은이는 진보정당 당원으로서 민주당과 한나라당 구도를 해체하려면 민주당 편만 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죠. 그래봤자 한나라당을 결속시키는 결과를 부를 뿐이니까요. 따라서 진보정당이 성장해야 한국정치판도 바뀐다는 논리를 진지하게 펴죠. 지은이는 인터넷에서 수많은 논쟁을 벌이다가 ‘노빠프리존’을 선언할 정도로 ‘노빠’들에게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다고 책에서 털어놓네요. 노무현지지 쪽과 진보정당 쪽 사이 깊은 골이 느껴지네요.

 

지은이는 하도 시달린 나머지 이문열 홍위병 발언이 어떤 의미에서는 적절했다고 할 정도지요. MB정부가 워낙 경제정책과 정치능력이 한심해 참여정부가 파스텔풍으로 그리워지는 때지만, 이전 정부 때도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을 지은이는 떠올리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지만, 그때만 해도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쪽과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거센 공방이 오고갔으니까요. 지은이의 글을 읽으며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네요.

 

88만원 세대, 이제는 정직하게 아무리 일해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세상이 끝났다!

 

아무리 게시판에서 논리정연한 논객이라도 그는 20대지요. 아직 완전한 독립을 못하고 부모 눈치를 보며, 언론사라도 들어가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88만원 세대 일원이라는 거죠. 좌파도 우파도 모범생이 되어버린 시대에 자신은 게으름뱅이라서 버벅거리고 있다며 자책을 읽다보면 슬쩍 마음이 쓰려오네요.

 

사실, 유럽에서 1,000유로 세대나 700유로 세대라며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20대가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일 수 있기 때문이죠. 유럽은 어느 정도 사회복지체계를 갖췄기 때문에 20대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적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은, 으악, 자살률 1위, 꺄악, 출산율 꼴찌답게 사람이 살 수 없는 사회지요. 여기저기서 죽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어서 젊은이들에게 눈길 돌리기가 쉽지 않네요.

 

눈높이를 낮추라고 위정자들은 말하나 젊은이들은 알고 있죠. 이제는 정직하게 아무리 일해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어떻게든 한방을 터뜨려야 하는 세상이 되었으며 열심히만 해서는 희망이 없다는 걸 온 몸으로 느끼고 있죠. 따라서 공무원 열풍이 부는 거죠. 평생을 경쟁만 하며 살아왔어도 희망이 안 보이는 이들이 해직의 걱정이 덜한 안정된 직장을 찾는 건 당연하죠.

 

젊은이들이 자기 상황을 그대로 ‘서사화’해야 한다고 한씨는 목소리 높이죠. 자신들이 어떠한 환경에 놓여있으며 어찌 살고 있는지 세상에 말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상황이 풀린다며 20대 후반의 88만원 세대로서 끔찍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죠. 모든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신통한 MB정부’를 맞아 젊은이들이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게 되네요.

 

스물일곱의 질풍노도를 겪고 있는 ‘아흐리만’, 진중권을 넘어 더 뜨거운 논객이 되길!

 

한윤형의 ‘아주 주관적이고도 사소한 연대기’를 보면 진중권을 중심으로 풀어져 있을 정도로 한씨는 ‘진빠’죠. 1998년 진중권, 세기말의 명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출간. 1999년 ‘강준만 - 진중권 1차 논쟁’ (지식인혐오증 논쟁), 2000년 진중권,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의 홈페이지 난입, 2001년 진중권, <조선일보>독자마당(조독마) 난입, 조독마에서 네티즌들의 청유로 ‘밤의 주필’이 됨을 선언하다. 2002년, ‘강준만 - 진중권 2차 논쟁’(옥석논쟁)을 기록할 정도로 지은이는 진중권에게 큰 영향을 받았죠.

 

사실 <디워>사태와 촛불 정국에서 진중권씨가 활약하며 ‘대중 지식인’이 되었지만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10년 전에도 유명한 지식인이었지요. 조선일보는 진중권을 막기 위해 조독마의 주소를 몇 번이나 옮겼으며, 게시판을 회원제로 만들었고, 최후에는 회원의 글쓰기 권한을 1일 5회로 제한할 정도로 진씨를 싫어했죠. 2008년, 촛불시위 현장에서 진중권이 “칼라TV 들어갑니다”라고 말하면 시위대가 절반으로 갈라지는 ‘기적’을 연출한 ‘진모세’는 이미 10년 전에도 사람을 반으로 나눴죠.

 

지금과 마찬가지로 진중권하면, 질색하는 사람들이 그때도 많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진중권 글을 읽으며 무릎을 치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한윤형은 진중권 글을 읽으며 감탄하는 쪽이었죠. 진중권을 알게 되면서 고등학생 한윤형은 대중문화 세계에서 정치세계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적네요. 진중권의 글을 보며 자란 청년은 20대 대표 논객이 되어 오늘도 매서운 글을 쓰며 사람들의 굳어진 고개들을 건드리네요.

 

이번 봄학기를 끝으로 대학을 졸업한 지은이는 취업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하네요. 스물일곱이지만 질풍노도를 겪고 있다면서 진중권과 이택광 사이 글쓰기를 목표한다고 하네요. 그게 과연 가능할지 자신 없어 하는 그의 글을 읽다보면, 청출어람이라는 말처럼 진중권을 넘어 더 뜨겁고 품 넓은 논객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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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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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늘 되돌릴 수 없을 때라야 가슴 치며 후회합니다. 좋은 사람이 떠나서야 미안하다며 어깨를 들썩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고, 사랑이 멀어져야 봇물 터지듯 눈에서 쏟아지죠. 있을 때 잘해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부터 줄곧 내려오는 말이건만 사람들은 건성으로 듣다가 뒤늦게 ‘아차’를 되풀이하죠.

 

여기 또 ‘좋은 사람’이 갔습니다. 장애를 딛고 희망을 나누던 장영희 교수는 2009년 5월 7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 교수의 유고모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2009. 샘터]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지요. 그녀의 마지막 수필집에는 당당한 희망과 따듯한 눈길이 어우러져 사람들을 짠하게 만드네요. 그녀가 남긴 빈자리를 어루만지며 책장을 넘겨봅니다.

 

낮은 목소리들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평범한 장영희 교수 이야기

 

장 교수 글 재료는 몹시 평범합니다. 일상에서 겪은 일들을 두런두런 늘어놓으며 거기서 느낀 점들을 조곤조곤 풀죠. 6년에 걸쳐 쓴 논문을 도둑맞아 절망에 빠졌던 일, 엘리베이터 문제로 미국 부동산 회사에 항의하며 벌어진 일, 그냥 주겠다는 말에 속아 중국산 부세를 굴비로 알고 산 일, 학생들과 만나면서 울고불고 한 이야기들…

 

또한 장 교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짜증내고, 토라지고, 성내고, 외로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게으르고, 귀찮아하고, 어지르고,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너의 머리가 바깥 기후에 시달리듯/ 내 머리는 내 안의 풍파에 시달린다’는 프로스트의 시처럼 일상의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죠.

 

그런 장교수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장애인? 암투병 환자? 아닙니다. 타인에 대해 마음 열고자 하고, 낮은 목소리들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희망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기운을 북돋워주며 남의 상처에 자기 아픔처럼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우러나와 소소한 지은이의 글을 특별하게 만들어줍니다.

 

예쁘게 꾸미기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장 교수 얘기에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맞아, 맞아, 무릎을 치면서 공감하게 됩니다. 어려운 말로 콧대를 세우려 하기보다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글이죠. 거기에 장애인으로서 겪는 어려움, 더구나 암 투병 이야기는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죠.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게 못 사는지 부끄럽게 합니다.

 

장교수의 몸을 깨뜨린 암, 하지만 그녀의 행복을 무너뜨리진 못 했다

 

당당하던 그녀가 암에 걸립니다. 장 교수는 2001년 암에 걸렸다가 치료를 받고 완쾌판정을 받았으나 2004년, 암이 척추로 옮아졌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다시 2년 동안 어렵사리 함암 치료를 해서 나은 듯싶었으나 암은 다시 간으로 전이됩니다. 장애도 모자라 암까지 걸렸을 때, 세상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지 차마 짐작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냐고 분노가 끓을 수밖에 없죠. 철저한 고독감, 지독한 박탈감에 마음을 부여잡을 수 없었겠죠. 사소한 것들에 불평불만하면서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던 일상이 너무나 그리웠을 겁니다. 허둥대면서 정신없이 보내지만 돌아보면 허무한, 그 김빠진 생활이 간절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떠넘기지 않습니다. 자기 자존심 때문에, 독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기에 암이 악성이 아니라 양성이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죠. 통증 때문에 돌아눕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고, 온 몸의 링거 줄을 떼고 샤워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방사선 치료 때문에 식도가 타서 물 한 모금 넘기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며 밥그릇만 봐도 헛구역질을 했어도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암은 장교수의 몸을 깨뜨렸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을 무너뜨리진 못 했죠. 그런 고통 덕에 행복할 수 있다고 환히 웃어 보입니다. 몸 건강하고 충분히 행복할 조건들이 넘쳐도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 장교수의 마음가짐은 훌륭한 본이 되죠. 온갖 바람과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희망노래를 불렀으니까요. 먼저 슬퍼하되 끝내 달게 받았으니까요.

 

맞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내 옆을 지켜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만난 독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삶의 그 많은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 책에서

 

좋은 사람 장영희,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유명한 의사가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렵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지요. 이름만 높을 뿐 가까이에서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장 교수에게 끌리는 까닭은 곁에서 존경할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거듭 자신을 높인 사람이니까요.

 

정말 누구의 마음에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게 얼마나 힘들고, 소중한지 깨닫기 시작한다.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라도 따뜻한 마음, 아끼는 마음으로 날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준다면 수천 수만명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한 사람이 되는 일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책에서

 

장 교수의 바람처럼 그녀는 ‘좋은 사람’으로 사람들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장 교수가 가르친 영문학에는 옥시모론(oxymoron)이란 게 있지요. 모순형용법이란 뜻으로 서로 상반되는 뜻의 낱말을 같이 씀으로서 의미를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표현법이죠. 보기를 들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뉴욕타임즈> 머리기사는 ‘작은 거인 암살당하다’였죠. 옥시모론을 쓰면, 장영희 선생님은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합니다.

 

잊히지 않는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죠.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처럼, 그녀를 평생 가슴에 간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녀가 행복함에 빙그레 웃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당신이 누리는 행복을 세어보세요! 하루하루가 기적이랍니다!

 

죽음은 삶과 겹쳐있지만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가고, 죽음과 삶이 꼬리에 꼬리를 물건만,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걸 어려워하죠. 특히, 장 교수처럼 좋은 사람이 죽었을 때,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죠. 날로 커져만 가는 슬픔을 다독이며 장 교수가 남긴 말들을 더듬어 봅니다.

 

장 교수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며 ‘오늘’을 찬양했습니다.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사는 거 자체가 행복이라고 일러줍니다. 배고플 때 밥 먹을 수 있고, 화장실 잘 갈 수 있고, 하늘과 나무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한지요. 게다가 가끔씩 맛난 음식 먹고, 좋은 사람 만나서 얻는 행복은 순전히 덤인데, 인생살이엔 덤들이 가득합니다.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당신이 누리는 행복을 세어보라고 권합니다. 오늘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오늘을 마음껏 상상하고 펼치라고 용기를 줍니다. 사랑하다가 이별하는 것이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며 세상을 사랑하라고 손을 내밉니다. 괜찮다며 조금 쉬다가 다시 일어서라고 등을 쓰다듬어 줍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것은 3%의 소금 때문이듯 장영희 선생님 같은 분들 덕택에 세상은 아직 살만 합니다. 티베트 속담에 “내일이 올지 죽음이 먼저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죠. 아득한 불안 때문에 오늘이 저당 잡혀 있습니다. 지난 날 걱정이 지금은 생각나지도 않듯 이 책을 읽는 사람 모두가 ‘오늘’을 누리고, 행복해야 된다며 장 교수는 싱긋 웃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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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이 있다 - 대한민국 개발 잔혹사, 철거민의 삶
강곤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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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릴 때, 장자연씨가 홀로 목을 맬 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차마 눈을 뜰 수 없습니다. 한국은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살률 1위. 저출산 1위, 살고 싶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낳을 수 없는 곳, 경제대국이라는 21세기 한국의 속살입니다. 그 속살에 불이 붙었습니다. 용산참사라는 너무 뜨거워 가슴 아린 불이.

 

오늘로 용산참사 150일이 되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여섯 명이나 죽임을 당했지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통령이나 장관, 하다못해 경찰청장의 입에라도 단 한마디 진심 어린 위로와 사과의 말이 없습니다. 오로지 법질서 확립과 떼잡이들을 근절시키겠다며 으르렁거리기만 합니다. 시신은 아직 장례를 치르지도 못한 채 순천향병원 차가운 냉동고에 있습니다. 이 냉동고에 한국의 인권이 갇혀 있습니다. 우리의 앞날이 얼어있습니다.

 

폭도로 몰린 너무나도 평범한 우리 이웃들 이야기, ‘여기 사람이 있다’

 

피해자들은 폭도도, 이익집단도, 테러리스트도, 브로커도 아닙니다. 350만 원짜리 무허가 판잣집을 ‘내 궁전’이라 여기고, 12평짜리 전셋집에서 네 식구가 함께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소박한 이웃이었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2009. 삶이 보이는 창]는 그들 역시 처음부터 철거민이 아니라 바로 ‘내 이웃’이었고, 자신도 언제고 철거민 처지가 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일깨워주는 글입니다.

 

지난 1월 20일, 짐승보다 못하게 내몰린 사람들은 살고자 망루에 올라갔다 끝내 죽어서 내려왔습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공권력은 “저 안에 사람이 있어요! 저 안에 사람이 있어요!”라는 울부짖음도 외면한 채 살인진압을 강행합니다. 불이 났는데도 진압은 이어졌습니다. 만약 불이 났을 때, 잠깐이라도 진압을 그만두고 구호 조치를 한 뒤 다시 작전을 했다면 철거민들이 숯주검 되었을까요? 그 숯주검조차 가족들을 따돌리고 12시간 만에 강제 부검 당했습니다.

 

폭도라고 몰아붙이며 죽은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피해자들이 너무나도 평범해 오히려 ‘테러리스트라고 손가락질하는 그 손’을 추악하게 만듭니다. 35년째 세입자로 살던 일흔 둘 할아버지, 식당을 하던 동네 아저씨, 노점상을 하던 가난한 철거민, 건설노동자 등 소박하게 일하면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강제철거 전에 임시로 살 곳을 마련해달라고 대화를 요구했을 뿐입니다.

 

당연한 권리입니다. 숟가락을 하나를 누가 집어가도 발끈하는 세상에 삶을 송두리째 앗아버리겠다는데, 어느 누가 가만히 있을까요? 나무 한그루를 옮기더라도 갖은 정성을 들입니다. 물건도 아니고 사람을 옮기는데, 어찌 힘으로 내쫓을 수 있나요. 그러나 어느 지역이든 용역 깡패들이 주먹질을 할 때, 불러도, 불러도 경찰은 오지 않습니다. 칠순 노인이 젊은 깡패들에게 욕먹고 얻어맞을 때에도 나이든 여성이 건장한 남성들에게 머리채를 휘둘리며 죽도록 맞아도 철거민들만이 업무방해와 공무집행방해로 입건될 뿐입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건 경찰과 용역 깡패들이 ‘나쁜 놈’이라서가 아니라 그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죠. 법치와 권력이란 이름으로 자본에만 철저히 봉사하는 그들에게 철거민들의 피눈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보통의 이웃들은 ‘사람의 권리’를 지키고자 폭력에 대항하고, 견디다 못해 망루에 오르게 됩니다. 그 과정이 너무 애달파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게 됩니다. 그리고 무참히 짓밟힐 때…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MB정부는 용산참사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유족대표들과 공식대화를 하지 않았다!

 

소통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는 용산참사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유족 대표들과 공식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특공대 투입 결정과 진압작전이 ‘적법한 법 집행이었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습니다. 청와대는 용산참사를 덮기 위해 연쇄살인범 사건을 키우라는 ‘신 보도지침’을 내려 보내기도 했지요. 지난 4월 말 행정안전부와 경찰 정보 계통 쪽에서 용산 문제를 풀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대화는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청와대 반대로 해결이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것은 국민을 섬기겠다는 모습이 아닙니다. 참여정부를 살펴보면, 그 때도 시민사회와 격렬한 대립들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태도가 딴판이라는 거죠.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운동이 한창이었던 2005~2006년, 당시 국무총리실·국방부의 ‘공식 라인’은 물론이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민정수석 등 ‘비공식 라인’이 주민 대책위 등과 수많은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당시 한명숙 국무총리는 주민들에게 수모를 당해가며 평택을 찾았고 대국민담화도 발표할 정도였지요.

 

지도자는 이곳에서 사람들 갈등을 풀어주어 저곳을 꿈꿀 수 있도록 챙겨주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을 온몸으로 냉정하게 품되 아름다운 내일을 그릴 줄 알아야 하는 거죠. 인류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세상을 수많은 작가, 정치가, 저술가들이 썼습니다. 오바마는 그 모든 책들을 거의 읽었다고 합니다. 법과 경제 같은 실물과 인류의 이상향을 같이 공부한 사람이라는 거죠. 현실과 이상이 만나고 끝없이 소통함으로써 지금의 오바마가 있는 겁니다.

 

지금 한국을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봅니다. <난쟁이를 쏘아올린 작은공>을 쓴 조세희 작가는 “무력을 행사하고 동족을 죽여 놓고도 자기들이 법대로 잘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독서량을 얼말까. 그 머릿속에는 뭣이 들어가 있을까. 이런 거 생각하면 끔찍하”다며 탄식을 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습니다. MB정부는 법치,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말만 내걸면서 도대체 귀를 열지 않습니다.

 

원래 나쁜 일을 저지를 거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요. 나쁜 일들은 언제나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방법을 정당화함으로써 만들어지죠. 권력자들은 흔히 경제 번영, 국가 전통성, 법치주의 확립, 선진화 따위를 내세우며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불평등과 불공정을 부추깁니다. 자유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고, 언론의 독립성을 목 조르죠. 법치란 명분으로 인권에 침을 뱉고, 국가 안보를 내세워 평화를 찢습니다.

 

민주주의가 가파르게 추락하는 한국, 이것은 MB정부만의 책임인가?

 

한국 사회 민주주의는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고,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사할 때는 하나하나 언론에 흘리던 검찰, 용산참사는 수사기록 3천여 쪽을 비공개하면서 진실을 덮으려 합니다. 지난 3월 말부터 참사 현장에서 ‘거리 미사’를 열고 있는 문정현 신부는 “이명박 정부는 용산 유족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닫고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며 “이는 정부의 무능이거나 엄청난 직무유기”라고 말을 합니다.

 

문제가 이렇게 된 데는 MB정부 책임이 크죠. 정부정책 비판은 하되 MB정부만을 탓해선 안 됩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시민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폭력은 경찰곤봉이나 군대의 총만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 어느 아이 하나가 배고파 밤에 울면, 그 아이 울음소리가 그치도록 애쓰지 않는 거 역시 폭력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떼죽음을 당한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눈감고 지나간다면 자기 안에 살아있는 양심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비록 철거민들을 두드려 패거나 그들을 죽일 때 힘을 보탠 건 아니지만 그 범죄행위와 학살행위에 무관심했던 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조세희 작가가 “미래에는 이러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는 <난쏘공> 나온 지 31년이 지났지만 똑같은 일은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조 작가는 “한국에서 행복해하는 자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고 합니다. 편안함은 언제나 누군가의 피눈물을 머금고 있으니까요.

 

사람이 무려 6명이나 죽는 참사를 겪고도 한국 사회는 여전합니다.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용산 4구역에서 재개발이 다시 진행되고 있습니다. 서울 시내 260곳, 전국 600여곳에서 이런 강제철거가 재개발이나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모든 곳에서 가난한 이들은 얻어터지고 쫓겨나고 있습니다. 중산층이라고 해도 하루아침에 철거민이 되고, 가옥주가 세입자로 전락하고, 상가 세입자는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날 판입니다. ‘제 2용산참사’는 예고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슴 아픈 게 경찰들입니다. 그들은 힘없고, 빽 없는 20대 청년들로 병역 때문에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온 젊은 친구들이 국민을 꽉 눌러야 되는 상황, 비극입니다. 철거민도 희생자고, 경찰도 희생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희생을 자꾸 만들어내는 걸까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라고 하고 누가 팔짱끼고 뒤에서 돈을 세고 있는 걸까요? 용산에서 일어난 불길은 한국을 제대로 보라며 5개월째 타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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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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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적으면 사랑하는 것이 적다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말했지요. 세상에는 알아야 되는 것도 참 많고 공부할 것도 쌓였습니다. 삶은 배움의 연속이니까요.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 없어요. 처음부터 준비된 인생은 없어요. 성별이나 외모, 인종, 지역 등 여러 요소들을 ‘우연히’ 갖으면서 ‘나’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나’는 기성품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의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이유로 고통 받지요. 고통은 계급이나 민족 지역 같은 어떤 한 가지 요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른 문제와 함께 작동을 하죠. 다른 요인과 마찬가지로 성별은 알아야 하는 과제가 됩니다. 사회 문제를 풀고 싶고, 자기 삶을 더 의미 있게 하고 싶다면 반드시 젠더문제를 공부해야 하죠.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2005]은 자기 삶과 세상을 돌아보게 해주고, 끝내 자신을 더 행복하게 해주는 책이지요.

 

앎은 경계를 만날 때 얻어지고, 인생에서 깨달음만한 오르가슴은 없다!

 

우리의 삶은 고통의 바다이며, 상처와 투쟁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죠.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의 원인과 역사를 밝히려 하지만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에 대해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상대를 더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은 언제나 약자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편안한 사람은 의문을 품지 못 하지만 아픈 사람은 물을 수밖에 없지요. 언제나 상처받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불합리함이자 부정의처럼 보이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알죠.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그제야 무언가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사랑하는 고통 속에서 사람은 자신의 크기와 깊이를 깨닫습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한 오르가슴은 없지요. 상처와 고통은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입니다.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에요. 타자와 소통하는 가운데 생기는 앎과 상처에서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언어가 자라죠. 상처가 클수록 더 웅숭깊은 세상을 만납니다. 여성주의를 잘 모른다는 것에 당당한 사람들이 많고, 여성주의를 아는 것 자체로 비난받는 경우가 흔한 한국, 그 황무지에서 여성주의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여성주의를 만나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인식과 생각이 바뀌면 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지구가 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하늘이 도는 것처럼 살 수 없듯이 여성주의를 공부하면 남성들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님을 깨닫죠. 더구나 일부러 지워진 역사를 알게 되면서 그동안 몰랐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를 향한 분노, 소통의 절망을 느끼며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한 상처는 자신과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돌에 부딪힌 물이 크고 작은 물거품을 일으킬 때 비로소 물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듯, 눈을 감고 돌아다니다가 벽에 부딪힐 때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알 수 있게 되듯 앎은 경계를 만날 때 얻어집니다. 여성주의는 그 경계를 드러내줍니다.

 

여성을 남성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으로 삼았던 가부장제 틀에서 벗어나야

 

이제까지 여성은 인식주체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타자화된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 조각, 남자 성욕을 풀어주는 판타지 대상이었죠. 국민, 시민, 민중이 아니라 남성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일 뿐이었죠. Man은 남성이자 사람을 나타내지만 여성은 man 앞에 wo라는 동물울음소리를 넣어서 이름을 갖게 되지요. 그렇게 오랜 시간 성차별 구조는 단단하게 이뤄져 왔습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사실과 성차별 당하는 일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여성이라고 반드시 성차별을 받아야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여성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여성이 인식주체가 되면 이미 굳어진 세상이 흔들리고 담론의 구도자체가 무너집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이 통째로 뒤집히고 새롭게 재구성됩니다.

 

서구/백인/남성 중심사고는 낡았고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성차별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빈부 격차, 환경파괴, 폭력, 인종증오, 근본주의 같은 문제들을 남성 시각으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지요. 남성 중심 사고의 기본 틀은 이분법이니까요. 이분법은 간단하되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닌 타자가 용납되지 않아요. 따라서 새로운 대안들이 나올 가능성이 닫혀있지요.

 

세상은 딱 반으로 나눠 있지 않을뿐더러 나눈다고 나뉘지도 않습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고 낮과 밤은 물고 무는데도 가부장제 패러다임은 대립으로만 세상을 파악합니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죠. 낮과 밤의 구분이 모호한 해질녘과 동틀 무렵이 아름다운 까닭은 경계의 시간이기 때문이죠. 경계에 선다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움직이는 상상력과 가능성을 뜻하지요.

 

여성주의는 기존의 나와 충돌하기 때문에 세상에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요. 그래서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남성에게, 공동체에, 전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력을 불어 넣죠. 남성이 자기를 알려면 여성문제를 알아야 해요. 여성문제는 곧 남성문제에요. 여성이라는 타자가 존재해야 남성 주체도 성립합니다. 둘은 언제나 포개져있죠.

 

대화의 가치를 강조하는 페미니즘,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페미니즘은 5천년이상 계속 되어온 남성사회를 설득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저항이론이나 저항운동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에요. 여성운동은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이 인간의 역사라고 하는 힘을 상대화시키자는 것이죠.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거죠.

 

여성주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거예요.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파괴하는 것은 그동안 억눌려 왔던 여성들의 솔직한 목소리가 아니라 가부장제죠.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와 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연대이지 남성중심의 단결이나 통합이 아닙니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왜 차이가 일어나는지 이해하는 방식이죠.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해요, 이렇게 될 때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되죠.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은 없어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인종,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하지요. 그렇기에 자기 내부의 타자를 찾아내어 소통해야 할 때 여성주의가 필요합니다.

 

여성주의는 편안할 수 없지요. 다른 렌즈를 꼈는데, 눈에 생기는 이물감은 어쩔 수 없지요. 여성주의뿐 아니라 기존의 지배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하지요.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주지요. 저마다 자기 고유성과 다양성을 찾아나가면서 즐겁게 공존하는 방식을 배우는 거죠.

 

아직도 암세포처럼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가부장제를 허물려고 여성주의는 망치나 톱을 들지 않아요. 공략하기보다 낙후시키죠.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라 그들과 협상하면서 공존하고자 하죠. 스스로 힘을 갖고 가부장제에서 시키는 대로 살지 않습니다. 가부장제에서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가니까요.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기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자기정체성은 사회관계와 맥락 속에서 이뤄져, 나를 바꿀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로 규정하는 것들은 하나가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다중주체입니다. 자신이 여성으로서 상처 입을 수도 있지만 이성애자나 비장애인으로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에게도 타자성이 존재하기에 언제든지 상처를 입을 수 있지요. 여성주의는 이러한 정체성들을 고민하면서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고 대화할지 고민을 안겨줍니다. 상처에서 건져 올리는 고민이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성애자/백인/부자/서울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하죠. 하지만 여성주의는 타자성을 만나게 해줍니다. 따라서 이전과 다르게 ‘많은 나’를 이뤄갈 수 있게 되죠. 자기 인생의 참고문헌이 많은 만큼 자신의 삶은 풍요로워지죠. 참고문헌 가운데 페미니즘은 자신을 새롭게 일구게 하는 든든한 밑그림이 되어주고, 모든 걸 효율성 하나로 묶어버리는 신자유주의 파도에 덜 흔들리며 생존하도록 힘을 주죠.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구성됩니다. 정체성은 본질이 아니라 사회관계와 맥락 속에서 이뤄지는 거죠. 황인이 백인에게 견줘 모자란 게 아니듯 여성이 남성에게 수그리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판타지’를 끌어들여 강요하는 거죠. 이러한 판타지를 넘으려면, 지금 자신의 정체성에 밑바탕을 두면서도 그것을 본질화하지 않고, 상대방의 상황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해요. 그때, 비로소 차이를 이해할 수 있고, 이렇게 이뤄지는 대화가 ‘횡단의 정치’죠.

 

여성주의가 세상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아니지만 마치 도돌이표가 있는 것처럼 반복되었던 현상을 새롭게 짚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죠. 차이를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기존에 보편성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니까요. 사람들은 주류나 표준에 얽매여있지만, 차이를 드러내어서 서로 어울릴 때, 진정한 인간 해방이 될 수 있죠.

 

미셀 푸코는 “나를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쓴다”고 하지요. 누구나 어제의 나에서 벗어날 때, 참다운 나로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나를 바꿀 때,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 세상과 겹쳐있기 때문이죠. 나는 변화 시작지점입니다. 자기 둘레 사람 관계가 민주화되고 일상에서 평화를 꽃 피울 때, 정치개혁과 역사의 진보는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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